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전선 유지]
병사들을 가득 실은 수송차량들은 하늘에서 보면 동그란 전초기지를 중심으로 양옆에 쭉 이어진 참호에 도착했다. 참호들의 길이는 어림잡아 몇km는 될 것 같았다. 수송차량에서 내린 병사들에게 전초기지에서 대기하던 이들이 환영해 주었다. 특히, 로스토크 훈련소에서 출발한 훈련병들은 1000명, 약 1개의 대대였기 때문에 임세 대위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임세 대위는 전초 기지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과 잠시 대화를 나누고는 이제는 병사가 된 훈련병들을 참호에 배치시키기 시작했다.
참호는 약 4km당 1개의 구역으로 총 6개의 구역이 있었는데, 1개의 구역 당 약 4만명의 병사가 배치되어 있었다. 피터가 속한 로스토크 1대대는 3구역에 배치되어 부족한 인원수를 매꾸게 됐다.
참호로 이동한 1000명의 대대원들은 거기서 또 2개의 소대씩 나뉘어 구역 내의 소규모 구역을 전담했다. 케일의 소대는 3구역의 20번째 소규모 구역을 맡아 수비하게 되었고, 케일의 소대원들은 서둘러 구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케일은 소대원들을 좁고 먼지가 매캐한 참호 안에서 걷게하기 보다는, 조금이라도 생생한 공기를 마시며 걸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참호 바깥에서 참호를 쭉 따라 걸으며 이동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계속해서 걸어가고 있을 때도 참호 뒤편의 타격포들은 불을 토해내고 있었다. 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운지, 여기서 150m는 떨어져 있음에도 바로 옆에서 들리듯 생생했다.
타격포들이 쉬지 않고 포문을 불태우는 통에, 문득 궁금해진 피터는 선두에서 걷는 케일 중위를 향해 다가가 질문을 던졌다.
"저기, 소대장님. 저 포들은 안 쉬는 겁니까?"
"아, 저거 말이지. 마침 우리가 오기 전에 한바탕 티스 놈들이랑 싸웠다고 하더라고. 일단은 티스 놈들이 물러나서 양쪽 다 큰 피해는 입지 않았지만, 놈들이 자꾸 다가오려 하길래 타격포로 진격을 저지시키는 거라고 하더군."
"그렇군요."
피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뒷편의 타격포들이 일제히 불을 뿜어댔다. 저 멀리 포탄이 지면에 닿아 터지며 폭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피터, 저렇게 포격 지원까지 해주면 전선이 밀릴 것 같지가 않은데. 안 그러냐?"
"나도 그렇게 생각해. 포격 지원은 둘째치고, 이 전선에만 투입된 병사들이 24만명 가량이라는데. 쉽게 밀릴 것 같지 않아."
"그치! 족같은 외계벌레 놈들에게 우리가 질 리 없다고."
피터와 코리의 대화를 들은 케일이 고개를 저으며 그들의 말을 반박했다. 그는 시선을 앞으로 향하고 있었으나, 진지한 표정임은 확실했다.
"자만하지 마라. 이 전선은 이미 한 번 괴멸 수준으로 파괴되었다가 다시 복구시킨거야. 우리가 투입된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지만 언제 뚫려도 이상할게 없다는 소리다. 그리고 이 전선에 24만명이 유지되는 것은 지속적인 증원군 덕분이지, 사람이 죽지 않아서가 아니다. 결국 우리들이 죽으면 다른 이가 자리를 대신하는 것 뿐이야."
케일은 잠시 말을 끊고는 뒷편의 타격포들을 쓱 훑어 보았다. 그가 타격포에서 눈을 뗌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이 타격포들은 다시금 불을 뿜어냈다. 땅의 흙먼지들이 타격포의 진동에 일렁이고 있었다.
"저 타격포들이 계속해서 움직이는 것은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다. 타격포를 전원 동원해야할 만큼 많은 숫자의 티스 군단이 전선 앞에 형성되어 있는 셈이야. 언제든 쳐 들어올 수 있다는 얘기지. 이런. 잡소리가 너무 길었다. 이제 우리의 수비 구역에 도착했으니 다들 안으로 들어가서 자리 잡고 짐 풀어라. 참호 안에도 충분히 쉴 만한 공간이 존재하니까."
