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4화 〉[제스의 계획 1] (104/131)



〈 104화 〉[제스의 계획 1]

"이젠 어떻게 하지?"


칼리브레가 넓고 어두운 지하 회의실의 테이블에 앉아 말했다. 그의 가슴팍에는 아직도 붕대가 칭칭 감겨져 있었고, 상처를 회복하기 위한 재생제 팩이 주위에서 덜렁거리고 있었다.


"그게 문제에요."


제스는 그녀답지 않게 매우 침울한 얼굴로 턱을 괸채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의 주위에 있던 검은 안개 연대원 하나가 막 끓인 커피를 가져다 주었음에도 그녀는 아무것도 목구멍 뒤로 넘기지 못했다.

"...씨발.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거야. 대체.."


코리는 그저 방 한켠에서 조용히 앉아 머리를 감싸쥐고 연신 한탄만 내뱉는 중이었다. 적어도 코리는 아직 화를 낼만할 힘이라도 있었지, 에리는 그저 의자에 멍하니 기대 앉은  죽어버린 눈을 하고 시체처럼 미동조차 않고 있었다.

"다들 아직 절망하긴 이르네."

상처를 급히 치료했으나 아직은 치료 장치를 등에 달고 있는 라미엘이 테이블 위로 어느 커다란 지도를 펼쳤다. 그곳에는 거대한 마키-203 행성의 대륙 중, 한때 연방군들의 전선이자 군사기지였던 곳들이 표시되어 있었다.


"라미엘씨. 그건 뭐죠?"

제스가 라미엘이 펼친 지도에 관심을 보였다.


"이건 다이아몬드 전선에서 제일 가까운 연방의  전선들이네. 이미 여기 다이아몬드 전선을 제외한 대부분이 전멸하거나 점령당했지만 말이네. 놈들이 피터를 납치하자마자 금방 물러난걸 보면, 난 이 주위에 놈들이 숨어있을거라고 생각하네."

"...어느정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확실하진 않은 정보잖아요?"

"그렇지. 결국엔 이곳저곳 하나하나  찔러봐야 알 수 있을게야. 사실상 그렇지 않고선 답이 없으니까."


"흐음."


"제스, 자네는 어쩔 생각인가? 난 당장에라도  중대원들을 이끌고 이 전선들을 급습할 것이네. 우리에겐 시간이 없으니까.."

"그렇죠."


라미엘과 제스의 말에, 에리의 눈이 잠시 껌뻑였다. 그녀는 다시 죽은 듯 차가운 눈으로 제스를 바라보며 무슨 시간이 없냐고 따지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죠? 시간이 없다니. 응? 피터에게 시간이 없다는 소리야? 빨리 말해."

"잠, 잠깐만요. 잠깐,"

제스가 에리의 집요한 질문에 손사래치며 답을 거부했으나, 오히려 에리는 더욱 더 가열차게 그녀에게 질문했다. 그걸 보다못한 라미엘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살짝 제지할 정도였다.

"진정하게. 흥분하지 말아주게나. 소위가 걱정되는건 충분히 이해하지만, 우리는 그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잘 알고 있고, 그에 맞춰 최대한 빨리 대처할걸세."


"...어떻게 시간이 없다는 소리죠? 저에게라도 알려주세요."

"큼. 꼭 말해봤자 좋을 것도 없는데 말이지.."


라미엘이 헛기침을 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바로 소위가 지옥 군세놈들에게 굴복할 가능성 말일세."


"아니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에리가 강하게 반발했다.


"피터는 저희를 버리지 않을거예요. 그이는 저희를... 저를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고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수도 있겠네만, 악마들의 유혹이란건 원체 강철같은 의지를 지닌 자조차 흐물거리게 만드는 것이라네."


"지금 피터를 모욕하는거에요? 그이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요...?"


"아니네. 아니야. 모욕하려는 것이 아니라네. 자네들은 악마들의 위험성을 간과하고 있어. 악마들이 현세에 나타나면 학살과 죽음이 뒤따르긴 하지만, 제일 위험한 것은 그놈들을 따르고, 그놈들에게 굴복해버린 자들이라네. 소위가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은 나도 잘 알아. 하지만, 만약에 말일세."


