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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화 〉[꿈속] (69/131)



〈 69화 〉[꿈속]

흙먼지가 일고, 쓰러진 병사들이 가득한 참호 속에서 피터는 자신의 헬멧을  눌러썼다. 참호 바깥으로 저멀리 펼쳐진 전장에는 뿔이 달리고 혀를 낼름거리는 악마들이 미처 참호 안으로 후퇴하지 못한 병사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도와줘-!"

"아악! 아아아아악! 그만해! 그만해애애..."

죽어가며 유린당하는 병사들이 제각기 고통에 울부짖었다. 피터와 그의 동료들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악마들의 잔혹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몸이 떨렸다. 다들 연방군이니 뭐니, 명예니 뭐니 지금까지 떠들어 댔어도 자신들 앞에 있는 저항할 수 없는 적들에게 짓밟히고 있었다.

"피떡과 핏물! 정복과 학살! 순수함을 더럽혀라! 먹어치워라!!"

악마 무리의 선봉에선, 외뿔이 커다란 악마가 한쪽에는 도끼, 반대쪽은 창으로 아루어진 무기로 덤벼드는 병사를 땅바닥에 꽂아버리고는 참호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어,어,어, 어떡해. 어떡해. 어떡하지?"


"으..으아아아..아아아아."


벌써 참호 내의 상황은 전망이 어두웠다. 겁에 질린 병사 여럿이 정신줄을 놓고 제멋대로 대열을 이탈하거나 벌벌떨며 알아들을 수 없는 헛소리를 내뱉고는 공황 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하지만 연대 지휘관은 정신줄을 놓고 헛소리를 하는 병사를 걷어차 벽으로 밀쳐버리고는 가슴팍에 권총탄환 3발을 박아버렸다.

"겁먹지 마라! 연방은 지지 않는다! 일제히 사격해라! 놈들이 여기를 넘지 못하게 하라-!"

거대하고 긴 참호의 총 지휘관이자 연대장인 자가 글라디오를 앞으로 겨누며 외쳤다. 병사들은 일제히 자신들의 SK-2 소총 장전 손잡이를 찰캉 잡아당기고는 놈들에게 화력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발사된 총탄들은 악마들의 머리를 비롯 전신을 타격했으나 그들은 병사들의 화력을 씹어버리고는 입가에 웃음을 띈 채 전진하고 있었다. 저들을 저지시키려면 적어도 유탄이나 고화력의 무기가 필요해 보였다. 마침내, 나이트 크롤러 한 마리가 참호에 가까이 다가와 참호 벽을 우그러뜨리고 내부로 진입했다.

"놈들이 들어왔다! 놈들이 들어왔어!!"


누군가가 다급하게 외쳤고, 글라디오를 뽑아든 병사 3명이 나이트 크롤러에게 달려들었다. 처음으로 달려든 병사는 도끼에 깔끔히 베여나가며 세로로 이등분 되었고, 다음 병사는 나이트 크롤러가 머리를 쥐어 으깨버렸다. 마지막으로 남은 병사는 글라디오를 휘둘러 나이트 크롤러의 가슴팍을 살짝 베었지만 이어지는 놈의 공격에 배가 찢겨져 나가며 순식간에 절명했다.

"크흐흐하하하하하하-!"


죽은 시신들을 짓밟은 악마는 도끼를 뒤로 빼더니 일렬로 서 있는 병사들에게 휘익 던졌다. 도끼는 매섭게 병사들에게로 날아가며 그들의 상반신을 하체에서 자유롭게 해주었다.


"젠장, 애들아! 서로의 옆을  살피고 놈들에게 계속해서 사격해! 조금이라도 다가오게 해서는 안된다!"

피터는 동료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글라디오를 뽑아 들었다. 그의 검집에서 쉬잉하는 금속의 마찰음이 울렸다. 그 소리에 악마는 그를 노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아. 네가 그 놈이렷다."

"뭐라고?"


악마는 입가에 계속 미소를 띈 채 천천히 걸어왔다. 놈이 바닥에 쓰러져 죽은 병사의 시신을 꾸욱 밟자, 내장이 뭉개지며 병사의 입에서 꿀럭꿀럭 흘러나왔다.


"그리고 지금 이건... 네가 보는 새로운 미래로구나."

"?"

"나는  수 있다. 너는 우리와 가까워질 수 있다. 온 은하계를 불태우고 우리의 발 아래 둘 수 있다..."

"넌 누구냐? 원하는게 뭐야...!?"


