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옛날 이야기 2]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타하리알이 그의 검은 자가 없는 눈동자를 빙글 돌리며 물었다.
"뭐... 그래서 이래저래 일이 진행되다보니 이곳에 와있더군. 그리고, '목소리'는 내게 마지막 행동을 지시했어."
"지시?"
"그래. 동료들을... 배신하고, 악마들에게 팔아넘기는 거였지."
"...우우."
타하리알이 알았다는듯이 고개를 저었다. 마르시도 착잡한 표정으로 하겐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후에는 실렌티온이 내게로 와줬다. 비록 '목소리'가 내게 약속한 것처럼 완벽한 루이는 아니었지만 말이야. 내가 사랑하고... 그리던 여자는 이미 그 차가운 괴물놈들의 탑에서 죽어버렸다는걸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지."
"그,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려운데. 루이 대신 실렌티온이 와줬단거야? 저기 저 누워있는 여자말이야."
하겐의 이야기를 쭈욱 듣던 이블린이 실렌티온의 침대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넌 잘 모르는게 당연하겠군. 실렌티온은 반정도는 루이다. 반은 완전히 다른 것이라 결국 백치가 되어버렸지만..."
"그말인즉슨, 얼기설기 기워만든 인형이란거 아냐?"
"...말 조심해. 이블린."
타하리알이 이블린의 눈치없는 말에 주의를 주었다.
"미안."
"어쨌든 그렇게 됐어. 모든걸 버리고도 결국 내게 돌아와준건 루이의 반쪽이지만, 난 이 반쪽을 지킬거야. 이번에는 잃지 않을거라고."
"...그랬으면 좋겠네."
마르시는 곤히 자고 있는 실렌티온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았다. 실렌티온은 즐거운 꿈을 꾸고 있는것처럼 기분 좋게 미소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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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라말렉이 인간들의 시신과 뼈로 장식된 옥좌 위에서 그의 턱을 매만졌다. 그의 복부에 달린 눈이 번뜩거리며 불경함을 사방에 전파했고, 그의 주위에 있던 타락자들은 포데스타의 시선을 받고는 흥분과 쾌락에 겨워 땅바닥에 널부러졌다.
아드라말렉은 지금 그 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다시 만나기 위해 모든 걸 내던진 인간 남자. 대체 사랑하는 이를 다시 만난다는것이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아드라말렉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악마적 삶은 죽이고, 찢고, 정복하고, 잡아먹는 일의 순환이었다. 아드라말렉은 자신에게는 잘 느껴지지 않는 감정인, '사랑'이란 감정이 참으로 역겨웠다.
"...아보림?"
"네. 아드라말렉님이시여."
아드라말렉의 앞으로 어느 나이트 크롤러가 무릎을 꿇었다. 그 악마는 다른 나이트 크롤러보다 근육이 몇cm는 더 두꺼워 보였다. 연방의 강력한 중화기들일지라도 그의 거죽을 뚫기에는 한참 걸릴것만 같았다.
"...가서 우리와 계약했던 그 필멸자를 찾아라. 하후케크에게 인형을 선물받은 하겐이란 놈 말이다."
"알겠습니다. 여자의 목도 가져올까요?"
"맘대로 해라. 둘다 죽여 없애버려. 이젠 쓸곳도 없을거니까."
아드라말렉의 말에 아보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의 날개를 정확히 접으며 뒤돌았다. 그의 바로 뒤에서 대기하던 악마들과 타락자들이 그를 올려다보며 명령을 기다렸다.
"아드라말렉님의 전언이시다. 하겐을 찾아라! 그 필멸자를 찾아, 머리를 베어라!"
아드라말렉은 아보림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하겐이 어떻게 죽어갈지 참으로 궁금해졌다.그는 아무래도 하겐에게 주어질 최후가 그리 좋은 최후는 아닐 것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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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제 할 이야기는 끝난거야?"
"응."
"헤.. 엄청 짧네. 딱히 옛날 이야기도 아니었다고."
이블린이 약간 투정부리듯 말했다. 그녀 입장에서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았는데, 그저 사랑하는 여자 하나를 위해서 모든걸 내던진 남자의 이야기였다. 이블린은 하겐이 이해되지 않았다. 대체 뭘 위해서 편안한 삶 같은걸 내던지고 이리 고생하고 있단 말인가?
"뭐, 옛날 이야기를 꺼내다 보니 좀 어지럽군. 사실 그리 좋은 기억들은 아니였거든. 후우. 다시 바람이라도 좀 쐬고 와야겠어."
"어. 다녀와. 우린 실렌티온을 보살피고 있을테니까. 너무 멀리가진 마? 우리 동료들이 널 공격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
하겐이 지상의 참호로 올라가는 계단을 막 밟았을 때였다. 그의 뒤로 이블린이 빠르게 따라붙으며 같이 계단을 타기 시작했다.
