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드러난 진실]
"루이.. 드디어.. 네가 내게로 돌아와줬어.."
하겐이 반나체의 루이를 껴안으며 그녀의 어깨를 눈물로 적셨다. 그는 자신이 지켜내지 못했던 그녀를, 동료와 연방을 버리면서까지 다시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우둔한 필멸자야. 그게 그렇게도 기쁜것이냐."
아드라말렉은 그런 하겐의 모습을 한심하게 내려다보며 콧김을 픽 뀌었다. 그는 행복에 겨워 눈물이 멈추지 않는 하겐을 보며, 어딘가 기쁜듯 미소짓고 있었다.
"루이, 나야. 하겐. 날 알아보겠니?"
하겐은 훌쩍임을 멈추고 기대가 가득 담긴 얼굴로 루이를 마주 보았다. 루이의 초롱초롱한 눈이 그를 올려다 보았다.
"..."
"루이?"
루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은, 은하계의 본질을 담고 있듯이 맑았지만 어딘가 허전해 보였다. 하겐은 루이의 눈이 자신이 기억하던 눈과 비슷하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어딘가 약간 다른 것도 어렴풋이 알아챈 후였다. 그리고 그 초롱초롱한 눈 한쪽은 다른 쪽 눈과 색이 판이하게 달랐기에 불길함이 점차 고개를 들고 있었다.
"루, 루이..?"
"어브브와...베?"
"...!"
"아이고."
아드라말렉이 그의 옥좌에서 일어나 과장되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의 말에는 약간의 조롱과 비웃음도 섞여있었다.
"뭐, 뭐야. 이 녀석한테 무슨 짓을 한거냐?"
하겐이 루이의 얼굴을 다시 바라 보았다. 루이의 티없이 맑은 눈과 표정은, 하겐을 처음보는 사람의 것이었다. 그리고, 어딘가 멍청해보이는 얼굴이기도 했다. 하겐은 루이읨 모습을 한 이것에게서 순간 혐오감을 느꼈다.
"아--."
왕좌에서 내려와 커다란 턱을 매만지던 아드라말렉이 피묻은 손톱으로 루이의 머리칼을 살짝 만지더니, 그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필멸자야... 이것은 네가 찾던 년이 맞으니까."
"...아니야."
"이 자의 영혼은 죽은지 오래 되어, 갈기갈기 찢어져 무로 돌아가고 있었지. 하후케크가 그걸 발견하고 그 찢어진 조각들을 얼기설기 붙혀 만든게 바로 네 앞에 있는 년이다."
"아니라고!"
"뭐가 아니라는 것이냐."
아드라말렉이 아까처럼 콧김을 씩 내쉬며 그를 비웃었다.
"우리는 네게 네가 사랑하는 자를 부활시켜준다고 약속했지, '완전하게' 부활시켜준다는 약속은 하지 않았던 걸로 아는데."
"그..그런..."
하겐이 절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맞춰 아드라말렉의 미소가 광소로 변하기 시작했다.
"크하하하하하-!"
"너희, 너희 인간들은 정말로 재밌단 말이다. 무언갈 이루어준다고하면, 앞뒤 사정은 알지도 못하고 불나방처럼 달려들지. 안 그런가? 네가 우릴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별 어려운 조건 없이 널 이용한 건 우리였다. 멍청한 필멸자야."
하겐이 절망에 무릎을 꿇었다. 고작, 고작 이런 미래를 위해 자신은 모든 것을 저버렸단 말인가? 전역 후의 미래, 동료들의 우정과 믿음, 그리고... 뒤틀린 사랑까지 버려가면서?
"우으으.. 우에에."
그러나 하겐에게는 아직 단 한명의 아군이 남아있었다.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면서까지 부활시킨, 루이의 잔재가.
루이는 절망에 빠져있는 하겐의 옆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볼을 비비는 등, 그의 상처받은 영혼을 따스하게 어루만져주었다.
"루이..?"
"에헤헤."
하겐이 놀란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니, 루이가 그에게 베시시 웃어주었다. 참으로 멍청하고 바보같은 미소였지만, 순수함이 가득한 미소였다.
"....흥."
아드라말렉은 그 모습에 못볼 꼴이라는 듯 혀를 찼다. 그의 손목에 연결된 힘줄들이 꿈틀거리며 그의 분노를 나타냈지만, 아드라말렉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참아주기로 결정했다. 하후케크의 '작품'을 함부로 부쉈다간 또 무슨 뭣같은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니까.
"영혼도 반쪽밖에 없어서... 백치가 된 년이, 새 주인이 마음에는 드는가 보구나."
"..."
"뭐, 근본적으로는 옛 자신의 영혼 조각을 어느정도 갖고 있으니.. 필멸자, 네놈이 어느정도 그년을 교육한다면야 충분히 예전처럼 널 기억하고 원래대로 돌아올 수도 있겠군. 크크크.."