"옙!"
케일이 선두로 참호의 게이트를 열었다. 소대장이 참호 속으로 들어가자, 나머지 소대원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참호 안은 생각보다 넓고 안락했다. 천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넓이는 아까 자신들이 타고 왔던 H-100 수송차량이 지나다닐 수 있을만큼의 넓이였다. 참호는 앞쪽과 뒷쪽으로 공간이 나뉘었는데, 앞쪽은 말 그대로 전장이 한 눈에 보여지는 넓은 뷰(view)였다. 단지 풍경을 보기 위해서가 아닌 온갖 무기를 난사하고 이용해야만 하는 곳이었지만. 피터는 참호의 앞쪽에서 전장을 둘러보았다. 병사들의 시체나 망가진 바리케이트, 파괴된 전차나 티스 놈들의 잔해 따위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참호 내에서 피냄새를 풍기자, 피터는 미간을 찌푸렸다.
"으윽. 피 비린내."
"오오! 야! 하겐! 참호 뒷쪽에는 반지하로 내려갈 수 있는 곳도 있네. 여기엔 2인용 침대들도 있잖아?"
코리가 참호 내부에 있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살펴보고는 하겐에게 신나하는ㅁ 말투로 떠들어댔다.
"진짜네. 우리는 이제부터 이 참호 내에서 살다시피 해야되는 건가."
"맞았다. 하겐. 내가 너희들 같은 일병 때, 참호 바로 아래 반지하의 조잡한 2인용 침대에서 총을 부여잡고 밤을 지새웠던 기억이 나는군. 언제 티스 놈들이 쳐들어 올지 몰랐으니까."
케일이 2인용 침대를 보며 옛날 생각 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침대가 어떠셨습니까? 이 간이 침대보다 좋았습니까?"
"음. 아니? 우리는 완전 딱딱한 목재 침대였어. 정말 즉석에서 만들었다고 믿고 싶은 수준의 완성도였지. 허리가 아파서 잠을 제대로 못 자는 날이 일쑤였어. 하지만 피곤함은 그것도 편안하다고 여기게 만들더군. 그리고 우리 때는 참호도 꽤 좁았지. 이렇게 넓은 곳은 상상도 못 했어. 그리고 그때도 이렇게 참호 내에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지."
"옛날 이야기 하시는 겁니까?"
"하하하. 그래. 그런셈이지 뭐."
케일의 그들의 소대원들과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장비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 참호 내의 사이렌이 삐잉 삐잉 울려댔다. 참호 내의 병사들은 자신들의 무장을 챙겨 참호 앞쪽으로 달려가 대기했다. 케일의 소대원들도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SK-2소총을 쥔 채 참호 바깥을 응시했다.
저 멀리서, 타격포에 맞아 파괴된 지형이 일으키는 연기를 뚫고 무엇들인가가 바글바글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가리에서 걸죽한 침을 흘리기도, 발톱을 흔들어대며 땅을 박차기도, 괴성을 지르며 포효하는 티스 군단이었다. 사이렌 소리가 지겨워질 때 쯤, 타격포들의 웅장한 포 소리가 전장에 울려퍼졌다. 타격포의 포탄들은 하늘을 가로질러 티스 군단의 선두에 떨어졌다. 땅이 진동하며 폭발했고, 선두로 달리던 티스 개체들은 폭발에 하늘을 날아 땅에 떨어져 죽거나, 폭발 그 자체로 가루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티스 군단은 진군을 멈추지 않았다.
참호 내에서는 불안함이 감돌았다. 믿었던 타격포는 그다지 효과가 있지 않았다. 피터의 생각도 그랬다. 타격포들이라면 선두에 서 있던 티스들 말고도 뒤의 놈들까지 싸그리 날려버릴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현장 지휘관이자 구역 담당인 어느 대위가 사격 명령을 내리니, 잠시 후 참호 내에서 일제히 SK-2 소총의 탄환이 쏟아져 나왔다. 총탄들은 장대비처럼 티스 군단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역시 선두의 개체들은 잘게잘게 쪼개진 고깃조각이 되어버리거나 온 몸에 바람 구멍이 나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그러나 비처럼 쏟아지는 총탄 속에서도 티스 군단은 진군을 멈추지 않았다.