"나두 같이가!"
"넌 왜? 여기에서 타하리알이랑 놀지 그래."
"벼, 별로 안 친하기도하구.. 왠지 친구랑 있어야 될 것 같아. 넌 내 친구잖아? 끄치?"
"(악마랑 친구라니... 다른 사람들이 알면 진짜 지랄나겠어.)"
"그럼 같이 간다?"
"....시끄럽게는 하지마."
하겐과 이블린이 계단을 타고 참호로 올라갔다. 실렌티온을 살피던 타하리알과 마르시는 말없이 도구들을 정리하고 침대를 정갈하게 정리했다. 타하리알은 그의 날개 끝에 힘을 주며 기지개를 피었다. 태평하게 날개를 움직이던 타하리알과는 다르게, 마르시는 무언가 불길함을 감지하고 턱을 매만지고 있었다.
"타하리알."
"왜?"
"아무래도 뭔가 불안해. 그냥 촉이 와. 네가 저들을 따라가줄래?"
"어? 왜?"
"...잔말말고 따라가. 난 항상 불길한 예감이 들면 왼쪽 손의 검지 손가락이 아려오더라고. 지금이 그래."
"끄으응. 귀찮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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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씨부랄. 악마는 커녕 타락자 녀석들 밖에 안보이잖아. 여기 피터가 있기는 한거야?"
솔리드 전선의 내부를 수색하던 코리가 불평했다. 그의 소대원들도 아무 말 없이 그를 따르고 있었지만, 다들 속으로는 불평불만이 가득할 것은 확실했다.
"어찌 보면 다행이겠지."
"칼리브레, 그게 뭐가 다행이야?"
"멍청아. 이런 곳에서 적절한 지원이나 화력 투사도 없이, 마리를 만나면 어떻게 대처할래? 그 빌어먹을 배신자년이 우리에게 좆같이 대단하신 무기를 휘둘러댄다면 살아남을 순 있겠냐? 마리 말고도 다른 악마들이 안 보이는건 우리에게는 좋은 일이라고."
"...그렇긴 하지만, 우리 목적은 피터를 찾는거잖아."
"나도 알아. 그런데 내가 보기엔 이 솔리드 전선에는 피터가 없어. 적어도 브로취른까지 수색을 해봐야 알겠지."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거지?"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에리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피터를 언급한 칼리브레를 보는 그녀의 눈이 반짝거렸다.
"워, 사람 잡아먹을듯이 보지는 말고. 에리. 왜 그렇게 생각했냐면, 피터는 연방에게 소중한 인재잖아? 역으로 악마들이 피터를 빼앗은 이유도 피터가 악마들에겐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겠지. 그런 피터를, 우리 수준에서 싸그리 정리해버릴만한 허접 쓰레기들이 있는 곳에 뒀을리가 없지. 안 그래?"
"..."
에리는 쉽게 반박할 수가 없었다. 칼리브레의 이성적인 판단은 노련한 제스와 맞먹는 것이었다.
"듣고보니 그렇긴한데, 그래도 아직까지는 이 전선 전체를 수색하지는 못했잖아. 끝나기 전까진 끝난게 아닌셈이지."
"코리, 알았으니까 제스쪽에 무전해서 그쪽은 어떻냐고 물어보자. 솔직히 지금 우리로선 지하 터널 몇개만 점검하면 끝인 수준이잖아?"
"...알았어. 그러지. 제스쪽은 별 일 없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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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위님. 무전입니다. 코리 소대쪽입니다."
"어? 설마 소위님을 찾았나?"
"...그건 아니고, 상황은 어떻냐고 물어보는 중입니다."
"그럼 그렇지. 바꿔줘."
무전병이 건네준 무전기를 받아든 제스가 응답했다. 무전기에서는 코리의 인사가 흘러나왔다.
"여, 제스."
"...무전 같은걸 할때는 좀 품위를 지키는게 어때요? 누가보면 제가 계급이 더 낮은줄 알겠군요."
"어우. 알았습니다. 네. 그쪽 상황은 어떠신가요~."
"어느정도 피해는 입었지만, 이 전선의 우두머리를 쓰러트린 것 같군요. 조력자의 도움이 있긴했습니다."
"조력자? 대체 누구?"
"...말하자면 좀 깁니다. 하지만 믿을만한 사람이죠."
제스가 자신 옆에서 칼날에 묻은 피를 털고 있는 앙펠을 흘긋 보았다.
"그쪽은 어떻죠?"
"우리는 피해가 없다고해도 괜찮을 정도야. 악마들은 커녕 타락자들만 만났다고. 지하 터널 한 곳이랑 소규모 구역 하나만 수색하고 나면 우리쪽도 끝이니, 슬슬 브로취른 전선으로 이동해야할 준비를 해야겠는데?"
