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타하리알의 선택]
"...?"
하겐은 자신에게 엄습할 끔찍한 압력을 생각하며 눈을 감았지만, 이상하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천장을 바라보았고, 자신의 머리 바로 위쪽에서 멈춰있는 침대를 보게되었다.
그 무거운 침대가 자신을 짓뭉개버릴것이라고 생각했던 하겐이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하겐은 침대를 움직였던 실렌티온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으, 으으... 으윽! 크으으으!"
염동력으로 침대를 들고 있는 실렌티온의 왼손을, 그녀의 오른손이 붙잡으며 움직이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었다. 그녀가 고통스럽게 내뱉는 신음들은 그녀가 아닌 생명 회수자가 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루이!"
"이, 멍청한년. 멍청한년이!! 이 몸은 내거라고! 맘대로 깨어나지 말란 말이-"
"아니."
두꺼운 생명 회수자의 목소리톤보다 더욱 가늘은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졌다. 하겐은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것만 같았다.
"하겐에게서 손 떼."
하얀색 섬광이 타하리알의 아지트를 가득 메웠다. 하겐과 마르시를 비롯한 자들도 순간적인 빛에 눈을 질끈 감거나 손으로 눈부분을 가려버릴 정도였다. 새하얀 섬광은 부서진 천장 사이로 날카롭게 솟구치며 주위에 있던 보라색 빛의 잔해들을 깔끔히 치워버렸다.
"...뭐, 뭐지?"
하겐은 섬광 때문에 눈이 고통스러웠지만, 억지로 눈을 뜨며 주위를 살폈다. 자신을 짓뭉개려던 무거운 침대가 방 한켠으로 날아가 부서져 있었고, 실렌티온은 그저 조용히 벽에 기대어 쓰러져 있었다.
"실렌티온!"
부서진 잔해들을 헤치며 하겐이 실렌티온에게로 나아갔다. 그의 입과 몸 곳곳에서는 큼직한 상처의 흔적이 남아 있었으나, 그는 그런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실렌티온, 정신차려! 괜찮아?!"
"..."
실렌티온이 말없이 하겐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의 베시시 웃는 미소가 하겐을 마주했다.
"실렌티온..."
"나는... 실렌티온이.. 아니잖아? 나는.. 루이.."
"맞아. 너는.."
하겐과 실렌티온의 입이 동시에 움직였다.
"루이 포스터."
....
"멍청한 놈."
"...으윽."
아보림이 칼에 묻은 검은 피를 떨쳐내며 타하리알의 주위를 멤돌았다. 타하리알은 가슴팍과 복부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숨을 헐떡이고 있었고, 그의 등에 난 자랑스러운 두 날개는 한짝이 완전히 베여나가 땅바닥에 나뒹굴고, 다른 한쪽은 상처를 재생시키기 위해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중이었다. 타하리알을 죽음의 경계로 몰아넣고 있는 상처의 주인은 바로 아보림이었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싸우는거지?"
아직도 쓰러지지 않고, 굴복하지 않는 타하리알을 보며 아보림이 따분하다는듯이 물었다.
"..."
"인간은 우리가 정복하고, 집어삼켜야만하는 존재들이다. 우리들 같이 위대한 자들이 어째 그들을 도울 수 있겠는가. 그리고 동족이여, 그들이 한 짓을 잊었느냐?"
"...흥."
"하아-. 동족이여. 네놈은 인간 따위에게 동화된 것이냐? 그렇게 미개한 것들에게, 오염당하고 만 것이냐? 대체 무엇이 너를 그렇게 나약한 악마로 만들었단 말이냐?"
"너는 절대 모를 것이다."
"뭐라?"
"너는 절대 모를것이라고 했다. 그들이 가진, 인간이 가진! 남을 위해 싸우고,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절대 모를것이라고!"
타하리알은 자신이 보았던 인류의 고대 전설 속, 요한 태석을 생각했다. 남을 위해 희생하고, 남을 위해 싸웠던 그 남자를.
타하리알이 그의 마지막 남은 날개를 활짝 폈다. 그에게는 아직 투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비록 덩치가 훨씬 작고, 다른 동족에 비해 나약한 자였을지라도 그는 정의로운 인간과 같은 마음씨를 지닌 자였다.
아보림을 강렬히 노려보던 타하리알이 그의 날개를 향해 손을 가져갔다. 아보림은 타하리알의 선택을 눈앞에서 똑똑히 목격하며, 경악한 채 뒤로 몇발짝 물러났다.
"서, 설마. 네놈!!"
"윽."
인간의 심장을 가진 악마가 그의 날개막을 지탱해주는 기둥 부분을 붙잡으며 신음을 냈다. 아보림은 그 모습에 그의 거대한 턱을 떡 벌리며 경악하고 있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악!!"
굳건한 의지가 담긴 타하리알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그의 거대한 턱에서는 고통을 참는 기합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그의 기합 소리와 함께, 그의 마지막 남은 날개는 등에서 산산히 뽑혀져 나갔다.
