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수송선 안의 세 사람]
피터는 잠시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 밖에서는 공항의 활주로들이 넓게 펼쳐지고 있었다. 피터는 활주로에 가지런히 놓인 거대한 수송선들을 보며 저 안에도 자신같은 청년들이 얼마나 가득할까 상상해보았다. 그런 피터의 모습은 꽤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궁금해진 코리는 피터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말을 걸었다.
"피터, 창 밖에 뭐가 그리 신기하길래 쳐다보냐?"
하지만 코리의 질문에도 피터는 묵묵히 진지한 얼굴로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고, 코리는 손가락으로 그를 쿡쿡 찔러댔다.
"야, 뭘 그리 뚫어지게 보는거야. 나도 좀 알려줘라. 심심하다고?"
"음? 어. 그냥, 저 멀리 공항 활주로에도 우리가 탄 수송선과 똑같은 수송선들이 줄지어 서 있길래. 너나 나 같은 징병자들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하고 있었지."
"흐흥. 별로 재밌는 이야기는 아니었네. 근데 왜 이렇게 출발을 안 한담?"
"아직 사람들이다 안 탔으니까요."
심심해보이는 코리에게 옆 좌석의 여성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코리는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자신의 말동무가 생긴 것을 놓치지 않았다. 여간 수다스러운 녀석이 아니었다.
"오호. 이번엔 먼저 말을 걸어주시네요? 댁도 심심하셨나보군?"
"심심하긴 했죠."
"피터. 들었지? 여성 분이 심심하대잖냐. 좀 말이라도 같이 섞자고. 어?"
코리는 치근덕거리면서 피터에게 들러붙었다. 피터는 그의 손을 들어 휙 치워버린 다음 옆 좌석의 여성에게 말했다.
"난 바깥을 좀 더 보고 싶으니까, 댁이 코리랑 좀 놀아주세요."
"그럼 어린애랑 노는 기분이겠군요."
"네, 좀 귀찮을 겁니다."
피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내와 만난 지 10분도 채 안 된 여성은 피터의 마음을 일부 이해한다는 듯 같이 고개를끄덕였다. 코리는 그 모습에 발끈하며 반박했다.
"누구보고 어린애래? 어, 당신! 여자라고 불러야하나? 이름을 모르니... 아무튼! 난 당신이랑도 동갑이거든? 저 녀석도 그렇고! 어린이 취급하지 마시지?"
"내 이름은 여자가 아녜요. 그리고 먼저 반말했겠다? 나도 한다고."
"헤~! 나는 동갑끼리 존댓말 써오던 게 어색했거든? 반말이 더 편하다고. 어쨌든, 나한테 여자라고 불리는게 싫음 이름을 알려주면 되잖아? 뭐 어떻게 불러야 하는 건데?"
"에휴. 꼭 이름까지 알려줘야하나. 알았어. 나는 에리 캐트. 에리라고 불러. 그리고 미리 말하는건데, 캐트라고 부르면 진짜 죽여버릴거야. 알겠어?"
"무서워라;; 캐트라고 부를려고 했는데. 실수할 뻔 했네. 야, 피터. 근데 어떻게 사람 이름이 캐트냐? 캐트래. 크크."
피터가 관심 없다고 말하려 옆을 돌아 보았을 때는, 이미 눈에 불꽃이 번뜩한 에리가 코리의 볼을 양옆으로 쥐어뜯고 있었다.
"내가! 캐트라고! 부르지! 말랬잖아!"
"아으으어... 이아내.. 이거 푸어져..."
"그만해요. 그만. 그러다 내 친구 볼때기 찢어지겠어.다치면 책임질거요?"
에리는 코리의 볼을 한번 주욱 늘린 다음 손을 놓았다. 볼은 착 소리가 나며 줄어들었다.
"피터 녀석이 말려서 살은 줄 알아."
"우어어... 피터.. 존나 아파..."
