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에리의 보물]
에리는 거주 구역의 복도를 걸어, 피터가 생활하는 방의 문을 두들겼다. 곧이어 방에서 코리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뉘쇼~ 우리는 엄~청 위험한 작전을 마치고 와서 다들 한잔씩 걸치는 중인데. 꼭 열어야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나야. 에리."
"뭐? 네가 여길 왜 와? 피터 아직 안 왔다."
코리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다시 문에서 멀어졌다.
"야, 멍청아. 피터를 데리고 왔으니 문을 열란 소리잖아."
"아 그래? 알았엉."
코리가 게이트 패널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자, 그들의 앞에는 피터를 업은 에리가 서 있었다. 코리는 빨리 피터를 침대에 눕히고 나가라 말했으나, 칼리브레는 잠시 기다리라며 그들을 멈추었다.
"빨리 눕혀놓고 나가. 지금 '남자'들의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까."
"남자들의 시간이라니. 딱히 그런건 아닌데."
팔런은 코리의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하겐이 소소하게 웃었다.
"잠깐."
"?"
에리와 코리가 의아한 표정을 띄우며 칼리브레를 바라 보았다. 칼리브레는 기계 의수를 까딱거리며 에리에게 가라는 듯한 제스쳐를 취했다.
"피터를 네 방으로 데리고 가. 너희 아직 화해도 못 했잖아? 피터한테는 피터 침대에 코리가 잔뜩 토해놨었다고 할테니까, 괜찮아."
"..."
"빨리 가래두."
"...그래도 괜찮을까?"
착잡한 표정으로 자신의 등에 업힌 피터를 쳐다본 에리가 이번에는 칼리브레를 보고 물었다. 칼리브레는 한마디를 하고 뒤돌아 다시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피터도 그렇게 화냈던 이유가 있었을거야."
"엥. 그러면 이 녀석 돌려보내?"
"그래."
코리가 게이트 패널을 조작하며 문을 서서히 닫았다.
"알아서 잘 해봐."
이윽고 문이 완전히 닫히고 에리만이 피터를 업은 채 거주 구역의 복도에 서 있었다. 에리는 잠시 고민했지만, 마음을 먹고 자신의 방이 있는 거주 구역으로 향했다. 그녀는 또 다시 기나긴 거주 구역의 복도를 걸으며 복도 창문에 길게 드리워져 있는 우주를 쳐다보았다. 정말로 어둡지만, 별이 반짝이는게 아름다운 우주였다.
마치 피터와 처음 본 그 날의 우주처럼.
에리는 왜인지 그때를 생각하니 미소가 났다.
.
.
.
.
"야, 아무리 화해해야된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역정을 냈는데 에리랑 꼭 붙여둬야겠어?"
맥주병을 그대로 들고 마시던 코리가 걱정스런 눈치로 칼리브레를 보았다. 하지만 칼리브레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기계 의수로 술잔을 집어 하겐과 건배했다.
"당연 괜찮지."
"왜?"
코리가 계속해서 알아채지 못하자 답답하단 얼굴로 그를 본 하겐이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생각해 봐. 너도 그때 우리 옆에 있었으니까. 드웬에 몸에 촉수가 휘감는걸 봤잖아?"
"...그랬지."
"피터는 흥분해서 못봤던 것 같은데, 촉수가 녀석의 손에도 닿을락말락 했다고. 그치, 칼? 팔런?"
둘이 고개를 끄덕였다. 코리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게 사실이냐고 물었다.
"그게 사실이야? 나는 그 상황에 너무 당황해서 잘 못봤지.."
"사실이야."
잔을 내려놓은 칼리브레가 기계 의수를 까딱거렸다. 팔런은 그 이야기는 더 듣고 싶지 않은지 창가에 비친 우주로 시선을 돌렸다.
"...만약 에리가 그런 선택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피터도 드웬처럼 끌려가서 죽고 말았겠지. 안 그래?"
칼리브레가 드웬이 죽는 그 순간을 떠올렸다. 드웬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피터에게 까지 뻗치던 보랏빛 촉수들.
"그렇겠지."
하겐이 칼리브레의 말에 응응하며 맞장구쳤다. 코리는 자신이 알지못했던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자 턱에 손을 가져다대고 입을 벌렸다. 꽤나 충격받은 눈치였다.
"그, 그럼.. 에리는 자신의 결정 때문에 피터랑 모든 것이 끝나는 한이 있어도.. 녀석을 살리기로 결정한거냐...?"
"...잘 알아먹네."
"..."
하겐은 시선을 돌리며 둘의 심정이 이해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칼리브레는 다시금 술잔을 입에 가져다댔다.
"둘이 다시 화해할 수 있을까..?"
"그건 둘이서 해결할 일이지. 우리는 자리를 만들어준 것 뿐이고."
