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꿀같은 휴가 1]
"우리 소대 휴가 얼마나 남았지?"
"음."
창밖으로 날아다니는 수송선들을 보며 코리가 피터에게 물어보았다. 피터는 벽에 달린 달력을 대충 읽다가 큐브를 하나 집어들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들은 이 우주 기지에서의 적응과 오레스 01 행성의 전투로 인해 소대 전체가 9일의 휴가를 받았던 것이었다.
"4일 남았는데."
"4일?!"
"그래, 4일. 뭐 그리 놀라?"
"아니 나는 여기가 너무 편해서... 그럼 우리 벌써 5일이나 쉰거야?!"
"오바하지 마시고."
"오바 아닌데? 너도 솔직히 훈련소나 참호에 비하면 이곳은 천국이라고 생각하잖아?"
"... 그렇긴 하지."
사실이었다. 짧은 훈련병 시절엔 32명이서 한 내무반을 썼고, 참호에서는 잠도 제대로 자기 힘든 날이 많았으니까. 그 시절에 비하면 지금 우주 궤도 기지 보병 거주 구역의 생활은 초호화 호텔에서의 생활이나 마찬가지였다. 방 1개에 4명씩, 매우 푹신한 2층 침대까지 있었으니까. 거기에 침대 옆에는 작동되는 고급 소형 냉장고까지 놓여져 있어 음료같은 것도 잔뜩 마실 수 있었다.
"거봐, 내 말이 맞지?"
코리는 냉장고에서 루트비어 몇 병을 꺼내 침대에서 뒤척이던 칼리브레와 하겐에게 건넸다. 하겐은 루이를 잃고 나서 조금 조용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동료들에게 맥주를 건넨 코리는 피터에게도 한병을 건넸으나 피터는 손을 흔들며 거절했다.
"안 마실거면 말구... 그런데 나 아까 겁나 신기한 것들 봤다?"
창가로 돌아와 병채로 맥주를 마셔대던 코리는 문득 아까 전의 일들이 떠올랐는지 피터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코리가 재잘재잘 떠들자 칼리브레나 하겐은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칼리브레는 귀찮은 목소리로 대충 맞장구 쳐 주었다.
"뭔데?"
"오, 칼리브레 진정하라고~ 말해줄 테니까."
"사실 그렇게 궁금하지는 않은데."
"거짓말 하시네. 어쨌든! 아까 맥주 좀 사려고 2광장에 갔었지. 생각보다 상점같은 곳이 많더라고. 뭐, 이런게 중요한게 아니고..."
"뭐가."
"벨라토르들이 있지 뭐냐?"
"벨라토르?"
"그래! 개쩔지? 키가 아주 멀대같이 크더라고. 3m는 되겠던걸!"
"그래서? 그래서 어쨌어?"
하겐이 맥주를 한입 마시고 코리에게 물었다. 코리는 잠시 턱을 매만지더니 자신의 오른손을 들었다.
"이 손으로 그 사람들 갑옷을 만져봤지!"
"진짜?"
"그럼! 만지고 싶다고 해봤는데 흔쾌히 허락해주더라고! 아무튼 그 갑옷을 만졌는데 엄청 단단하더라. 거짓말 안치고 글라디오를 휘두르면 글라디오가 두동강이 나서 부러질 것 같았어."
"오..."
"그리고 또... 그 사람들 총도 만져봤는데 총구 안으로 내 주먹이 다들어가더라. 우리는 그거에 맞은 티스들 본 적 있잖아? 터지고 찢겨나가던거. 만약 인간이 그런걸 맞았다면 맞은 부분이 반으로 잘려나갈 걸."
"총도 만져봤군."
"그래서, 그게 다야? 뭐 벨라토르들을 만나서 그들의 무기나 갑옷을 만져봤다... 이정도 아니야?"
칼리브레가 읽던 책을 착 덮으며 불평했다. 그는 코리가 엄청 떠들어대는 성격인 건 알았지만 그의 말대로 그리 신기한 일은 아니었다. 거대한 우주 궤도 기지에서 벨라토르나 므트마 대원들 같이 특수한 사람들을 만나는 건 흔한 일이었으니.
