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6화 〉75.남자는 이해 못하는 것 (74/99)



〈 76화 〉75.남자는 이해 못하는 것

이그에게 갈굼을 당하던 대마왕이 말을  하자 내가 나서서 이그를 말렸다.

“일단 이야기는 들어봐야지. 그만해봐.”

내 말을 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런 나를 마치 백마  왕자님처럼 쳐다보는 대마왕은 이윽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좀 긴 이야기입니다.”

목을 가다듬은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으려고 무릎을 굽혔다.
나는 긴 이야기를 듣는  바닥에 앉아 듣기 싫었기에 창조로 그녀가 앉을 의자와 일행이 앉을 소파를 만들었다.
대마왕은 갑자기 생겨난 의자에 당황하였지만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고는 입을 열었다.


“지금으로부터  4만 년 전.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대륙이 피로 번졌었습니다.”

“당시에 저희 초대 님. 그레이아님은 어디에서나 볼 법한 부모 없는 마족으로 태어나 자신의 힘으로만 세력을 일구셨죠.”

“본인 고유의 능력과 강력한 신체 능력에 반한 강자를 숭상하는 마족들은 그레이아님에게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고, 이윽고 그분은 베기아를 완전히 통일하시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그런 그레이아님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큰 공을 세우셨던 마족이 바로 저분입니다.”

그렇게 말한 대마왕은 손으로 초상화에 그려진 어린 남자 마족을 가리키며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그 초상화로 쏠렸고, 대마왕은 말을 이어갔다.

“남겨진 기록에 따르면 그레이아 님께서 저분과 어렸을 적부터 남매처럼 자란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름이 아마... 에렐 이셨을 겁니다.”



두근두근


‘에렐...?’

그 이름을 듣자 무언가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내 반응을 보고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에렐이라는 남자 마족이 자신의 전생 중 하나였다고.

몸이 외치고 있었다.

‘근데 왜 그레이아라는 이름에는 아무런 반응이  오지?’

 전생의 이름에는 반응이 오면서 그레이아라는 마족 여성의 이름에는 아무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와중에도 대마왕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두 분은 항상 붙어 다니셨습니다. 어디서든 말이죠. 한창 세력을 일구던 시절에는  분의 이름만 나와도 적들이 도망칠 정도로 마족 역사상에서도손을 꼽으실만한 강력한 마족이셨죠.”

“그러던 중 큰 사건이 발생합니다. 세력이 순식간에 불어나면서 적의 첩자들이 대량으로 세력 안으로 들어왔던 것을 제대로 걸러내지 못하신 겁니다.”

“첩자들은 번번이  분의 암살을 실패했지만 어느 날 에렐님께서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지기 시작합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말이죠.”

“지금 와서 이야기하면 독을 썼느니 저주에 걸렸느니 말이 많지만,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저 에렐님이 한순간에 평범한 마족처럼 약화되었고, 그런 에렐님을 그레이아 님께서 지극 정성으로 돌보셨다는 이야기만이 남아있을 뿐이죠.”

“그럼에도 에렐님은 뛰어난 두뇌와 경험을 통해 저희 그레이아 세력에 최고 참모로서 활약을 하십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였죠.”

그녀의 이야기를 끊고 케테르가 말했다.

“첩자들이 에렐을 암살했군.”

케테르의 말에 대마왕은 고개를 끄덕이고선 말을 이었다.


“그 이야기는 지금도 모든 마족에게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치스트 세력과 결전을 앞두기 바로 전날. 그동안 기다리고 또 기다려왔던 첩자들이 에렐님을 대놓고 습격하여 죽이고 자살합니다.”

“그 장면을 눈앞에서 보신 그레이아님은 미쳐 날뛰기 시작하면서 단신으로 적진에 처들어가 치스트의 목을 베서 가져오시고는 에렐님 앞에 무릎 꿇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때 에렐님이 죽어가면서 그레이아님에게 하신 말은 지금도 수많은 마족이 로맨틱한 대사를 꼽으면 항상 1위에 드는 말입니다.”

잠시 목을 가다듬고 목소리를 중성적으로 바꾼 대마왕이 말했다.

“다시 태어나도 너와 함께할 것이다. 너와 함께한 내 인생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행복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러니... 울지 마라 그레이아. 네가 나를 찾아 준 그 날처럼 나 또한 너를 찾아 갈 테니. 울지 말고 일어서서 앞을 향해 나아가라. 너를 따르는 자들에게 승리를 선언해라. 어서.”

그렇게 말한 대마왕은 살짝 눈물을 글썽거렸다.

‘저걸 내가 말했다고?’

정확히는 내가 아니지만, 엄연히 내 전생이었다.
저 대사는 로맨틱하다면 로맨틱하고 오글거린다면 오글거리는 대사였다.
나는 아내들에게 똑같은 대사를 할  있을까 생각해보니 약간의 감정을 넣는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상황만 받쳐준다면...’