볼을 부여잡고 눈물을 그렁거리는 코리를 뒤로하고, 피터는 에리에게 할말이 있다고 말했다. 에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피터를 쳐다 보았다.
"어쨌든간에, 같은 징병 대상자니 앞으로 잘 해봅시다. 아니지, 동갑이니 그냥 편하게 말할게. 난 피터 메이슨. 그리고 저 녀석은 알고 있듯 코리 맥코이. 위험한 곳에 가는 같은 사람들이니 잘 부탁해. 캐트."
피터의 마지막 말에 볼을 부여잡던 코리가 눈이 휘둥그래졌다. 말하면 안 되는 것을 말해버린 피터를 측은하게 바라보기도 했다. 곧 피터도 자신이 무슨 말 실수를 한지 깨닫고 당황했다.
"아, 어, 그러니까.방금은 놀리려고 그런게 아니라."
"괜찮아. 잘 지내보자고. 우리는 앞으로 같은 곳에서 같은 훈련을 받게 될 거니까. 동료지. 아니? 전운가?"
에리는 오히려 피터의 말을 개의치 않고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자는 모양이었다. 피터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린 후 안심의 한숨을 내뱉곤 그녀의 손을 잡았다.
"윽익!"
악수한 그의 손에 덮쳐온 것은 어마무시한 에리의 악력이었다. 숱한 밭일과 농기구를 만져와 단련된 피터의 손이었지만 으스러지는 듯 손이 아팠다. 이 여자는 무슨 오쏘우라도 된단 말인가?
"으게겍!"
"그리고 캐트라는 말은 하지마. 알겠지?"
"아, 알겠어! ㄴ, 네!"
"흐흠. 그래."
어리는 꽉 쥐었던 손의 힘을 풀었다. 피터는 재빨리 손을 빼 조금이라도 아픔이 가시라고 손을 흔들었다. 피터는 침을 꿀꺽 삼키곤 에리를 괴물같은 악력의 소유자라고 생각했다.
"잠깐 화장실 좀.. 손에 냉수라도 들이붓고 와야겠는걸."
"어,어? 나도! 같이 가 피터!"
피터는 좌석에서 나와 바로 옆 복도를 걸었다. 옆에서는 코리가 에리에게 들릴까 조심스레 속삭이고 있었다.
"으윽, 피터. 저 여자 힘이 장난 아니야. 강단은 있어보이긴 했는데, 저렇게 곱상하고 여려보이는 몸에서 무식할 정도의 힘이나오다니. 볼을 잡아댕길 때도 손을 치우질 못했다니깐! 약간 무서운년이라고! 아니, 약간이 아니라 존나 무서워!"
손을 아직까지 털어내고 있는 피터도 그의 말에 동감하며 대답했다.
"맞아. 오질라게 세던데. 팔힘이나 악력 정도는 나도 자신 있는데 말야. 그냥 당해버렸잖아."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 문을 열며 들어간 두 사내는 볼일을 본다기보단 시원한 냉수로 자신들의 부위를 식히기에 바빴다. 피터는 오른손을, 코리는 자신의 양 볼을 물을 묻히고 비벼댔다.
"흐에. 진짜 조금만 더 잡아댕겨졌으면 볼이 찢어졌을거야..."
두 사내가 아픔을 식히고 있는 순간, 수송선 내부의 스피커에서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피터는 그때까지도 자신의 볼에 찹찹거리는 소리를 내며 냉수를 바르던 코리에게 잠깐 멈추라는제스처를 취했다.
"B구역 게이트의 입장이 완료되었습니다. 징병 대상자 분들은 좌석에 완전히 착석해 주시길 바라며, 저희는 고르페우스 구역의 은하 정거장으로 이동해 헬레헤시 구역으로 이동할 것입니다. 21광년의 거리를 이동할 것이며, 약 20시간이 소요 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들었냐? 이제 슬슬 출발한다는 소리야. 근데, 코리 너 21광년이 얼마나 먼 거리인지는 아냐? 난 잘 모르겠는걸."