하겐에게 기대감 섞인 조롱을 내뱉은 아드라말렉이 짧게 킬킬거리며 웃었다. 하겐은 놈의 말을 최대한 무시하며, 자리에서 일어서 반나체인 루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너...너는.. 루이가 아니야."
"헤?"
"너는.. 이제부터.. *실렌티온, 실렌티온이야."
(*망각.)
"시르레..렌티..오느?"
루이, 이제는 실렌티온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가 어버버거리며 자신의 이름을 되뇌였다.
"실렌..티온.. 실렌티온. 실렌티온!"
"그래. 실렌티온... 잘 부탁한다. 앞으로도."
"실렌티온! 실렌티온, 기뻐!"
실렌티온이 하겐의 품에 안겨 볼을 비볐다. 실렌티온이 그에게 안기자, 하겐이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그녀의 옅은 금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더이상 볼것도 없군. 약속대로 그년은 네놈에게 주마. 하지만 일을 좀 더 해줘야겠어. 필멸자."
"...뭐지?"
하겐이 실렌티온을 아드라말렉의 시선에게서 가리며 말했다.
"우리가 점령한 이 전선의 지하에는, 네놈이 포획한 미래 예지 능력자가 있지. 피터라고, 알고 있겠지? 놈은 아마 퍼플 윙에게 온갖 유혹을 받고 있을거다. 아마 지금쯤이면 우리쪽으로 돌아섰을수도 있겠지. 지하로 가서 놈을 살피고 내게 어떤지 보고해라. 난 여기서 기다릴테니.."
아드라말렉이 그의 시체 옥좌 위로 올라가 턱 걸터앉았다. 그는 어서 가보라는듯 손을 까딱거렸다.
.
.
.
.
피터와 깊게 입맞춤을 나누던 마리가 입술을 뗐다. 침이 둘 사이에서 늘어지며, 반짝 빛났다.
"후후후후♥."
마리는 만족한듯이 웃음을 지었고, 피터는 그녀가 입을 떼자마자 헛구역질을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욱..우웩.."
"어머?"
"우웨에엑-"
피터는 마리가 자신에게 삼키도록만든 타액과 거기에 섞인 불순물들을 토해냈다. 추악하고 더러운 체액들, 악마의 육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경한 액체들을.
"아~. 겨우 먹였는데. 왜 다시 토해내는거에요~. 정말."
마리가 계속해서 토악질을 하는 피터를 내려다보며 미소지었다. 그녀의 자주색 혀가 낼름거리며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뭐, 다시 먹이면 되는거긴 하지만."
불경하게 미소짓는 마리가 피터에게로 다시금 천천히 다가왔다. 피터는 자신에게 또 다시 혐오스러운 일들이 자행될 것임을 깨닫고는, 눈을 감고 버텨낼 준비를 하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아주 잠시 뒤로 미루어질 수 있었다.
"...그쯤하지."
"?"
피터와 마리 둘다 의아한 표정을 띄운 채 어둠속을 쳐다보았다. 그곳에서는 두 남녀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하, 하겐...!"
"그래. 피터."
"당신이 왜 여기있는거지? 지금은 '내 시간'이야. 당장 꺼져."
하겐에게 경고를 한 마리가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하겐은 그녀의 위협에도 전혀 겁먹은 얼굴이 아닌, 오히려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드라말렉의 명령이다. 비켜. 멍청아."
"...흥. 어차피 나중에 더 놀 수 있으니까... 뭐. 지금은 잠시 양보해줄까. 소위님도 잠시 쉬어야하고. 그렇죠?"
고옥같은 피부를 지닌 마리가 피터에게 고개를 돌려 따스하게 말했다. 하지만 피터는 그녀의 말속에 숨은 흥분과 욕망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저는 갈게요. 소위님. 나중에 또 봐요?"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발길을 올린 마리가 피터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차분하게 굳어있었다.
"아 참, 절대 그것만은 안된다고, 에리를 배신할 수 없다며 비명 지르는거.. 상당히 좋았어요. 또 하죠?"
아까의 기억을 떠올린 마리가 윙크를 남기며 문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에 피터는 마리가 자신에게 저질렀던 외설적인 일들을 생각하며 공포에 떨었다.
"..."
"..."
어두운 방에 남은 두 남자와 한 여자는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이어 그 침묵을 조금씩 깬 것은 하겐이 먼저였다.
"...꽤나 기가 빨렸나보군. 안 그래?"
"...닥쳐."
"이쪽으로 넘어올 생각은 없나? 마리가 널 아주 사랑하던데."
"...닥치라고. 씨발아."
"뭐. 잡담은 여기까지 하자. 친구."
"친구? 지금 친구라고 했냐? 날 친구라고 부르지마라. 이 배신자 새끼야. 내가 누구 때문에 이곳에서 이런 일을 당하고 있는지, 벌써 잊은거냐? *체쉬대가리 새끼."
(*7000년대의 닭. 여러가지 환경에 적응할 수 있다.)
