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전선으로]
수많은 연방군이 점령한 메헤테크 공항은 매우 북적이고 있었다. 수백대의 수송선들이 기갑 병기와 군수 물품, 충원병등을 실어나르며 대기권을 분주히 들락날락 움직였고, 그럴때마다 메헤테크 공항의 활주로와 주위 넓은 들판에는 연방군의 병기들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메헤테크 공항 탈환전 당시 투입되었던 연방군의 보병 연대들도 충원병들로 채워지며, 어느정도 복구를 완료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이제 준비된 수백대의 H-100 수송 차량이나 수송선에 탑승해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전장으로 떠나는 것이었다.
"로스토크 제 1연대부터, 제 11연대까지 전원 수송 차량에 탑승하라. 다시 한번 알린다. 제 1연대부터 11연대에 속하는 모든 병사는 활주로에 준비된 수송 차량과 팔콘V에 소대 단위로 탑승하라. 수송 차량들 앞에는 기갑단의 병기들이 함께 움직일 것이다. 이상."
공항 내부에 달려있는 스피커들에서 다음 작전을 조곤조곤 지시하는 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스피커의 말을 듣고 다들 약속한듯이 한숨을 쉬었다.
"다들 들었지! 어서 이동해!"
전사한 2 연대장 이스칸달을 대신해, 지휘권을 물려받은 *2 연대의 연대 지휘관 크레이스가 크게 외쳤다.
(*연대장과 연대 지휘관은 다르다. 연대 지휘관은 연방에서 특수한 교육을 수료받은 인재들이기 때문임. 그에 비해 연대장은 일반적인 장교자리.)
각 연대의 병사들이 그들의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활주로와 들판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엔진을 털털거리며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수송차량들을 마주했고, 곧 그 차량들이 자신들을 험된 곳까지 데려다 줄 것을 깨달았다.
피터와 그의 동료들도 H-100 수송 차량에 올라서며 그 험난한 길을 달려야할 것에 벌써부터 한숨이 절로 나왔다.
.
.
.
.
"...꽤나 질긴 놈들이군."
전장에 놓인 커다란 바위산 위에 서있던 아드라말레크가 견고하면서도 뚫리지 않는 기다란 전선을 바라보았다. 족히 수km는 넘을 그 연방군의 참호 라인은 마키-203 행성이 절멸 직전까지 갔어도 뚫리지 않는 견고함을 자랑하고 있는 곳으로, 다이아몬드 전선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었다.
아드라말레크의 지시 아래에 수억명의 지옥 군세 전사들과 타락자들이 저곳에 갈아넣어졌으나 저 참호 안에 숨어있는 연방 병사들, 그들이 가진 고화력 병기에 의해 가루가 되어버리기 일쑤였다.
"아드라말렉."
거대한 날개 한쌍을 가진 데모니오가 그에게 기웃거리며 다가왔다. 그는 딱봐도 타락해 넘어온 데모니오들 중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자로 보였다. 아드라말렉은 말해보라는듯이 콧김을 핑 내쉬었다.
"마침내 우리 군세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갑 사단이 이쪽으로 이동중이다. 그들의 화력이면 아마 저 참호들을 싸그리 날려버릴 수 있을 거다."
데모니오가 아드라말렉이 바라보고 있는 먼 거리의 참호들을 같이 바라보았다.
"어떡할거지? 전사들의 피해가 막심하나, 더 갈아넣을수는 있어."
"...아니. 괜찮다."
아드라말렉이 잠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더니 무언가 감지했다. 그는 알겠다는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웃었다.
"응?"
"우리의 보물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거든. 그자와 나는 꿈속에서 만났지. 그때부터 난 그를 느낄 수 있어. 난 그자가 이쪽으로 오고 있는 걸 느낄 수 있다."
"..."
"메르켄. 네 형제 자매들과 같이 기습을 준비하라. 그가 당도한 순간, 그를 노려 낚아채 와라."
"알겠는데, 아무리 우리가 미개한 놈들의 머리통을 부숴버릴 수는 있어도.. 그처럼 보호받는 자는 쉽게 빼앗지 못할걸."
"으음? 그건 걱정하지 마라. 때가 오면, 우리를 도와줄 녀석들이 그곳에 이미 있으니까."
아드라말렉의 말에, 메르켄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드라말렉은 그저 만족스러운 웃음소리와 함께 뒤돌아 바위산을 내려갔다.
.
.
.
.
"씨이팔. 엄청 덜컹 거리네. 머리를 벌써 두번이나 찧었잖아."
