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79.구원자 후보
그 이야기를 들은 여자들은 다시 울먹이기 시작했다.
“크으응... 저게 사랑인가...”
“너는 저렇게 하라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아막내야?”
“글쎄요...”
그들이 떠드는 소리를 무시한 채 에렐은 계속 말을이었다.
“윤회의 굴레는 실로 끔찍한 곳이었다. 수많은 영혼을 짜내는 존재들이 있었고, 그들은 영혼들의 기억을 빼내어 보이지도 않을 무저갱에 버리고 있었지.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혹시 내가 아는 영혼이 어디로 환생했는지 알 수 있냐고.”
“그러자 그들 중 가장 높아 보이던 놈이 내게 말하더구나. 불가능하다고. 나는 그 사실에 절망했지만 겨우 42000년이었다. 너를 찾기 위해는 100만 년도 넘게 걸리리라 생각했지만 그보다 훨씬 빠르게 찾았다는 것에 희망을두었지.”
“그리고 기억을 버리는 무저갱 밑바닥에 자란다는 기억의 열매를 꺼내 올라와 그들의 도움을 받아 캡슐 형태의 약으로 만들었다. 내 노력이 가상해 보였는지 그들도 나를 도와주더군.”
“그렇게 나는 그 약을 손에 쥔 채 다시금 너를 찾아 돌아다녔다. 그렇게 몇천 년을 찾아다녔을까. 어느 날 내가 너에게 심어둔 정신방벽이 발동되는 것을 느꼈다. 기억나는가? 그때 네가 내게 힘을 넘겨줄 때.”
나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나. 치스트와의 격전을 앞두고 너에게 힘을 모두 넘겼지.”
내 대답에 그녀는 활짝 웃고는 말했다.
“역시 기억하는구나. 그래, 그때였다. 혹시나 약해진 네가 적들의 정신공격으로 피해를 볼까 봐 힘을 넘겨받는 동시에 만들어 놓았지. 그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아무튼 그렇게 정신 방벽이 발동되었고, 나는 먼 차원 너머에서도 내가 너에게 심어둔 정신방벽이 발동되는 것을 느꼈다. 그 기운이 느껴지자 곧바로 너의 위치를 특정했지. 그리고 그곳이 바로 아까 그 행성이었다.”
“막상 도착하니 웬 이상한 여자가 행성을 향해 무언가를 쏘고 있더구나. 그래서 혹시 네가 다칠까 봐 바로 공격했다.”
그러자 아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행성을 정화하는 중이었지. 근데 쟤가 갑자기 나와서 나한테 주먹을 휘두르길래 깜짝 놀라는 바람에 출력을 조절 못 해서 실수로 파괴해 버렸어. 이제 복구는 힘들 거야.”
그 말을 들은 에렐이내게 말했다.
“순간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겨우 찾은 너를 다시금 잃게 될까 봐. 눈에 뵈는 게 없었고 전력을 다해 그녀를 막았지. 행성이 파괴되는 순간에 이성을 놓았다. 다시 너를 찾아 머나먼 길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절망감이 차올랐지.”
“그동안 수많은 세계를 돌아다녔고, 돌아다닌 세계에 문제점을 하나둘 없애다 보니 이미 나는 마족의 한계를 뛰어넘어 있었다. 그럼에도 저 여자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는 것은 더욱 큰 충격이었지. 그저 일방적인 싸움이었다.”
“잃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 그녀와 미친 듯이 싸웠고, 그러던 중 그레이아 네가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사건의 말로를 알게 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결국 여러 세계를 오랫동안 돌아다니며 문제점을 해결한 것이 에렐의 격을 높이게 되었구나.”
케테르도 이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세계를 돌아다닌 것인지 가늠도 안 되네. 한 행성 당 아무리 길게 잡아도 1년일 텐데. 그럼 거의 몇십만 개에달하는 행성을 돌아다닌거야.”
정말 대단한 집념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기에 더 미안하네. 나는... 너가 기억하는 그레이아가 아니니까...”
