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타락하지 않은 자]
"다들 흩어져서 수색을 시작하세요. 정확히 2시간의 수색 후에, 이 중앙홀로 모이도록 합니다. 적의 공격을 받았다면 바로 반격해도 괜찮지만 그외의 경우엔 통신은 먼저 해주세요."
제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검은 안개 연대원들이 움직였다. 제스의 소대가 먼저 솔리드 전선의 어두운 내부로 사라졌으며, 다음은 검은 안개 연대의 베테랑 소대가 지하 시설을 수색하기 위해 전부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다들 엄청 빠르잖아."
검은 안개 연대원들의 척척 맞는 움직임을 보며, 코리가 다시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조직적인 움직임은 자주 봐왔지만 볼때마다 항상 놀라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생각에 빠져 잠시 멍하니 있던 코리의 어깨를 누군가가 툭 두들겼다.
"야, 가야지. 피터를 찾아봐야 할 것 아냐?"
"칼리브레."
"맞아. 빨리 찾아보자고. 응?"
에리도 칼리브레 옆에서 바쁘다는 얼굴로 코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코리는 그들을 향해 멋쩍게 웃어보인 뒤 자신의 총을 앞으로 겨누며 당당히 외쳤다.
"좋아! 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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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들의 소굴이 된 브로취른 전선의 어느 지하 의무실.>
"됐다. 이제 이정도면 되겠지."
의무실에 놓인 메스와 실들로 하얀 가운들과 생활복을 서걱서걱 자르고 꼬매가며 실렌티온을 위한 옷을 만든 하겐이 뿌듯히 미소지었다. 그는 누더기에 가깝지만, 그래도 입지 않는것 보다는 훨씬 나은 옷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흠이 없는지 찾아보고 있었다. 그의 바로 앞에 있는 실렌티온은 침대 위에 걸터앉아 하겐이 무엇을 하는지 궁금한 표정으로 쳐다만 볼 뿐이었다.
"자. 입어봐."
"헤?"
하겐이 멍하니 있는 실렌티온에게 옷을 꾸역꾸역 입혔다. 누더기와 다를바 없는 옷이었으나 반나체인 것보다는 훨씬 나은 모습이었다.
"흐음. 솔직히 옷이라도 부르기 그런 옷이긴한데... 없는것 보다야 낫긴하네."
"어..."
실렌티온은 하겐이 입혀준 옷을 이리저리 더듬어보며 살폈다. 부드러운 가운의 촉감이 그녀의 손끝을 감쌌고, 치마의 끝자락이 나풀나풀 흔들려 마치 드레스를 입고 있는것 같았다. 실렌티온은 자신에게 이런 옷을 선물해준 하겐을 보며 베시시 웃었다.
"하겐! 고마워. 고마워! 실렌티온 기뻐!"
"...잘됐네. 하하. 잘됐어."
"실렌티온, 엄청 기뻐! 하겐 너무 좋-"
하겐을 보며 기쁨을 한껏 드러내던 실렌티온이 가슴팍을 부여잡고 무릎을 꿇었다. 하겐이 깜짝 놀라며 그녀가 다치지 않게 붙잡고 부축한 뒤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의 새하얀 이마에서 식은땀이 방울져 흐르고 미간은 고통에 찌그러져 있었다.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충분히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시, 실렌티온?! 왜 그래! 실렌티온!"
"시..실렌티온.. 가슴이 아파... 심장이.. 아파.."
실렌티온이 부들부들 떠는 손을 가슴팍에서 떼어내며 흰 가운으로 덮인 그녀의 가슴팍을 보여주었다. 시뻘건 섬광과 보라색의 불길한 빛이 그녀의 심장쪽에서 쉬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잠시동안 매우 밝게 빛나더니, 곧 힘을 잃고 스르르 꺼져갔다.
"뭐, 뭐지?"
"아...아... 하겐.."
커다란 고통에 정신을 잃어가는 실렌티온이 쓰러지며 하겐의 손을 붙잡았다. 실렌티온은 숨을 고르는 그 순간에도 하겐의 눈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젠장..! 실렌티온, 잠시 실례 좀 할게."