티스 군단의 선두에 있는 개체와 참호까지 단 100m가 남았을 때, 대위는 글라디오를 뽑아 티스 놈들을 겨누고는 크게 소리쳤다.
"백병전 준비! 곧 놈들이 올 것이다! 놈들이 절대 이 참호를 넘어 전선을 돌파하게 하지 마라! 연방을 위하여!"
"연방을 위하여!"
병사들은 한 손에는 소총을, 한 손에는 글라디오를 뽑아 들었다. 이윽고 티스 놈들이 참호의 철판을 찢어버리며 내부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제각각 티스 놈들에게 총알을 배불리 먹여주거나 글라디오로 베어버려 티스 놈들을 격렬히 환영했다. 케일 소대가 있는 소규모 구역에서도 티스 군단이 맟미내 참호의 병사들과 전면 충돌하기 시작했다.
"다들 자리 잡아! 놈들이 들어온다!"
부서진 참호의 철판들 사이로 가증스러운 랩터 몇 마리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피터는 갈라진 틈에서 괴성을 질러대는 랩터들에게 SK-2 소총의 탄창 하나가 빌 정도로 갈겨댔다.
"씨팔! 놈들이 왼쪽에서도 들어온다!"
왼쪽에서 교전하고 있던 다른 소대의 병사가 외쳤다. 그 소리에 하겐은 자신의 유탄 발사기에 유탄을 장전했다. 케일은 하겐과 피터, 코리에게 왼쪽을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3명은 단박에 왼쪽으로 달려갔다.
"으아아악!"
"아아아아아악!!"
"키에에엑--!"
"이런 씨부랄! 이거나 쳐 먹어라!!"
한 이름모를 병사 위에 올라타 가슴팍을 갈가리 찢어놓은 랩터에게 코리와 피터가 동시에 총을 난사했다. 랩터는 머리와 몸에 구멍이 수십 개는 나 힘없이 털퍽 쓰러졌다.
"더 들어온다! 집중해!"
하겐이 왼쪽의 틈새에서 기어나오는 랩터 떼를 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질렀다. 코리는 아까 전 배급받은 파쇄 수류탄의 핀을 뽑고 안전 손잡이를 제거했다. 그는 2초간 들고 있다가 틈새 사이로 정확히 던져넣었다. 틈새 사이의 구멍에서 잠깐 섬광이 일더니, 랩터의 시체들이 굴러 떨어졌다. 파쇄 수류탄이 완전히 틈새의 랩터들을 섬멸한 것이었다.
"잘했어, 코리!"
"이쯤이야!"
피터는 왼쪽의 틈새에서 티스들이 기어나오는 것이 일단락 되자, 소대로 돌아가자고 하겐과 코리에게 의견을 건넸다. 하겐은 다른 곳에서 병사들이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보고는 그들에게 맡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 빨리 돌아가자고!"
그들이 소대가 있는 소규모 20구역으로 복귀했을 때, 상황은 처음보다 더 심각해져 있었다. 같은 훈련병 동기이자 소대원이었던 자들이 몇 명은 시체가 되어 누워있고, 몇 명은 커다란 부상을 입은 채 참호의 의무병들에게 간호를 받고 있었다. 구역으로 복귀한 3명을 보고 케일은 그쪽은 어찌저찌 막았냐고 물어보았다.
"왼쪽, 아니, 소규모 19구역은 괜찮나? 어떻게든 막아냈어?"
케일의 말에 하겐이 코리를 가리켰다.
"이 녀석이 파쇄 수류탄으로 한 건 했습니다. 그 틈새에 가득 차 있던 랩터놈들을 분쇄해 버렸다구요."
"좋아! 잘했군. 그러나 이쪽은 꽤 큰 피해를 입었다. 메신, 소거스, 줄츠가 당했다. 스피터 두 놈을 상대하다가 그만.. 재생제로도 답이 없을 정도의 공격을 받아버렸어."
"이런 제기랄..."
"이뿐만이 아니다. 지금은 재생제 투여를 받고 어떻게든 의무관들이 치료하고 있지만, 목숨이 위태로운 소대원이 2명이야. 당장은 티스 놈들이 물러갔기에 그들은 안정적으로 치료 받을 수 있지만.. 중상은 중상이다."
"티스가 물러났습니까?"