"..."

"만약에 소위가 악마에게 굴복해 돌아선다면, 어쩔 셈인가? 그렇게 된다면 연방은 악마들과 함께 미래를 보는 자를 상대하게 될거라네. 아직은 소위가 모든 미래를 볼 수는 없지만, 악마들의 축복이라면 그의 능력이 더욱 강화될 여지가 있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단 말일세."


라미엘은 자신의 말을 들으며 자신을 조용히 올려다보는 에리에게 손가락 하나를 들어올려보였다.


"그렇게 된다면, 자네와 자네의 동료들에게 묻겠네."


"...?"

"소위를, 피터를, 죽일  있겠나? 응?"

"....그건."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이네. 그럴 일은 없겠고, 없어야 하겠지만 만약에 물어보는 것이니까."

"..."


에리는 한때 자신이 피터에게 해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버리지 못하는 자는, 필요한 순간에 망설이게 된다.'라는 말을. 그때는 피터가 자신에게 역으로 물어보았을때 대답을 하지 못했었다. 에리는 지금도 자신이 대답을 하지 못할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좌우로 젓고는, 믿음이 담긴 말을  자  자 꾹꾹 눌러 말했다.

"저는. 절대 피터를 죽이지 않을거에요. 왜냐면... 그는 저희를 버리지 않을거니까요."


"...믿음을 가지는겐가."

"그래요. 모두가 피터를 타락자라고 욕하더라도, 저만은 그를 믿어줄겁니다."

"흠..."

라미엘이 턱을 쓰다듬으며 에리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가에 왠지 모를 미소가 넘실거렸다.

"그래. 누군가를 신뢰한다는건 굉장히 좋은 일이지."

"하지만. 그 신뢰가 독이 되어 돌아올 수 있음을 명심하게. 이미 자네들은 자네의 동료에게 배신당해 독을 마셔본 자들이니."

"...알겠습니다."

라미엘의 충고가 에리를 비롯한 자들의 마음속에 칼날같이 박혔다. 이미 그들은 하겐을 신뢰했고, 그에게 배신당한 전적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번에도 그들은 피터에게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들 모두 생각하는 건 제각기 달랐지만, 적어도 피터가 자신들을 배신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건 모두가 동의하는 점이었을 것이다.

"중대장님. 중대원들을 준비시켜 둘까요?"

라미엘이 테이블에서 벗어나자, 테리우스와 키아나가 칼같이 다가와 물었다. 라미엘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을 끄덕였다.

"테리우스씨?"

"무슨 일인가. 보안부여."


키아나와 지상으로 올라가는 테리우스를 제스가 멈춰 세웠다. 테리우스는 그의 육중한 갑주를 끼릭거리며 뒤돌았다.


"당신이 구해준 세일과 레나는 괜찮나요? 당신이 의무실로 데려다 주셨잖아요?"

"...레나는 집중 치료를 받으면 금방 호전되는데에 비해, 세일은 치료를 해도 목숨이 위험하다더군. 어떻게 될지는 나도 모르겠어."

"그렇군요."

세 벨라토르가 지상으로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자, 제스가 드디어 이마를 감싸쥐고 테이블에 납작 엎드렸다. 그녀가 연신 한숨을 뱉어대는 통에 코리가 오히려 괜찮냐고 물어봐줄 정도였다.

"이봐, 제스. 괜찮아?"

"...아뇨. 괜찮을리가 없죠. 임무도 실패하고, 병력만 잔뜩 잃었어요. 나와 몇년을 함께하고 보안부에도 같이 들어온 동료도 오늘 잃었고요. 솔직히..."

"솔직히?"

"...펑펑 울어버리고 싶군요."

제스가 코리에게 살짝 안기듯 기댔다. 그녀의 울먹거리는 눈과 코리의 눈이 마주쳤다. 코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뜬금없지만 제스가 상당히 빼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는걸 깨달았다.

