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78.집념
에렐의 기억과 내 기억이 서로 혼합되듯이 섞였지만 나는 정신을 잃지 않았다.
최대한 제 3자의 입장을 유지하며 그녀와 에렐의 기억을 보려고 했다.
“으으윽...”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져 오고 그녀와 함께했던 순간순간이 뇌리에 박혔다.
“성원! 성원!”
옆에서는 하련이 달려와 나를 붙잡고 흔들었다.
‘미치겠네.’
그 와중에도 머릿속에서 그레이아의 기억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하지만 내 자아가 바뀐다던가 무너진다든가 하는 뭐 그런 일은 없었는데.
애초에 굳건한 구원자의 자아를 무너뜨릴 정도로 강렬한 기억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뒤 계속해서 떠오르는 기억을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에렐과 그레이아의 인생을 감상했다.
‘그래도 마지막 장면에서는 조금 슬펐네.’
머리가 아파져 오는 와중에서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전부 내 눈에 담았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알게되었다.
‘그레이아는 에렐을 이성으로 하나도 보지 않았다. 처음에는 누나처럼 나중에는 자기 여동생처럼 생각했어.’
그레이아는 동굴에서의 첫 만남 이후 그녀를 단 한 번도 이성으로 보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쪽에 대해 관심이 생길 수 없을 만큼 치열한 삶을 살았고, 머릿속에는 다음 전투에 대한 시뮬레이션만 계속 돌리고 있었을 뿐이다.
에렐은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그레이아를 한 평생 지켜만 봐왔고, 마지막 전투를 앞두기 전날 그레이아를 불러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상태로 그레이아가 죽었지.’
그렇게 생각하니 불쌍한 것은 그레이아가 아니라 에렐이었다.
좋아하던 남성은 평생 자신을 이성으로 보지 않았고, 죽는 그 순간까지 단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자신에게 해주지 않았다.
‘나 같아도 빡쳐서 한마디라도 듣기 위해 쫓아가겠네.’
에렐의 무시무시한 집념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머리의 고통이 사라지고 이내 기억들은 자연스럽게 내 기억에 정착했다.
“하아... 살았다...‘
구원자로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깨질듯한 두통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보며 말했다.
”어... 이제 괜찮은 거 같은데요?“
그러자 하련이 나를 잡고 흔들며 말했다.
”너! 나 누군지 알지?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원탁이지.“
하련을 처음 본 곳은 원탁이었다.
”이익! 그게 아니라 제대로 말을 섞기 시작한 곳!“
”차원 이동 방 아닌가?“
차원 이동 방에서 프로티아로 가기 전에 대화한 것이 처음이었다.
하련은 내 어정쩡한 대답에 꿀밤을 먹이며 말했다.
”아닌가는 뭐야 이 멍청아!“
그러고 서는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전생의 기억이 떠오르면 원래의 자신을 잃게 되는 예도 있다고, 이그가 말하던데 다행이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게서 떨어졌다.
그때 에렐이 달려와 내 얼굴을 만지며 말했다.
”기... 기억이 나는가? 내가 누군지?“
”음... 기억이 나기는 하는데... 에렐.“
내가 자신을 에렐이라고 불러주자 그녀는 활짝 웃으며 나를 껴안았다.
”정확히 47291년이다. 너를 찾아 헤맨 시간이. 더 오래 걸릴 것으로 생각했어. 윤회의 굴레로 떨어진 영혼이 다시 태어나는 데 걸리는 시간도위치도 전혀 알 수 없었으니까.“
”돌아가자 베기아로. 가서 다시금 너와 나의 왕국을 세우자. 모든 마족이 평화롭고 안전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자.“
그리고는 갑작스럽게 내게 얼굴을 들이밀더니.
쪽
내 입술에 키스했다.
그러고 서는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리고... 나와 결혼해줘. 그레이아. 그날 말하지 못한 말이 이거야.“
나는 갑작스러운 키스에 멍해져서 아무 말도 못하고 어버버거렸다.
그러자 하련이 달려와서 그레이아를 내게서 떼놓고는 말했다.