[똑똑]
"뭐야?"
갑자기 울리는 노크 소리에 코리가 뒤돌아 문을 쳐다보았다. 하겐과 칼리브레도 올 사람이 없는데, 하며 볼을 긁적였다.
"뉘시요~ 지금은 술파티 중인데.. 엥?"
코리가 문을 열어보니 마리가 생활복을 입고 쭈뼛거리며 서 있었다. 코리는 몸을 약간 베베 꼬는 그녀를 보며 왜 왔냐고 물었다.
"마리잖아. 왜 왔어?"
"피, 피터 준위님 만나러 왔는데."
"으. 너 왜 피터한테 존댓말하냐. 부담스럽게."
"내 맘이야! 아무튼.. 있어?"
"아, 잠깐만! 진짜 잠깐이면 되거든? 기다려 봐?"
코리는 방의 게이트를 닫고 칼리브레엑 달려가 어떡하냐고, 밖의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칼리브레! 어떡하지? 마리가 왔는데? 피터는 에리랑 같이 에리방에 있.."
"야..! 조용히해. 밖에 다 들리겠어. 마리가 찾아온 걸 보면, 피터가 축제 때 잘 말하지 못한 것 같네. 아니면 이렇게 찾아올 일이 없으니까."
"그, 그런가?
"그냥 피터는 술 취해서 안 일어난다고 하고, 돌려보내..!"
"알았어."
코리가 다시 방문으로 다가가 패널을 조작해 문을 열었다.
"미안, 마리. 피터씨께서는 지금 술 취해서 안 일어나- 없네?"
"뭐라고?"
하겐이 깜짝 놀라며 일어섰다. 그의 눈에도 문 밖에는 아무도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설마.."
칼리브레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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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는 자신이 생활하는 방의 게이트 패널을 조작했다. 문을 노크한다거나, 열어달라는 말은 없었다. 그녀와 같이 방을 썼던 세 동료들은 모두 검은 수염 작전으로 희생당했으니. 그녀는 피터가 없었다면 혼자서 방에 드러누워 창가의 어두운 우주를 봤어야하는 처지에 놓였을 것이다.
"읏차차."
에리는 피터의 방탄복과 헬멧을 벗겨 침대 주위에 내려두고, 그를 자신의 침대에 눕힌 뒤 이마에 맺힌 땀을 쓱 닦았다. 그녀는 자신이 걸치고 있던 방탄복을 벗어 관물대 옆에 걸어놓고, 헬멧은 관물대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소총은 그녀가 피터를 찾기 전에 관물대 속에 거치해 두었기에, 따로 정리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가 관물대를 닫자, 관물대 손잡이 부분에는 P&E 표시가 그려져 있었다.
간단히 장비를 해제한 그녀는 금발의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방 안의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거울을 보며 긁히고 피가난 상처들을 물로 씻어 깨끗히 만들고는 밖으로 나와 테이블에 앉았다.
테이블 위는 소독약 몇통과 간단한 거즈들이 올려져 있었기에, 에리는 거즈에 소독약을 묻혀 자신의 상처를 문질렀다. 알싸한 소독향이 퍼지며 그녀의 코끝을 싸하게 만들었다.
"휴. 뭐.. 할 건 다 끝났네."
에리는 곤히 자고 있는 피터를 살짝 돌아본 뒤 미소를 짓고는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엎어졌다. 그녀도 꽤나 피곤했지만, 몇 시간 전까지 같이 대화하며 떠들던 동료들의 침대를 쓸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아서였다. 그렇다고 피터가 누운 자신의 침대에 들어가는 건, 피터를 깨울 것만 같아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에리."
"?!"
에리는 자신을 부르는 말에 깜짝 놀라며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곧 피터가 자신을 부르고,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에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ㅇ, 왜?"
"잘 곳 없으면 이리 들어와서 자."
"좁..을텐데?"
"사양하지 말고. 네 침대잖아?"
"..."
에리는 얼굴을 붉히며 피터가 누워있는 자신의 침대로 슬며시 들어갔다. 그녀가 침대로 들어오자, 피터는 옆으로 슥 비켜주며 그녀가 누울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에리는 이제 피터와 함께 침대에 단 둘이 누워있게 되었다. 둘간의 잠시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
"..."
먼저 입을 연 것은 피터였다. 그는 침대에서 뻔히 보이는 관물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관물대에 그려진 P&E가 뭐냐고 물었다.
"저 글귀, 무슨 뜻이야?"
"어.. 그러니까.."
에리가 또 다시 얼굴을 붉혔다. 자신 입으로 말하기는 조금 부끄러웠다.
"피터랑 에리?"
피터는 글귀의 뜻을 대강 파악하고는 그게 맞냐고 물었다. 에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했다.
