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제스의 계획 2]
"...왜지? 증거는?"
라미엘이 의심 가득한 얼굴로 제스를 보았다. 당연히 그럴만했다. 일개 보안부의 병사가 어찌 아드라말렉의 소환 지점을 알았단 말인가?
제스는 그런 라미엘을 의지가 확고한 눈으로 시선을 맞춘 뒤, 지도를 그의 테이블 위로 휙 던져 펼쳤다. 넓게 펼쳐진 지도 위에 5개의 전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보십시오. 저희가 있는 다이아몬드 전선이 여기, 그리고 나머지 4개의 전선들이 흩뿌려져 있죠? 순서대로 솔리드, 브로취른, 스탁, 캠브렝 전선이오. 가운데의 커다란 돌산을 중심으로 말입니다."
"그렇다네."
"이게 마구마구 흩뿌려져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잘 보면 *오망성 모양입니다. 그것도 역오망성이죠."
(*별 모양.)
"역오망성이라."
"그렇습니다. 놈들은 소위님을 납치하자마자 곧바로 물러났어요. 그리곤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적어도 아주 멀리 떠나버렸다면 연방 공군이 충분히 감지할만한 무리였는데 말이죠."
"..."
"그들이 이렇게 쉽게 몸을 숨길 수 있었던것은 이 주위에 있는 곳에 숨었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이 주위에서 가장 쉽게 숨을 수 있는 곳들은?"
"...파괴된 4곳의 전선이겠지. 하지만 그게 꼭 아드라말렉의 소환터라는 증거가 되지는 않잖나."
"이 전선들의 모습은 오망성, 그것도 역오망성 모양입니다. 지옥 군세들이 악마들을 소환할때면 지옥 군세의 문양이나 역오망성을 그린다고들 하죠. 이 5개의 전선들이.. 아드라말렉을 소환해주는 역오망성이 되어줬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비약이야."
"...그렇다곤 하지만, 확인해봐야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조금있다 아즈레엘님이 돌아오시면 이 5개의 전선 한 가운데에 있는 이 돌산을 조사해달라고 부탁할겁니다. 거기서 뭔가를 찾을 수 있다면 좋겠죠."
"알았어. 자네가 하는 말은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겠네. 아드라말렉이 이 주위에서 소환되었다는건 동의할 수 없지만, 피터 소위를 납치한 그놈들이 여기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는건 확실히 동의할 수 있네."
라미엘이 제스의 두 의견 중 한가지는 동의하지 않았으나, 피터 소위와 악마놈들이 이곳에 가까이 있다는 것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좋습니다. 그냥.. 제 생각과 계획을 말씀드리려 온 거였는데. 받아줘서 기쁘네요."
"계획?"
"예. 상부에 지원을 요쳥했다고 말했었죠? 그들과 제 소대가 이 두 전선을 수색해볼 겁니다. 피터 소위님이 이끌던 소대도 임시로나마 저희에게 편입되었고요."
"흠."
"라미엘씨는 이곳과 이곳. 저희의 반대쪽에 있는 전선들을 수색해주세요.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게 제일 빠르고 확실한 방법입니다."
"다이아몬드 전선의 병사들에게는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나?"
"예."
"왜지?"
"...그들은 이곳에서 몇개월 가량을 버틴 베테랑들이나 다름 없지만, 저희에게 큰 도움은 되지 못할겁니다. 이번 작전은 소규모 인원으로 순식간에 구역의 수색을 끝마치고 피터 소위님을 발견 즉시 탈환하는 목적이니까요. 길다랗지만 양옆으로는 비좁은 전선들을 수색할 때 대규모 인원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얘깁니다. 오히려 내부에서 적과 교전시 상당한 불편함만을 주겠죠."
"그렇겠군. 알겠네. 나도 내 부하들과만 수색을 하란 소리지? 연방의 지원은 피하고 말일세."
"그렇습니다. 인원이 많아 봤자, 비좁은데선 큰 인명피해만 불러일으킬거예요."
"...알겠네. 그럼 우리 라이징 해머 4중대는 스탁 전선과 캠브렝 전선을 맡겠네. 자네들은 그럼 솔리드와 브로취른을 맡게 되겠군."
제스가 라미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라미엘은 알아들었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똑같이 고개를 끄덕거려준 뒤, 지도를 집어들어 다시 쭈루룩 읽어 나갔다.
"제스 준위님."
"?"
라미엘과 함께 지도를 보려던 제스에게, 아까전의 무전병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아즈레엘님의 무전입니다."
"아즈레엘님의?"
"옙."
"바꿔줘봐."
무전기를 무전병에게서 건네받은 제스가 귀를 기울였다. 무전기에선 잠시 치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오다가, 아즈레엘의 목소리로 바뀌기 시작했다.