"응? 아 그거말이야? 그건 말하기엔 좀 길어서, 이따가 자리에 앉아서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설명해 주려고 했던 건데."
"그래? 그러면 슬슬 나가보자구."
손에 묻은 물기를 탈탈 털며 나온 두 사내는 자신들의 좌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송선의 엔진 소리는 우연히 그들의 발걸음 박자에 맞춰 점점 커지고 있었다.
"우리 왔어."
코리가 앉아서 먼가를 열심히 살피고 있는 에리에게 말했다. 그녀는 지금까지의 드센 모습과는 달리 화들짝 놀라며 등 뒤로 무언가를 숨겼다.
"어, 어? 왔어? 볼일 보는게 좀 빠른걸?"
"그런가. 근데 뭐 보고 있었어?"
에리는 당황하며 땀을 뻘뻘 흘렸다. 그녀는 등 뒤에 숨긴 물건을 바지 뒷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아니? 안 보고 있었어. 그냥 뭐... 내 가방에 두고 온게 있나 싶어서. 잠깐 찾아 본거야."
"그랭? 칠칠치 못하구만?"
"뭐가 그렇게 궁금하냐. 코리. 여자한테 너무 신경을 쏟지 말라고. 내가 봐도 귀찮아 보인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냥 앉기나 하자. 언제까지 서 있을거냐? 나 슬슬 다리 아프거든."
코리는 쉽게 자리에 앉았지만 피터는 코리와 에리에게 부딪혀가며 좌석에 앉았다. 피터의 발이 코리를 꾹 밟아버리자 코리가 윽 소리를 냈다.
"찌팔. 조심 좀 하라고."
"미안."
마침내 좌석에 앉은 피터는 귀가 먹먹하고 몸이 찌뿌둥해 기지개를 폈다. 기지개 때문에 기분이 좋아진 그는 고개글 괜스레 끄덕였다. 눈도 피곤한 것 같아 잠시 눈을 감고 10까지 셌다. 그리고 좌석 아래의 더플백에 손을 넣어 뒤적거리며 집에서 챙겨온 차가운 음료수를 찾았...는데 없었다.
"뭐야?"
꿀꺽꿀꺽. 자신의 옆에서 누군가 마시는 소리가 났다. 피터가 설마하고 돌아보니 코리가 자신이 가져온 음료수를 꿀꺽꿀꺽 마시고 있었다. 코리는 음료수를 한번 더 들이키고는 캬 소리를 냈다. 음료수가 맛있어서 기분이 좋았던 코리는 자신을 쳐다보는 뜨거운 눈길에 행복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역시 맛있네. 이거. 입은 안 댔다? 그 정도 매너는 있다구."
피터는 황당한 얼굴로 그를 쳐다 보았다.
"언제 가져갔냐. 그거."
코리는 뭘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더플백 안에 음료수가 있길래. 내가 좀 마신다고 했잖아? 그랬더니 니가 고개를 끄덕였다고."
"뭐? 마신다고 했었냐? 아, 왜 못 들었지? 이런... 어차피 달라고 하면 나눠줄 생각이었지만 제일 첫 번째로는 내가 마실려고 했는데."
"누가 먼저 먹든 무슨 상관이야. 둘 다. 유치하네."
"그런가. 아무튼 음료수 돌려줘라. 나도 마시자고."
"응. 여기. 가져가."
음료수를 돌려받은 피터도 시원하게 한 입 들이켰다. 음료수의 달달하면서 시원한 기운이 몸 전체로 퍼졌다.
"음. 역시 이거 최고라니깐."
"맞아.맞아. 나도 그게 제일 좋아. 블라스틴! 최고의 음료수라구. 헤헤."
코리가 피터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피터는 한 입 더 들이키면서 갑자기 궁금해진 점이 떠올랐다. 그는 음료수를 더플백에 넣고 잠근 뒤 좌석 아래로 다시 밀어 넣었다.