타하리알의 선택에 경악한 아보림의 눈은 분노와 안타까운 감정을 지닌 눈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자신의 동족이, 인간 따위를 위해 저렇게 변절되는 꼴은 악마의 입장에서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네, 네놈... 그 인간을 위해 그런 선택을 하겠단 말이냐?! 인간들은 서로를 배신한다! 그들은 서로를 죽이고, 오만함이 가득한 결과를 초래한단 말이다!! 네놈의 희생은 전쟁터에 버려진 시체보다 값어치가 없을 것이라고!!"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타하리알이 하얀색으로 가득찬 눈이 아닌, 인간의 눈처럼 동공이 번뜩이는 눈으로 아보림을 노려보았다.
"진실된 희생은 언제나 값진 것이다."
자신의 뽑아낸 날개의 날개막을 다 뜯어낸 타하리알이 기다란 날개뼈를 아보림에게 겨누었다. 날카로운 악마의 날개끝이 스며들어오는 햇살에 살짝 빛나며 반짝였다.
"이.. 이.. 불쌍한 동족이여... 내가 네놈을 자유롭게 해주겠다.."
아보림이 그의 검 손잡이를 단단히 쥐고 타하리알에게 돌진했다. 타하리알은 자신에게 맹렬히 돌진하는 아보림의 검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그가 자신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순간, 자신의 왼팔로 목을 단단히 감쌌다.
[파사아악-]
아보림의 검이 타하리알의 왼팔을 절단함과 동시에, 그의 목에 박히었다. 아보림은 그가 타하리알의 목을 참수할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았다.
타하리알의 잘려나간 왼팔이 땅바닥에 털퍽 떨어졌을 때, 아보림은 그의 패배를 직감했다. 타하리알은 자신의 팔을 기꺼이 내주면서 아보림의 목을 노린 공격을 무효화 시킨 것이었다.
[푸욱.]
타하리알의 날카로운 날개뼈의 끝이 아보림의 명치를 깊숙히 찔렀다. 검은 피가 상처 부위에서 찔끔거리며 날개뼈에 흘렀다. 타하리알이 더욱 깊숙하게 뼈를 찔러 넣음과 동시에 위로 그어버리자, 터진 물풍선에서 물이 튀어나오듯 시커먼 피들이 상처 부위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카..카아아악.."
"..."
죽어가는 아보림의 복부에서 날개뼈를 끄집어낸 타하리알이 땅바닥으로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아보림은 심하게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고, 이내 주저 앉아버렸다.
"커허억..커헉-..."
"..."
타하리알은 죽어가는 아보림을 뒤로 하며 어두운 전선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막 한발짝을 내딛었을 때, 그의 뒤에서 아보림의 마지막 질문이 들려왔다.
"동...족이여..."
"아직 죽지 않았나."
"...네...선택이...옳았길...빌겠다..."
"...그거 참 고맙군."
아보림이 뒤로 철퍽 넘어지며 절명하는 소리와 함께, 타하리알은 그의 무거운 발을 움직였다.
....
브로취른 전선의 주위에서, 3대의 수송 차량이 긴급하게 들이닥쳤다. 수송 차량들은 간단히 세워둔 타락자들의 방어진을 쾅하고 부숴버리며 당황하는 그들을 짓뭉개버렸다.
살아남은 타락자들이 수송 차량을 향해 총기를 난사했으나, 곧 수송 차량에서 쏟아지는 탄환에 갈갈이 찢겨나갔다.
"빨리! 빨리 하차해!"
제스의 지시에 검은 안개 연대원들과 코리의 소대원들이 신속하게 차량에서 내렸다. 그들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타락자들의 머리통을 박살내버리며 브로취른 전선의 거대한 입구에 몰려들었다.
"폭발물 설치! 다들 뒤로 물러나요!"
[콰아아아앙-!]
"진입! 진입해!"
테일런의 다급한 지시에 그의 베테랑 소대원들이 안으로 먼저 진입했다. 곳곳에서 악마들과 타락자들의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제스는 자신들이 진입하기 전, 코리에게 조용히 걸어와 인사했다.
"코리씨."
"제스!"
"브로취른 전선은 솔리드 전선보다 훨씬 많은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을겁니다. 더 경계하고, 더 조심해야 하겠죠."
"...알았어."
"에리씨와 칼리브레씨도 코리씨를 잘 중재하며 움직여줘요. 코리씨를 부탁드린다구요?"
"걱정말라고."
칼리브레가 그의 기계 의수로 주먹을 꽈득 쥐며 의지를 불태웠다. 에리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저희와 테일런 준위의 베테랑 소대가 먼저 진입해 주위를 닦아놓을 겁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저희를 도와 안으로 깊숙하게 직진하면 될겁니다. 사소한 것까지 수색할 필요 없어요. 저희가 길을 뚫으면, 여러분들이 따라오시면 됩니다. 그럼!"
제스와 그녀의 소대원들이 어두운 참호로 진입했다. 코리를 비롯한 칼리브레와 에리는 서로의 시선을 조용히 공유하며, 자신들 뒤에 있는 50명의 동료들을 쳐다보았다.
"다들, 꼭 피터를 찾아내자고!"
....