"그래. 타격포가 이 소규모 무리를 이끌던 스웜가드의 머리통을 날려버렸거든. 덕분에 랩터와 스피터 잔당 무리는 생각보다 쉽게 토벌되었다. 무리를 이끄는 스웜가드가 죽어버리면 티스들의 공격성은 한풀 꺾여버리니까."
"그건 그렇고, 방금 전의 숫자가 소규모 무리라고요? 그렇게 바글바글 했는데?"
"그래. 지금 공병단이 전선 전체를 돌아다니면서 참호를 수리하고 물자를 배급하고 있는데, 무리의 규모나 숫자를 대강 파악하는 것도 녀석들 일이거든. 공병단은 방금 전의 무리가 30만 마리의 소규모 무리라고 판단했다."
"우리는 교전 시작 후 1시간도 안돼서 30만 마리를 죽인 겁니까?"
"정확히는 아니지. 절반 가까이 살아서 놈들의 군락으로 복귀했으니까. 이 행성의 티스를 지휘하는 개체가 누군지는 몰라도, 고작 20만마리 정도는 적의 전선에 꼴아박아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고작 20만마리라구요?"
하겐과 케일의 대화 내용을 듣고 발끈한 코리가 그에게 재확인하기 위해 물었다. 케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20만마리가 맞다고 확인시켜 주었다.
"그래. '고작' 20만마리. 연방의 정보에 따르면 이 행성의 티스 개체는 1조에 가까울 거라고 하더군. 보유하고 있는 숫자가 1조지, 티스는 여기서 더 찍어낼 수 있는 놈들이야."
"이런 시발... 이거 이길 수는 있는 전쟁입니까?"
"우리 정도면 나쁘지 않은 전선이야. 오레스 01 행성에는 전선이 수백 수천 곳 있다. 그중에서는 이미 파괴되고 짓밟혀 티스의 거처가 되버린 곳들도 있어. 지금 이 행성을 되찾기 위해 교전하고 있는 연방 육군의 숫자만 해도 억을 넘을거다."
"그럼, 저희는 여기서 끝까지 버티는게 목적입니까? 언제 죽을지 모르고?"
"사실상 그렇지. 하지만 연방군은 점점 놈들의 숨통을 조이고 있어. 언젠가는 이 행성에서 티스를 몰아낼 기회가 올 거다. 물론 이 행성의 티스를 전부 몰아낸다고 해도, 어차피 우주에도 놈들이 사방에 있으니 전쟁은 누구 한 쪽이 죽어야지만 끝나겠지."
"젠장. 젠장. 젠장!! 터무니 없는 전장에 끌려 와 버렸잖아."
피터가 분노해 발을 굴렀다. 그것은 어찌보면 부모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은 마음에서 나온 분노였다. 피터의 얼굴에 분노가 생기자, 에리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 진정시켰다. 케일은 피터를 보며 속으로 불쌍함을 느꼈다. 제대로 된 훈련 일자도 채우지 못하고 끌려온 남녀들. 그들이 죽기살기로 버텨야 오레스 01 행성의 희망이 생기는 것이었다.
벌써 동료를 4명이나 잃은 케일의 소대원들은 멍하니 연기가 피어오르는 전장을 쳐다 보았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불안감이 서서히 자리잡고 있었다.
"보급입니다!"
그들의 불안한 마음도 모르고, 공병단 소속 공병들이 워크 비들을 끌고 참호 내부를 걸었다. 워크 비들은 거대한 보급품 상자를 들고 있었다.
"받으십시오. 이것도. 이것도요."
공병들이 나눠주는 것들은 전부 전투를 위한 물건들이었다. 탄약, 레이져팩, 유탄, 새로운 글라디오, 수류탄과 같은 것들. 그러나 한 가지 새로운 무기를 배급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로 로쉐 장갑이었다. 격투 훈련 도중 모든 훈련병들이 사용해 본 그 무기. 얇은 건틀릿처럼 생겼지만 굉장히 튼튼한데다가 격투술의 파괴력과 속도를 올려주는 근접 무기.
마침내 공병들이 로쉐 장갑을 케일 소대원들에게 보급하기 시작했고, 로쉐 장갑을 받은 에리는 이가 보일 정도로 씨익 웃었다. 그녀 자신의 특기를 살릴 수 있는 시간이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