에렐은 고개를 흔들며 내게 말했다.
“아니다. 너는 그레이아가 맞다. 그 배려심, 나를 대하는 태도. 말투나 겉모습은 바뀌었지만 너는 너다. 환생해도 변하지 않았어.”
에렐은 그렇게 말하고는 이번에는 나를 자신의 품에 안았다.
그리고 그때 라시르가 말했다.
“좋아요. 조건은 충분합니다. 에렐님? 혹시 저희와함께할 생각 없으신가요?”
그러자 에빌다씨가 라시르에게 물었다.
“왜? 후보에 넣게?”
라시르는 에빌다씨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조건은 충분하죠. 수많은 세계를 돌아다닌 이력과 케테르 언니에게 타격을 입힐 만한 강대한 힘. 평화를 바라는 마음까지. 무엇하나 빠지는 게 없어요. 에렐님은 구원자에 가장 적합한 인재라 생각해요.”
에렐은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구원자...? 구원자가 무엇인지 말해주겠나 그레이아...?”
“음... 구원자는 말이지...”
나는 에렐에게 구원자에 대해 설명했다.
그녀는 내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었고, 종종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끝나자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하더니 라시르에게 물었다.
“내가 그 구원자라는 것이 된다면 그레이아... 아니 이제는 성원이라고 했지. 성원과 함께 할 수 있는 건가?”
라시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요. 싫으시다면 그저 옆에 계시기만 하셔도 돼요. 억지로 시키는 것이 아니니까요. 구원자라는 일 자체가 그만한 업보를 감당해야 하므로 절대 강제로 시킬만한 것이 아니에요.”
“그런가...”
에렐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답을 정한 듯 라시르에게 말했다.
“좋다. 구원자라는 것 내가 하겠어. 애초부터 내가 원하는 것은 평화다. 결국 구원자라는 것은 전 차원의 평화를 위해 움직인다는 뜻이 아닌가? 오히려 나로서는 하고 싶다.”
그녀의 흔쾌한 허락에 라시르는 손뼉을 5번 쳤다.
짝! 짝! 짝! 짝! 짝!
그러자 의회에서 자신의 볼일을 보던 구원자들이 하나둘 원탁 방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리오, 드베리아, 키릴, 슈엘이 모두 원탁 방으로 들어오자 자리가 부족해졌기에 나는 상상으로 똑같은 의자를 더 만들었다.
내가 만든 의자에 모두가 앉자 라시르가 입을 열었다.
“정말 간만이죠? 성원님이 들어오기도 훨씬 전부터 거의 800년간은 후보가없었으니까요! 자, 앞으로 나와주세요! 에렐님.”
내 옆에 앉아있던 에렐의 앞에 원탁의 중앙으로 가는 길이 생기고 에렐은 그 길을 따라 과거 내가 섰던 그 자리에 섰다.
에렐은 나름대로 긴장한 것인지 숨을 깊게 내쉬고 있었다.
“혹시 에렐님이 후보로 들어오시는 것에 불만 있으신 분?”
그러자 슈엘이 손을 번쩍 들며 물었다.
“상황 설명을 해줘야 할 것 같은데? 분명 성원에 관련된 일로 1 베기아에 다녀온 것 아니었어? 갑자기 웬 동족 하나를 데려다 놓고 후보자로 뽑느니 마느니 하는 거야?”
의회에 있었던 다른 구원자들도 고개를 끄덕였고, 라시르는 최대한 이야기를 압축하여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키릴은 라시르에게 물었다.
“으으음... 그러며어언... 성원을 찾아서 오랜 시간을 돌아다니며 이미 여러 세계를 구했고오... 아스타로트랑 싸움이 성립될 정도의 전력이라는 거야아...? 굳이 후보로 만들 필요 있을려나아...?”
라시르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도 규칙은 규칙입니다. 아무리 적합한 인재라 할지라도 성원 님 같은 특이 케이스를제외하면 반드시 몇 가지의 테스트는 거쳐야죠.”
