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하겐의 일상]
[나는 로스터 하겐. 1중대 4소대의 훈련병이다. 벌써 이곳에 온 지도 한 달이 넘었다.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가장 놀라웠던 점은, 훈련병들이 남녀가 나뉘지 않고 한 내무반에 생활한다는 것이었다. 남녀 16명씩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뉘어 내무반에서 생활하는 것 말이다. 초기엔 다들 서먹서먹하고 말도 나누지 않았지만, 한 녀석, 코리 맥코이라는 녀석 덕분에 내무반에는 활기가 뛰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녀석은 참 좋은 친구인 것 같다.]
"야, 하겐! 뭐해?"
"어어, 코리잖냐. 깜짝 놀래키지 말라고."
"뭐야, 너 일기도 쓰냐? 네 덩치에 안 맞게 꽤나 귀여운 노트를 쓰네."
"그럴수도 있지. 근데 무슨 일이야?"
"아, 오늘 교육 훈련 이후로는 훈련이 없다길래 연병장에서 애들이랑 *사쿼나 할려고 했지. 너도 할래?" (*7000년대의 축구.)
코리의 말에 하겐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오늘 조금 편안히 쉬고 싶었다.
"아니, 나는 오늘 좀 쉬고 싶어서. 우리 모두 근 한 달 동안 쉬지 않고 단련만 해 왔잖아? 이런 기회는 몇 없는 셈이지."
"그래? 알았으!"
하겐의 거절에 코리가 나가려하자 내무반 입구에 서 있는 칼리브레가 크게 소리쳤다.
"야! 코리! 니가 하자고 해놓고 왜 안 나와? 2소대 애들이 지금 기다리고 있다고!"
"지금 나간다! 나가요~! 암튼 하겐, 하고 싶으면 나와!"
"어.응."
코리가 우으며 내무반을 달려나갔다. 하겐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지었다. 역시 코리는 붙임성이 좋은 친구가 확실했다. 그는 다시 일기를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코리의 주위에 있는 피터와 에리도 좋은 친구이다. 두 명 모두 나처럼 검술 상위 5명 안에 드는 사람들이고, 그중에서 피터의 검술은 나나 칼리브레보다도 월등하다. 피터는 대체 어떻게 글라디오를 그리 쉽게 다룬다는 말인가? 에리 또한 대단한 친구이다. 내가 보기엔 그 친구는 격투술의 천재같다. 전장에서 그녀를 적으로 만나 주먹과 칼을 섞게 될 이가 불쌍해질 정도로.]
[그러고보니, 칼리브레도 꽤나 대단한 실력을 갖고 있었다. 녀석은 루이나 루크보다 훨씬 믿음이 가는 친구이다. 위험한 전쟁터에서도 녀석에게 뒤를 맡긴다면 걱정할 것은 없을 것 같다.]
[루이는... 요즘 많이 귀찮게 군다. 고향에 있을 때 칼리브레보다 먼저 만나 친구가 되었던 녀석은 요즘 자꾸만 내게 사사건건 간섭하려고든다. 군복을 제대로도 못 입는다며 옷깃을 매만져 주거나, 머리가 붕 떴다며 자신이 빗겨주겠다고 하거나. 마치 내 엄마 같다. 그래도 녀석의 잔소리와 간섭을 듣다보면, 내 주위가 어느정도 정돈 되어있기에 마냥 귀찮다고만은 할 수 없겠다.]
하겐은 잠시 일기를 쓰다가 볼펜으로 볼을 톡톡 쳤다. 뭘 더 쓸지 고민하고 있었다. 어차피 남이 볼 일기도 아니지만, 심심할 때 이렇게 가득가득, 있었던 일을 적는 것은 꽤나 재밌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치, 이런건 어떠려나."
하겐은 다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사실 이미 일기라기보다는 자신의 생각들을 적어놓은 노트나 마찬가지였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연방군이 이렇게 개방적일 줄은 몰랐다. 아무리 훈련병이고 군인이래지만, 남녀를 한 내무반에서 생활하게 하다니. 조금은 놀라웠다. 만약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 엄마나 아빠는 걱정을 할 지도 모르겠다. 팔팔한 20대 남녀가 한 방에 있는데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냐며. 뭐, 그런 일은 비밀리에 이루어질 수도 있겠지만 우리 내무반에서는 없는 것 같다. 우리는 이 로스토크 훈련소에 왔을 때부터 한 가지 경고를 받았다. 아직도 교관의 말이 기억난다.]
"너희들이 떡을 치든, 애를 낳든 관심은 없다. 하지만 훈련소나 전장에서 애를 갖게된다면 그 출산 될 아기는 '연방군'의 소속이 되니까, 명심하길 바란다."
