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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화 〉[희망 없는 전장속에서도 사랑은 핀다.] (25/131)



〈 25화 〉[희망 없는 전장속에서도 사랑은 핀다.]

"이겼다."


"아, 진짜!  졌잖아. 왜이리 잘하는거야, 얘?"


"그냥 운이 억수로 좋은 것 같은데."


벌써 6번의 원카드 게임에서 6번 전부 연승을 한 에리가 카드를 섞고 있었다. 팔런과 피터는 그녀에게는 강운이 있음을 느끼며 제각각 투덜거렸다.

"한번 더 할까?"


"아니요. 나는 이제 안 할래. 지금 밤이긴한데, 참호로 올라가서 총이나 꼬나쥐고 전장을 바라보는게 더 재밌고 가치있는 일이겠어."


팔런이 바지를 툭툭 털며 일어섰다. 그는 원카드에 계속해서 패배하자 흥미를 잃고 말았다. 팔런이 계단을 통해 참호로 올라가자, 피터도 에리에게서 건네받은 카드를 정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두 갈란다. 솔직히 팔런의 말이 맞는 것 같거든."

"가려고..?"


피터가 계단을 오르려고 출구로 다가가자, 에리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피터는 어정쩡한 자세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그, 있잖아."


"그니까 왜."


"나 붕대 좀 다시 감아줄래."

"뭐?"


"그게... 붕대가  느슨해 진 것 같아서. 네가 좀 풀었다가 다시 튼튼하게 감아줘."

에리가 애원하는 눈빛으로 피터를 쳐다보았다. 피터는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속으로 에리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원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전장에서도 그녀는 피터에게 훈련소에서 그랬듯,  다시 그런 행동들을 할까?

"빨리 감아줘. 부탁해?"

에리가 자신의 가슴팍에 감긴 붕대를 슬슬 풀었다. 그녀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자신의 군복 상의마저 벗어버렸다.


"야, 야! 왜 옷을 벗어?!"

피터가 당황해 얼굴이 빨개진 채로 그녀에게 물었다. 에리는 그녀를 보며 별 거 아니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옷 위로 붕대를 감으니까, 느슨해지는 거겠지. 적어도 맨살에 감아야..."


"아니야! 아니야, 됐어. 그냥 군복만 벗어. 내가 네 내복 위에다가 감아주면 되니까. 맨살까지 갈 필요 없어. 내가  감아줄게."

"그으래.."


에리는 약간 실망했다는 톤으로 피터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녀는 회색의 내복을 입은 채 뒤를 돌아 그에게 등을 보여주었다. 그녀가 뒤로 넘긴 손에는 방금 막 풀은 붕대가 들려져있었다.


"빨리 감아줘. 슬슬 아프니까.."


"으응."


그녀가 건네준 붕대를 잡아 주욱 늘리며 가슴팍과 등을 붕대로 감던 피터는 에리의 가슴팍을 붕대로 너무 세게 감았단 생각이 들었다. 그가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에리가 얕은 신음소리를 냈다.

"아으그윽.."

피터는 무안함과 창피함에 조금씩 빨리 붕대를 감았다. 에리는 붕대에 눌려 갈비뼈와 가슴팍이 아픈지 계속해서 얕게 신음을 내뱉었다.

"으으윽.. 응긋. 아앗.."

"..."


"아아! 그마안... 아파."


"아직 세게 감지도 않았어; 이정도로 엄살 떨지 말라고. 격투 훈련 할 때는 내가 이악물고 휘두른 주먹에 맞아도 미동도  하더니만."

"그건 네가 너무 약해서였다고."


에리가 헤헤 웃으며 고개를 돌려 그와 시선을 맞췄다. 참으로 맑은 에메랄드 색의 눈이 피터의 눈에 비춰졌다. 피터는 그녀가 순간 너무나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터는 자신이 한 생각에 부끄러움이 들어 헛기침을 하면서 시선을 피했다.

"크흠. 큼. 컴. 붕대 조금만 더 감으면 돼."


"그래. 어서 감아줘."


이번에는 붕대를 계속해서 감는데도, 에리는 신음을 내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가 이상한 소리를 내지 않자 피터는 쉽고 빠르게 붕대를 감을 수 있었다.


"거의 다 감았다. 이젠 안 아파?"


"응."

"다행이다. 재생제도 투여 받았고 뼛조각들도 다 제거 했으니 며칠이면 상처가 전부 아물거야. 그렇게 되면 같이 작전에 나갈  있겠지."


"헤, 그거 다행이네. 다행이야..."


에리가 잠시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피터가 그녀의 이상함을 알아채고 조심스레 물어오기 시작했다.

"왜 그래? 갑자기 말을 끊어버리곤."


"피터."

"어?"

"피터."

"왜..."


"피터. 있잖아?"

"응."

"네가 했던 질문 기억나? 생존 훈련 때, 너는 나한테 이렇게 말했었어."

"뭐가."

"왜 내게 다가와 줬냐고. 너는 이 질문을 하고 답을 원하는 것 같았어. 그때는 내가 얼버무리고 말았지만... 나는 이제 네 질문에 대답을 해  만큼 용기가 생긴 것 같아."


"...."


