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80.반지
물에 젖은 둘을 마법으로 간단히 말린 뒤 나는 아직 상황을 모르는 프레이야와 케야에게 이야기했다.
말 그대로 내가 본 기억에서 중요한 부분을 단편으로 짜기워서 들려주었다.
“그렇게 해서, 내가 그레이아일 때 에렐과 처음으로 만났지.”
“와... 그 베기아라는 곳은 좀 너무하네요. 고아들을 그렇게나... 거기에 들쥐 고기라니...”
프레이야가 탄식을 하며 말하자 옆에서 에렐이 거들었다.
“그때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음식이었다. 들쥐 한 마리만 잡아도 세상 부러운 것이 없었던 시절이었지.”
“음... 확실히 그때 먹었던 들쥐 고기보다 값지게 느껴지는 음식은 없었어.”
나는 잠시 그레이아가 되어서 그녀와의 추억을 최대한 나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와 그레이아 사이에서 오는 괴리감을 더욱 심하게 느낄 것 같아서.
“그렇게 우리는 에렐 군을 세웠어. 거기서 내가 에렐이 되었고, 에렐이 그레이아가 되었지.”
“어찌나 나보고 진지하게 이야기하던지. 처음에는 그저 장난인 줄 알았다.”
“엄청 로맨틱 하느니라... 분명히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되거늘. 어째서 지금의 성원과 그레이아는 그렇게 다른 것이느냐?”
케야는 나를 보며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아니... 나도 저렇게 해줘? 하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됐느니라. 진심에서 나오지 않는 연기 따위는 사양이느니라.”
“어... 알겠어...”
케야에게 대차게 까인 나는 다시금 이야기를 이어가고 어느새 이야기는 최후의 그 순간이었다.
이야기를 전부 끝내자 프레이야와 케야가 훌쩍거리고 있었다.
“무슨 동화책에서 나오는 이야기 같아요... 흐윽... 에렐씨 너무 불쌍해...”
“크응...! 그때나 지금이나 눈치 없는 것은 매한가지인 듯 하느니라. 그 그레이아라는 놈이 내 앞에 있으면 한 대 후려 패주고 싶구나...”
눈물을 연신 닦아내는 프레이야와 콧물까지 나와서 코를 푸는 케야가 나를 보며 말했다.
그 뒤 이야기는 간단하게 에렐이 말했다.
결국 에렐의 이야기마저 끝나자 거실은 울음바다였다.
“흐아아앙... 에렐 언니이....”
“흐으윽... 이리 오거라 내 안아줄 테니...”
둘은 에렐을 붙잡고 한참을 울며 그녀를 위로했다.
나는 그 모습을 떨떠름하게 보고 있었고, 에렐은 자신을 위해 울어주는 두 사람에게 감동했는지 살짝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오직 하련만이 그 모습을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나는 하련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에렐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그러자 하련은 나를 홱 돌아서 쏘아보더니 말했다.
“아니거든! 그냥... 아냐... 됐어...”
그렇게 말한 하련은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난 내가 무언가 잘못했나 생각해보았지만...
정말 놀랍게도 너무 많았다.
하련에게 사과해야 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기는 하였다.
‘최근 하련과 시간을 덜 보내긴 했지.’
거기에 둘은 집에서 기다렸지만 하련은 항상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달려와 주었다.
어떻게 보면 나와 가장 오래 함께할 아내인데도 불구하고 조금 무관심했나 싶었다.
도대체 어떤 남자가 여러 여자와 결혼한 경험이 있을까.
내 실수라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나는 하련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똑 똑 똑
“하련, 들어가도 돼?”
안에서 대답이 없자 나는 결국 문을 따고 들어갔다.
“하련?”
그녀는 베개에 머리를 박은 채 엎드려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옆에 누워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하련 화났어?”
그러자 배게 사이로 조그마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화 안 났어...”
“그럼 왜 이러고 있어? 응? 내가 미안해... 하지만 이번 일은 정말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야. 나만을 위해 그 긴 시간을 찾아다닌 여자를 냉정히 내칠 수는 없잖아...”