"하하.."
"하, 하하.."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너무나 어색했다. 원래 서로 이러지 않았는데, 라며 둘다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피터는 에리의 당돌함이 그리웠고, 에리는 피터의 어리숙함이 그리웠다.
"에리."
"응?"
"나는.."
피터가 말끝을 흐렸다. 에리는 그의 말을 듣기 위해 몸을 더욱 밀착하며 귀를 기울였다.
"나는.. 너의 무엇이냐..?"
"..."
"너의 진심을 이야기 해줘. 부탁이야."
"...너는.."
피터와 에리 모두 조용해졌다. 에리는 다음 할 말이 입에 고여있었지만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침내 그녀는 눈을 꼭 감고 떨리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너는 나의 보물.. 보물이야.."
"...그러냐."
피터는 아련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마치 그가 격노해 그녀를 즉결 처분했던 일을 미안해하는 것처럼. 실제로도 피터는 자신이 그녀에게 한 짓에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피터."
이번에는 에리가 피터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할 말이 있어보이는 것 같았다. 피터는 그녀에게 눈길을 돌려 시선을 맞추었다.
"왜?"
"저기.. 미안해."
"...뭐가."
에리는 피터의 가슴팍에 손을 올려 그를 껴안았다.
"드웬을... 내손으로.. 했던거."
"하아."
피터는 에리가 드웬의 손목을 잘라버렸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자신이 본 미래는 드웬을 구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본다면 에리나 다른 동료들은 그것을 알 수 없었음이 분명했다.
"에리."
"응..?"
"다시는 나를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해줘. 그때는 정신없고, 흥분해서 말을 못했지만.. 난 드웬을 구하는 예지를 봤어."
"...!"
"그러니까, 이제는 나를 믿어줘."
"..."
그녀는 말이 없었다. 피터의 예지는, 지금까지 언제나 들어맞았었다. 그런 그의 예지를 무시하고, 자신이 결단을 내려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에리는 피터에게 미안한 감정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미안..미안해.. 미안..내가..무슨 짓을.."
"이제는.. 그러지 않으면 돼. 내 말 알겠지?"
"응. 다시는,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네 말을 믿을게..."
에리는 눈물을 흘리며 피터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피터는 에리의 머릿결을 만지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피터는 그녀의 찰랑거리는 금발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이 여자는 나를 너무나 아끼는구나. 나를 살리기 위해, 나를 구하기 위해, 다른 이들을 포기할 정도로. 피터는 그녀의 행동이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자신에게 쏟는 사랑이 이상하게 어긋나지 않기를 바랬다.
문득 그녀를 쓰다듬던 피터는 에리가 자신을 올려다 보고 있음을 깨닫고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녀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이만큼,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는 피터에게 없었다. 피터는 왜인지 그녀의 사랑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에리는 조용히 눈을 감고 그에게 점점 다가왔다. 피터도 그녀가 밀착하며 다가오는 것을 허용하고는 눈을 감았다. 마침내 에리의 따듯한 숨결이 피터의 턱에 닿자 피터는 몸의 떨림을 느꼈다.
[똑똑]
"?"
"??"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에리와 피터는 동시에 방문을 쳐다보았다. 계속해서 노크가 이어졌다.
[똑똑]
"...내가 가볼게."
"다,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면 어떡해?"
"우리는 원래 그런 사이잖아."
"아.."
피터는 에리를 부드럽게 젖히고 침대에서 걸어나왔다. 에리는 아쉽다는 듯이 약한 탄식을 뱉었다.
피터는 새로 생긴 왼팔의 손가락들을 움직여 손을 푼 뒤, 게이트 패널을 조작해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린 곳에는 마리가 싱긋 웃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준위님."
"어? 마리?"
"네. 헤헤."
"왜 왔어? 아니, 그보다도 내가 여기에 있는건 어떻게-"
"지금 바빠요?"
"...잠시 생각좀 하고."
피터는 고개를 돌려 침대에 살짝 숨어있는 에리와 눈을 마주쳤다. 에리는 손을 X자로 교차하며 돌려보내달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안돼. 여기는 지금 나랑, 어.. 대충 알지?"
"아아~.."
마리의 눈빛이 잠시 회색빛에 물들었다가 생기를 되찾았다.
"죄송해요. 그럼 나중에 다시 봬요?"
"그래. 그리고 나 이제 준위가 아니라 소위야. 진급했다고."
"...잘됐네요."
마리는 뒤돌아서 천천히 복도를 걸어갔다. 피터는 그 모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패널을 조작해 문을 닫았다.
"왜 왔대?"
문이 닫히자 에리가 침대에서 나와 테이블에 앉았다.
"..몰라. 안 알려주더라고."
"에.. 그럼. 다시 시작하는거지?"