"근데 있잖냐. 코리."
"엉?"
"너 더플백 안에 음료수 챙겨온 건은 어떻게 알았냐? 더플백은 내가 닫아 놨는데."
피터의 말에 코리는 엥 소리를 냈다.
"엥? 아니던데. 더플백이 열려 있어서 음료수가 다 보였다구. 내가 무슨 수로 니 가방 안의 물품들을 정확히 알아내겠냐?"
"아닌데... 더플백의 지퍼를 분명히 잠갔는데... 아닌가...?"
피터가 긴가민가 하는 모습을 보며 에리는 괜스레 그를 다그쳤다.
"어음! 네가 깜빡했을 수도 있지. 잠갔다고 생각하고 깜빡했거나. 아니면 뭐 니가 발을 움직이다 좌석 아래의 더플백 지퍼를 열었을 수도 있는 거잖아?"
"끄으응. 아마 그랬겠지? 뭐.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
"그래. 아무 일도 아니겠지."
"응응! 그럴거야!"
"근데 에리. 너 더워? 땀을 흘리곤. 지금 딱히 덥진 않은 것 같은데."
"그러네. 에리 녀석 땀을 엄청 흘리네. 피터, 음료수라도 한 입 줘버리지 그래?"
"그럴까. 자. 에리. 이거 먹으면 좀 나을 거다."
피터는 금새 더플백에서 블라스틴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에리는 처음엔 괜찮다고 했지만 마지못해 음료수를 받았다. 에리에게 음료수를건네 준 피터는 수송선에 처음 탔을 때처럼 창 밖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수송선이 우우웅 소리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수송선은 한번 흔들리더니 조금씩 뜨고 있었다.
"오옷. 뜬다."
피터는 거대한 수송선에 타 중력을 이겨낸 기분에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창 밖에서는 줄지어 서 있던 다른 수송선들도 점점 떠오르고 있었다. 피터 일행이 타고 있는 수송선 내부의 좌석엔 사람들이 그득그득 했지만 다들 조용히하고 있었다. 아마 긴장과 자신들의 고향을 떠난다는 생각에 침묵이 유지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깬 것은 코리의 엑 하는 소리였다.
"엑! 얌마, 에리! 음료수를 입대고 마시면 어떻게 하냐? 매너가 없구만!"
에리는 코리의 말에 음료수가 잔뜩 묻은 입가를 씻어내며 대꾸했다.
"매너는 조용한 곳에서 시끄럽게 말하는 네가 더 없거든? 조용히 해. 쪽팔려!"
코리는 씨익 웃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에리를 놀리기 시작했다.
"킥킥킥. 그거 혹시 간접 키스? 우웩. 나도 피터랑 간접 키스하는 건 딱히 원치 않아서 입도 안 댔던건데. 바보잖아?"
코리의 말을 곰곰히 듣던 에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코리는 계속해서 에리를 놀려댔고 에리는 새빨개진 얼굴로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아오! 코리! 그만 좀 괴롭혀라. 그리고 에리. 난 간접 키스 같은거 신경 안 써. 어린애도 아니고 말야. 다 마셨으면 음료수 이리 줘."
에리는 쭈뼛쭈뼛 음료수를 피터에게 건넸다. 그녀는 아직도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없었다. 피터는 이런 어색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그녀에게 조그맣게 속삭였다.
"으휴. 그냥 다시 꼬집어버려. 이번엔 안 말릴게."
에리는 그 말을 듣자마자 피터의 눈을 바라보았다. 진짜 해도 되냐는 얼굴이었다.
"그래. 안 말릴거야. 귀찮아. 진짜로."
에리는 피터의 말이 끝나고 코리를 돌아보더니 그의 양볼을 아까처럼 쭉쭉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코리는 짧게 단말마를 뱉었다.
"흐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