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인간과 친해지고 싶은 악마2]
"..."
하겐이 말없이 타하리알의 수술 집도를 지켜본지 2시간이 넘게 흘렀다. 타하리알은 지금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뻘뻘 흐르는 땀이 그의 날카롭고 커다란 턱에 흐르는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정도 남았어?"
"어, 아마 1시간만 더하면 될 것 같은데."
"1시간?"
"1시간. 날 도와줄 녀석이 빨리 와준다면 10분 내로 끝낼 수도 있을 것 같아."
"도와줄 녀석이 있다고?"
"응.나처럼 인간들을 좋아하는 특이한 녀석이야. 아마도 곧 올 것-"
"타하리알."
"???"
아지트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타하리알의 이름을 부르는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하겐은 깜짝 놀라며 뒤를 바라보았고 문을 잡고 있는 부드러운 손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오, 왔네? 들어와, 마르수이."
"마르수이?"
당황하는 하겐을 뒤로하며 문 뒤에서 어느 가녀린 악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란 갈색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여자가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에는 피가 묻어있는 붕대들이 눈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는 왠지 모르게 느낄 수 있었다.
"저, 저게 널 도와줄 녀석이야?"
"저거라니. 말이 좀 심하네."
"마르수이가 아니라 마르시라고 불러달라 했잖아. 그리고 옆에 있는 인간은 또 뭐야? 귀엽게 생긴 여자랑, 좀... 무섭게 생긴 인간 남자네? 얘, 네 손금 좀 봐도 되겠어?"
"맘대루 해. 마르시. 그전에 내가 좀 바쁘니까 날 도와줘."
"으. 또 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을 돕는 일이라면 좀 도와줄게."
마르시가 타하리알에게 도구를 건네받으며 옆에 걸터앉았다. 그녀의 고옥같은 손길이 실렌티온에게 닿자, 실렌티온이 얕게 신음했다.
"에구. 불쌍해라... 이리도 아파하다니. 타하리알. 지금까지 뭐한거야?"
"나, 나도 도우려고 했던 거라구.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리고, 봉인 역할을 하는 문양을 제거하기 어려웠단 말야."
"어휴. 내가 도와줄테니 잘 따라와."
마르시는 능숙하게 실렌티온의 가슴에 그려진 문양을 제거해가기 시작했다. 한눈에 보기해도 가녀린 그 악마-여성은 악마답지 않은 따스한 손길로 실렌티온을 치료하고 있었다. 타하리알이 아무리 순한 손길로 지금껏 치료해 왔어도, 마르시의 손길을 따라가기엔 백만년은 글렀을 것이었다.
"그런데 있잖아, 나 아까 엄~청 고됐다."
실렌티온을 살피던 마르시가 타하리알에게 잡답을 건넸다. 타하리알은 눈에 물음표를 띄우며 무슨 일이 있었냐고 살짝 물어보았다.
"고됐다니?"
"그 있잖아, 이번에 우리쪽으로 새로 들어온 녀석. 퍼플 윙."
"퍼플 윙?"
두 악마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하겐의 귀가 움찔했다. 퍼플 윙. 한 남자를 갖기 위해 악마로 변해버린 가엾은 여자. 그 여자는 하겐이 알고 있는 자이기도 했다.
타하리알이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했다. 그러더니 아하하며 손가락 하나를 들어올렸다.
"아~ 그 인간이었다가 악마로 승천한? 대체 왜 그랬대? 인간은 인간일 때가 제일 아름다운 법인데."
"나야 모르지. 아무튼 그 미친년이.. 어휴."
"말 좀 이쁘게 하지? 그래서 그자가 왜?"
"인간 남성을 하나 데리고 오더니, 온갖 고문에 고문은 다하고 강제로 겁탈하던거 있지? 으으."
"...상당히 좋지 않네."
악마들의 악마같지 않은 대화를 듣는 하겐은 피터에게 마음속으로 조용히 용서를 빌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신이 팔아버린 동료는 지금 악마들에게 희롱당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그래서, 내가-"
"그래서? 그래서 그는 지금 어디에 있지?"
마르시의 말을 그대로 끊어버린 하겐이 그녀에게 물었다. 마르시는 잠시 그를 황당하게 쳐다보았지만 이내 그의 눈빛을 읽고는 순순히 말해주었다.
"그, 여기서 좀 멀긴한데. 여기가 지하 4구역이잖아? 지하 1구역 인간들이 회의하던 방에 있어. 말이 회의지, 사실상 고문실이긴 하지만."