"이게 다가 아니지. 그리고 마실 거랑 먹을 거 대충 사서 오는데... 3번 통로 기억해?"
"천장이 강화 유리로 된 거기?"
"응. 거기를 지나다니고 있는데 위에서 누가 걸어다녔다고! 무슨 벌레가 벽에 딱 붙어서 걸어다니는 것마냥 발을 척척 붙여대며 유리 위를 걸어다녔어."
"... 그건 조금 신기하네."
"웬일로 코리가 정말 신기한 이야기를 하네."
하겐과 칼리브레는 팔짱을 끼고 코리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피터는 그게 뭔지 알 것 같다며 침대에서 돌아누웠다. 더는 코리의 이야기에 관심없다는 뜻이었다. 코리는 피터의 말에 정체가 뭔지 아냐고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럼 내가 본 게 뭔지 알아?"
"당연하지. 네가 본 건 궤도 기지 해병들이야. 우리가 이 기지에 처음 온 날 기억나냐? 그때 쿠셴 대령님께 들었지. 우리 차폐복보다 훨씬 뛰어난 슈트를 입고 궤도 기지 표면을 걸어다닌다고 하더라."
"그래...? 그리 신기한 것도 아니었구먼."
관심이 없어진 칼리브레가 다시 책을 폈다. 하겐은 졸리다며 눈을 감아버렸다.
"아. 김새네."
코리도 피터에 의해 궁금증이 해소되자 빤히 창밖을 쳐다보며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피터는 침대속에서 큐브를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그가 큐브를 이리저리 돌리며 색깔을 맞춰가고 있는데, 누군가 방의 문을 쿵쿵 두들겼다.
"누구지?"
"훈련이나 출동같은거면 내부의 스피커가 울리는데... 누가 찾아온거냐."
"별거 아니면 난 잔다."
"누가 가 봐!"
코리가 맥주를 내려놓고 말했다. 그러자 피터를 비롯 하겐과 칼리브레가 코리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왜 나를 보냐?"
갑자기 시선이 쏠리자 부끄러워진 코리가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긁적였다. 칼리브레가 으 하는 표정을 지었다.
"으. 징그러운 행동하지말고 가서 문이나 열라는 소리잖냐."
"쳇, 알았다고."
창가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코리가 문으로 다가갔다. 그는 문을 열기 전 투덜투덜 불평을 해댔다.
"에이씨.. 지들은 손이 없어 발이 없어..?"
그가 문을 열자 마리가 그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마리는 그에게 잠깐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피터가 있냐며 물었다. 코리는 옆으로 살짝 비켜나며 침대에 누워 큐브를 맞추던 피터를 보여주었다.
"저기서 애마냥 큐브 맞추고 있는데."
"오! 고마워."
마리가 방 안으로 발을 들이자, 코리가 그녀를 막았다.
"엥?"
"이런이런. 여기부터는 '남자'의 공간이라고. 여자가 들어올 수 없다는 뜻이지."
"어...아하하.. 그래..."
"뭔데 그래?"
마리의 목소리에 기웃기웃하며 피터가 일어섰다. 코리는 피터에게 마리가 왔다며 그를 찾고있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뭐야, 마리잖아. 왜 온거야?"
"그, 준위님! 잠시-?"
"으, 준위님이래 준위님. 킥킥."
칼리브레가 마리의 존댓말이 어색한지 몸을 부르르 떨며 혀를 쭉 내밀었다. 코리는 칼리브레와 맞장구치며 킬킬 웃었다. 피터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쉬고 마리에게 다른 곳가서 얘기하자고 말했다. 마리는 피터에게 고개를 힘차게 끄덕여댔다.
"'준위님' 이랑 열심히 이야기하고 와라~! 으하하하~."
피터가 나가자 코리는 하하 웃으며 문을 닫았다. 칼리브레나 하겐의 웃음소리도 함께 흘러나오자, 마리의 얼굴이 빨갛게 붉어졌다.
마리를 데리고 거주 구역의 복도에 널린 벤치에 걸터앉은 피터는 그녀에게 무슨 일로 찾아왔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는 존댓말을 뒤에 붙이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존댓말은 하지말고. 어차피 난 너희들한테 준위라고 불리는 거 그리 익숙하지 않아서 별로거든."