실렌티온의 가슴팍을 가리고 있는 가운을 살짝 젖혀 확인한 하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의 심장이 있어야할 자리에는 커다란 지옥 군세의 문양이 떡하니 박혀있었다. 그것이 불길하게 보라색 빛을 내뿜을 때마다, 실렌티온의 심장이 반응하듯 붉게 빛났다.
"....뭐야? 이게... 대체.. 뭐냐고."
"시, 실렌티온... 심장이 아파... 하겐.. 누, 누가 실렌티온 귓속에서 말을 해.."
"뭐? 실렌티온! 실렌티온..!"
하겐을 붙잡은 손을 부들부들 떨던 실렌티온이 마침내 정신을 잃고 그의 품에서 고꾸라졌다. 그녀의 심장 부근이 불길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겐은 정신을 잃은 실렌티온을 강하게 껴안고 눈물을 흘리고는, 그녀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갈곳은 정해져 있었다. 그 빌어먹을 악마놈에게 당장 가서, 지금 일어나는 일이 무슨 일인지 알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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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지옥에게 영광을! 사악한 자들에게 영-"
[타앙!]
"크아악.."
"씨팔. 확 튀어나와서 쏴버렸잖아... 이거 통신도 안했는데 어떻게하지?"
모퉁이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타락자의 가슴팍을 쏘아 넘어트린 코리가 죽어가는 그를 내려다보며 한숨쉬었다.
"....제스도 이런건 뭐라 안할것 같은데."
칼리브레는 꿈틀거리는 타락자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렇겠지? 이놈 손에 글라디오가 들려있었으니, 안 쐈으면 내가 죽었겠지?"
"응. 그렇겠지. 제스도 적의 공격이 시작되면 반격해도 괜찮다고 했잖아."
"휴. 그럼 다시 이동해보실까."
"그래."
[타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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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총소리 들었어?"
제스가 자신의 대원들을 멈춰 세우기 위해 한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옆에 딱 달라 붙어서 수색하고 있던 검은 안개 연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안개 연대원들이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다른 곳에서도 총성이 서서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교전 시작하기 전에는 항상 통신 먼저 하라고 했는데. 하기야, 이런곳에서 그런게 지켜지는게 더 어렵겠지."
"그렇겠죠."
"근데 방금 총소리는 좀 가까웠던걸로 기억하는데. 대체 뭐지?"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던 총성에 다시금 귀를 기울이던 제스는 뭔가 이상함을 알아챘다. 간간이 들리던 총소리 중간중간마다, 인간의 비명이나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같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매우 가까운 곳에서 타락자로 추정되는 비명이 들렸을때, 그들은 전부 완전한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흐아아악!"
"...다들 들었지?"
"...예."
"1분대, 2분대는 정면에 경계를 유지하고, 나머지는 동그랗게 원으로 둘러싸듯이 수비해. 가운데에 있는 인원들은 부상자가 발생하면 순식간에 자리를 교체할 준비하고."
"예."
"...놈이 가까이에 있나보군. 이런곳에서 같은 타락자들을 죽여댈 녀석이면 악마가 분명하겠지. 놈의 모습이 나타나는 순간, 머리통에 총알을 박아버린다. 알겠어?"
"예.."
[더걱. 더걱.]
천장에 연결되어 주렁주렁 흔들리고 있는 인간 예술품과 갖가지 잔해들 사이에 깔린 어둠속에서, 연방군이 신는 군화의 소리가 길게 울려퍼져왔다. 제스는 그녀의 x-01 라이플을 어둠속으로 겨누며 침을 꿀꺽 삼켰다. 대체 무엇이 튀어나올까? 대체 어떻게 생긴, 기이하게 생긴, 혐오스럽게 생긴, 불경하게 생긴 것이 튀어나올까? 제스는 그저 소총의 방아쇠에 올린 손가락을 빨리 움직일 수 있기를 바랐다.
"..."
"..."
군화 소리를 내며 걸어오던 것의 소리가 뚝 끊겼다. 아주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제스와 그녀의 대원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어둠속을 강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쏘지 말지?"
"...??"