”이게 어디서 갑자기 나타나서 남의 남편을 데려가려 해! 그것도 본인 눈앞에서!“
에렐은 그게 무슨 소리냐며 나를 향해 눈빛으로 물었다.
나는 그 눈빛에 이내 정신을 차리고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주려 했지만, 이그가 나와서 선수를 쳤다.
”하이고~ 우리 성원이는 인기가 참 많아. 그지? 아내를 셋이나 두고서도 아직도 달라붙는 여자가 더 있네? 심지어 상황을 보니 거절하기도 힘들어?“
그 말을 들은 에렐은 나를 멍하니 쳐다보며 물었다.
”아내가... 세... 셋...?“
”어... 음...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내가 말을 흐리자 하련이 나를 향해 소리 질렀다.
“성원! 지금 제대로 대답 안 하면 돌아가서 프레이야랑 케야에게 다 말할 거야!”
‘이런 씹...’
케야는 몰라도 프레이야는 진짜 상처받을 게 뻔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는 에렐에게 말했다.
“에렐, 일단 나는 그레이아가 아니야. 그의 환생은 맞고 방금 기억이 전부 떠오른 것도 맞는데... 너에 대한... 감...감정... 감정...?”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에렐을 향한 감정을 생각하자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거 왜 이래?”
나는 너무 당황해서 내 심장을 부여잡았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하지만 이 멍청한 심장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레이아, 미친놈아! 평생을 가족처럼 생각했다며! 왜 인제 와서!’
하련이 떼어놓은 후 다시금 내 품에 들어와 있던 에렐은 내 심장 소리를 느끼고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지금 뛰고 있는 이 심장 소리는 무엇이냐?”
“아... 아니, 이건...”
내 거칠게 뛰는 심장 소리에 귀를 가져다 댄 에렐.
그때 케테르가 다가와 에렐을 떼어 놓고는 말했다.
“거 사랑싸움은 나중에 하시고, 일단 내게 어떻게 타격을 입혔는지 설명해 줄래? 나는 그게 지금 너어어어어무~ 궁금하거든?”
그래, 나도 그게 궁금하였다.
어떻게 일개 마족의 육신으로 케테르에게 타격을 입힐 만큼 격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인가.
에렐은 그 말을 듣고 그녀를노려보더니 말했다.
“주먹을 뻗으면 맞는 것이 정상이거늘 그런 것을 물어 뭐 하는가? 내가 그레이아에게 심어둔 영혼의 방벽이 그레이아의 정신세계에 외부의 침입자가 들어왔다는 것을 내게 알려 그대를 발견하고 공격한 것뿐이다.”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에렐을 보며 케테르가 가슴을 쿵쿵 치며 답답한 듯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나보다 격이 낮은 상대한테서는 피해를 보지 않게 해두었는데 네가 그럼 나랑 동격이란 말이야?”
그러자 그녀의 옆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아스가 말했다.
“아니? 얘 나보다도 약한데? 그런데 언니랑 동격일 리가 없지. 뭐 착각한 거 아니야?”
아스의 말을 들은 케테르는 나를 레브를 바라보며 말했다.
“레브! 나 한 대만 쳐봐! 리미트는 풀지 말고!”
“오우! 그런 제안이라면 언제나 환영이지!”
레브는 바로 주먹을 꽉 쥔 채로 케테르를 향해 뻗었다.
쾅!!!
분명히 케테르에게 레브의 주먹을 닿았다.
하지만 케테르는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그 자리에 서서 에렐을 보고 있었다.
“이거 봐봐! 구원자라 해도 리미트를 풀지 않으면 내게 피해조차 못 입히는데 구원자도 아닌 네가 어떻게 내게 피해를 준 거냐고.”
그러자 에렐은 레브의 주먹을 보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누가 봐도 살살 때린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을 자신이 피해를 보지 않았다고 주장하는가? 그렇다면 좋다.”
그렇게 말한 에렐은 주먹을 쥐더니 힘껏 케테르를 향해 내질렀다.
퍼어어어억!!!
