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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7화 〉[의지] (117/131)



〈 117화 〉[의지]

"왜 여기까지 나오게하면서 말할게 있다는거지?"


"...하겐."

타하리알의 눈이 사뭇 진지해졌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타락자의 시신에서 SK-2 소총을 뺏어들어 하겐에게 턱 넘겼다.


"우리는 좀 고된 길을 걸어야할지도 모르겠어."


"뭐?"

"내 동족들이 너희 둘의 목숨을 원해. 아드라말렉이 죽이라고 시켰겠지. 너희는 어딜 가든 동족들에게 공격 받을거야."


"...그딴것쯤이야 알고 있어. 하지만 쓰러지지 않을거야. 난 루이와  절망적인 우주에서 살아나가겠어. 단 둘이-"

하겐이 그의 소총을 꽈악 안으며 말했다. 타하리알은 그저 고개를 저으며, 하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니다. 하겐."


"...?"


"우리가 너와 함께한다. 나, 마르시.. 이블린까지. 우리는 너와 함께한다. 실렌티온, 아니. 루이와 함께하겠어."

"그럴 필요는 없어! 너희는 너희들의 동족들에게 돌아가도 된다고! 우릴 위해서 목숨 걸 필요는 없-"


"하겐. 이미 나는 아드라말렉의 사자를 죽여버렸다. 이블린과 마르시는 그들의 명령을 받는 타락자들을 죽였고. 아까 죽어있던 타락자의 시체에 마르시의 주사기가 꼽혀있더군. 우리는 어딜가든 손가락질 받겠지. 미개한 인간 따위를 도우려고 안간힘을 썼던 놈들이라면서."

"너..너희들.."

"그럴바엔 너희들과 함께하는게 우리에게도 나은 일이겠지. 솔직히 난 이런걸 바랐어. 내 동족들과 나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거든. 가치관부터가 완전히 틀려먹었지. 문제는 이블린이지만... 이블린은 네 친구잖아? 네가  중재할 수 있을거라고 믿어."


"그래서, 너희도 너희의 모든 걸 버리고 나와 루이와 함께하겠다고?

"응. 그러는 편이.. 우리에게  좋은 미래라고 생각하거든."

타하리알이 옆으로 돌아 참호의 뻥 뚫린 곳으로 걸어갔다. 그곳은 병사들이 참호로 공격해오는 적들에게 화력을 쏟아내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붉은 태양이 뉘엿뉘엿 저무는,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가서 마르시와 친구들을 데려와 줘."

"...그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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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챙캉-!]

자신의 팔을 감싸고 있는 마지막 사슬을 글라디오로 깨부숴버린 피터는 그의 팔을 부드럽게 움직여 보았다. 사슬이 파각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손목에서 벗겨졌고, 그는 시원하다는 듯이 손목을 빙빙 돌렸다.

양손이 자유로워진 피터는 그의 두 발목에 단단히 묶여있는 사슬을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그의 글라디오를 높게 쳐들었다. 글라디오가 쉬익하며 공기를 베어가르는 소리와 함께, 그의 오른발을 구속시켰던 사슬에서 챙캉하는 금속음이 울려퍼졌다.

그런 금속음이 대여섯번 들린 이후엔, 그의 발목을 감싸던 빌어먹을 사슬이 힘없이 잘려나갔다.


"...좋아."

피터는 마지막으로 남은 왼발의 사슬을 직접 잡아당겨보며, 그 사슬이 얼마나 두껍고 튼튼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그러나 이젠 자신에게는 남은 힘이 얼마 없었다. 이곳에 약 이틀정도 갇혀 있었던걸로 기억하지만 그가 느낀 시간은 2년 같았다.  짧은 이틀 동안 마리는 그에게 온갖 고문과, 쾌락을 선사해주었다. 마리는 영양분을 지급하는 것조차 그녀의 입에서 음식물을 씹은 뒤 피터의 입으로 흘려넣어주는 식이었다.


당연히 피터는 그럴때마다 토악질과 함께 전부 게워냈으며, 마리를 증오할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두꺼운 사슬을 하나라도  부수는건 적잖게 괴로운 일이었다.


"씨발.. 진짜, 진짜 좆같아..!"


하지만 피터는 포기하지 않았다. 추악하고 불경한 마리에게서도 장장 이틀이나 버틴 남자였다. 그는 하겐이 자신에게 쥐어준, 아주 조그맣고 여린, 그러나 매우 반짝이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부서져라."

[챙캉!]

"부서져..!!"

[챙캉!]


"부서져!!"

[챙캉!!]


피터의 왼발목을 감싸고 있던 마지막 사슬이 떨어져 나갔다. 드디어 피터가 그리도 원하던 자유가 그의 품안에 들어오게  것이었다. 피터는 그의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축축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해냈다..."