"음, 울고 싶으면 울어도 되지만... 지금은 어떻게 해야할지 정해야 하잖아? 제스, 네 계획은 뭐지? 계획이 있어?"

"계획이오?"

"그래요. 계획. 제스, 질질 짜는건 나중에 해도 돼요. 당신이라면 지금 분명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해나갈 계획이 있겠죠?"

제스의 나약한 모습을 본 에리가 진저리치듯 말했다. 그녀의 머릿속엔 지금 피터를 구출해내야겠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일단 상부에 지원을 요청해야겠지요...  60명의 소대원들 중 정상적으로 작전을 진행할 수 있는 자들은 20명 남짓 정도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는?"

"피터 소위님의 소대, 즉, 여러분들을 저희에게로 임시 편입하는겁니다. 당신들은 충분한 베테랑들이 많으니, 어느정도는 저희를 도와줄 수 있는 자들이니까요."


"우, 우리를, 너희들과 같은 검은 안개 연대로 만들겠다고?"


"뭐, 일시적이지만 그렇겠네요."


"...두근거리네."


칼리브레가 앞으로 닥칠 위험을 생각하며 시니컬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소위님을 구출하는데 가장 큰 도움이 될 아주 강력한 사람을 불러야죠."

"아주 강력한 사람..?"

코리가 얼굴 한가득 물음표를 띄웠다.

제스는 그런 코리에게 고개를 끄덕거려준 뒤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등뒤에 커다란 무전기를  무전병이 뚜벅뚜벅 걸어와 무전기를 건넸다.

"..."

무전기를  제스는 무표정하게 교신음만을 듣고 있었다. 곧이어 치직하며 통신이 연결되는 소리와 함께 제스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여기는 아즈레엘."


"아즈레엘님. 비상 상황입니다. 곧바로 돌아와주셔야겠어요."

"뭐라고..?"

"피터...소위가 적에게 납치되었습니다. 저희가 빼앗겼어요. 게다가 제 소대도 절반 이상이 죽었고, 테니도 잃었습니다."


"...그건 좋지 않군. 그나저나, 실종된 로스토크 후방 연대들을 찾았다. 절반은 전부 죽었고, 절반은 지옥 군세에게 굴복했더군. 내가 놈들을 처리하긴 했지만, 아직 살아남은 놈들이 이곳저곳에 숨어들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알겠습니다. 제 대원을 시켜 이곳의 사령관에게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즈레엘님도 속히 돌아와 주세요."


"알았다."


툭하는 소리와 함께 무전이 끊겼다. 제스는 상당히 만족한 표정으로 무전기를 무전병에게 돌려주며, 천천히 고개를 흔들거렸다. 코리는 그런 그녀를 보며 엿들었던 무전 내용을 살짝 물어보았다.


"아즈레엘?"

"어떻게 들으셨군요."


"아니, 제스 네가 그렇게 말해댔잖아. 아무튼, 그 사람은 누구지?"

"하하.. 지금 이 행성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죠. 메헤테크 공항의 지원을 온 사람이 바로 이분입니다."


"그래?"

"네. 그리고, 저와 테니를 악마들의 손길에서 구해준 사람이기도 하죠."

제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생각한 작전은 내일부터 진행될거에요. 하루빨리 피터 소위님을 구출해야하니까요. 늦어도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인류 보안부의 지원이  줄 겁니다. 저는 그럼, 라미엘씨와 작전에 대한 회의를 해보러 가야겠어요."


제스를 따르는 검은 안개 연대원들이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문을 잡아당겼다. 제스는 밖으로 나가기 바로 전, 잠시 뒤돌아 코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코리씨, 아주 일시적인 지위겠지만, 당신이 테니가 있던 부소대장 자리를 맡아줘요. 당신에게 부탁할 수 밖에 없겠어요."

"....?"

"그럼."

쾅. 문이 닫히며 어두운 회의실에 칼리브레, 코리, 에리만이 남았다. 칼리브레는 담배를 하나 꺼내물어 씹은 뒤 불을 붙이고, 후 내뿜었다.