케테르의 복부에 다시 한번 꽂힌 그녀의 주먹을 따라 케테르의 복부에는 파장이 일었다.
“커흐으윽... 거봐... 너는 공격하면 내게 적중하잖아...”
“세게 공격했으니 적중하는 것이다. 저자도 내지르는 자세를 보면 절대 약한 자가 아닌 것을 그가 자신을 봐주며 공격했다는 사실도 모를 정도로 멍청한 것인가?”
그러자 케테르는 이를 악물며 뭐라 하였지만, 라시르가 우리의 사이에 끼어들어 케테르와 에렐을 말렸다.
“자! 일단 수확은 있었으니 의회로 돌아가서 마저 이야기를 나누죠? 여기서는 잠깐 멈추고요.”
그렇게 말한 라시르는 허공에 손을 뻗어 흔들더니 차원 균열을 열고는 말했다.
“다들 원탁 방으로 가서 이야기를 좀 나누죠.”
우리는 고개를 흔들었고, 나는 에렐에게 말했다.
“일단 나를 따라 의회로 가자. 에렐. 해야할 이야기가 꽤 있는 것 같으니까.”
에렐은 내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차원 균열 안으로 나와 같이 몸을 던졌다.
차원 균열을 통해 의회로 들어왔고, 우리는 그 커다란문을 통과해서 원탁 방으로 들어왔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 앉고, 남는 자리는 이그, 아스, 케테르가 대충 앉았다.
에렐은 내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가만히 붙어 서 있었는데 나는 상상으로 내 의자를 2인용으로 바꿔서 그녀가 옆에 앉기를 권했다.
그녀는 갑자기 생긴 의자에 놀랐지만 결국 내 손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았다.
모두가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한 라시르가 말했다.
“흠흠... 일단 성원님? 그 기억은 돌아온 것이 맞나요?”
나는 라시르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레이아였던 시절의 기억은 전부 떠올랐습니다만 딱히 흔들리거나 그런 이상은 없습니다. 마치 긴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은 정도에요.”
그러자 케테르가 파하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했다.
“파하하하! 그럼 구원자의 정신력이 그런 마족 시절과 똑같겠어? 한마디로 네가 그레이아의 기억을 먹어치웠을 뿐인 거지.”
에렐은 그 말을 듣고 내게 물었다.
“저 말이 정말인가? 그레이아? 정말 딱 그 정도의 기억인가?”
나는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말했다.
“미안해, 에렐. 나는 어디까지나 지금의 나인 성원이야. 그레이아는... 나지만 내가 아니지. 그래서 나는 너와 추억을 나눌 수 없어.”
잔혹한 말이지만 사실을 전해야만 했다.
여기서 그녀를 속이는 것은 그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행위다.
하지만 에렐은 고개를 저으며 내게 말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네가 그레이아였었다는 것은 바뀌지 않지 않는가. 어차피 내가 알던 그레이아는 여기 있다. 비록 네가 이제는 성원이라는 인격체라 할지라도 나에게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그레이아다.”
에렐은 그렇게 말하며 내게 꼭 안겼다.
“다시는어디로 가지 마라. 추억이야 다시 쌓으면 그만이다. 네가 어디로 사라지지만 않는다면 언제든지 쌓을 수 있는 것이 추억이다... 아니, 오히려 잘 되었다. 어차피 피와 살육으로 물든 추억을 무엇 하러 기억하겠는가. 지금부터 좋은 추억을 쌓아나가면 될것이다...”
뿌드득... 뿌드드드득...
익숙한 무언가 갈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하련을 쳐다보니 이빨이 갈려서 원탁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하련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보냈다.
하련은 그런 나의 제스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를 가는 것을 멈추질 않았다.
조용한 원탁에서 하련의 이가는 소리만이 울려 퍼지자 이그가 말했다.
“성원? 그래서 아내를 네 명째 들이는 기분은?”
“커헙...”
제대로 치명타로 적중한 그녀의 공격에 나는 순간 헛기침을 내뱉었다.