피터는 글라디오를  손에 힘을 주었다.


"흐흐흐흐..."


악마는 도끼를 휘릭 돌려 땅에 쾅 꽂았다.


"나는.. 지옥 군세 돌격대의 수장이자, 짓밟는 자... 아드라말렉이니라."

아드라말렉은 그렇게 말하며 피묻은 손으로 피터의 손목을 붙잡았다. 피터는 손목에 아득한 고통이 느껴지며 신음을 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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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어억-!"


피터는 눈을 번쩍 뜨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몸에는 식은땀이 잔뜩 맺혀 있었다. 그가 누워 있었던 침대는 마치 물을 뿌려놓은 듯이 흥건하게 젖어 축축했다. 피터는 방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이른 저녁을 먹고 잠든  2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이었다.

"헉..허억.. 대체 뭔 꿈이냐고."

피터는 숨을 고르면서 손목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그는 한숨을 휴우 쉬고는 잠도 깼으니 뭐라도 마셔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어..?"


그는 분명히 땀을 닦았지만 이마는 아직 끈적했다. 그는 손가락을 이마에 대고는 끈적한 액체의 정체를 살폈다. 손가락에 묻은 액체는 약간 끈적해 땀은 아닌 것 같았다.

"불을  켜서 어둡잖아."

피터는 침대에서 스르륵 나와 창가로 다가갔다. 저멀리 인공 위성의 불빛이 반짝거리며 우주의 어둠을 밝혀주고 있었기에, 그는 불을 키지 않고도 창가에서 액체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피?"

두근두근.

그의 심장이 뛰었다. 피터는 곧바로 화장실의 불을 키고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에 묻어있는 피를 똑똑히 보았다. 그가 고개를 들자, 거울에 비친 그의 이마와 손목에는 피가 흥건히 묻어 있었다.


"이, 이게 뭐야! 피가, 나한테서 난 건가?!"

그는 손에 물을 적셔 이마를 짚고 피를 씻어냄과 동시에 상처가 있는지를 살폈다. 그러나 상처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손목도 마찬가지였다. 그 어디에서도 베이거나 찢기는, 피가 날만한 상처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피를 완전히 씻어낸 피터는 자신의 손목에 강하게 남아있는 손자국을 보았다. 사람보다는 훨씬 큰 무언가가 자신의 손목을 붙잡은 흔적. 잠시 생각한 피터는 오한이 들며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서..설마.. 꿈이 아니라... 진짜였어...?"


피터는 자신이 보았던 예지의 악마가 말한 것을 떠올렸다.

"새로운 미래 예지라고? 대체 언제 일어날 일이지? 아냐, 이렇게 있을 시간이 아니야!"


서둘러 군복으로 갈아입은 피터는 결심한 표정으로 자신의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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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문을 똑똑똑, 규칙적으로 3번 노크하는 소리가 제렌의 귀에 들렸다. 그는 마시던 홍차를 내려놓고 가만히 말했다.

"들어오게. 헤르테츠."


게이트가 스르르릉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거기에는 헤르테츠가 당황하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제렌은 헤르테츠가 말없이 당황한 모습에 슬쩍 뒤돌았다.

"무슨 일인데 그런가?"


"저, 대령님. 피터 소위가 미래 예지를 보았다고 합니다만..."

"뭐라고? 그럴 수도 있겠지. 소위는 짧은 예지 능력이 있으니까."


제렌은  것 아니라는듯이 픽 웃고 다시 홍찻잔을 집어들었다.


"그게 아니라, 언제 일어날 지 모르는 미래의 일을 봤다고 합니다."


"?!"

"지, 지금 소위님이 대령님과 대화하기를 원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대령은 다시 홍찻잔을 내려놓고 크게 말했다.

"들여보내!"


대령이 말을 끝마치자마자 피터가 헤르테츠를 젖히고 달려들어왔다. 그는 먼저 자신의 손목에 남겨진 거대한 손자국을 대령에게 보여주었다. 대령은 그의 손목과 얼굴을 번갈아보며 미심쩍은 눈치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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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것입니다. 대령님."

"사실이야?"

"네, 거짓 하나 없이 사실입니다. 믿어주십쇼."


"..."

"대령님, 어떻게 하실겁니까?"

"쿠, 쿠셴. 쿠셴에게 통신 걸어서 소위의 휴가가 끝나면 무슨 작전에 투입되려 했는지 물어봐. 나는 소위와 더욱 대화를 나눠봐야겠다."