"여기는 아즈레엘. 제스?"
"말씀하세요."
"가면서 생각해보았는데 말이지. 소위가 타락하지 않았을 확률은 얼마정도 된다고 생각하나?"
"...예?"
"너도 알잖아. 제스. 악마가 인간을 어찌 굴복시키는지. 강철같은 의지를 지닌 자도 흐물거리는 초콜릿마냥 녹여버리는 놈들이야. 피터 소위가 악마에게 굴복했다면, 난 그를 가차없이 처리할거야."
아즈레엘의 중후한 목소리는 제스에게 충분한 경고를 주고 있었다. 그의 중후한 목소리는 경고와 뒤섞여 강압적인 태도를 가지기 시작했다.
"그가 그렇게 된다면 상부에 보고할 것도 없다. 연방을 배신한 타락자에게 두번의 기회는 없으니까. 알고는 있지? 그가 아무리 소중한 예지 능력자라고 해도 말이야. 오히려 그렇기에 그가 타락했을 경우 무조건 처리해야 한다."
"..."
"제스. 대답해라. 사사로운 정이라도 들었나? 죽이겠다고 확정짓는건 아니야. 다만 그렇게 될 수 있다는거지."
"...그럴 경우엔 소위님을 없애버려야겠죠."
"좋다. 잘 생각했어. 지금 거의 다 도착해간다. 네가 계획을 짜놓았을거라고 생각하는데, 내 생각이 맞겠지?"
"...네. 자세한건 돌아오셨을때 알려드리죠."
"알겠다."
치익하는 소리와 함께 통신이 두절되었다. 제스는 약간 떨리는 손으로 무전기를 돌려주었고, 후 하는 한숨을 같이 내쉬었다. 지도를 살피던 라미엘이 슬쩍 지도를 내린 뒤 그녀의 안색을 살필 정도였다.
"제스. 방금한 말, 진심인가."
"...들으셨어요?"
"이정도 거리면 자네가 듣는 소리는 내 귀에서 웅웅 울려댈 정도로 아주 잘 들리지. 벨라토르의 청각을 무시하지는 말게나."
"하아--."
제스가 무전병을 향해 나가라는 제스쳐를 하며 그를 밖으로 내보냈다. 무전병이 밖으로 나가자, 그녀는 테이블 주위의 의자를 아무렇게나 빼 추욱 늘어졌다.
"맞아요. 진심이기는 하죠..."
"소위를 죽인다는 말이?"
"네. 라미엘씨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나야 뭐. 소위와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진 않아서 그가 배신한다면 아무렇지 않게 움직일 수 있을것 같네. 하지만 자네는... 그럴 수 있냐는 말일세."
"..."
"인류 보안부의 대원이 되었다면 사사로운 정은 삼가하는게 좋지 않겠나? 자네, 그렇게 해선 이 바닥에서 오래 못갈게야. 자네를 보니 소위를 비롯해 그 주위 사람들과도 자주 대화하고 오래 곁에 있던데. 정이 들지 않을리가 없지."
"...그건 그냥 호위팀 임무여서 그랬던 거였어요."
"하하하."
라미엘이 지도를 말아 테이블 위로 올려두곤, 깍지를 끼더니 턱을 괴었다. 반신의 손을 감싸고 있는 갑주에서 금속 소리가 났다.
"그렇다고 보기엔 너무 붙어있던걸."
"..."
"솔직히 말해보게. 저들이 죽지 않았으면 하지? 행복했으면 하는가?"
라미엘의 질문에 제스가 말문이 턱 막힌 듯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잠시 후 재차 한숨을 쉬었다.
"예.. 그들이 적어도 함께하면서,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왜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는걸까요. 저도 한때 그들과 같은 일개 연방 보병이었어서? 전 지금은 더욱 어두운 곳에서 움직이는 군인이 되어버렸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으면 해요."
"으흠."
"소위님이 저흴 배신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봐온 그는 그럴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법이잖아요."
"...그렇지."
"그리고 이 모든 일이 끝난다고 하더라도, 소위님은 아마 연방의 이능력병단이나 그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끌려가게 되겠죠. 거기서 무기처럼 비참한 삶을 살거나, 적어도 그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는 헤어지게 될거라는거.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맞다네. 자네가 말한게 맞아. 소위는 그렇게 될 운명이지. 하지만 말일세."
라미엘이 손가락으로 제스를 가리켰다.
