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5화 〉[배신자 2] (75/131)



〈 75화 〉[배신자 2]

"마리, 나 왔어. 오늘 광장에서 무료로 음식을 나누어줬는데, 엄청 맛있더라. 마리?"


줄리가 거나하게 취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허나 마리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는 테이블에 엎드려 잠을 자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테이블 아래에 가려져 있었는데, 줄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음, 이렇게 자면 추울텐데. 옷이라도 걸쳐줘야.."

그녀는 자신이 입고 있는 연방 보병 재킷을 벗어 마리에게 덮어주고는 침대로 들어가 눈을 붙였다. 술에 취해 잠이 오는 것도 있었지만, 자고 있는 마리를 깨우면서까지 방을 돌아다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줄리가 누운지 5분도 안되어, 코를 골아대는 소리가  안을 메웠다.


"...-"


마리는 감았던 눈을 살짝 뜨고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 아래에 숨겨져 있던 그녀의 손에는 면도날과 국소 마취제가 담긴 주사기가 들려 있었다.


.
.
.
.


왁자지껄 떠들며 술을 마시던 피터와 동료들은, 칼리브레가 신음하는 소리에 대화를 멈췄다. 그는 자신의 기계 의수가 달린 어깨를 부여잡고 있었다.

"에그그."


"왜 그래?"


피터는 그를 걱정하며 의수를 살폈다. 칼리브레는 코리를 보고 대뜸 국소 마취제를 어디다 두었냐고 물었다.

"코리, 내 국소 마취제 어딨어? 의무실에서 받은거 말야."


"아 그거? 찬장에  봐."


"알았어."


칼리브레가 자리에서 일어나 찬장으로 걸어갔다. 피터는 그런 칼리브레의 뒷모습을 잠시 보다가 코리에게 웬 국소 마취제를 찾냐고 의문을 가졌다.

"뜬금없이 웬 국소 마취제? 의무실에서 그런것도 받았어?"


피터의 질문에 코리가 대답했다.

"새로 이식한 기계 의수 적응 기간에는 저렇게 고통을 유발할 때도 있어서, 그럴땐 그냥 국소 마취제로 버텼거든. 의무실에서 주사기랑 약병을 줬었어."


"그렇구나."

코리의 말에 수긍한 피터가 칼리브레를 바라보았다. 그는 찬장을 뒤지며 국소 마취제를 찾고 있었다. 한참을 찾던 그는 코리를 홱 노려보며 없는데 왜 거짓말하냐며 짜증을 냈다.

"없는데? 거짓말을 아주... 아야야."


"없어? 그럴리가 없는데.. 내가 아까 봤다고. 그치, 하겐?"

"...몰라."

"이상하네.. 진짜 아파 죽겠는데  없는거야?"

"오늘만 참아~ 내일 의무실에서 하나 받으면 되지. 정 뭐하면 재생제 놓든가."

코리가 맥주잔에 담긴 맥주를 들이키며 웃었다. 술잔을 전부 비운 제스는 기지개를 한번 쭈욱 피고 일어났다.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소위님. 대령님의 호출이 있었거든요."

제스와 테니는 피터에게 경례하고는 문으로 걸어갔다. 피터는 그들에게 수고하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
.
.
.

마리는 죽은듯 자고 있는 줄리에게 다가가 국소 마취제가 담긴 주사기를 꺼내들었다. 그녀는 줄리의 볼과 어깨에 주사를 놓고, 약효가 퍼지기를 잠시 기다렸다.


"어떻게 해야하는지는 내가 알려주었지?"

검은 목소리가 마리에게 속삭였다.

"...정말. 이렇게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질  있단 말이야? 내 친구를 죽이면서?"

"아니, 죽이는게 아니야."


"진짜?"

"죽이는게 아닌, 더 위대한 존재로 만들어주는거야.  어느 인간도 감히 덤비지 못할, 더욱 위대한 존재로."


"..."

"어서하렴.  손으로 그녀를 '승천' 시켜주렴. 그래야만이 네 욕망을 채울 수 있을지니."

검은 목소리의 달콤한 유혹에, 마리가 면도날을 집어들었다. 창가로 들어오는 미약한 불빛에 날카로운 면도날이 빛나며 번뜩였다. 마리는 면도날을 줄리의 어깨로 가져갔다.

[사악.]

살이 베이는 소리와 함께 면도날이 깔끔하게 줄리의 어깨를 베었다. 줄리가 잠시 움찔했으나, 그녀는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문양을.. 만들어.."

