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옛날 이야기 1]
"..."
크나큰 상처를 입은 채 쓰러진 우피르를 내려다보며, 앙펠이 그의 검 손잡이를 쥐었다.
"잠시 비켜봐."
그는 아직도 무기를 겨누고 있는 중화기 분대원들을 옆으로 비키라는듯 제스쳐를 취하곤 놈의 앞으로 걸어갔다. 우피르가 불경한 눈깔을 이리저리 굴리며 앙펠을 쓰윽 올려다 보았다.
"그래서, 패배하신 소감은 어떤가?"
"...그르르..."
"넌 내 부하들을 쳐먹었잖아. 네놈에게 이 전선이 함락되고, 수십일을 기다려왔다. 그리고 오늘이 되었지. 이 불경한 악마자식아. 다시는 나타나지 마라."
앙펠의 높게 들어서 내리친 글라디오에, 우피르의 두꺼운 목이 썰리며 달아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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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조용히해. 누가 온다."
타하리알을 조용히 시킨 마르시가 아지트의 문을 흘긋 보았다. 무언가가 계단을 내려오며 뚜벅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끼익--]
"나 왔어. 타하리알."
"휴우, 하겐이었잖아?"
타하리알은 문을 열고 나타난 하겐을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는 곧 하겐의 뒤에서 우물쭈물거리는 것을 보고 경계 태세를 갖췄다.
"하겐, 그런데 뒤에 있는 녀석은 누구야?"
"..아."
"잠깐, 말하지 않아도 난 알겠는데.. 이블린!"
마르시는 팔짱을 끼며 이블린의 이름을 불렀다. 이블린이 마침내 쭈뼛쭈뼛 하겐의 등뒤에서 걸어나왔다.
"안녕. 헤헤."
"뭐, 뭐야. 둘이 아는 사이야?"
하겐이 머리를 긁적이며 두 텐타시온을 번갈아 보았다. 마르시는 아직도 팔짱을 낀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저 녀석은 우리들 사이에서 괴짜로 유명하거든. 악마들 사이에서도 기이하게 생각되는걸 만든다거나 하지. 그래서 동료랄게 없는 녀석이야. 나도 이름 정도만 알고 있었지."
"...그래?"
하겐이 이블린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약간 초조해하며 손가락을 꼬았다.
"(...뭐. 그래서 친구가 되어달라고 했던건가??)"
"믿을만한 녀석이야?"
타하리알은 아직도 경계 태세를 풀지 않은채 말했다. 그는 침대에 누워있는 실렌티온을 그의 손으로 살짝 가렸다.
"날 도와줬어. 그런 점에선 믿을만 하겠지."
"아니, 하겐. 넌 인간이라 그런지 엄청 순수한건가 싶은데, 누군가를 그렇게 쉽게 믿으면 안된다? 우리도 그렇고 네 뒤에 있는 녀석도 그렇고 본질적으로는 악마들이라고."
마르시가 상당히 공격적인 어투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이블린의 어깨가 추욱 늘어지더니 곧 힘없이 대답했다.
"...알았어. 여기까지 따라와서... 어, 미안하지는 않은데. 난 갈게."
이블린이 아지트의 문을 열었다. 그녀의 앞에 높은 계단이 펼쳐졌다. 그녀는 이번에도 친구를 만들지 못했다는 허탈감과 슬픔에, 말없이 계단을 오르려고 했다.
그녀가 정확히 2번째 계단을 밟았을때, 하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그는 이블린을 다시 타하리알의 아지트로 데리고 오며 그녀를 변호해 주었다.
"그렇다고 내쫓을 이유는 없잖아. 걱정은 하지마. 내가 보증하고, 약속하지."
"(...마르시, 어쩔거야?)"
"(...몰라. 믿어봐야지. 저렇게 말하는데...)"
"휴우-. 알았어. 하겐. 이블린은 네가 맡도록 해. 그 대신 사고치면 네가 감당해야 할거야. 우린 네 선택을 존중하겠지만, 돕지 않아야할 것은 돕지 않을거거든."
하겐의 약속을 받아들인 마르시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왜인지 하겐에게 경고하듯 마음속에서 울리는 목소리였다. 하겐은 그녀가 다시금 왜 악마인지를 깨달았다.