"있잖아. 피터. 있잖아. 피터? 나 네가 너무 좋아. 너에게 다가 온 것도, 수송선에서 네 옆에 앉으려고 매너없게 굴었던 것도, 전부 너와 함께하고 싶어서였어. 내가 가까이 다가가야만 너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어."

"...."

"피터, 너를 너무 좋아해. 너를 너무 사랑해. 내 가슴이 부숴질 정도로 너를 꼭 껴안고 싶어. 너와 수송선을 타고 훈련소를 가는  상황에도 나는 전혀 외롭지 않았어. 너와 함께 우주를  수 있어서 행복했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피터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성격, 외모,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투력까지 피터는 에리보다 잘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고작 검을  다루는 것 빼고는. 격투 때도 그녀에게 졌고, 체력 훈련 때도 그녀보다 먼저 지쳤다. 교육의 이론도 그녀보다 훨씬 늦게 이해했었다. 피터는 지금의 에리가 장난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피터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당황한 얼굴로 있자, 에리가 피터의 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가슴팍에 댔다.


"느껴져? 심장이 뛰는게, 느껴져...? 너를 생각하면 이렇게 뛰어. 한없이 차갑게 뛰던 내 심장은 너를 보는 순간 다시 따듯해지기 시작했어. 나는 네가 없으면 안돼. 피터. 너도 알고 있잖아... 어렴풋이 알고 있잖아..? 네가 수송선에서 잠시 화장실을 갔을 때, 더플백을 뒤져 양말을 훔친 것도 나야. 네가 샤워실에서 열심히 씻고 있을 때 속옷을 훔친 것도 나였어."


"알고... 있었어. 그건 대체  그랬던거야?"


"너를 너무나 사랑해서, 잠시도 떨어지기 싫었어. 잠시라도 떨어지면 너의 물건을 품속에 껴안고 외로움을 버텨냈어.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내 심장이 다시 차갑게 변해 느리게 뛸까 봐. 다시 감정도, 행복도 느끼지 못하는 내가 되어버릴까 봐."

"너, 너는... 너는... 미쳤어."

에리는 피터의 말에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나는 네게 미쳤어. 너라는 정신병에 걸려 미쳐버렸어. 부정하지 않을게."

"그래.. 그럼 하나만 묻자. 그날, 훈련소의 밤에서. 왜 내 침대로 몰래 들어와서 나를 쓰다듬고, 내 귀를 깨물어댔던거야? 대체  그랬던 건데."


"그렇게 해서라도 네가 내게 새로운 감정을 느끼길 바랐어. 새로운 감정에 눈을 뜨면, 내게는 벗어나지 않을 것 같았어. 내가 그러지 않았다면, 너는 다른 곳으로 훨훨 날아가 없어져 버릴 것만 같았어. 너에게 했던 모든 짓을 사과할게. 나는 너를 소유하려고 했어..."


피터는 에리의 말에 잠시 머리가 띵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다리가 풀릴  한 것을 억지로 참고는  자신이 갖고 있는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마지막 질문을 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물어볼게. 마지막으로..."


"응.응."

"정말, 나를 사랑하는거냐? 이 나를? 여자와의 경험도, 아무 것도 없어서 네게 상처를 줄 지도 모르는데. 나를 사랑하는거야?"

그는 에리가 자신을 사랑하더라도, 자신 때문에 고통을 받지 않기를 원했다. 자신같이 서투른 녀석은 에리에게 마음의 짐을 얹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피터의 걱정이 담긴 질문에도, 에리는 그에게 손을 뻗어 볼과 턱을 쓰다듬었다.


"괜찮아. 전부 받아들일거야. 네가 경험이 없는 것은 내게는 축복이야. 너의 모든  경험은 전부 내것이 되는거니까... 감히 물어볼게. 지금  첫 경험을 하나 가져가도, 되겠어?"


"..."

"피터..."

"...그래."


피터가 마지못해 허락했다. 피터는 자신이 여기서 거부하면 에리가 어떤 마음의 상처를 받게  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미치겠다고, 자신을 사랑해서 몸이 뒤틀릴 것 같은  소녀의 마음을 지닌 여자에게, 그처럼 따듯한 이가 어찌 거절할 수 있었을까.

에리는 의자에 앉은  서서히 몸을 돌렸다. 그녀는 피터의 턱과 볼을 만지던 손으로 강하지만 매우 부드럽게 그를 잡아 당겼다. 에리는 먼저 피터의 턱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점점 올라가, 피터의 입술에 살포시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에리는 처음에는 느릿느릿, 부드럽게 그의 입술을 감쌌지만 점점 격정적으로 변하며 그의 입술을 빼앗는 것처럼 입술을 움직였다. 마침내 자신이 원하던, 자신이 사랑하던, 남자를 손에 넣은 것이었다.

"...하."


족히 몇 분은 걸렸을 진한 입맞춤을 마치고 에리가 입술을 떼었다. 길쭉한 침이 그들의 입 사이에서 늘어졌다. 에리는 피터의 붉어진 볼을 보며, 그가 정말로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피터는 모든 것을 가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에리를 보며, 그녀가 정말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맞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침대로.. 갈래?"

에리가 자리에서 슬쩍 일어나 피터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는 천천히 그를 잡아당기며 구석의 침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피터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천천히 끌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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