"...그래. 고맙군."
하겐이 그녀에게 고맙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벽에 몸을 기대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하면 피터를 도울 수 있을지, 어찌하면 그와 다시 동료가 될.. 희망이 있을지 고민했다.
.
.
.
.
"자! 이제 끝났다. 타하리알, 이 여자를 좀 더 편안한 곳에 뉘여줘."
"알겠어."
타하리알과 마르시가 수술용 고글을 벗어 내려놓았다. 마르시는 눈가를 붕대로 감고 있었기에 고글 따위를 쓰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그저 그녀의 버릇인 것 같았다.
"다 끝난건가?"
아직까지 벽에 기대어 고민하던 하겐이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물었다. 타하리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실렌티온을 조그만 침대에 눕혔다. 마르시는 수술을 집도하던 의자에서 내려오며 손을 탁탁 털며 말했다.
"수술이라고 하기도 그렇지만, 어쨌든 성공적이야. 문양을 제거하는데엔 성공했거든. 근데, 이후에는 우리가 어쩔지 모르겠는데."
"어쩔지 모르겠다니? 너희 악마들이 모르면, 대체 어쩌자는거지?"
"진정해. 인간. 우리도 최대한 힘을 써본거야. 우리로선 문양을 제거하는게 최대였다구."
"...그러니까. 내 말은 이후에 어찌 될거냐고 묻는거다."
"음.."
마르시가 말을 머뭇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하겐은 그런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질문을 토해댔다. 가녀린 마르시의 어깨가 강하게 흔들렸다.
"묻고 있잖아!"
"잠깐, 하겐. 마르시를 다치게 하면, 인간일지라도 용서 안해."
타하리알이 하겐의 손목을 붙잡으며 경고했다. 하겐은 쳇하며 그의 손을 거두었다. 마르시는 큼큼하며 헛기침하더니, 복잡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우리의 지식을 뛰어넘은 누군가가 이 여자를 만들어낸거야. 내가 보기엔, 고위급 악마들인 포데스타가 만들어낸 것 같아."
"..."
"인간, 우리야말로 묻고 싶어. 이런 여자를 대체 어디서 만난거야? 누가 이런 여자를 네게 맡긴거지?"
마르시의 다그침이 섞인 질문에, 하겐은 실렌티온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아드라말렉이 그의 시체 옥좌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며, 했던 말들을.
"...아드라말렉. 아드라말렉이.. 하후케크란 자가 실렌티온을 만들었다고 말했어."
"지, 진짜야?!"
마르시가 하겐과 타하리알을 번갈아보며 눈을 번쩍 떴다. 물론 붕대에 가려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왜 말 안했어?! 하후케크님이라면, 이거 위험하단말야!"
다급한 분위기의 마르시가 타하리알을 올려다보며 다그쳤다. 타하리알은 그저 손사래를 치며 자신도 몰랐다는 말만을 했다.
"왜 그래? 나도 몰랐어!"
"하아... 이거 맘대로 건들였다간 우리 끝장일지도 몰라. 어떡하지?"
"...그러게."
타하리알이 그의 튼튼한 턱을 긁적거리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러게가 아니잖아!"
마르시는 타하리알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한번 강하게 친 뒤, 하겐을 쳐다보며 손가락질했다.
"인간, 그 여자는 이제 다른 녀석들의 눈에 안 띄게 잘 숨겨. 그리고 네게 말해주지 않은게 있는데, 그 여자의 몸에는 뭔가가 있어! 하후케크님이 아마 그 여자를 제조할 때 집어넣은거겠지! 그게 뭔지는 우리도 몰라. 언젠가 밝혀지겠지. 곧이거나, 아니면 먼 미래의 일이거나. 아무튼, 그게 좋은건 아니란거야."
"그, 그런. 너희도 모른다는게 말이 돼? 그래도 실렌티온의 몸속에 있는게 뭔지는 대충 파악했을거 아니야?! 그 근사치만이라도 알려달라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정말 알고 싶어?"
마르시의 분위기가 갑자기 어두워졌다. 타하리알은 식은땀을 흘리며 뒤로 살짝 물러났다. 그는 이런 무거운 대화에 끼고 싶지 않았다.
"우리 붉은 지옥은 여러가지 지역으로 나뉘어져있어. 타하리알?"
