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라미엘]
"흐-하하하~!"
네르갈의 육신을 빼앗은 판이 그의 검과 커다랗게 뒤틀린 왼팔을 휘두르며 벨라토르의 *방진을 무너트렸다. 벨라토르 두 명이 그를 저지하기 위해 코발트 권총을 쏘아대며 접근했지만, 곧 판의 왼손에 찌그러지며 생을 끝마치고 말았다.
(*방진: 방어진형)
"우오아아아악-!"
"쏴! 쏴!"
벨라토르를 제외한 연방의 필멸자 병사들은 자신들의 소총과 중화기를 판에게 일제히 집중했으나 판은 한 걸음도 물러섬이 없었다. 판의 갑주로 1만도가 넘는 레이져 응축기의 레이져 탄환이 스쳤으나, 판의 갑주이자 네르갈의 갑주는 살짝의 그을림만을 남긴채 뚫리지 않았다.
"붉은 지옥에게 영광을-! 제 1 군단장에게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겨라. 미개인들이여!"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벨라토르 전사를 일도양단해 처리한 판은 방진 곳곳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연방 병사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의 공포와 두려움이 판에게 느껴지며, 희열을 몰고 왔다.
"너희들의 나약함이 느껴지는구나.."
판은 벨라토르들의 피가 묻은 검을 툭 털어냈다. 반신들의 피가 흙과 철이 뒤엉킨 바닥에 흩뿌려지며, 끈적하게 흘렀다.
"다들 뒤로 물러나! 위험해!"
연방 보병들 사이에서 어느 연대장이 글라디오를 뽑아들고 병사들의 앞으로 나섰다. 판은 그저 비웃음을 얼굴에 띈채 부들부들 떠는 그녀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포데스타의 꿰뚫는 눈이 연대장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기 시작했다.
여러가지 감정이 뒤얽힌 그 연대장의 속마음은, 무언가 반짝이며 빛나는 것이 높게 떠오르고 있었다. 희생과, 남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 보잘것 없는 일개 보병들의 지휘관 이었으나 자신의 자리에 만족하며, 연방에 가진 충성심이 똘똘 뭉쳐 황금색의 섬광으로 그녀의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고결한 의지가 담긴 그녀의 눈이 판과 마주쳤다. 겁을 먹어 흔들리고 있던 그녀의 눈은 점점 확고한 의지에 의해 눈빛이 바뀌고 있었다.
"흥.."
불쾌해진 판은 그의 검을 높게 쳐들었다. 고작 희생 정신? 고작 의무감? 그런 것으로는 악의 물결을 막을 수 없는 법이다. 그는 연대장에서 느껴지는 자신의 불쾌함을 꾹꾹 눌러담아 조롱의 표정으로 바꾸었다.
"죽어-"
판이 그들에게 죽음이라는 형벌을 내리려는 찰나, 그의 검이 멈추었다.
[척]
[척]
"...이.. 이새끼들."
겁을 먹고 물러났던 다른 병사들이 하나둘씩 앞으로 걸어나와 그들의 연대장 옆에 섰다. 그들도 그들의 연대장 라케니스처럼 몸을 조금씩 떨고 있었지만, 용기를 가지고 죽음에 맞서고 있는 자들이었다. 제 3 로스토크 보병 연대의 연대장 라케니스는 자신의 부하들을 보며, 더욱 용기와 의지를 얻었다.
"..."
판은 이제 매우 불쾌해진 얼굴로 그들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판은 자신에게 모욕이나 다름없는 짓들을 한 이들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이 자리에서 그대로 참살해야만, 그의 자존심은 상처받지 않을 것이었다.
"망할새끼들이---!!!"
판의 검이 번쩍이며 라케니스의 머리카락에 닿은 그 순간, 커다란 굉음과 섬광이 그를 뒤덮었다. 그에게 가해진 공격이 얼마나 위력적이었는지, 판이 빙의하고 있는 네르갈의 갑주는 반쯤 쪼개지며 파편을 사방으로 튀어댔고, 네르갈의 뒤에서 꿀럭거리던 검은 촉수들은 잠시 형체를 잃고 희미해질 정도였다.
"...!!"
연방 병사들은 잠시 섬광에 다들 눈을 가렸지만, 섬광이 멎고 나자 자신들의 눈 앞에 어느 거대한 벨라토르 하나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노란색 망토를 휘날리며, 몸에서 번개같은 황금색 전기들이 파직거리는 벨라토르.
상처를 감싸며 다른 중대원들과 함께 교전하고 있던 테리우스는 그것이 누군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중대장의 등장에, 감격하며 눈물을 한방울 흘릴 정도였다.
"중대장...님.."
쓰러져버린 판의 육신을 보며 망치를 돌리던 라미엘이, 자신의 뒤에서 멍때리던 필멸자들을 향해 뒤돌았다.
"다들 괜찮나?"
"ㅇ, 예! 괘, 괜찮습니다."
"좋아. 이제 우리가 왔으니, 자네들은 공항 건물 내부로 대피하게. 이제부터 이곳은 자네같은 필멸자들이 낄 곳이 아니네."
"아, 알겠습니다!"
라케니스가 말을 절며, 벨라토르를 향해 감사함의 표시로 경례를 건네었다. 벨라토르는 그녀의 행동에 살짝 미소지으며 어서 가보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저, 저기... 죄송합니다만, 존함이...?"