그 대사를 들은 여자들은 하나같이 손을 맞붙잡고 글썽거렸다.

‘이게 통한다고?!’

케테르가 목소리를 안 어울리게 덜덜 떨며 말했다.

“으아아... 저런 말을 하고 가면 나 같아도 찾아다닐 것 같아...”

그런 케테르의 말에 이그도 맞장구치면서 말했다.

“진짜로... 아니 오히려 너무한  아니야? 저런 말을 듣고 여자가 어떻게 자기를 싹 잊고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성원  진짜 못됐다.”

‘어이가 없네... 진짜...’

심지어 뒤에서 라시르는 눈물도 글썽이고 있었다.
오직 나와 레브만이 이 감정선을 이해하지 못해서 멀뚱멀뚱 여자들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나는 레브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게 이렇게 울만큼 슬픈 내용인가요?”

“나도 이해하지 못하겠군. 흔해 빠진 사랑 얘기 같은데 말이야.”

그러자 뒤에서 눈물을 제일 많이 쏟아내던 쿠르가 우리를 보며 삿대질했다.

“으이구, 이 화상들아! 너희는  감정이 없는 거야 뭐야?”

“아니... 그게...”

예상외로 격렬한 반응에 나는 자리로 돌아가 쭈그려 앉았다.
그런 나를 보며 하련이 조용히 내게 말했다.

“저거 다음에 나한테 해주면 안 돼? 우리 둘만 있을 때.”

“어... 그래...”

‘미치겠네... 진짜.’

순식간에 여자들의 마음을 홀려버린 성원(전 에렐)은 아내가 좋다면 못 해줄 것 없다고 생각하며 하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글썽거리던 눈물을  하고 닦은 대마왕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그레이아님은 베기아에 있는 모든 세력을 통합하고 거대한 하나의 왕국을세우셨습니다. 나라의 이름도 에렐님의 이름을 따서 에렐이라고 지었죠. 매년 에렐님이 사망하신 날에 국가 행사처럼 커다란 행사가 열렸고, 당시에 평화를 가져다준 에렐님을 기리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그레이아님은 평생 후계를 만드시지않으셨고, 에렐국이 건국된 이후 약 500년 뒤에 홀연히 모습을 감추십니다.”

“갑자기 사라진 그레이아님의 빈자리에 모두가 어안이 벙벙할 때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던 마족들이 자신들만의 세력을 이끌고 나가기 시작했고, 그렇게 에렐국은 역사 속에서 짧게 모습을 비추고는 사라졌습니다.”

“어르신들의 말을 따르면 당시에 모든 마족이 행복하고 풍족한 삶을 영위하였다 하시더군요...”

“그렇게 뿔뿔이 찢어져 버린 에렐국에는 아직 그때의 평화를 기억하며 모인 사람들이 있었고, 그게 바로 저의 가문. 네이그르입니다.”

“그 뜻을 이어받기 위해 저희 네이그르 가문은 열심히 움직였지만 결국 통합은 실패했고, 시간이흐르고 흘러 지금은 그저 강대한 세력이라 평가될 뿐 모든 마족을 통합하는 일은 꿈에도 못 꾸게 되었습니다.”


대마왕의 기나긴 이야기가 끝나고 주변을 돌아보자 아까의 여운이 남은 건지 눈물 콧물을 닦은 자국이 남은 여자들과 고개를 끄덕이는 레브가 보였다.

이그는 이야기가 끝나고는  멱살을 잡고 흔들더니 말했다.

“야 이 쓰레기 같은 놈아. 저렇게 말했으면 어떻게든 기억해내서 찾아갔어야지. 그동안 뭘 한거야?”

“아니, 그걸 왜 나한테... 보니까 전생도 그냥 전생도 아니고 한참 전인 것 같은데...”

“어휴, 어딘가에서 자기를 아직도 기다리고 있을 그레이아가 있는데도 이 새끼는 좆을 놀리다 못해 헬리콥터처럼 빙빙 돌리며 벌써 아내를 3명이나 뒀네! 아이고오...”

‘니가 할 말은 아니지 미친년아!’

나는 목구멍까지 넘어오려 하는 말을 다시 집어넣는 데 성공하고는 말했다.

“자, 나는 성원이고.저건 내 수많은 전생 중에 하나야. 누구 자기 전생 기억하는 사람 있어?”

당연히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거봐, 이걸 어떻게 기억하냐고. 너희도 알잖아 윤회의 굴레로 가면 전생에 대한 기억 탈탈 털려서 다시 태어나는 거. 그걸 왜 나를 탓해!”

생각해보니 조금 억울했다.

솔직히 영혼만 같지, 나는 성원이고, 쟤는 에렐이다.

그레이아가 사랑했던 것도 에렐이지 성원이 아니다.

물론, 지금까지 그레이아가 나를 찾아 차원을 헤매고 있다면 정말 대단한 일이고 집념이지만.