사실 언젠가는 더 늘어나지 않겠느냐고 막연한 생각을 하고는 있었지만 이건 그냥 늘어난 수준이 아니었다.
‘나를 4만 년도 넘게 기다린 여잔데... 이걸 찰 수도 없고... 이미 내가 그레이아가 아니라고 설명도 해주었는데도 이렇게 나오면... 어쩔 수 없나...’
그런 생각을 끝으로 에렐에게 진지하게 물어보기로 한 그때 케테르가 다시 외쳤다.
“야!사랑싸움 나중에 하라니까? 너희가 5p를 하건 애를 낳건 나랑은 관계없으니까 빨리 어떤 방식으로 격을 올렸는지 설명 좀 해봐!”
하지만 에렐은 케테르의 말을 무시한 채 내게 계속 뿔을 비비고 있었다.
나는 그런 에렐을 향해 물었다.
“어... 에렐 그니까... 지금까지 뭘 했는지 좀 알려줄래? 나도 궁금하거든? 거기에 별 상관은 없지만 저기 있는 분도 알고 싶어 해서 말이야. 응?”
내가 간곡히 부탁하자 에렐은 말하기 싫어하면서도 내가 부탁해서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에렐국을 세운 채 네가 말한 윤회의 굴레라는 것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제대로 된 정보가 없었지.”
“그래서 나는 단련하고 또 단련했다.어떻게든 더욱 강해지면 너를 만날 길이 열리리라 생각하며.”
에렐은 그렇게 말하면서 주먹에 힘을 주고 허공을 내리쳤다.
쨍그랑!!
“에렐국에서 500년간 수련만 하다 보니 어느새 이렇게 주먹을 강하게 내지르면 무언가 유리가 깨지듯이 깨졌지. 처음에는 무엇인지 몰랐다. 구멍도 작고 겨우 손 하나 들어갈 크기였으니까. 처음에는 그 구멍에 여러 가지 물건을 던져보며 실험도 해보았고, 결국 그러다가 구멍의 크기를 키워 나 자신을 집어던지게 되었지.”
“본능이었다. 이 구멍을 따라 어딘가로 가다 보면 너를 만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조그마한 희망에 몸을 맡겼지. 그 구멍에서 벗어나 보니 놀랍게도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마족의 종족 특성 중 하나였다.
일정 이상으로 강해지면 차원을 이동하는 능력.
이 능력을 이용해 마족들을 수많은 차원에서 온갖 사건·사고를 일으켰다.
그 능력을 에렐이 사용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놀라웠지. 우리 말고도 다른 생명체들이 다른 문화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그곳이라면 네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수십 년을 돌아다녀도 너의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결국 실망한 나는 다시 구멍을 열어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제야 내가 얻은 이 능력은 차원을 뛰어넘는 능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수많은 차원을 돌아다니며 윤회의 굴레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
“그러던 중 자신들을 신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수많이 모여있던 세계에 도착했지. 그들은 정말 자신이 신이 되는 것, 마냥 행성의 주민들을 부려 먹고 있었고, 나는 그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신 하나하나를 죽일 때마다 물어보았다. 윤회의 굴레를 아느냐고. 하지만 모조리 꽝이었다. 결국 마지막 남은 가장 강한 신을 죽일 때 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물어봤지. 윤회의 굴레를 아냐고.”
“그러더니 그 신은 살기 위해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이며 긍정하더군. 처음으로 찾은 단서에 나는 뛸 듯이 기뻐 그를 살려서 윤회의 굴레에 대한 정보를 가져오게 시켰다. 예상보다 크나큰 성과가 있었지.”
“윤회의 굴레는 실존하고, 차원 어딘가에 단 하나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윤회의 굴레에서 너를 찾지는 못해도 어딘가에 환생한 너에게 먹일 전생을 떠올리는 열매가 있다는 것 또한 알아내었다.”
“그 뒤로 너를 찾으면서 동시에 윤회의 굴레를 찾아 헤맸다. 일일이 전부 돌아 다녀가며 빠짐없이 찾아보았지.”
“그렇게 약 420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는 그제야 윤회의 굴레를 찾아낼 수 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