[화이트 베이비라고 했었나. 군 소속의 아기라니. 너무하지 않은가. 참. 아무튼 그 경고가 제대로 먹혀들어갔는지 20대의 남녀 사이에서도 그렇고 그런 일은 잘 벌어지지 않는 듯 했다.]
"오늘 일기는 여기까지 쓰도록 할까."
하겐은 일기장을 덮으며 기지개를 폈다. 그의 책상 옆에는 관물대와 침대가 놓여져 있었다. 그는 슬그머니 침대에 눈이 돌아갔고, 이어서 내무반의 침대를 싹 둘러보기 시작했다. 몇몇 동기들이 혼자서, 아니면 지들끼리 모여서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오랜만의 휴식을 누리는 동기나, 여성 동기들끼리 모여 자신들의 군복에 달 연방군 마크를 뜨개질하고 있거나, 아니면 사이가 좋은 남녀 훈련병 커플이 볼에 홍조를 띄우며 수군대고 있거나 그런 것 말이다.
동기 중 몇 명은 하겐과 눈이 마주치자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거나 무슨 일인지 궁금해 고개를 갸우뚱 하는 녀석도 있었다. 하겐은 멋쩍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맞장구를 치곤 자신의 관물대 정리를 시작했다.
"으휴, 먼지가 쌓였네."
관물대 탄약이 없는 채로 꼽혀있는 SK-2 자동소총을 옆으로 치운 하겐은 쓰지 않았던 전투복을 꺼내 후후 불엇다. 먼지가 그의 바람에 날려 땅에 떨어졌다. 관물대에 웬 소총이 있나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연방군의 보병들에게는 소총이 영구적인 소유물로 지급된다. 단, 내무반에는 탄약을 소지한 채 들어갈 수 없을 뿐이다. 탄약은 훈련 전이나 비상 상황 발생 시 복도에서 뽈뽈뽈 날아다니는 워크 비들에게 지급받는다. 행여나 탄약을 숨겨 동기에게 총기 난사를 벌일 수 있을 확률이 있기에, 모든 훈련병들은 훈련이 종료되고 나면 워크 비들에게 강력한 몸 수색을 받아야만 한다.
"이거, 한 번 세탁해야겠는 걸."
먼지가 묻고 얼룩이 진 군복을 어깨애 올린 하겐은 자신의 내무반을 나섰다. 그는 세탁실로 향하며, 다른 소대의 훈련병이나 같은 소대의 훈련병과 여러번 마주쳤다. 그중에는 자신의 지인인 루크도 있었다. 그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다른 소대의 훈련병에게 부축을 받고 있었다.
"루크. 다리는 왜 그래?"
"어, 하겐이냐. 아... 사쿼하다가 그만 멋지게 굴러버렸지 뭐냐. 의무실에 가보려고."
"조심 좀 해라. 맞다, 다른 녀석들은?"
"다른 녀석들? 어... 루이는 세탁실에. 칼리브레는 애들이랑 사쿼하는 중이고."
"그래. 빨리 가서 치료 받아라. 임마."
"헤헤."
"빨리 가자."
다른 소대의 훈련병이 루크를 부축해 윗층으로 올라갔다. 하겐은 잠시 그들을 지켜보다가 세탁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탁실에 들어서자, 다른 훈련병들이 자신의 속옷이나 생활복, 전투복을 세탁하고 있었다. 루이도 역시 그곳에 있었다. 그녀는 하겐을 보자마자 일어서서 왜 이제 오냐며 따졌다.
"하겐! 왜 이제 오는건데?"
"어. 우리 만나기로 했었냐?"
엉뚱한 소리를 들었다는 하겐의 얼굴에 루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지만.. 어쨌든 세탁은 해야만 하는 거잖아? 빨리 와. 내 것도 마침 하려는 참이었어."
"오, 아직 자리가 남아 있었어? 같이 하게 해 준다면 나야 고맙지."
"빨리 넣으라구."
루이는 세탁기의 문을 열며 안을 가리켰다. 하겐은 자신의 때묻은 전투복을 세탁기 안으로 들이밀었다. 곧이어 루이가 세탁기를 가동하자, 두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세탁기가 세탁을 시작했다.
"조금만 기다려."
"엉."
루이와 하겐은 세탁기 앞에 배치된 기다란 의자에 앉아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루이는 발을 앞뒤로 흔들며, 콧노래를 불렀다. 하겐은 문득 세탁실의 창문으로 연병장에 눈이 돌아갔다.
연병장에는 동기들이 공을 차며 뛰놀고 있었다. 그중에는 피터, 에리, 코리, 칼리브레등 자신의 친구들도 보였다. 그들은 소리치기도 하고, 다같이 웃으며 배를 잡기도 했고, 투쟁심을 불태우며 공을 몰기도 했다. 루이는 연병장에 눈이 팔린 하겐의 얼굴을 쓱 바라보더니 뭘 보고 있냐고 물었다.