"...나는 라미엘 하르칸. 라이징 해머 대대의 4 중대장이네."
말을 마친 라미엘은 몸을 비틀거리는 판을 향해 자신의 망치를 휘두르며 달려나갔다.
.
.
.
.
<라미엘이 판과 맞서기 10분 전. 메헤테크 공항의 건물 내부.>
"...진짜 그렇게 하시려고요?"
"그렇다네. 하지만 이번 건 나만 짊어지는게 아니야. 소위 자네가 그만큼 고통스럽고, 위험한 작전이지."
라미엘이 피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정말 판과 맞설 생각입니까? 미쳤어요? 당신 그러다 죽을겁니다."
제스가 라미엘을 걱정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라미엘은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다른 상대도 아닌, 판이란 말입니다. 놈을 잡으려면 내일 아침까지는 버텨야 될 거라구요!"
"알고 있다네."
"알고 있으면서 그러는 겁니까? 정말 미쳤군요. 당신 임무는 인류 보안부에서 직접 내린 명령이잖아요! 소위님을 지켜라! 이거 하나라구요."
"...하지만. 소위가 이번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선 지금 누군가가 판과 맞서 시간을 끌어야 한다네. 그 시간이 5분이 되든. 1분이 되든간에 말이네. 그 시간을 벌지 못한다면..."
"...못한다면요?"
"판은 공항 활주로에 있는 내 중대원들의 방진을 싸그리 깨부수고 내부로 침입하겠지. 그렇게 된다면 이 좁은곳에서 놈을 막을 수는 없을거라네."
"..."
"자, 나는 이제 가보겠네. 피터 소위!"
"예!"
"나는 시간 끌기용이네. 사실상 이번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자네의 능력과..."
라미엘이 피터의 손에 들려있는 블랙 콘솔리다시온을 쳐다보았다.
"그 약물이 필요하다네. 내가 아까 설명해 주었던거, 생각 나나?"
"...예.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좋아. 그럼 자네들만 믿겠네. 조금 있다가 보자고."
.
.
.
.
"이야압-!"
라미엘이 번개가 담긴 망치를 휘둘러 네르갈의 남은 갑주를 산산 조각 냈다. 그는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네르갈의 육신을 강력하게 두들겨댔다. 반신의 피가 사방으로 튀며 땅을 더럽혔다. 라미엘의 공격은 네르갈의 육신을 넘어 그의 몸을 빼앗은 판에게도 고통을 주고 있었다.
"크윽, 크으윽-."
판이 고통에 빠져 휘두르는 왼팔을 피하며, 라미엘은 그의 코발트 권총을 뽑아들었다. 코발트 권총의 탄환이 네르갈의 육신에 박히며 폭발하자, 판이 고통에 울부짖었다.
코발트 권총이 내뿜은 28mm 고속 철갑고폭탄환은 빙의된 네르갈의 육신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 뒤가 훤히 보이도록 만들었다. 라미엘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손에 마인드- 에너지적인 번개를 담아 그 상처 사이로 쑤셔넣기 위해 팔을 내질렀다.
"...안 되지."
"..!!!"
네르갈의 등 뒤에 자라난 수십개의 검은 촉수들이 꿀럭거리며 라미엘의 손과 팔목을 강하게 붙들고 있었다. 라미엘은 그의 손을 빼내기 위해 비틀었으나, 그럴수록 악마의 촉수는 강하게 그의 갑주와 손을 조여왔다.
"이제 끝이다. 4 중대의 중대장이여."
"아니!"
라미엘은 이를 악물며 묶여버린 왼손의 번개들을 촉수로 퍼트려버렸다. 그의 왼팔이 살짝 불탈 정도로 강력한 마인드 에너지는 촉수들을 황금색의 번개로 불태우며 재로 만들었고, 그 충격은 판에게도 심각한 타격이었다.
"으, 우억..."
판은 강력한 번개에 의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는 뒷걸음질치며 팔을 내저었고, 그럴 때마다 그의 육신에 걸쳐졌던 갑주의 파편이 땅으로 툭툭 떨어졌다.
"이제는 몸을 가누기 어렵나보구나. 악마야."
"크으으악..."
라미엘이 판의 복부를 짓밟으며 조롱했다.
"내 부하의 몸에서 나와라. 쓰레기 같은 것."
"으..흐흐... 아니. 이 육신은 이제 내 거야. 내거라고!"
"..."
판을 구하기 위해 달려든 나이트 크롤러의 머리를 망치로 내려찍어 박살내버린 라미엘이 흥하며 조롱의 웃음을 내뱉었다.
"네놈이 이렇게 약한걸 보아하니.. 불완전하게 강림했나보군. 안 그런가?"
"...닥쳐라."
"그렇다면 넌 죽을 것이다."
라미엘이 그의 망치를 높게 쳐들었다. 노랗고 황금색의 번개가 번쩍이며 그의 망치와 육신 주위를 감돌았다.
마침내 망치가 판의 머리를 향해 내리 꽂아졌을 때, 판은 자신이 숨겨두었던 얼굴을 드러냈다. 그 뒤에는 그가 아껴두었던, 불경한 힘이 서려 있었다.
"중대장님!"
"..!"
벨라토르는 반신이다. 인간과 신이 합쳐진 자들. 판의 속임수는 네르갈의 불쌍한 얼굴이었다. 반신이 인간적인 면에 잠시 굳어버렸을 때, 마침내 둘의 운명은 결정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