검은 목소리는 마리에게 '문양'을 만드는 것을 지시하고 있었다. 마리는 그의 말대로 줄리의 어깨에 문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두운 광장의 뒷편에서 자신이 흘린 피가 만들었던 문양. 그 문양을 그리고 있던 마리는, 자신이 지금 조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이건... 그 함선 안에서 봤던..)"

악마의 문양. 지옥 군세의 문양.

줄리의 어깨 위에서 면도날을 움직이던 마리의 손이 멈칫했다. 자신은 지금 악마에게 명령을 받고 있단 말인가?

"왜 멈추었니?"

검은 목소리는 나긋나긋하게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너, 너는.. 너는..뭐지?"


"..."


"대답해. 아니면 그, 그만 둘거야. 이런거 따위는.."

"..."

"말하라고...!"


"아니야."


검은 목소리는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부정했다. 그는 그저 마리의 눈앞에 아름다운 환상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평화로운 행성. 푸른 초원이 넓게 드리워져 있는 들판의 조그만 집이 하나 보였다. 환상은 계속 진행되며 그 조그만 집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뭐,  보여주려는거야.."

"너의 원동력이 되어줄 것들."

집의 문이 열렸다. 환상은 그 집안으로 들어가며, 집 내부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거실에 앉아있는 남녀, 그리고 즐겁게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들. 마리는 설마하며 자신의 눈을 비볐다.

"오늘도 평화롭기 그지없네요."


"응. 너무나."

거실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남녀는 바로 피터와 자신이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밀착하며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거실 벽에는 그들이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진들이 걸려있었다. 그리고 그런 피터와 마리에게, 거실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이 달려왔다.


"엄마! 아빠! 오늘은 멀리 놀러가요."


"엄마..? 아빠..?"


아이의 말이 끝나자, 환상이 사라졌다. 마리는 자신이 들은 말에 감동을 받았는지 손이 부르르 떨렸다.

"맞아. 너는 그이와 이어져, 아이들을 만들게 된다. 이 모든 일이 끝났을때, 너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삶을 살게 될거란다."


"가..가정..미래..행복한 삶.."


"네가 면도날을 움직여준다면 이런 미래는 네게 더욱 가까이 오겠지.  그래?"

검은 목소리가 응원하는 듯한 말투로 그녀를 북돋았다. 마리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

"(원하는 걸 가질수만 있다면...)"


마리는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갖기 위해, 면도칼을 쥔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국소 마취제로 마비된 줄리의 어깨를 향해 칼을 다시 가져다댔다.

[사악.]

살이 베어지는 소리와 함께 줄리가 움찔거렸다. 면도날은 그녀의 피부를 베어가며, 어느 문양을 그렸다. 4개의 삼각형에 둘러싸인, 하나의 눈. 악마들의 피부에 새겨진 그 문양.

어깨에 문양을 새긴 면도날은 이리저리 움직이며 줄리의 볼을 향해 다가갔고, 이윽고 줄리의 볼에도 지옥 군세의 문양이 커다랗게 새겨졌다.


줄리의 붉은 피가 면도날을 타고 마리의 손과 팔꿈치로 흘렀다. 줄줄 흐르는 피들은 줄리가 누워있는 침대와 시트로 스며들더니, 곧이어 끼익끼익하는 기이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

줄리는 자신의 볼과 팔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고통과, 끼익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며 주위를 살폈다.

"마, 마리?"


피가 잔뜩 묻은 면도칼과, 주사기를 들고 있는 마리. 그녀의 눈은 정신이 나간것처럼 멍한 눈이었다. 그녀의 입가에서 침이 주륵 흘렀다.


"어, 어?!"

줄리는 자신의 볼과 어깨에서 흐르는 피를 보며 기겁했다. 그녀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술이 확 깨며 침대를 박차고 일어서려 했으나, 침대 시트가 괴물의 입처럼 갈라지며 그녀를 물어뜯었다. 피와 장기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게에에엑.."


줄리가 피를 토하며, 단말마를 내뱉었다. 침대 시트 사이사이에서 튀어나온 보라색 촉수들은 줄리의 신체를 강하게 붙잡고, 침대 시트 속으로 점점 잡아당겼다. 마침내 침대 시트는 자신의 거대한 입을 벌려 줄리를 집어 삼켰다.

땅바닥과 천장에 흩뿌려졌던 피와 장기들은 스르륵 움직이며 침대 시트로 모여들었다. 마지막 한방울의 피까지 침대 시트 내부로 스며들자, 주위는 언제 피가 튀겼냐는 듯 깨끗해져 있었다.