잔해와 '인간 공예품' 사이에서 들려온 것은 놀랍게도 정상적인 남성의 목소리였다. 지옥의 악마들처럼 정신을 직접적으로 후려치는 목소리도 아니었고, 타락자들처럼 욕망과 쾌락에 사로잡힌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저, 연방군이라면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정상적인 목소리였다.
"...난 너희들의 적이 아니다. 앞으로도 그럴것이고."
목소리는 제스와 그녀의 대원들을 진정시키려는듯한 말투로 조용히 타일렀다.
"날 쏘게 된다면, 너희는 연방의 충성스러운 병사를 잃는 셈이겠지."
"...당신은 누구지?"
"...아. 자기 소개를 먼저 해달라는 뜻인가."
"...(쉬잇, 다들 긴장 풀지마.)
"좋다. 내 소개를 간단히 해주지. 그러기전에, 너희들 앞에 그대로 걸어나갈테니 쏘지 않았으면 좋겠군. 알겠나?"
"..."
"대답해주는게 너희나 나에게나 좋지 않겠나? 신실한 병사를 쏴죽여봤자 너희들의 마음만 아플테니."
어둠속에서 들리는 사내의 말에, 제스가 자신의 대원들을 돌아보았다. 어느 대원이 제스를 보며 손가락 하나를 관자놀이에 가져다대고 빙빙 돌리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알겠어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우리가 당신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볼 수 있을정도로 천천히 나와요."
"그러지."
글라디오 하나가 어둠속에서 쑥 튀어나와 그의 앞을 가리고 있는 '인조' 예술품을 슥 밀어 치워버렸다. 옆으로 젖혀진 예술품들 사이로, 목소리의 주인공이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반갑군."
연방군 보병 장교의 상징인 망토를 메고 있는 병사가 그들에게 글라디오를 까딱거리며 인사했다. 그의 반대쪽 손에는 24발이 장전되는 자동 권총이 들려 있었다. 글라디오와 그의 권총, 군복과 망토에 피가 튀어있는걸 보아하니 제스 주위에서 총성을 울려댄 자가 바로 저 사나이인듯 했다.
"서론은 나중에 듣고, 몇가지만 묻겠습니다."
제스는 그녀의 소총을 내렸지만, 그의 대원들에게는 총을 거두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당신은 누구고, 연방의 적인가?"
"..."
"대답하는게 좋을텐데. 5초 안에 대답하지 않으면, 그대로 총살-"
"하하하하.."
병사가 웃기다는듯이 폭소했다. 그러나 그는 순식간에 정색한 표정을 지으며 그가 허리춤에 준비해 두었던 것을 꺼내 제스의 앞에 휙 던졌다.
"머...리통?"
"그래. 이 전선의 총 사령관이었던 사내. 셴 첸이다. 이 자는 전선에 패배의 예감이 드리우자, 곧바로 연방을 배신하고 악마놈들에게 붙어버렸지."
"...뭐?"
"나는 그런 이 자식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개자식을 따라 지옥 군세에게 붙은 좆같은 녀석들도!"
"대체 뭐라는거야?! 똑바로 설명을 해!"
"나처럼 연방을 위해 충성하는 자들도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완전히 틀려먹은 것이더군. 나는 셴 첸과 악마놈들의 추종자들을 전부 싸그리 없애기 위해 그들에게 연방을 배신한 시늉을 했지. 참으로 좆같은 일이었어."
"...저 녀석 뭐라하는지 알겠어?"
어느 대원이 고깝다는듯이 땅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그러나 그 병사는 그걸 보지도 않은체하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몇십분 전, 내가 주위에 심어두었던 정찰대가 응답하더군. 누군가가 이곳으로 찾아오고 있다고. 난 그때 깨달았지. 오늘이 셴 첸의 모가지를 베어버리고 악마놈들을 이곳에서 싸그리 죽여버릴 날이라는걸!!"
"이. 이봐요. 너무 흥분한 것 같은데. 진정을 좀-"
"나는 마키 제 141 보병 연대의 연대 지휘관! 앙펠 켈투렌이다! 너희들은 나를 도와 이곳의 불경한 것들을 싹 쓸어버릴 수 있게 도와다오!"