[또각.]

"!"


피터가 경계하며 그의 검을 쥐었다. 그는 날카로운 구두소리가 들려온 어둠속을 바라보며, 조심히 몸을 일으켰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고 있긴 했지만 그보다도 몸이 먼저 움직였다.

피터가 응시한 어둠속에서, 보라색의 갑주를 착용한 마리가 몸을 드러냈다. 이젠 마리라는 이름보다 퍼플 윙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는 그녀는 피터를 보며 박수를 쳤다.

"어머. 어머."

"마...리."

"제가 지켜보는 줄도 모르고, 아주 열심히 하시더라구요. 조금  나중에 나올걸 그랬나?"


"..."

"아아~."


마리가 즐겁다는 눈으로 피터를 내려다보며 황홀히 미소지었다.

"이런 순간에도.. 이런 순간에도.. 절대 의지를 잃지 않네요. 정말 멋져요. 소위님."


"...아가리 닥쳐."


"그래도 탈출은 안된다구요? 자꾸 그러면 다리를 잘라버릴거예요."

"잘라? 내 다리를?"


피터가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웃었다. 곧 그는 마리를 뚫어지게 쏘아보며 으르렁댔다.

"네년에게 약속하지. 난 오늘 여기서 나가고, 너가 날 가질 수 없다는게 명백한 사실이 된다고 말이야."

"...어머."


피터의 자신감 넘치는 선언에 마리가 흠칫했다. 그녀는 이내 다시 원래대로의 황홀한 표정으로 돌아오며 씨익 웃었다. 그녀의 표정에 어찌나 고양감과 황홀감이 가득 했는지, 그녀의 눈에 하트가 그려질 정도였다.


"내 앞에서 꺼져!"

검의 손잡이를 부서질 정도로 쥔 피터가 마리에게로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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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스가 그의 손을 높이 쳐들자 검은 안개 연대원 5명이 어두운 지하 터널로 신속히 진입했다. 몇발의 총성과 비명 소리가 들리고, 먼저 들어간 대원들의 클리어 신호가 들려왔다.

"좋아! 지금부터 지하 터널을 수색한다! 다들 정신 똑바로 붙을어 매!"

"우, 우리 차롄가."


코리가 침을 꿀꺽 삼키며 제스와 대원들이 먼저 들어간 지하 터널의 입구를 보았다. 칼리브레는 그런 코리의 어깨를 퍽 치며 말했다.

"걱정마라. 우리가 있잖아. 피터도 분명히 우릴 기다리고 있을거야. 어서 구해주자고!"


"...피터는 꼭 여기에 있어야만해.  찾아내고 말겠어."


에리도 그의 주먹을 뿌드득 소리나게 쥐며 굳은 의지를 뿜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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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어떻게 빠져나갈 생각인데?"

하겐이 쉬고 있던 타하리알에게 물었다. 그의 옆에는 마르시를 비롯한 타하리알의 동료들도 있었다. 잘려나간 왼팔을 완전히 재생시킨 타하리알이 저멀리 참호 한켠에 있는 지하 터널로 가는 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지하 터널을 경유해서 이곳을 빠져나간다."

"왜 지하 터널이지?"

"지하 터널은 숨을 곳도 많고 생각보다 넓은데다가 구조가 복잡해서, 추격을 뿌리칠 수 있거든. 그리고...."

"그리고?"

"누가 이 전선에 들어온것 같아. 많은 숫자는 아니겠지만, 적들이 분명해. 저멀리서 들려오는 총격음을 보면, 고작 타락자들의 내분이 일어난건 아닌 것 같으니까."


"...적?"


하겐이 잠시 생각에 빠졌다. 악마들의 적. 이 추악할 정도로 타락한 전선에 직접 와줄만한 적이 있나?


있었다. 하겐이 알고 있는 단 한가지의 적들이.

"서, 설마. 그 녀석들은 아니겠지."


"그 녀석들이라니?"

하겐의 혼잣말에 타하리알이 곧바로 질문했다.

"아, 아냐. 얼른 가자구."


타하리알의 질문을 뿌리치듯 얼버무린 하겐이 애써 침착한 척하며 루이의 손을 잡았다. 타하리알과 두 텐타시온은 그런 하겐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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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돼요."


피터의 매서운 글라디오의 칼날을 턱 잡아버린 마리가 싱긋 웃었다. 피터는 순간적으로 그가 지금껏 느끼지 못한 소름이, 처음으로 느껴졌다.


[퍼억-]

마리의 갑주로 감싸진 주먹이 피터의 가슴팍을 강타했다.


"커허어-억.."

피터는 갈비뼈가 부서지며 그의 폐와 심장을 찌르는 고통을 전부 느꼈다. 그는 얼떨결에 케일의 글라디오를 놓치고 뒤로 자빠져 가슴팍을 쥐고 말았다.