"으.. 그럼 알겠어요, 아니 알겠어."
"옳지."
"이따가 저녁에 2번 광장에 같이 가주라."
"왜?"
"그, 2번 광장에서 몇시간동안 축제가 열린데. 벨라토르 1개 중대가 이 우주 기지에 배치받은 기념으로!"
"(아까 코리가 본 벨라토르들이 그들이었나보군!)"
피터는 속으로 아하를 외치며 아까 코리가 한 말을 떠올렸다.
"(하긴.. 벨라토르들이 이런 기지에 배치되는 건 축제를 벌일만 한 일들이지.)"
"그래서 가 줄거야?"
"어? 어. 가지 뭐. 우리 휴가 4일이나 남았는데, 할 게 없으니 가야지. 소대 애들도 데리고 갈까 고민이네."
마리는 피터의 말을 듣고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피터에게 자신의 생각을 건넸다.
"저 피터, 동기들과 다 같이 가도 괜찮지만, 거기가서는 나랑 둘이서 다녀줄 수 있어?"
"...엥."
"알겠지? 그럼 이따가 저녁에, 광장에서 보자!"
"어, 야 잠깐만!"
피터가 말릴 새도 없이 마리는 거주 구역의 복도를 달려갔다. 피터는 잠시 얼이 빠져 혼잣말을 내뱉었다.
"참, 몰랐는데 저 녀석도 코리마냥 완전 마이페이스잖아. 지 할 말만 하고 가고. 아무튼... 왜 같이 가달란 거지."
벤치에서 일어나 바지를 툭툭 턴 피터는 자신의 방으로 되돌아갔다. 그가 방에 들어오자마자 코리와 칼리브레, 하겐, 그리고 에리의 시선이 그에게 쏟아졌다. 에리는 이상하게도 칼리브레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있었고, 칼리브레는 그런 에리가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는 책에 집중했다.
"오! 드디어 왔군." 저기 왔다, 왔어!"
코리가 에리의 어깨를 두들기며 피터를 가리켰다.
"저기 왔네. 이제 우리 귀찮게 하지마."
칼리브레는 에리의 손을 툭 쳐서 떼내고는 책에 집중했다.
"피터. 어디갔다 왔어? 아니, 누구랑 있다 왔어?"
"뭐?"
"지금 묻잖아?"
"킥킥.."
에리가 피터에게 따지자, 코리가 뒤에서 킥킥 웃었다. 칼리브레나 하겐도 상황이 웃기는지 간신히 웃음을 참는 표정을 띠었다.
"잠깐 마리랑 이야기를.."
"마리랑?!"
에리의 얼굴이 약간 험악해졌다.
"이야기를?! 무슨 이야긴데?"
"그.. 그 뭐였냐.. 어.."
"뭔데?"
"그..! 그그! 저녁에 있을 축제에 동기들이랑 같이 가고 싶다고.. 해서.. 어... 내가 소대..장이잖아? 그러니까 내 대원 말도 들어야지! 어! 그런거야."
"피터, 저렇게 당황한거 처음 본다."
"사랑하는 사람 놔두고, 다른 사람에게 눈 돌리면 안돼지. 킥킥."
하겐이 킥킥대며 칼리브레와 함께 웃음을 참았다. 피터는 에리에게 차마 마리가 했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흐음.. 정말 그런 얘기만 한거야?"
"당연하지! 음. 어.. 정말."
"알겠어. 그 축제 나도 간다?"
"그래야지! 애초에 모두한테 말할려고 했어..."
"그럼, 나중에 봐."
에리는 자신의 오해가 풀리자 피터에게 슬며시 웃어주고는 방을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마자 피터를 제외한 모두의 웃음보가 빵 터져버렸다.
"하하하하하~!"
"푸흐흐흐흐."
"헤헤헤헤!"
"아, 젠장."
이제서야 사태를 대충 파악한 피터가 탄식을 내뱉었다. 그는 이마에 손바닥을 올리고 한숨을 쉬더니 에리에게 무슨 말을 했냐고 물었다.
"대체 뭔 말을 했길래 에리가 저렇게 화가 난 거야?!"
칼리브레와 하겐은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동시에 코리를 가리켰다. 코리는 눈이 땡그래졌다.