"..."
"어서! 내가 이 전선을 정복한 악마놈의 위치를 안다. 나를 따라와야한다!"
"묶어."
"뭣?!"
제스의 명령에 검은 안개 연대원 둘이 제압탄을 쏘았다. 짜릿한 전기 탄환이 앙펠의 몸을 타고 흐르며 그의 근육을 수축시켰다. 앙펠은 한쪽 무릎을 후들거리며 주저앉았고, 5명이 넘는 대원들이 달려들어 순식간에 그에게 수갑을 채워버렸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내 말을 들어야한다고!"
"흠. 미안합니다."
"이봐!"
"당신은 몇 주, 혹은 몇 달이 넘게 악마들과 함께하던 사람이죠. 당신이 타락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게 설령 당신, 앙펠 켈투렌일지라도요."
"오, 세상에. 지금 날 의심하는건가?! 난 마키 제 141 보병 연대의 연대 지휘관, 앙펠 켈투렌이다! 네놈들에게 명함과 동시에 네놈들에게 알리노니, 난 결단코 연방을 배신하지 않았어!"
"...그거야 오염도 측정을 하고 지켜보면 알 수 있겠죠."
제스의 말에 두 대원이 앙펠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들의 손에는 간단하게 정신의 오염도를 측정할 수 있는 정신도 오염 감지기가 들려 있었다.
[삐이익. 삐이익-.]
"이딴 검사를 받지 않아도, 내 의지는 굳건하다!"
[삐이익. 오염 수치 매우 낮음.]
"...준위님. 다시 한번 진행할까요?"
"...그래."
[삐이익. 삐이익-.]
"몇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나? 응?!"
[삐이익. 오염 수치 매우 낮음. 위험성. 현재로썬 존재하지 않음.]
"..."
"..."
제스와 대원들의 말이 없어졌다. 기기는 놀랍게도 두번 다 오염 수치가 낮음을 알려주는 상태창을 띄우고, 응답하고 있었다. 정신도 오염 감지기의 인공지능이 오차될 확률은 10조분의 1이었다. 터무니 없이 낮은 확률이었다.
"세번이나 진행하면서 시간을 날려먹을 셈인가?"
"...(준위님, 저 앙펠이라는 지휘관말입니다. 악마들과 오래 있었음에도 망토와 군복에 전혀 악마들의 문양을 새기지 않았는데요.")
"...(그러네. 믿어봐도 되는건가? 타락자들은 가만히 내비두면 지옥 군세의 문양을 미치도록 많이 그리는데.")
"...(괜찮을것 같습니다. 일단 위협적인 무기는 빼앗아버리고, 글라디오만 쥐어주도록 하죠.")
"...(좋아. 그렇게 하지.)"
"둘이 뭘 그리 쑥덕거리지? 검사 완료됐으면 풀어주기나 하란 말이다! 네놈들의 정체도 밝히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앙펠 켈투렌 연대 지휘관씨. 저희는 인류 보안부의 검은 안개 연대입니다. 이 전선 전체를 수색하는 임무가 있는데, 혹시 '피터 메이슨' 이라는 자를 본 적이나, 들어본 적 있습니까?"
"아니."
앙펠 켈투렌은 정말 단칼에 잘라 아니라고 답했다. 어찌나 단칼이었는지 둘러대는 것은 아니라고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뭐, 좋습니다. 풀어드리기는 하겠습니다....만! 글라디오를 제외한 무기들은 전부 저희에게 맡겨주셔야 겠습니다."
"?"
"아직은 당신의 순수성이 완전히 증명되지 않았으니까요. 어서 장비 넘기십쇼."
"...씨팔."
앙펠이 글라디오를 제외한 그의 무기들을 대원들에게 넘겼다. 그러나 앙펠은 끝까지 연방군 장교의 상징인 망토를 주지 않았다. 제스도 그런 그의 의지를 인정해 그것만은 빼앗지 않았다.
"그럼, 이제 길을 좀 알려주셔야겠습니다."
"...당연하지. 날 따라와라. 악마놈의 목을 베어버릴 시간이 지금 우리에게 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