"저기 하겐, 뭐 봐?"
하겐은 루이가 자신을 부르자 무슨 일인가 싶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때, 창 밖에서 연방의 인조 태양이 내리쬐는 햇살에 하겐의 얼굴이 빛났다. 루이는 무언가 가슴이 두근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어? 왜? 그냥 밖에서 애들이 신나게 놀고 있길래. 궁금해서."
"그, 그래? 하겐은 왜 안해? 심심하지 않아?"
루이의 질문에 하겐은 어깨를 한 번 돌렸다. 그러더니 팔을 흔들어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려주었다.
"보다시피 몸이 좀 뻐근하거든. 근 한 달간 훈련만 받았으니. 좀 쉬고 싶은거야. 뭐, 생각해보면 저 녀석들도 대단하지. 힘들지도 않나 봐."
"그렇구나..."
루이는 하겐이 다른 동기들과 어울려 놀지 않고 자신과 세탁실에 있음을 느끼며, 왜인지 모를 기쁨을 느꼈다. 자신에게 소중한, 매우매우 소중한 친구. 그녀는 자세를 똑바로 고쳐 앉아 자신의 무릎을 쥐었다. 그녀의 얼굴은 약간의 홍조가 올라와 있었다.
"띵!"
"엇, 다 됐다. 루이, 네 것도 꺼내야지."
세탁기가 작업 완료를 마치는 소리에 하겐은 자리에서 일어나 세탁기 앞으로 다가가 세탁물을 찬찬히 꺼내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루이의 세탁물을 꺼내 바구니에 담았다. 자신의 군복은 상당히 무게가 있고 크기에, 나중에 꺼내는게 편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근데. 이건 뭐냐."
루이의 양말과 생활복등 옷가지들을 바구니에 담아주던 하겐이 하얀색의 세탁물을 엄지와 검지손가락으로 집어올렸다. 하겐이 무엇을 들고 있는지 빠르게 알아챈 루이는 얼굴이 새빨개지며 그의 손에 있는 세탁물을 뺏었다.
"변태! 그걸 왜 만지는 건데?"
"아니 나는 꺼내주려고 한 거잖아."
"아무튼! 내꺼 챙겨줘서 고맙고 머, 먼저 돌아간다?"
자신의 세탁물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내무반으로 먼저 달려간 루이를 보며 하겐은 자신의 머리를 긁적거렸다.
"내가 뭐 잘못한 건가?"
머리를 긁으며 생각하던 하겐도 자신의 군복을 꺼내 물을 한 번 쫙 짜고는 바구니에 담아 내무반으로 향했다. 어차피 군복이나 옷가지들을 말릴 만한 곳이라면 내무반 내부의 관물대에 걸어놓고 말리면 되니까.
"하암~"
하품을 늘어지게하며 내무반 내부로 들어선 하겐은 슬쩍 루이의 자리로 눈길을 주었다. 그녀는 관물대에 양말, 생활복, 속옷을 걸어놓고 드라이기로 찬찬히 말리고 있었다. 하겐은 아차하며 자신의 머리를 때렸다.
"(하얀 건 속옷이었구나! 이런, 섬세하지 못 했다.)"
하겐이 자신의 머리를 때리는 소리에 루이가 그를 돌아보았다. 루이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하겐에게 뭐 말할 거 없냐고 물었다. 하겐은 그녀의 관물대 쪽을 살짝 보고는 미안. 하며 대답했다.
"좀 더 섬세해져 볼게."
볼을 부풀리던 루이는 볼멘소리로 그의 말에 담긴 사과를 받아들였다.
"구래. 조심하라구."
"하하.."
자신의 관물대로 돌아온 하겐은 군복을 바르게 펼쳐 옷걸이로 관물대에 걸었다. 군복에서는 아직 젖은 냄새가 나지만, 은은하게 세탁 세제의 향이 나고 있었다. 하겐이 걸린 군복을 손으로 일일이 주름을 펴 가고 있을 때, 등 뒤에서 루이가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말리는거야?"
"어? 응. 왜?"
"그럼 내가 좀 도와줄게."
그녀는 씨익 웃으며 드라이기를 가져왔다. 그리고는 하겐의 군복에 가까이 가져가 말리며 주름을 펴주기 시작했다.
"보이지? 보이지? 잘 펴지지?"
"오호. 그렇네? 똑똑한데, 루이?"
하겐의 칭찬에 가슴을 쫙 피며 히히 웃은 루이는 하겐의 침대에 걸터 앉아 같이 군복을 말렸다. 그들에게는 참으로 즐거운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