"자네가 그걸 바꿀 수 있어. 정해진 운명. 정해진 미래. 모두가 이것에 저항할 수는 있네. 심지어 미래 예지 능력자가 본 미래일지라도, 저항할 수는 있지. 뭐.. 결론적으로는 그 미래에 도달하게 되겠지만, 중간이나 혹은 결말이 조금은 뒤바뀔 수 있게 만들 수는 있어. 그리고 그 열쇠가 바로 자네가 될 수 있다네."
"...제가 말입니까?"
"테이프. 그 검은 테이프 말일세. 세일이 녹음해 두었던..."
"그, 그걸 라미엘씨가 어떻게-."
"하하. 세일이 예전에 내게 단둘이 있을때 들려준 적이 있지. 그건 4 중대에서도 나만 아는 정보야. 그런데, 자네가 그걸 부숴버린다면?"
"...네?!"
"그걸 부숴버린다면 누가 상부에 보고를 해봐도, 증거가 없으니 허무맹랑한 소리가 되겠지. 안 그런가?"
"그렇긴 하지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않습니까. 적어도 라미엘씨 같은..."
"내가 입을 닫아준다면?"
"...!"
"선택은 자네가 하게. 난 자네 선택에 맞춰 움직여줄테니. 자, 말이 많았군. 슬슬 나가보세. 나도 내 중대원들을 불러 우리만의 작전을 고려해봐야하니까."
라미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제스에게 걸어왔다. 그는 제스를 내려다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
.
.
.
"음-. 아~."
외설적인 소리를 흘리며 피터의 입술을 빼앗던 마리가 마침내 그녀의 추악한 입술을 떼내었다. 그녀는 만족한 표정으로 묶여있는 피터를 내려다보았고, 피터는 그녀와 시선을 맞추지 않은채 고개를 푹 숙이며 구역질을 해대는 중이었다.
"콜록! 콜록! 크우웨엑..."
"아! 또 뱉어내다니.. 참. 당신이 받아들일때까지 할 거라고요? 물론 받아들여도 멈추진 않을거지만. 아무렴, 잘 꺾이지는 않네요?"
"...좆...까. 미친년아..."
마리에 의해 부풀려진 흥분을 정신력으로 억누르던 피터가 짧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마리는 그 모습을 보며 하찮다는 듯이 웃었다.
"하하하하하-! 아, 이렇게나 저항하다니."
마리가 피터에게로 몸을 숙여 그의 볼을 어루만졌다. 따듯하지만 차가운, 날카롭지만 부드러운 그녀의 손길이 피터의 볼에 닿자, 피터가 더러운 것에 닿은 것처럼 몸을 짧게 흔들었다.
"건들지...마라.."
피터는 마리를 강하게 쏘아보며 위협했지만 마리는 그런 피터의 모습을 사랑과 약간의 분노가 담긴 눈길로 받아칠 뿐이었다. 그가 절대 굴하지 않는 의지를 보여줄 때마다 분노가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기는 했으나, 조금만 더 하면 왜인지 그가 넘어올것만 같았다.
"정말, 정말 사랑스러워요. 하지만 자꾸 반항하니 조금의 체벌을 가해야겠는걸요."
"...체벌이라고? 엿이나 까잡-"
마리의 날카로운 휘파람이 그의 말을 잘랐다. 그녀의 휘파람에 맞춰 어두컴컴한 방의 어둠속에서 기다란 장발과 단발의 여성들이 천천히 걸어왔다. 그녀들은 전부 얼굴에 붕대를 메고 있었기에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고, 다 헤진 누더기같은 가운에 여러 수술도구등을 소지하고 있었다.
"저년들은...뭐야. 씨발."
"아, 잠시 소개해줘야겠네요. 인사해요. 소위님. 제 지도를 도와줄 조수들이랍니다. *텐타시온들이죠."
(*지옥 군세의 악마. 전부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전장에 나서는 일보다 잡아온 포로나 적을 갖가지 고문과 쾌락등으로 유혹한다.)
"..."
"자, 마로수이? 마취제 좀 주겠니?"
[척척척.]
텐타시온 하나가 불길한 액체가 든 주사기를 마리에게 넘겼다. 마리는 그 주사기를 받아들고 액체를 한번 흔들어보더니, 싱긋 미소를 지으며 피터에게로 다가왔다. 그녀는 피터의 묶인 팔을 자신쪽으로 잡아당기더니 주삿바늘을 팔로 가까이 가져갔다.
"소위, 아니. 내 사랑. 자고 일어나면 저와 이어질 준비를 해야할거에요.♥"
"ㅁ, 뭐? 지금-"
푸숙. 주삿바늘이 그의 팔을 찌름과 함께, 그의 눈에 마리의 미소가 가득차며 정신이 어둠속으로 떨어졌다. 그가 마지막까지 떠올린 것은 그가 지금 그렇게도 만나고 싶은, 에리의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