‘음... 나도 궁금하긴 한데...‘
내가 한 적 없는 구원자가 되기 위한 선행 과정.
그게 궁금하기는 하였다.
내가 무슨 테스트이려나 고민하던 그때 에빌다씨가 손을 들고 말했다.
“테스트는 바로 보는 건가? 조금 나중에 봤으면 하는데. 성아도 한번 봐줘야 할 테고, 성원도 조금 쉬는 것이 좋지 않겠어?”
그 말을 들은 스퀴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에빌다의 말이 맞다. 며칠 쉬고 나서 하도록 하지. 테스트가 하루 이틀 안에 끝나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각자 해야 할 일도 조금씩은 있지 않나? 나도 에릴과 좀 쉬고 싶군.”
라시르는 둘의 의견을 듣고는 모두에게 물었다.
“그럼 에렐님의 테스트는 어느 정도 미루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얼마나 쉴지는... 성원님이 괜찮다고 하면 바로 시작하도록 하죠. 그동안 혹시나 진행 중인 임무나 볼일은 각자 끝내 주시고요.”
그렇게 말한 라시르는 손뼉을 한번 치고는 말했다.
짝!
“그럼! 일단은 해산하기로 하죠!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구원자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기 시작했다.
에렐은 떠나는 구원자들을 보며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라, 내 옆에서 안절부절못하였다.
나는 그런 에렐을 보며 말했다.
“에렐, 어차피 갈 곳도 없을 텐데 나랑 같이 가자.”
그러자 에렐은 환하게 웃으며 내 옆에 딱 붙어 섰다.
그때 하련이 내게 다가와에렐과 내 사이로 낑겨 들어왔다.
“비켜! 성원 옆은 내 자리야!”
그러자 에렐도 지지 않고 말했다.
“그동안 그레... 아니, 성원 옆에서 계속 붙어있었으면 지금은 내게 양보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그렇게 눈치가 없나?”
둘은 서로를 뚫어지라 응시하더니이윽고 말싸움을 시작했다.
“하! 미안한데 성원은 그레이아인가 뭔가 하는 놈이 아니라 ’내 남편‘이거든?
”기억도 떠올렸고, 그도 나를 거부하지 않는다! 너는 성원과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냈지? 나는 그와 3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붙어 다녔다!“
”그건 그레이아지 성원이 아니라니까? 자꾸 니 옛 남친을 성원에 겹쳐 보지 마! 너가 성원에 대해서 뭘 알아?“
”그건 지금부터 알아가면 된다! 애초에 여자를 선택하는 것은 남자이거늘! 네가 뭔데 자기 반려의 선택을 무시하는 것인가? 혹시 자기가 그의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하이고! 성원이 착해서 너를 떼놓지 않는 것뿐이지 진짜 너가 좋아서 지금 그러고 있는 줄 알아? 너 이따가 다른 프레이야랑 케야한테도 그렇게 말해봐! 내가 아주 버릇을 고쳐놓을 테니까! 선배로써!“
둘은 어느새 나를 내버려 두고 내게서 한 10m 떨어진 곳에서 천천히 따라오며 끊임없이 말싸움하였다.
하련과 에렐은 서로 단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말싸움을 하는 모습이 무림 고수들의 논검과도 같았다.
’이번에도 프레이야 말고는 믿을 게 없네...‘
어쩌다 보니 정말 프레이야는 우리의 기둥이 되어버렸다.
하련과 케야는 아직도 서먹서먹하지만 프레이야는 둘 다 사이가 좋았다.
엘프 특유의 나긋나긋하고 친절한 성격이 정말 완벽한 윤활제 역할을 해주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뒤에서 들리는 소리를 애써 무시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어느새 우리는 집 앞에 도착했다.
집 앞에 새로 생긴 숲 때문에 처음 보는 에렐은 물론이고 아직 보지 못한 하련조차도 한 번쯤은 바라볼만한데 둘은 문 입구까지도 계속 싸웠다.