제렌은 그렇게 말하며 떨리는 손가락으로 홍찻잔을 집어 힘겹게 한모금 마셨다. 헤르테츠는 그에게 경례를 건네고는 방밖으로 달려나갔다.


"제렌 대령님.  말은 진실입니다. 고작 꿈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아드라말레크라는 악마가 제 손목을 붙잡았단 말입니다!"


피터는 다시금 그의 손목을 보여주었다. 그의 손목에 남겨진 흔적들도.

제렌은 아드라말레크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손에 핏줄이 섰다. 피터는 잠시 그의 기운에 밀려 움츠라들었다.


"...아드라말레크라고?"

"예."


"잠깐, 잠깐만..."


대령은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걱정하는 표정으로 뒤바뀌었다. 그는 약간 떨고 있는 것도 같았다.


"왜 그러십니까?"

"자네, 검은 수염 작전에서 살아남았지?"


"...예. 그건 왜?"


"그렇다면 보안부 녀석들을 만났겠지. 안 그런가?"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

"쿠셴에게 전해들었으니까. 인류 보안부... 악마들과 싸우는 연방의 어두운 수호자들.
이번에도 아마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할거야. 내가 아는 아드라말레크라면 말이지..."

"네?? 자세히 말해주십시오. 대체 왜요?! 저만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겁니까?"

"아드라말레크, 짓밟는 자. 그 악마놈이 고르페우스 구역을 비롯, 여러 구역을 정복한 주범이지. 보안부는 놈의 뒤를 맹렬하게 쫓고 있고 우리 이능력병단은 그런 보안부를 돕고 있으니까."


"아, 아드라말레크가... 악마들의 정복 전쟁을 일으킨겁니까?"

"정확히 말하면 아니야. 놈은 고르페우스 구역과 할루키, 메니칸 구역을 정복했어. 그외 연방의 수많은 구역들도 지옥 군세의 공격을 받고 있지만 아드라말레크가 이끄는 군단이 가장 활발하다고 볼 수 있지..  전쟁을 놈이 시작한건 아니겠지만, 가장 열렬히 움직이는 놈이라고 생각된다."


"그럼, 놈이 정복한 구역은 무슨 일이 일어난거죠?!  그걸 알아야겠어요!"


피터는 고향의 행성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의 소중하고 소중한, 돌아갈 의미가 있는 가족들도.


하지만 제렌은 피터의 기대를 저버리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할루키와 메니칸은 연방군이 완전히 밀려나 악마들의 공간이 되어버렸어. 고르페우스는 매우 소수의 연방군만이 살아남아 교전을 이어가고 있지만 오래 버틸수는 없을거야. 그런 상황이니 엄청난 인명피해가 지금도 생겨나고 있겠지."


"이..이런.. 씨브랄.."


망연자실한 피터는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쥐었다. 제렌은 그런 그를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대령님!"

"헤르테츠."


"쿠셴 대령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소위와 소위가 이끄는 소대원들은, 휴가가 종료되는 즉시 제 2 로스토크 연방 육군 보병 연대에 편입되어 고르페우스 지역으로 급파될거라 합니다."

"...들었나. 소위?"


"..."

"겁 먹었나?"


"...누가 뭐래도 전 갈 겁니다."

"좋아. 그렇다면. 테스트를 열심히 거치도록. 아드라말레크를 붙잡을 생각이라면 더욱!."

피터는 고개를 끄덕거린 후 제렌에게 경례했다. 그는 제렌의 방을 뚜벅뚜벅 결심이 담긴 발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헤르테츠는 잠시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제렌에게 물었다.


"정말 전장에 내보낼 생각입니까? 나중에 엄청난 중요성을 갖게될지도 모르는 사람인데요?"


"예지 능력자가 본 미래는 바뀌지 않아. 예언은 바뀌나, 예지는 바뀌지 않는다네. 게다가 소위는 한가지의 미래만을 보았어. 아드라말레크를 만나는 것!"


"...짧은 미래만을 볼 수 있었던 양반이, 어째서 더 먼 미래를 보게된 걸까요."


"뭐,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편안한 꿈속이라면... 더 멀리 나아가 볼 수 있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겠지. 헤르테츠, 이제 자네도 가서 쉬게. 난 보안부에 연락을 해야겠으니까."

"보안부 말입니까?"


"그래. 자네 말대로 저런 중요한 인재를 전장에 보내려면, 그 친구들 도움은 있어야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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