"...알았어."
"좋아. 그렇다면 이쪽으로 와."
"나두?"
이블린이 아까보다는 훨씬 즐거운 얼굴로 마르시에게 물었다. 마르시는 그녀를 착잡하게 쳐다보았지만, 이내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넌 망을 좀 봐줘. 이 일은 하겐과, 우리의 이야기거든."
"체에.."
"자, 하겐은 이리로."
타하리알과 마르시 사이로 걸어온 하겐이 침대에 누워있는 실렌티온을 마주했다. 침대에서 곤히 잠자고 있는 실렌티온의 얼굴은 아까 고통받던 때보단 평온해져 있었으나 어딘가 불길함이 감돌았다.
"갑자기 실렌티온은 왜?"
"...그게. 꼭 해줘야 할 말이 있어서."
"응, 하겐. 앞으로 들을 말에 절대 흥분하거나 하지 말아줘. 마르시가 하는 말은 전부 진실이니까."
"(불길한데.)"
마르시가 말없이 실렌티온의 옷을 젖혀 가슴팍을 살짝 드러냈다. 실렌티온의 심장 부근에서 두근거리며 붉은 빛이 솟아났다가 가라앉았다. 아직도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방금도 봤지?"
"...응."
"하겐, 우리는 네가 없을때 실렌티온의 몸속에 봉인되었던 것이 무엇인지, 대충 간파했어."
"그런걸 알아냈다고?"
"응. 하지만 그다지 좋은 건 아니었지. 나와 타하리알이 알려줬던 붉은 지옥의 지도를 기억해?"
하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에 있던, 어두운 골짜기도 기억하지? 악마들조차 이해할 수 없고, 공포에 떠는 이물들이 있는 곳이라고 했잖아."
"...설마."
"맞..아. 어두운 골짜기에서 서식하는 생명 회수자. 놈이 지금 실렌티온의 몸속에 들어있어."
생명 회수자라는 5글자를 듣기만해도 하겐의 온몸에서 알 수 없는 소름이 쫘악 돋았다. 다른건 다 둘째치고도, 이름 그대로 생명을 회수하는 것이 실렌티온의 몸속에 들어있다고?"
"그 놈이... 뭘 하는 놈인데?"
"숙주의 몸에 기생해, 터져나올듯한 생명력과 마인드 에너지를 폭발적으로 지급해주지. 숙주는 단기간 매우 질긴 생명력과 마인드 능력을 얻게 되겠지만 결국엔 생명 회수자에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빨아먹히-"
[콰악-]
하겐이 자신도 모르게 마르시의 멱살을 붙잡았다. 가녀린 마르시가 캑캑거리며 하겐의 손목을 잡았으나, 하겐은 흥분한채 마르시의 멱살을 더욱 조였다.
"뭐?! 지금 장난해?! 그딴게 실렌티온의 몸속에서 잠자고 있다고??"
"캐액.. 캑.. 잠, 잠깐.."
"말도 안돼는 소리 하지마! 실렌티온이 죽기라도 한다는거야?!"
"하겐!"
타하리알이 하겐과 마르시 사이로 뛰어들듯 들어오며 둘을 갈라놓았다. 마르시는 자신의 목 주변을 매만지며 숨을 골랐고, 하겐은 뒤로 몇발자국 물러나다가 절망적인 얼굴로 주저앉았다.
"마르시, 괜찮아?"
"컥, 커허억... 컥! 흠. 음. 난 괜찮아. 하겐, 하겐은?"
마르시는 먼저 하겐의 안부를 살폈다. 그녀의 말을 들은 타하리알이 뒤를 돌아보자, 하겐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하겐?"
"실렌티온은... 실렌티온은 어떻게 되는거지?"
하겐의 절망섞인 물음에 타하리알이 마르시를 보며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했다. 그는 하겐을 위해서, 비록 자신은 악마였지만. 남자 대 남자로 이야기하기로 했다.
"실렌티온은... 아마도 죽겠...지."
"...장난치지 말라고. 실렌티온의 몸속에 있는 개자식을 어떻게든 제거할 방법이 있을거 아냐."
"..."
"야, 타하리알. 넌 방법이 있을거잖아. 넌 실렌티온 녀석을 구할 방법이 있을거잖아?!"