딸깍
”하아... 하아... 어머, 성원 님 벌써 오셨어요?“
뭔가 숨이 막히는 듯 빨개진 얼굴로 숨을 내쉬는 프레이야의 상태가 이상했지만 지금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겠다.
나는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녀가 무척이나 안고 싶었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고민에 눈앞에 있는 사랑스러운프레이야를 꽉 껴안았다.
”어머... 뒤에 있는 분은 누구... 세요?“
뒤에 있는 에렐을 발견한 프레이야가 내게 안겨서 물었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좀 할 얘기가 많거든.“
”네...“
저번에 막상 10명쯤 있으면 좋다고 해놓고 진짜 한 명 더 데려오니까 안색이 나빠지는 프레이야를 보며 양심이 미친 듯이 찔리는 기분이 들었다.
둘은 현관에 들어와서도 계속 싸우고 있었다.
”야! 그래서 너 성원, 아니 그래 좋아. 그레이아랑 몇 번 해봤는데?“
”뭘 해본단 말이냐? 뭔지는 몰라도 너의 배는 될 것이다!“
”섹스 말이야 섹스! 성관계! 교미! 아이 만들기!“
”뭐... 뭐... 그게 무슨 소리냐! 갑자기 그런 천박한 말을 왜 하는 것이냐! 너는 수치라는 것이 없는가?“
’진짜 지랄을 해라... 지랄을...‘
이제는 하다 하다 나와 섹스한 횟수로 싸우고 있다.
물론, 당연하게도 에렐의 완패다.
에렐의 집념을 보면 그레이아 말고 다른 남자와 잤을 리는 없고, 내 기억에는 에렐과 나눈 정사의 기억이 없었다.
’한마디로 약 4만 7천 년 묵은 처녀다 이 말이다.‘
유니콘들이 있었으면 모두가 일어나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기립박수를 올렸을 것 같은 그녀의 절조에 나는 새삼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를 그레이아라고 생각한다고 하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레이아 대신이 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일단 성격이 너무 달랐다.
그레이아는 무뚝뚝하고, 카리스마 있으며 전형적인 묵직한 남성이었다.
그에 비해 나는 내가 생각해도 조금 가볍고, 촐싹거리는 편이었다.
’이참에 성격을 좀 바꿔볼까?‘
솔직히 내가 나쁜 성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은 성격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딱 그 중간선에서 줄을 탄다고 봐야 하나.
그렇기에 내 다른 요소들에서 플러스 점수를 내기 위해 존댓말을 입에 달고 살며, 항상 예의 바르게 행동하였다.
거기에 전투 방식도 달랐다.
나는 마법을 주류로 사용하는 후방 포지션이지만 그레이아는 마치 광전사처럼 전열에 서서 적을 쓸어 담는 전형적인 최전방 포지션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와도 내가 닮은 건 하나 있었다.
’음... 역시 내 전생이야.‘
비록 나는 구원자가 되기 위해 단련하면서 같이 커간 거지만 그레이아는 선천적으로 나와 비슷했다.
’난 놈은 난 놈이었다.‘
딱히 그에게 질투를 느끼거나 하는 감정은 전혀 없었다.
애초에 그도 나고, 내가 그다.
엄연히 다른 인격체지만 결국은 하나란 소리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집에 들어와 거실에 앉았다.
하련과 그레이아는 아직도 말싸움하고 있었고, 그걸 말리는 프레이야와 케야는 쩔쩔매고 있었다.
나는 과열된 분위기를 식히기 위해 그녀들의 머리 위에 물벼락을 떨어뜨렸다.
”꺄아아아악!“
”으에에엑...“
물벼락을 맞은 둘은 흠뻑 젖은 꼴이 돼서야 말싸움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나는 둘이 내 쪽을 쳐다보자 활짝 웃으며 말했다.
”자, 일단 진정 좀 해볼까? 그런 상태면 프레이야랑 케야가 곤란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