"줄리를.. 어떻게 했어?"

"그녀는 불멸의 승천을 했단다. 자신이 원하지 않았어도. 우리는 그녀를 원했지."

"무슨 뜻-"

침대 시트가 들썩였다. 마리는 갑자기 일어난 움직임에 면도날을 강하게 쥐고는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뭐, 뭐야?"


허연 침대 시트에서, 손이 불쑥 솟아올랐다. 그 손은 자신을 가두는 침대 시트를 손쉽게 찢어버리고는 꾸역꾸역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 줄리..?"

찢어진 침대에서는 완전히 나체인 줄리가 기어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땅바닥에 머리를 쿵 찧었고, 마리는 그것에 몇걸음 더 물러났다.


"오, 두려워하지 마렴. 그녀는 이제 다른 사람이란다. 그녀를 일으켜줘."

검은 목소리의 지시에, 마리가 머뭇거리며 줄리를 일으켜주었다. 그녀를 일으켜주는 동안 마리는 줄리와 눈이 마주쳤는데, 줄리는 심장이 얼어붙을 만큼 차가운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예전에 알던 줄리와는 다른 인간이었다.

"고맙도다. 필멸자여. 내게 새로운 몸을 주었구나."


"?"


"새로운 몸도 나쁘지 않도다. 하후케크, 다음 계획은 무엇인가?"


"(하후케크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거지?)"

"하하하하하. 좋아. 프로세르핀. 새 몸은 마음에 들지?"


검은 목소리가 나체의 줄리를 보며 웃었다. 줄리. 아니, 프로세르핀은 이젠 마리를 쳐다보며 기이한 미소를 지었다.


"필멸자여, 겁먹지 말아라. 너의 친우는 나의 산 제물이 되었나니. 이제는 내가 그 몸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도다."


"프로세르핀. 모레에 전투가 일어날 때까지는 몸을 숨기고 준비해. 아드라말레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


"알았다. 하후케크여. 정확한 미래를 보는 필멸자라니, 나 또한 탐이 나는구나. 허나..."

프로세르핀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의 붉은 눈을 이리저리 굴려댔다.


"보안부 놈들이.. 수색의 손길을 뻗쳐오는건 어떻게 할 셈이지?"

그녀의 말에 검은 목소리, 즉. 하후케크가 낮게 낄낄댔다. 가소롭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우리 *포데스타들에겐 오염도 감지기 정도야 속이거나 고장낼 수 있다는 거, 잊었나? 인간들은 그렇게 똑똑하지 않아."
(*포데스타: 강력한 악마를 통칭. 연방에서는 프라임 데몬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때가 된다면...  앞에 놓인 이 필멸자는 '맹약의 승천자'가 되어 우리를 도울거야."

하후케크는 마리를 빗대며 걱정하지 말라는 말투로 말했다.

.
.
.
.

제스와 테니는 자신의 헬멧을 꾹 눌러 쓰고는 사령관실의 게이트를 노크했다. 곧이어사령관실의 문이 열리며 쿠셴이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모습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수호."

"왔군요. 대원들은 준비해 두었겠죠?"

쿠셴이 테이블에 앉아 턱을 괴고 그들에게 물었다. 제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무전기를 집어들었다.

"좋아요. 지금부터 피터 소위가 속한 제 2로스토크 연대원들을 샅샅이 수색해 배신자를 색출 해내세요. 검사에 반항하는 자들은 강하게 진압해도 좋습니다. 3천명이 넘는 병사들을 하나하나 검사해야하니, 신속하고 정확하게 이행하세요."

"알겠습니다. 대령님."

"수호!"

둘은 대령에게 경례를 건넨 후 사령관실 밖으로 나왔다. 둘은 자신의 장비를 점검한  복도를 걸었다. 그들의 뒤에 검은 안개 연대원 분대장들이 따라붙으며 무기를 장전했다. 제스는 자신의 뒤에 붙은 분대장들을 확인하며 들고 있던 무전기를 입으로 가져갔다.

"전 대원은 들어라. 지금부터 쥐새끼들을 사냥한다. 6명씩 1개 분대로 나뉘어 1 거주지역부터 3 거주지역까지, 3000명에 달하는 병사들을 검사해라. 정신 오염도가 위협 단계를 넘고, 저항한다면 무자비하게 진압하라. 무전 종료. 움직여!"

무전을 끊은 제스는 잠시 멈추고 자신의 뒤에 걸어오던 8명의 분대장을 보고 말했다.


"배신자들에게 자비를 주지마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