내가 옆에서 하련을 달래자 하련은 자신이 머리를 파묻고 있던 베개를 내게 던지며 말했다.
“그런 거 때문에 화난 거 아니라고!”
나는 갑작스러운 하련의 급발진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결국 내가 잘못한 일이기 때문에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그럼 뭐 때문에 그런지 이야기를 해줘. 그래야지. 내가 그걸 고칠 거야. 응? 내가 미안해...”
일단 아내가 화났을 때 최고의 방법은 계속 사과를 반복하는 것이다.
뭐 선물이나 이벤트 이런 것은 필요가 없었다.
진심 어린 사과.
딱 그거 하나면 아내들은 대게 마음이 풀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련은 씨익거리며 아무것도 없는 이불에 머리를박았다.
그렇게 한참을 이불 속에서 씨익거리던 하련은 내게 말했다.
“그냥... 나한테 화가 났어...”
“응?”
예상외의 답변에 나는 내가 잘못 들었나 해서 그녀에게 되물었다.
“그냥...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가 모르는 성원을 알고 있고... 그녀가 너를 찾아다닌 시간을 생각하면 나와는 비교도 안 되는 것 같아서...”
하련의 목소리는 서서히 물기로 젖더니 이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내가 프레이야나 케야보다 나은 게 무엇인지 항상 생각했어. 프레이야는 착하고 아름다워서 항상 너를 치유해주고, 케야는... 가슴이 크잖아... 엄청... 거기에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둘보다 내가 나은 게 뭘까? 얼굴? 몸매? 밤일? 성격? 아무리 생각해봐도 둘을 이길 게 생각이 안 나... 그러다가 결국 생각난 게 수명과 힘이었어...”
“언젠가는 둘에 영혼의 수명이 전부 사라지고 너의 곁을 떠나겠지. 그렇게 되면 너를 위로해줄 수 있는 건 나뿐이라고. 너에게 위험한 일이 생기면 지켜줄 수 있는 것도 나뿐이라고 생각했어...”
“근데 이게 뭐야... 에렐이 오면서 내가 가진 유일한 가치들이 전부사라졌어... 너를 알고 있는 시간도. 너를 향해 품고 있는 애정도 나보다 훨씬 큰 에렐이...”
그렇게 말한 그녀는 고개를 들어 맑은 눈물이 흐르는 눈동자로 내게 물었다.
“흐윽... 성원... 나 되게 추하지...? 다른 애들은 모두 에렐에게 공감... 히끅... 해주고 환영할 때 나 혼자 이러고 있으니까... 네가 날 싫어하게 되어도 할 말이 없어...”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차마 고개를 들고 있지 못한 채 다시 베개에 머리를 박고 흐느꼈다.
‘이런...’
하련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항상 터프하고, 강한 얼굴만 내게 보여주었기에 그녀가 이런 고민을 마음에 가졌는지도 몰랐다.
나는 흐느끼는 하련의 얼굴을들어 올려 키스했다.
쪽...
하련은 처음에는 벗어나려 하면서도 내 키스를 점점 받아들였다.
처음 프로티아의 아이언쓰론에서 했던 첫 키스와 같이 풋풋한 느낌의 키스.
짧은 키스를 마친 나는 얼굴을 떼고는 하련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으이구 이 바보야.”
“아야!”
내게 맞은 머리를 움켜쥐고 나를 노려보는 하련이 무어라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하련. 잘 들어. 내가 너뿐만 아니라 내 아내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하나야.”
하련은 멍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그냥 좋아. 너희 옆에 있으면 모두 내팽개치고 그저 온종일 껴안고 자고 싶고, 임무를 마치고 집에 와서 나를 반기는 너희를 보면 마음이 치유되고.”
“그냥 좋은 거야. 이유는 없어. 그냥 너희라서 좋은 거야. 너희에게서 무슨 가치를 찾거나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어. 얼굴? 예쁘면 좋아. 몸매? 이것도 예쁘면 좋지. 성격도 마찬가지고.”