"...미안해. 하겐."
"씨발, 거짓말 하지 말란 말이야... 내가, 내가 루이를 구하기 위해 무슨 짓을 했는데..."
"루이라니?"
마르시가 타하리알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섰다. 붕대에 가려진 그녀의 눈이 반짝 빛났다.
"루이는 누구지? 하겐, 우리에게 숨긴거라도 있는거야?"
"..."
"타하리알, 루이라는 인간을 알고 있었어?"
"아니."
"하겐, 루이는 대체 누구지?"
"...실렌티온의.. 본모습이라고 해야되나."
"본모습?"
"말하자면 길어. 별로 듣고 싶지도 않을거다. 빌어먹을 옛날 이야기 따위는 악마라도 듣기 싫어할걸."
"아니야. 우리에게 알려줘. 우리가 들어줄게."
마르시가 하겐에게 한발짝 가까이 오며 말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한 후 타하리알을 올려다보며 살짝 눈치를 주었다.
"어, 어! 나도. 나도 네 이야길 들어줄게."
"...."
"그럼 나는?"
심심하게 망을 보고 있던 이블린도 가세했다. 순간적으로 타하리알과 마르시의 불편한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으나 하겐은 옆에 앉으라며 땅바닥을 턱턱 손바닥으로 쳤다.
"헤헤~."
"그럼... 내 이야기를 시작해줘야겠네. 별로 좋은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푸념섞인 한숨을 내뱉은 하겐이 그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세 악마들은 그의 이야기를 더욱 자세히 듣기 위해 집중했다.
"그래.. 어디부터 시작해야되나. 내가 루이를 만난건 정말 어린 나이부터였다. 내 고향에서 만난 친구들 중, 가장 처음으로 만난 녀석이었지. 그 후에도 칼리브레, 루크같은 좋은 녀석들도 만나긴 했지만, 아무래도 루이가 항상 첫번째로 친했었지."
"(그러니까 루이가 누구냐고.)"
"(가만히 들어, 타하리알!)"
"그렇게 우린 나이를 먹고, 성인이 되어 연방에 입대했지. 자발적이라기 보단, 끌려간거나 마찬가지였지만 말야. 그곳에서도 피터..."
하겐이 누군가 생각나는듯 말을 잇지 못했다.
"...녀석과 새로운 동료들을 만났었어. 그렇게 우린 병사가 됐다. 전장에 끌려가서 티스라는 괴물놈들과 맞닥뜨리기도 했고, 우주 궤도 기지에서 반역자들의 공격을 받기도 했지. 맞아, 우주 궤도 기지로 가기전, 난 루이와 갑작스럽게 이별했다. 그녀의 뒤로 돌아온 빌어먹을 괴물새끼들이 그녀의 목을 찢어버렸지."
"..."
"..."
"오우.."
"그렇게 우울하게 살아갔지만, 난 내 동료들에게 티를 내지 않았어. 내 친구들은 그저 내가 말수가 살짝 줄어든 정도로만 알더군. 인간이란게 원래 남의 감정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생물이니까. 하루는... 내가 우주 궤도 기지에서 혼자서 멍하니 우주를 바라보고 있을때였지.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주더군."
"말을 걸어?"
이블린이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그래. 별들이 내게 속삭이는것처럼, 내 귀에 쏙쏙 들어왔지. 내 슬픔을 이해한다며, 내 슬픔을 없애주고, 원하는 걸 주겠다며. 그대신, 자신이 말하는 일을 그대로 실행하라고..."
"그걸 믿은거야?"
"...너희들은 악마들이라 잘 모르겠지만, 인간은 소중한 걸 잃으면 악마들보다 무서워지는 법이지. 허무맹랑한 개소리고, 내가 망상한 목소리일지도 몰랐지만 난 그 목소리대로 모든걸 이행했다. 친구의 국소 마취제를 훔쳐 마리라는 년의 방으로 갖다주기도 했고, 꾸준히 그 '목소리'에게 내 정보를 제공했지."
"별로 좋지 않았던 생각 같은걸."
타하리알이 그의 커다란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지금와서 보면 후회스럽기도 해. 아무튼, 여기까지가 끝은 아니야. 더 남아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