"저 녀석이 에리한테 다 꼰질렀어. 니가 마리랑 '단 둘이' 긴밀한 대화를 하러갔다고."
"뭐?! 내가?! 우쒸, 야! 말 안한다고 약속했잖아!"
코리는 배신감에 억울한 표정을 지었으나 전부 사실이었다.
"코리~! 내가 언제 긴밀한 대화를 나누러 갔냐고!"
그는 코리의 멱살을 잡고 좌우로 흔들었다. 코리는 으엑 소리를 내며 피터의 양손 움직임에 맞게 좌우로 흔들렸다.
"으에에엑. 으엑"
코리를 마구마구 흔들어대던 피터에게 칼리브레가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책을 덮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냐고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 옆의 하겐도 궁금한지 귀를 쫑긋 세웠다.
"그래서, 마리가 뭐라고 하던? 조~금 궁금하네."
"어? 그거.. 뭐 지랑 같이 단 둘이 축제 때 다니자고..."
"뭐? 크크. 장난치지말고."
하겐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픽 웃었다. 칼리브레 또한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여기며 다시 책을 폈다.
"아니 진짠데? 마리가 나 보고 단 둘이서 다니재."
"...?"
"...?"
"이젠 좀 놔주라."
얼이 빠진 둘을 뒤로하고 멱살이 잡혔던 코리가 손가락을 하나 들어올리고 말했다. 피터가 손을 탁 놓자, 코리가 땅바닥에 널부러졌다. 그것에 맞춰 칼리브레도 책을 툭 털어뜨렸다. 피터는 머리를 긁적이며 얼빠진 그들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다.
"왜 그러는데."
"...야 이 멍청아. 그거 고백아니야?"
"누가봐도 고백이다.. 정말 병신 머저리가 아닌 이상 누구라도 알겠다..."
"나는 언제 고백받~나."
하겐과 칼리브레가 돌아가며 한마디씩 할 때, 땅바닥에 널부러진 코리가 힘없이 말했다. 칼리브레는 땅바닥에 널부러져 한탄하던 코리를 잠시 한심하게 바라보곤, 피터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야, 그건 내 생각에 고백이나 마찬가지야.. 그렇게 둘이 같이 다니다가 축제가 끝나면? 끝나면 마리가 너에게 뭐라고 말할 것 같아? 정말 축제가 끝나면 거기서 끝! 하고 거주 구역으로 돌아올 것 같냐?"
"절대 아니지. 암."
하겐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그래?"
피터는 고민하는 표정을 짓고 말을 더듬었다. 칼리브레는 그를 보며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해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제일 중요한 건?"
"마리의 고백을 받으면 그건 바람이야 임마!"
땅바닥에 아직까지 널부러져 있던 코리가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는 칼리브레의 말을 가로챘다. 칼리브레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멍청이의 말이 맞아. 그건... 에리를 배신하는거라고? 너랑 에리는, 어.. 그렇고 그런 사이잖냐?"
"그건 코리만 알고 있었을텐데!"
"헤헤;"
코리가 멋쩍게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이익.. 코리 너!"
"아니야 아니야, 코리가 말 안 해줬어도 다들 짐작은 하고 있었어. 에리가 하도 티를 내니까."
"그렇지."
하겐은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칼리브레."
"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마리가 만약 고백해도 받으면 안된다는거야. 그건 에리를 배신하는 일이고.. 또.."
"또?"
"알잖아. 에리 성격."
"..."
피터는 대답하지 못했다. 에리의 성격이 어떤 녀석인지, 누구를 제일 좋아해 미쳐버릴 것 같은 녀석인지 충분히 잘 알고 있는 것은 바로 그였으니까.
"그러니까 대처 잘해야된다? 마리에게도 상처를 입히지 않으면서 거절하고, 녀석과의 관계도 유지하면서 에리와는 마찰을 없애는거지!"
"그런 방법이 있을까?"
"...나는 몰라. 너 알아서 해야지 뭐."
칼리브레는 어깨를 으쓱하며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칼리브레조차 답을 주지 못하자 피터는 벌써부터 저녁에 있을 일들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축제 때 체쉬 버거나 먹을래."
코리는 저녁에 먹을 음식이나 고민하고 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