내 솔직한 말에 하련은 피식하고 웃었다.
나는 피식 웃어버린 하련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게 나에게서 너희에 대한 가치를 정하는 기준이 되지는 않아. 하련, 나는 그냥 네가 좋아. 네가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 좋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그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나를 지켜봐 주면 되는 거야.”
그런 내 진심 어린 고백에 하련은 나를 껴안고는 말했다.
“정말이야...? 정말 내가 추하지 않아...?”
나는 그런 질문을 하는 하련의 양 볼을 손으로 잡고는 내 정면에 놓았다.
“이 얼굴이 어떻게 추한 거지? 하련이 추하면 이 세상은 추녀들밖에 없는 건데?”
내 오글거릴 정도로 달달한 말에 하련은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내게서 떨어졌다.
“사실 이야기를 들을 때는 되게 멋져 보였는데 진짜 들으니까 안 그렇네. 역시 그런 로맨틱한 대사는 성원이랑 안 어울려.”
“칭찬이야?”
“칭찬이겠어?”
나와 하련은 서로를 마주 보고 활짝 웃었다.
그녀가 마음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용기를 내어 내게 말해주었으니 나도 보답을 해야 했다.
나는 내 오래된 기억 속에 담아둔 반지를 만들었다.
집으로 퇴근하던 길에 보석점에서 보았던 언젠가 내 아내 될 사람에게 주고 싶었던 평범한 반지.
원래는 금이었지만 하련과 어울리지 않아서 백금으로 바꾸고 거기에 에메랄드로 문양을 새겨 넣었다.
반지 안쪽에 나와하련의 이름을 써놓는 것까지 마무리한 나는 하련에게 반지를 주었다.
“웬 반지야?”
하련은 내가 준반지를 보며 갸우뚱거렸다.
여기서 문화차이가 느껴졌지만 나는 하련에게 말했다.
“내 고향에서는 프러포즈할 때 반지를 주면서 말하거든.”
이미 프러포즈를 하기에는 너무 늦은 타이밍이었지만 나는 하련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며 물었다.
“너무 늦은 것 같지만... 다시 한번 물을게. 나랑... 결혼해 줄래?”
내 때늦은 프러포즈에 하련은 잠시 멍하니 반지를 쳐다보았다.
“푸흡...”
“응?”
하련은 뭔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더니 어느새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꺄하하하하하하!”
“왜... 왜 웃어!”
남의 진지한 고백을 이렇게 받아들이다니.
솔직히 내가 하고도 분위기를 타서 조금 무리수를 던진 감이 없잖아 있다고 느꼈다 하더라도.
‘이렇게 웃을 필요는 없잖아...!’
안 어울리는 행동인 것은 맞아서 웃는 이유가 충분히 이해는 가는데 그럼에도 내 수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련은 자신에 끼워진 반지를 이리저리 만지더니 내게 물었다.
“근데 이거 상상으로 만든 거 아니야? 그런 중요한 반지면 드베리아한테 외주라도 맡겨야 하지 않겠어?”
으윽...
솔직히 그런 생각을 하긴 했다만.
“어... 음... 싫으면 다시 줘 드베리아한테 만들어 달라고 할게.”
그러자 하련은 내밀고 있는 내 손등을 가볍게 때리더니 말했다.
“네가 그러니 눈치가 없다는 소리를 듣는 거야. 이 멍청아.”
그렇게 말한 하련은 내 등을 툭툭 치더니 밖을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먼저 나가버렸다.
나는 그런그녀를 따라 거실로 나갔다.
거실에서는 어느새 울음을 그친 그녀들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진짜요...?”
“네! 분명 성원씨도 좋아할 거에요!”
“내가 해봤는데... 확실히...”
자기들끼리 뭔 이야기를 하는 건지는 몰라도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조용히 이야기하는 것이 누구한테 들려줄 만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그때 하련이 갑자기 성큼성큼 걸어서 에렐에게 다가갔다.