슬ㅉ거 뒤로 물러난 타하리알을 쳐다본 마르시가 박수를 짝짝쳤다. 타하리알은 한숨을 한번 쉬고는 그의 테이블 서랍을 뒤져 돌돌말린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그가 돌돌말린 두루마리를 쫙 펼치자, 수채화로 그려진 지도가 드러났다.
"봐, 이 지도는 그냥 간단하게 그린거라 정확한게 아니지만.. 그래도 인간의 뇌엔 어느정도 정보를 심어줄 수 있겠지. 이곳이 붉은 지옥이야."
지도 전체를 길게 손가락으로 그은 마르시가 답했다. 지도에 그려진 거대한 산들과 붉은 평야들이 보였다.
"그리고, 이곳이 어두운 골짜기지."
수채화 그림이어도 보라색 빛과 어두운 색감이 현실적으로드러나는 곳을 가르킨 마르시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골짜기처럼 생긴 그곳은 한눈에 봐도 위험한 곳이라는걸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붉은 지옥의 악마들도 가까이하지 않아. 이 안에는 우리들조차 두려워하고, 이해할 수 없고, 깨달을 수 없는 것들이 잔뜩 있거든. 아마 너같은 인간들은 가까이만가도 정신줄을 놔버릴걸."
"...그런건 안 물어봤어."
"그래. 미안하네. 아무튼 잘 들어. 하후케크님은 이런곳을 어느정도 알고 있는 분이야. 그래서 그분을 누구도 이해하기 어렵다는거지. 그런데 그런분이 이곳에서 뭘 집어와서 그 여자의 몸속에 넣은지는, 우리로선 당연히 알 수가 없다는 말이야. 이제 이해가 가니?"
"그러니까, 뭔 좆같은 걸 집어 쳐넣은지는, 너희들이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건 매우 위험하다. 이런 말이로군."
"...간단히 말하면 그런거지.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후케크님이 직접 새긴 봉인마저 저항할 정도로 억센 거니... 위험하다는거야."
"그럼 하후케크란 개자식은, 왜 실렌티온에 몸에 그딴걸 집어 쳐 넣은거냐?"
"그건 우리도 몰라."
마르시와 타하리알이 동시에 어깨를 으쓱했다. 하겐은 순간적으로 올라오는 욕설을 참으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장난해?"
"진짜야, 하겐. 우리도 몰라. 하후케크님의 이명이 뭔지나 알아?"
타하리알이 그를 최대한 이해하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분은 '비웃는 자', '속삭이는 자', '이해할 수 없는 의도'. 이렇게 불린다고!"
"...엄청 우스꽝스러운 녀석이군."
"그렇게 말해도 그분을 이해할 수는 없을걸."
"됐다. 너희랑 대화해봤자 뭔갈 더 얻어낼 수는 없을것 같아. 실렌티온을 조금 쉬게 해줘. 난 잠시 바람 좀 쐬야겠어..."
"그래. 조심하고. 누가 널 해치려구 들면, 내 이름이나 마르시의 이름을 대줘. 그럼 꼼~짝도 못할테니."
"참으로 듬직하군."
하겐이 계단을 통해 지상의 참호로 올라갔다. 그가 타하리알의 아지트를 나가며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리자, 마르시가 타하리알을 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타하리알, 너도 대충 감이 잡히니?"
"..응."
"아무래도 이 불쌍한 인간 여자의 몸에는 '놈'이 깃들어 있는 것 같은데."
"맞아. 숙주에게 강한 생명력과 마인드 에너지 능력을 주는 대신... 종국에는 숙주를 먹어치우고 성장하는 *혐물인 생명 회수자."
(*혐오스러운 이물.)
"...하후케크님이 왜 그런걸 집어넣었을까?"
"나야 몰라. 하지만, 실렌티온에게 희망은 없을거야. 아직까진 생명 회수자가 잠자고 있지만, 정말 깨어난다면 하겐을 위해서도, 실렌티온을 위해서도 없애버려야겠지."
"왜 우리는 악마로 태어났을까."
마르시가 침대에서 새근새근 잠자고 있는 실렌티온을 내려다 보며 슬프게 말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이 실렌티온의 볼에 닿자, 실렌티온이 얕게 미소지었다.
"그러게.."
타하리알도 둘을 내려다보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두 악마는, 자신들이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더욱 행복했을 것이라는 걸 깨달은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지금같은 위기에 굴복하지 않는, 인간과도 같은 굳센 의지가 샘솟고 있었다. 타하리알과 마르시는 자신들의 종족인 악마를 위해서가 아닌, 인간을 위해서 움직이리라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