"...마리에게 고문을 빙자한 성욕 해소를 당하는 네 모습을 생각했을땐, 처음엔 쉽게 넘어올 줄 알았지만 아닌 것 같군. 내 생각을 바꿔야겠어. 넌 역시 대단한 녀석이다."
"대체 뭘 원하는거냐? 응? 너나, 마리나. 아드라말렉이라는 개새끼나. 대체 내게 뭘 원하는거냐고!"
"...나는, 나는 이제 네게 원하는게 없다. 난 내가 원하는 것을 이뤘거든."
"뭐?"
피터가 하겐 뒤에 숨어있는 반나체의 여성을 보았다. 그녀는 피터와 눈이 마주치자 허겁지겁 하겐의 뒤로 완전히 숨었지만, 피터는 그 짧은 순간에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루, 루이냐? 어떻게 루이가..."
"그래."
"너, 너 설마. 내가 생각하는건 아니겠지. 응?"
"후-. 네가 뭘 생각하든간에, 거의 사실이겠지. 난 루이를 되살리기 위해 악마들과 거래했다. 대가는 내 영혼도 아니었어. 내 가까이에 있는 미래 예지 능력자, 그래. 널 데려오는 거였지."
"..."
"네게 도움이 될말은 없겠지만, 그저... 미안하다고 생각할 뿐이야. 정말 미안하다."
"...네 행복을 위해 날 팔아먹은거냐."
"..."
피터의 입에서 느릿하게 나온 질문에, 하겐이 잠시 말을 잃었다.
"그래, 날 팔아먹으니... 그들이 네게 루이를 죽음에서 되돌려줬군. 참으로 잘된 일이야. 안 그러냐?"
"...피터."
"아주.. 아주 잘됐어. 그래. 아주 잘됐다고."
"..."
"그런데 말이다. 하겐. 응? 네 뒤에 숨어있는 상냥한 그 인형이, 정말 루이라고 생각하냐? 죽음에서 되돌아왔다고, 그게 루이라고 생각하냐고."
피터의 차가운 비꼼이 하겐의 가슴에 박혔다.
"병신새끼. 넌 이용당한거다. 죽어버린 과거의 옛 잔재가 뿌린 미끼에, 넌 멍청한 물고기마냥 그걸 물어버린거라고."
"..."
"그런데도, 넌 내게 와서 네가 원하던걸 이루었다고 자랑하는 꼴이지. 네가 악마들에게 받은 보상은, 네가 알던 루이가 아님에도 말야."
"...안다. 피터."
"뭐라고?"
"안다고. 네 말대로, 이 녀석은 루이가 아니야. 반쯤은 루이겠지만... 완전한 루이는 아니라고."
"...?"
"이 녀석의 영혼은 반쯤 루이다. 악마놈들이 루이의 영혼 조각과 무언가를 얼기설기 엮어서 만들었다더군. 정신도 온전치 않은 백치에다가, 나를 포함해 모든 것을 잊은 여자야."
"...푸하하하-!"
피터가 하겐을 보며 광소했다. 그의 웃음에는 왠지 모를 슬픔이 섞여 있었다. 모든 걸 버려가면서도, 결국엔 원하는 걸 얻지 못한 자를 안타깝게 여기는 슬픔이.
"내 말이... 내 말이 맞았군. 그래, 악마들이 네게 '진짜'를 줄리가 없지..."
두 남자의 침묵이 시작됐다. 둘 다 서로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는, 웃지못할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래. 그래서, 이제 어쩔셈이지? 네 미래와 친구를 팔아먹고?"
"이 녀석에게.. 미래를 줄거야."
"..."
"이 녀석에게 삶이라는 미래를 주겠어. 내가 옆에서 모든걸 다시 돕겠어. 이 녀석의 이름은 이제 더 이상 루이가 아니야. 이 자는 실렌티온이다. 나와 함께할 실렌티온이야."
하겐이 실렌티온을 피터에게 보여주었다. 맑은 눈을 가진 오드아이의 여성이 피터에게 조심스레 손을 올려 인사했다. 피터는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을 보며, 자신이 알던 루이와 매우 똑같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망각이라. 많은걸 잊은 여자에게는 비참한 이름이군."
피터의 말을 들은 하겐도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그와 같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천천히 실렌티온과 뒤돌며, 피터에게서 멀어졌다.
"...미안하다. 피터. 네게 해줄 말은 이것 뿐이야. 정말 미안하다. 그리고..."
"굽히지 말아라."
하겐이 실렌티온과 함께 지상의 참호로 올라가는 계단을 밟았다.
"....좆같은 걱정은 하지 마라. 난 악마들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으니까."
피터는 그가 나가고 나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한방울 흐르더니 땅바닥으로 톡 떨어졌다.
동료의 배신도 배신이었지만,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나서도 결국 얻은 것은 반쪽의 행복이라는 것이 왜인지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는 하겐의 배신이 역겹게도, 비참하게도 느껴졌다. 알 수 없는 감정이 피터의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