험난한 지형을 내달리는 수송 차량 내부에서, 코리가 머리를 매만지며 일어났다. 헬멧을 쓰고 있었음에도 그는 벽에 머리를 부딪혀서인지 상당히 불만스러워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안전 벨트를 하라고. 교육도 받지 않았어?"
칼리브레는 옆에서 한심한 눈초리로 그를 보며 혀를 찼다.
"근데, 왜 이렇게 지형들이 험난한거지?"
팔런은 수송 차량의 *사격창을 통해 밖을 살짝 쳐다보았다.
(*수송 차량 내부에서 외부를 향해 사격할 수 있는 조그만 창.)
"맞아. 여긴 우리 고향 행성인데, 이런 곳들이 없었다고."
코리도 팔런의 말을 거들었다.
"...너희들의 말처럼 여기는 우리의 고향이지. 그러나 이제는 우리의 고향이라고 부를 수 없을만큼 변해버린거야."
밖의 상황을 살피는 팔런과 코리를 보며, 피터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그의 눈에서는 바깥의 끔찍한 상황들이 상상되는지 감긴 눈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가."
수송 차량 내부에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충원으로 온 병사들은 몰랐겠지만, 피터의 소대를 넘어서 제 1~10 로스토크의 보병 연대원들은 대부분 마키-203 행성 출신이었으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나고 자랐던 고향 행성 위에서 목숨을 건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셈이었다.
"뭐, 옛날 생각 나는데."
하겐이 숙연한 분위기를 조심스럽게 깨면서 옛날 일을 떠올렸다. 약 1년전, 티스와의 대규모 전쟁으로 인해 투입되었던 오레스 01 행성의 일들을.
그들은 막 병사가 된 신참들이었었고, 전장의 공포에 압도되었던 병사들이었다. 그때 우주의 괴물들과 싸우던 그들은 지금 상상할 수 없는 지옥의 악마들과 싸우고 있었다. 싸우는 적이 달라졌을 뿐이지, 그들의 삶은 한치도 변함이 없었다.
"...이 모든게 다 꿈이었으면 좋겠네."
피터와 함께 밭을 갈며 평화롭게 살던 때를 떠올린 코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듯, 아니면 경고하듯, 바깥에서는 붉은색과 파란색의 번개들이 미칠듯이 점등하며 굉음을 내고 있었다.
.
.
.
.
100대가 넘는 수송 차량과 80대 가량의 팔콘 수송선들, 기갑단의 돌격 전차등 수많은 병력이 다이아몬드 전선 뒷편에 일제히 멈추었다. 전선에 주둔하고 있는 병사들이 경계 태세를 갖추며, *이동형 파쇄포를 여러대 끌고와 수송 차량들을 향해 겨누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들의 주위에는 연방 기갑대의 *T-1과 돌격 전차들도 대기중이었다.
(*양팔에 30mm 기관포와 날카로운 검을 단,15~20m 크기의 인간형 전쟁 기계. 1명의 조종사만이 탑승한다.)
잠시 대척 상태가 이루어지고, 다이아몬드 전선의 총 사령관 아델이 병사들을 젖히며 앞으로 걸어나왔다.
(*연방 육군이 운용하는, 기동 타격포. 보병 연대에 10대 이상 배치된다.)
마찬가지로 수송 차량들에서도 2 연대의 연대 지휘관인 크레이스가 차량에서 내린 뒤 그들에게 맞서섰다. 그들은 서로의 복장과 상태를 눈으로 살펴가며, 적인지 아닌지 빠르게 분간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은 바로 다이아몬드 요새의 사령관 아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앞으로 걸어나온 크레이스의 연대 지휘관 복장을 보고 이동형 파쇄포의 조준을 뒤로 물렸다.
"당신들이 우리가 꿈에 그리고 그리던 지원군들인가?"
"쉽게 말하면. 그렇습니다. 우리는 로스토크 제 2보병 연대고, 저는 2 연대의 연대 지휘관입니다. 현재 당신들 앞에 보이는 수송 차량과 팔콘들에는 1 연대부터 4 연대까지의 병력이 준비 되어있죠. 그리고 이들은 당신들을 도와 이 행성을 되찾기 위해 싸울 것이고요."
"...좋군. 그런데 끽해봐야 1만명 정도 아닌가? 나머지는 더 없나?"
아델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수송 차량을 쓱 훑어보았다.
"7개의 연대가 추가로 도착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은 이유는 잘 모르겠군요."
"..."
"..."
두 지휘관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아델이 미소 지으며 지원을 온 그들을 환영해주었다.