에리는 아까 전의 분위기와 상황이 아쉬웠는지 피터에게 살짝 물었다.
"에리, 그런건 분위기대로 하는 거라고. 잘 봐."
피터가 방에 놓인 조그만 소형 냉장고에 다가갔다. 그는 냉장고를 뒤적거리더니 찐한 위스키 한 병을 찾아냈다.
"술이, 곧 분위기겠지. 한잔 할래?"
"...나 술 약한데."
"그럼 내가 조금 알려줄 수 있겠네."
"너 내가 데리러 가기 전까지만 해도 잔뜩 취했잖아. 더 마셔도 되겠어?"
"하하하.."
에리의 걱정에 피터가 작게 웃었다. 그는 테이블에 놓인 컵에 위스키를 따라 에리의 앞으로 건네주었다.
"너 때문에 술이 다 깼으니, 더 마셔도 괜찮겠지. 여기."
술을 건네받은 에리가 머뭇거렸다. 피터가 괜찮을거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에리는 위스키를 쭈욱 삼켰다. 술이 들어간지 10초도 안 되었건만 그녀의 볼이 발그래하며 붉어졌다.
"으, 핑 돈다아.."
"한 잔 더?"
"줘!"
피터는 뭐 어때하는 심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위스키를 조금 더 따라주며 자신도 한 입 마셨다. 얼마나 마셨을까? 벌써 위스키 병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피터가 처음에 마신 한 잔을 제외하면, 거의 다 에리가 마신 것이었다.
"우엑. 피이터. 좀 덥지 않아?"
에리는 상기된 얼굴로 땀을 조금씩 흘리며 자신의 손으로 부채질했다. 그녀는 많이 더운지, 입고 있던 전투복을 훌렁 벗어 관물대로 휙 던졌다. 그러자 전투복 속의 그녀의 생활복이 피터의 눈에 들어왔다. 훈련소에서부터 에리가 항상 입던 옷. 그 옷이.
"맨날 그 생활복? 다른 옷은 없어?"
"다 세탁시켜서 말리는 중이지, 뭐. 근데 엄~청 덥다."
"덥다고? 그럼 에어컨을 좀.."
피터가 천장에 달린 에어컨을 작동시키기 위해 일어섰다. 그러나 에리의 손이 그의 손목을 붙잡고, 일어서지 못하게했다.
"에리? 덥다며."
"..."
"야. 에어컨 켜줄게."
"아-니야. 이건 그렇게 해서 사라지는 더위가 아-니야."
"너, 너 취했-"
에리가 피터를 덮쳤다. 피터는 에리의 공격 때문에 발을 헛디뎌 침대로 벌러덩 넘어졌다.
.
.
.
.
"왜. 왜지?"
마리가 거주 구역의 차가운 복도에서 손톱을 깨물고 있었다. 그녀는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벤치에 앉더니, 착잡한 얼굴로 계속해서 손톱을 깨물었다.
"아닌데..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 사람은 나랑 어울리는데..?"
마리는 피터를 떠올렸다. 검술이 뛰어난 사람. 언제나 정직한 사람. 언제나 겸손한 그 사람. 강하고, 지도력 있고, 남을 아끼는 마음이 가득한 사람. 자신을 구하러, 시체들의 무리를 뚫고 와준 사람...
"그 사람은 내건데.. 아.."
손톱을 빠득빠득 깨물던 그녀는 문득 자신이 앉은 벤치 앞에 핏물이 떨어져 있음을 발견하고는 자신의 손톱을 보았다. 손톱은 그녀가 너무나 물어뜯은 탓인지, 피가 조금씩 흐르고 있었다. 그 순간 손톱의 피가 땅바닥으로 떨어지며 핏물을 톡 하고 두들겼다.
"아, 피터.. 갖고.."
"갖고 싶어?"
핏물이 말했다. 마리는 흔들리는 눈동자를 핏물로 집중시켰다. 그녀의 눈에는 핏물이 말하고 있음이 확실했다. 핏물이 살짝 진동하며, 그녀의 마음속으로 조그맣게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갖고 싶으면.. 네 마음을 열어줘..."
"...마음? 마음을 열라고? 그렇게하면 가질 수 있어?"
"갖게 해줄게. 나와 함께하면."
"..."
핏물이 그녀에게 물어보듯, 다시금 진동했다.
"선택하기 어렵니? 포기해도 좋아. 그럼 너는 영원히 그를 가질 수 없겠지.."
핏물은 그녀를 안타깝다는 목소리로 쯧쯧거렸다.
"....."
"포기 할 거지? 히히."
"...아니."
"그래..!"
핏물이 흥분하며 조용히 목소리를 떨었다.
"갖고 싶어."
"그거야..!!"
마리의 대답에 핏물이 웃는 것처럼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