"아~~."

피터에게서 검을 빼앗은 마리는 그런 피터의 모습에 더욱 흥분하며 조금씩 걸어왔다.

"역시..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의지가 아무리 굳건해도 어쩔 수가 없는 법이에요."

마리는 글라디오를 피터의 옆에 휙 던져 땅에 박아버리고는, 그에게로 몸을 숙였다. 피터의 눈 앞에 마리의 찰랑거리는 흑발이 아른거렸다. 마리는 그저 피터의 뒷목을 한손으로 살포시 받친채 자신쪽으로 끌어당길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의지는... 사랑의 힘을 이기지 못한답니다."


"(이...이제 끝이야.. 더이상 힘이 나지를...)"


마리에게 안긴 피터의 정신이 점점 희미해졌다. 이대로 모든걸 놓고, 마리와 함께 한다면 아무런 고통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 비록 그의 자존심은 꺾이고, 영원히 그의 동료들과 만나지는 못하게 되겠지만 뭐가 어떠하리. 끝이 없을 쾌락과 행복 하에는 그런 것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

[타앙!]


"!"

갑작스레 들려온 총성에 마리와 피터가 동시에 정신을 차렸다. 피터를 유혹하느라 정신이 팔려있던 마리는 급속히 불안감을 느꼈고, 피터는 마리의 유혹을 몰아내고 그의 의지를 굳건히  수 있는 기회였다.

[타앙! 타앙! 타타타탕!]


피터가 갇혀 있던 어두운 방의 바깥쪽에서, 계속해서 총성이 들려왔다. 무언가가 지하 터널에서 총기를 난사하고 있었다.

"방해꾼...?"

마리는 자신을 방해한 소리를 듣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맞추는 것처럼, 총성은 더욱 가까이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리가 잠시 방심한 틈을타, 정신을 차린 피터는 그의 옆에 떨구어진 글라디오에 조용히 손을 뻗었다. 마리가 피터의 행동을 알아차리며 그를 향해 뒤돌은 그 순간, 피터는 그의 글라디오를 있는 힘껏 내던졌다.

[사악.]

글라디오는 마리의 뽀얀 볼을 날렵하게 베어버리며 날아가더니, 벽에 부딪혀 캉하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글라디오가 지나가며 베인 마리의 볼에선 피가 주륵 흘렀다.


"...?"


자신의 볼을 매만진 마리는 곧 그녀의 손가락에 흥건히 묻은 피를 보게되었다. 그녀는 피터가 자신의 볼에 무슨 짓을 한지를 깨닫고는, 배신감에 손가락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런 못된---!!!"


분노한 마리가 아직도 땅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고 있는 피터의 멱살을 쥐어 들어올렸다. 피터가 컥컥대며 그녀의 손목을 양손으로 붙잡았으나, 그럴수록 마리의 손아귀엔 더욱 힘이 가해졌다.


"나를, 당신을 이렇게나 사랑해주고 생각해주고 아껴주는 나를!! 어떻게 상처입힐수가 있죠?!"

"커허억.. 커헉..!!"


"좋아요! 소위님, 당신의 팔다리를 잘라버리겠다고 했죠? 지금 당장 해주겠어요! 해주고 말겠다고요! 바로 당신의 검으로-."

마리는 피터의 목을 잡아 들어올린채 피터가 던졌던 글라디오쪽으로 다가갔다. 마리는 땅에 떨어진 피터의 글라디오를 줍기 전, 벽에 상당히 깊게  흔적을 볼 수 있었다. 피터가 정말 이를 악물고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며 던졌던게 분명했다.


"...흥. 조금만 더 노력했으면 제 머리를 완전 날릴뻔 했네요."

"으윽."


"다시 생각하니 정말 참을 수가 없어요..! 정말 짜증난다고!!"

피터의 멱살을  마리가 피터를 벽으로 두어번 쾅쾅 찍어댔다. 죽지 않을 정도의 위력이었지만, 피터의 입에서 각혈이 튀어나올 정도였으니 그리 안심할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었다.


"이제 완전히 내꺼에요. 소위님, 아니!! 피터! 넌 이제 영원히 내거야. 포기하라고."

마리의 눈이 광기에 가득 차 번뜩였다. 그녀의 눈과 마주친 피터는 잠시 주춤하는 기색을 보였으나, 이내 마리를 조롱하듯 살짝 미소지었다.


"...웃는다고? 지금 이 상황에? 난 당신의 팔다리를 잘라버릴건데? 아. 나와 함께 있을 수 있어서 기쁜거구나? 그런거지?"


"...고맙다. 멍청한년아."

"뭐?"


피터가 기대고 있는 벽 너머로 찰칵 찰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피터의 옆에서 1m쯤 떨어진 곳의 벽이 폭발하며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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