"이, 이봐. 하겐?"
마르시가 실렌티온을 껴안고 있는 하겐을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하겐은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 실렌티온과 같이 천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괘, 괜찮은거야? 하겐??"
이블린도 그녀의 상처를 잊고 하겐을 걱정했다.
"그래. 이블린. 실렌티온, 아니. 루이가 돌아왔거든."
하겐의 말에 옆에 있는 루이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잘 해결된 것 같군.. 휴우..."
마르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두꺼운 문에 기대었으나,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가 기댄 문을 열심히 두들기던 타락자들의 비명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1"
"끄아아아악--"
"어억, 어억, 오지마! 오지-"
[파삭.]
틀림없이 두개골이 박살나는 소리였다. 마르시는 그 소리에 질겁하며 이블린을 데리고 문에서 물러났다. 하겐도 몸을 움츠리는 루이를 자신의 뒤로 숨기며 문을 노려보았다.
[ 똑. 똑. 똑. ]
"...?"
"쉬잇, 조용히해."
마르시가 그녀의 친구들을 조용히 시켰다. 그녀는 긴장한 표정으로 문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똑.똑똑똑.]
"누, 누구야?!"
"...마르시. 빨리 열어."
타하리알의 목소리가 문 뒤에서 흘러 나왔다. 마르시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쉬며 두꺼운 문을 낑낑대며 열었다.
"타하리알!"
"...다들 괜찮지?"
두 날개가 없고, 온몸에 상처가 가득한 채, 왼팔을 잃은 타하리알이 그들의 안전을 살폈다. 마르시는 그에게 달려들듯 안기며 상처를 보고는 울먹거렸다.
"타하리알... 상처가.. 상처가! 대체 누가 이런거야?!"
"괜찮아. 곧 재생되겠지."
"하지만, 하지만..."
"괜찮다구."
타하리알이 자신의 복부에 안긴 마르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타하리알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잠시 미소짓고는, 다시 하겐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겐, 너나 나나, 더럽게 힘든 일을 겪었던 것 같네."
"...그렇지. 친구."
"실렌티온은 안전하지?"
"...이제는 실렌티온이 아니야. 루이라고 불러줘. 이 녀석은 이제 괜찮아. 생명 회수자를 이겼다고."
"생명 회수자를 이겨?"
타하리알이 의문스러운 얼굴로 턱을 짚었다. 그러나 마르시가 그의 복부를 살짝 꼬집으며 조용히 하라는 눈치를 주었다.
"...잘됐네. 아무튼, 하겐. 밖에는 내가 대강 정리했어. 여기서 어서 도망가자."
"도망가자고?"
"그래. 다들 필요한것들 챙기라구. 우리는 이제 동족들에게 공격받게 될테니까."
이블린과 마르시는 그의 말을 이해했으나, 하겐과 루이는 그의 말을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도망간다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내 동족들이 너희 둘을 죽이려고 들었어. 나는 그걸 막기 위해 아드라말렉의 사자와 싸웠고. 이젠 나도 동족들에게 공격받고 죽을 수 있다는 소리야."
"..."
"어서 빠져나가자고."
"대체 왜 그런짓을 한거지..?"
하겐이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대체 왜 그런 선택을 한거냐고! 우리를 위해 희생하기라도 하겠다는거야? 미천한 인간들을 위해 죽겠다고? 내가 그런걸 좋아할 것 같아!?"
"...?"
"너희들이 죽기라도하면.. 내가 좋아할 것 같냔 말이다.."
"...미안하다. 하지만 너희를 위한 선택이었어. 난 후회하지 않아. 내가 책에서 본 영웅과 드디어 같은 길을 걸을 수 있게 됐으니. 하겐, 여기서 빠져 나가기전에 밖으로 잠시 나와봐."
"왜지?"
"...너에게만 해줄 말이 있으니까."
타하리알이 하겐을 데리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 바깥으로 나갔다. 하겐이 밖으로 완전히 나가는 모습에, 루이는 하겐을 따라가기 위해 발을 움직였으나 곧바로 심장을 움켜쥐며 땅에 엎어지고 말았다.
"루이!"
마르시가 당황하며 루이에게 달려왔다. 이블린은 하겐을 부르기 위해 계단으로 달려갔으나, 루이의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잠, 잠시만요!"
"??"
"가, 가지 말아요. 하겐에게 알리지 말아줘요.."
"루이, 너.. 생명 회수자가 아직 몸속에 있는거지?"
루이를 자신의 품에 기대게한 마르시가 그녀의 어깨를 붙들고 말했다.
"..."
루이는 매우 고민하며 말을 잇지 못했으나, 마침내 천천히 입을 열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것.. 같아요. 언제 또 깨어날지 모르겠어요.. 그때는 어떡하죠..?"
"...하아."
마르시가 이마를 짚으며 고민했다.
"그, 그렇게 될까 너무 두려워요. 하지, 하지만.. 하겐에게는 비밀로 해주세요. 하겐이 아는게.. 더 두려워..요."
"알았어. 알았다고.. 젠장."
마르시가 루이의 부들거리는 손을 잡고 나지막히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