그러더니 에렐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해. ‘동생’”
“뭐?”
“귓구멍 막혔냐? 네가 여기서 제일 막내잖아. 그러니까 자, 한번 불러봐. ‘언니’”
에렐은 갑자기 그렇게 변한 하련의 태도가 당황스러운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언니라 부르라는 하련이 가당찮아서 그런 것인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야, 너가 나보다 나이 많아? 뭔 언니라 부르래. 언니는 무슨.”
“어쭈? 이게 나이로 나한테 들먹여? 왜 한번 따져볼까?
”야, 내가 나보다 나이 많은 놈을 전 우주 다 뒤져도 없었는데 여기서 발견할 것 같아?“
어느새 조금은 친해진 것인지 서로 완전히 말을 놓고 이야기하는 둘의 모습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서로 진심으로 싫어한다기보다는 약간 기 싸움의 형태로 바뀌어 버린 둘의 말싸움을 보고 있으니 옆으로 프레이야와 케야가 다가왔다.
나는 다가오는 둘을 자연스레 품에 안고 물었다.
”내가 원하는 만큼 여유시간이 있는데 그사이에 뭐할까?“
그렇게 묻자 둘은 동시에 대답했다.
”“여행!”“
”여행?“
흐음... 여행이라...
하긴 아무리 이곳에 숲이 있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것은 굉장히 고역이다.
생각해보니 스퀴르도 에릴을 데리고 가끔나갔다 온다고 하니 안될 것은 없었다.
새로 온 에렐과의 친분도 다지고, 다들 지친 마음도 풀어갈 겸 나는 여행을 가기로 정했다.
”좋아! 여행지는 내가 알아 올게!“
그렇게 말한 나는 텔레포트로 스퀴르에게 찾아갔다.
똑 똑 똑
문을 두드리자 얼마 뒤 지친 얼굴에 스퀴르가 튀어나왔다.
”허억... 허억... 무슨 일이냐. 성원.“
상당히 지친 기색처럼 보이는 스퀴르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한 나는 이내 스퀴르를 찾아온 목적을 말했다.
”에렐도 왔고... 아내들끼리 친분을 위해서라도 잠깐 어디서 쉬다 올까 하는데... 스퀴르씨라면 여행지에 대해서 잘 아실 거 같아서요.“
”그... 그렇긴 하지. 조금만 기다려다오.“
그때 뒤에서 에릴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기야? 뭐해? 누구 왔어?“
”성원이 여행지를 물으러 왔다고 하는데!“
”그래애?“
잠시 뒤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에릴씨가 붉은 가운을 걸치고 입구로 나왔다.
‘음... 했구만.’
이건 내가 눈치가 없었다.
스퀴르가 에릴과 시간을 보내겠다고 말할 때부터 알았어야 했는데.
나는 빠르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가 방해한 것 같네요. 여행지는 다른 분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그때 에릴씨가 책 한 권을 내밀며 말했다.
”스퀴르랑 그동안 다닌 곳들 볼거리랑 먹을거리 정리해둔 책~! 10점 만점이니까 원하는 데 골라서 가라고?“
나는 그 책을 보며 활짝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에릴씨!“
에릴과 에렐의 발음이 비슷하기에 나는 최대한 조심하기로 생각하며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는 되었으니까 쓰고 나서 책이나 돌려줘~ 그럼 우린 들어가 볼게? 자, 다시 들어가자 자기야~“
”성원 그런 거 아니니 오해하지... 허업...“
에릴에게 뒤통수를 붙잡혀 질질 끌려가는 스퀴르를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채 나는 문을 닫았다.
‘부디 살아남기를.’
아무리 생각해도 스퀴르와 에릴 사이에서 스퀴르가 우위를 잡는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체격 차이 때문에 힘들다.’
하지만 에릴에게 유린당하고 힘들어하는 스퀴르...?
‘오히려 좋아...’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가는 길에 성아를 만나고 가기로 하고, 에빌다씨의 구역으로 텔레포트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