"젠장. 날이 가면 갈수록 편한 곳에서 군생활을 보낼  알았는데. 일은 점점 커지고, 상황은 점점 심각해지는구만."


"칼리브레."

"응?"


"하겐이 우리를  배신했을까..?"


",,,"

코리의 질문에 칼리브레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는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하며 하겐의 행동을 곱씹어 보았다.


"나도.. 모르겠어. 하겐이 왜 우릴 배신했는지는. 그것도, 우리에게 총을 쏴가면서 까지 말이야."


"하겐은.. 아직도 우리의 친구일까-"

"아니. 그런 생각은 하지마. 코리."


에리가 코리의 말을 싹둑 자르며 끼어들었다.


"하겐은 우릴 배신했어. 칼리브레를 거의 죽일뻔했고, 나를 기절시킨 뒤 팔런을 총으로 쏴죽여버렸지. 목과, 가슴팍을 정확히 노려서 말이야. 그후에는 피터를 우리에게서 앗아갔어. 놈은... 이제 우리의 적이야."

"...야, 에리. 너무 심한 말은 하지마-. 칼리브레도 듣고 있-"

"괜찮아."

칼리브레는 코리의 걱정을 이해함과 동시에, 에리의 듣기 거북한 말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에리의 말이 맞아. 하겐은... 16년지기 친구인 나를 배신했고, 죽이려고 들었지. 팔런은 실제로... 죽어버렸고. 하겐은 한때 우리의 동료였지만 지금은 아니야. 녀석은 악마와 거래한 배신자일..."

칼리브레가 뒷말을 흐렸다. 그의 말이 입에서 나오지 못하고 멤돌고 있는듯 했다. 마침내 칼리브레가 한숨 쉬듯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뿐이라고.."

.
.
.
.


지하 회의실을 나온 제스는 아까전의 지도를 돌돌말아쥔  그대로 참호 내부를 걸었다. 참호 곳곳이 파괴되어 공병단 병사들이 열심히 보수중이었고, 아직도 치우지 못한 시신이나 혈흔들이 참호 내부에 흩뿌려져 있기도 했다. 제스는 그런 모습을 최대한 무시하며, 벨라토르들의 지하 시설을 향해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하의 벨라토르 시설에 내려온 제스는 그대로 걸어, 라미엘의 방으로 들어갔다. 말이 라미엘의 방이었지, 사실상 그의 중대원들이 모여 작전을 회의하는 곳이나 다름 없었다.

"라미엘씨."

"음. 제스."

"보안부 상부에는 연락을 마쳤습니다. 넉넉하게 전원 중화기를 무장한 소대와 베테랑 소대 하나를 보내주겠다더군요. 그들의 지휘권도 제게 있습니다."

"그거 잘됐군. 아즈레엘은 어디라고 하던가?"

"지금 이곳으로 복귀중이라고 합니다."

"좋아. 거기에 자네가 자신만만하게 들고 있는 지도를 보아하니, 작전이 떠올랐나보군."

"넵."


제스가 라미엘의 테이블 위에 지도를 쫘악 펼쳤다. 빨간 삼각형으로 그려진 연방군의 옛 전선들이 둘의 눈에 들어왔다.

"이곳과 이곳은 저와 제 휘하 소대가 수색하겠습니다. 아즈레엘님도 함께하실 것이고요."


"그래. 그럼 남은 나머지 2곳은, 우리 중대가 맡으면 되겠군. 좋아."


"역시 바로바로 분담할  아시는군요.  수색 작전은 내일부터 진행할겁니다. 피터 소위님을 하루빨리 찾는게 제일 중요하니까요."

"으음-. 하지만 이 4곳에 소위가 없으면 어떻게 할지 생각은 해보았나?"

"아니요."


"뭐라고...? 제스. 그렇게 무식한 소리를."


라미엘이 약간 실망한 표정으로 제스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나 제스는 전혀 주눅든 기색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이 4곳중에는 분명히 있습니다. 4곳 중 한곳이 아드라 말렉을 소환된 곳이라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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