"환영하겠네. 여기는 다이아몬드 전선이네. 나는 이곳의 총 사령관, 아델이고. 아마도 여긴 이 행성에 마지막으로 남아, 제대로 굴러가는 전선이겠지. 다시 한번 자네들을 진심으로 환영하네."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전 크레이스 토치, 2연대의 연대 지휘관입니다. 교전 중 전사한 이스칸달 연대장 대신, 2연대와 나머지 연대의 총 지휘권을 맡고 있죠."
"음. 그래서 연대장이 아니었던건가. 아무튼 밖에 있으면 하나도 좋을 것 없으니, 자네들 병력은 전부 참호 안으로 들여보내게. 수송 차량들은 저기 돌격 전차들과 T-1들 사이에 두고 말이야."
아델이 말을 끝마치고 그녀의 호위대와 함께 참호 안으로 들어갔다. 크레이스는 곧 자신의 연대와 다른 연대의 연대장들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 무전병을 불렀다.
"무전병!"
무전병이 크레이스에게 허겁지겁 달려오는 사이, 크레이스는 왜 나머지 연대는 도착하지 않았는지를 먼저 생각하며 고민에 잠겼다. 그는 이 전선으로 오는 내내 이상하게도 번개와 굉음이 자주 들렸는지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
.
.
.
<크레이스가 이끄는 4개 연대가 다이아몬드 전선에 도착하기 10분 전.>
"어?"
로스토크 제 5보병 연대의 어느 운전병이 자신들의 무전망이 고장났음을 깨닫고는 계기판을 두들겼다. 그러나 계기판에서는 통신망이 완전히 끊겨버린 붉은 빛만을 내고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현상은 나머지 6,7,8,9,10,11연대에서도 똑같았다. 약 2만 5천명의 병사들이 순식간에 무전망을 잃고 거대한 행성의 들판에서 미아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들 주위에는 나침반이나 방향감각마저도 파괴시키는 불가사의한 붉은 폭풍이 불어대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불안한데요. 연대장님."
로스토크 제 5보병 연대의 연대장, 미레스가 운전병에게 다가와 상황을 물었다. 그러나 운전병들도 지금 상황을 파악하지는 못한채 두고볼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상황은 그들의 능력을 뛰어넘은채 시시각각 바뀌어가는 중이었다.
수많은 연방의 병사들이 지금 일어나는 알 수 없는 현상에 공포를 느꼈고,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어둠이 점점 드리우기 시작했다.
마침내 불길한 번개 소리와 함께, 붉은 색으로 가득찼던 하늘에 흑구름이 몰려들었다. 흑구름들은 순식간에 불어나며 핏방울의 비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그들이 지나다니던 들판은 이리저리 뒤틀리며 수송 차량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단단히 묶었고, 곧 커다랗고 붉은 폭풍이 2만 5천명의 연방 병사들을 흽쓸었다.
붉은 폭풍에 의해 H-100 수송 차량들은 두꺼운 장갑이 찢겨져 나가며 안에 탑승한 병사들을 드러냈고, 팔콘 수송선들은 추락하거나 망령에게 기체의 주도권을 빼앗겨 미친듯이 하늘을 날아다녔다.
폭풍에 흽쓸린 병사들은 뼈와 살이 분리되어가며 죽어가거나, 혹은 거대한 폭풍 속에서 그들을 비웃고 있는 악마들과 마주했다. 악마들은 그들의 정신과 혼을 빼놓아 미쳐버리게 만들기도 했고, 어디론가 끌고가 극상의 쾌락과 함께 고통을 선사하기도 했다. 또는 강력한 힘과 영원한 보상을 약속하며, 정신이 나약한 필멸자들을 회유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정신이 나가버렸을 때, 특수한 고급 교육을 받은 각 연대의 연대 지휘관들이 악마에게 저항하며 자신들의 병사들을 일깨웠으나 그것도 아주 잠시 어둠속에서 촛불 하나가 밝아졌다 꺼진 정도의 저항이었다. 결국 그들도 그들의 부하들처럼, 어둠의 길을 걷고 말았다.
단 5분 만에, 2만 5천명 중 절반이 악마들의 가혹한 고문과 회유를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살아남은 절반의 병사들은 반이 미쳐버렸고, 반은 악마들에게 충성을 약속하며 영원한 노예가 되어버렸다.
로스토크 제 5보병 연대장 미레스는 자신의 몸을 어느 망령에게 빼앗긴 뒤, 영혼은 그들에게 잡아먹혀 영혼의 찌꺼기만이 그의 육신 어딘가에 남았다.
그렇게, 1만 2천명의 타락자들이 탄생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