"알겠어요. 저희도 이쪽 구역 수색이 곧 끝나니, 전부 끝나면 처음에 흩어졌던 홀로 모이죠."
"오케이. 그, 우리랑 같이 들어온 베테랑 소대한텐 너희가 전해줘."
"...그러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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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겐은 길고 어둑한 참호 내부를 조용히 걷다가 한눈에 전장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몸을 기대었다. 그의 옆에서 계속해서 쫑알대던 이블린도 그의 분위기에 맞춰 조용히 그의 옆에 섰다.
"...후우-."
"왜 한숨을 쉬어?"
"살기 좆같으니까."
"허어, 그렇게 나쁜 말 쓰면 안돼."
"악마 주제에 뭔 그런 말을 해? 개그가 따로없네."
"...그런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블린은 왜인지 모르게 하겐이 참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하겐이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아졌으면 싶었다.
"하겐."
"왜."
"인간들은 이럴 때 담배를 피지?"
"...난 담배 별로 안 좋아해."
"헤헤. 내가 피는게 있는데, 한번 펴볼래? 완전 뿅간다? 이렇게 분위기 우중충 할때 한대 해주면-"
"뭘 권하는거야. 불길하게."
"아냐, 아냐. 한번 해보라니까? 진짜 죽여줘~!"
이블린이 그녀의 피묻은 가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러더니 곧 고대 인류가 피웠다던 파이프 담배와 비슷한 것을 꺼내들었다.
"자. 자! 한번 해봐! 친구가 우울할땐 내가 도와줘야지~!"
"...정말."
하겐은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이블린을 보았으나, 곧 그녀의 기대하는 얼굴에 차마 대놓고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본래 악마라도, 지금 자신을 걱정해주는 것은 이 악마녀 밖에 없었으니.
"줘 봐."
이블린에게서 담배를 받아들은 하겐이 파이프 담배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이블린은 그의 파이프 담배를 보며 기대하는 눈빛을 보냈다. 비록 붕대에 가려져 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하아--."
숨을 한번 내쉰 하겐이 파이프 담배의 끝을 쭈욱 빨았다. 불도 붙이지 않았는데 단순히 빨아들이는 것만으로도 파이프 담배의 내부가 후끈 달아올랐다. 파이프담배의 내용물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겐은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짐과 동시에 몸이 나른해지는 쾌락을 느꼈다.
"우, 우왓. 이거 뭐야."
"쩔지? 대박이지? 우리 악마들은 이런거 많이한다?"
"(건강에는 좋지 않지만...)"
"이블린, 왠지 모르겠는데 머리가 좀 어질어질한걸. 갑자기, 갑자기 말야..."
"헤. 나도 처음 필때 그랬는데. 인간은 역시 약해서 더 어지러운가 봐. 자, 나한테 기대."
"아구구. 미안, 미안하다. 하하하..."
파이프 담배의 강력한 약효에 하겐이 약간 정신줄을 놓자, 이블린이 비틀거리는 그를 받쳐주며 자신에게 기대게 만들었다.
"이게... 친구구나."
몽롱한 하겐을 벽으로 기댄 이블린이 쭈욱 기지개를 폈다. 악마인 그녀에게도 무언가 뿌듯함이 있었다. 다른 동료들에게 은근히 왕따 당했던 그녀에겐 하겐 같이 반응해주는 인물은 처음이었다. 이블린은 하겐 같은 친구와 영원히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생각했따.
하지만 그녀의 행복한 시간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소중한 친구의 목숨을 노리는, 어느 발소리가 그녀의 뒤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쿠웅-. 쿠웅-.]
"...?"
"아, 동족이었나."
"다, 당신은 누구지?"
"나는 아보림. 아드라말렉님의 명을 받아 저 남자를 죽이러 왔다."
"...!"
"자, 그럼."
아보림은 그의 날카로운 검을 매섭게 쥐고는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의 검이 참호로 스며들어온 햇빛에 살짝 빛나며 번뜩였다.
"?"
그러나 아보림은 자신의 앞길을 막는 무언가에 의해 잠시 발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아, 안돼."
"...텐타시온이여. 비키거라. 아드라말렉님의 명령이자 사자인 나를 가로막겠다는것이냐? 고작 저 필멸자를 위해서?"
"...안돼."
"난 동족은 베지 않기로 했거늘, 내 자신에게 약속한 맹세를 어기지 않게 해주었으면 좋겠군. 비키거라! 마지막 경고다."
"내 친구를 죽일 순 없을걸!? 설령 그게 아드라말렉이든, 그 자식의 사자든간에!!"
"이 년이 드디어 돌았구나! 그렇다면 네년의 목을 먼저 뽑아주마-!"
아보림의 우악스러운 손이 이블린의 목덜미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