그렇다고 한들 내가 그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아닌가? 사랑하게 될 것 같기도 하고...’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초상화를 보았다.

‘어린 모습인데도 확실히 예쁘긴 하네...’

역시 전생의 나도 보는 눈이 높았기는 했나 보다.
그레이아의 외모는 아내 중 그 누구와도 꿇리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조금은 사랑하게 될지도...?’

그런 우리를 보더니, 대마왕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우리를 보며 물었다.

“저기... 저분이 에렐님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러자 케테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쟤 전생 중 한 개가 에렐인 것 같아. 아마도.”

그 말을 들은 대마왕이 기겁하며 나를 보며 무릎 꿇고 말했다.

“허억... 초대님의 친우님을 뵙습니다!”

나는 그 태도에 이마를 짚고 그대로 턱까지 쓸어내렸다.

‘너는 또 왜 그러냐...’

사실 이미 에렐이 내 전생 중 하나였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에렐이라는 단어에 이렇게 반응하지 않았을 거니까.

‘내가 전생의 여자를 빼앗은 다면 그건 NTR인가 아닌가...’

순수하게 궁금해진 나는 일단 한시라도 빨리  그레이아라는 마족 여성이 살아있다면 만나보고 싶었다.
그때 에빌다씨가 대마왕에게 물었다.

“혹시  그레이아라는 여자가 손을 대거나 사용했던 물건이 남아있을까?”

심지어  에빌다씨마저 두 눈이 붉은 것이 눈물을 흘렸나 보다.

‘이쯤 되면 그냥 남자들은 이해 못 하는 무언가가 있나 보네.’

에빌다씨의 물음에 대마왕은 잠시 고민하더니 기록 보관소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낡은 깃발을 하나 가져왔다.

“이건 에렐국을 건국할 당시에 그레이아님께서 직접 올리신 깃발입니다. 직접 사용하지는 않으셨지만, 손을 대신 적은 있을 겁니다.”

그 깃발을 받아들인 에빌다씨가 바로 독립 마법을 영창 하기 시작했다.

『마법의 주체자는 나 에빌다』



 모습을 보던 케테르는 경박하게 웃으며 말했다.

“꺄하하하하! 에빌다 아직도 독립 마법 영창 생략  해? 우주 최고의 마법사라는 이름이 울겠어! 꺄하하하하.”

그러자 옆에 있던 이그가 케테르의 머리를 내려쳤다.

쾅!!!



“꺄아아아아악!”

“제발 좀 닥쳐봐 동생아. 언니랑 막내 쪽팔리게 굳이 지금 그래야겠어? 속으로만 생각하라고 속으로만.”

‘역시 이그를 데려오는  정답이었네.’

이그를 안 데려왔으면 옆에서 온종일 깝죽거리는 케테르를 보고만 있어야 했을 것이다.
나는 다음에 이그와 섹스할 때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기로 마음먹고 에빌다씨를 쳐다보았다.



『기록을 파먹는 쥐들의 왕이여. 네가 먹은 기록의 파편을 내게도 나눠다오!』


번쩍!


그러자 깃발에서  부신 빛이 나타나더니 이내 사라졌다.
에빌다씨는 잠시 눈을 감더니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는 우리에게 말했다.

“일단 살아있는 건 확실한데... 좌표가...”

그러자 케테르가 물었다.

“좌표가 어딘데!”

에빌다씨는 조금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레비인데...? 성원이 폭주했던 곳...”

“뭐?”

뭐?

레비?

왜 거기에?

“아!”

나도 당황하고 모두가 당황했을 때 케테르가 이마를 '탁' 치며 말했다.

“내가 성원의 의식 세계에서 그녀를 만났을  성원이 있는 좌표를 찾아내서 바로 찾아갔구나!”

라시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말했다.

“당장 찾으러 가죠! 그분도 성원 님을 보고 싶어 하실 거예요!”

대체 왜 라시르가 저렇게 의욕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조용히 있어야겠다...

‘만나면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전 당신을 몰라요.}

{안녕하세요?}


{당신이 그레이아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좋은 인사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어느새 차원 균열을 만들어낸 이그가 내게 말했다.

“뭐해 성원? 빨리 가보자.”

“아... 네! 네!”

마족들을 대다수 잃은 대마왕이 불쌍했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미안해요!’

그렇게 마음속으로 그녀를 향해 사과를 전한 나는 일행들을 따라 이그의 차원 균열 안으로 몸을 던졌다.

“잠까아아안!!!”

균열 안으로 몸을 던지는  순간.
뒤에서 무언가 내 등을 붙잡는 느낌과 대마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슈우우우우우욱

“어?”

“어?”

균열 밖으로 빠져나온 우리가 본 것은 폭발하고 있는 우주였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이그에게 물었다.

“이그! 제대로 온  맞아?”

그러자 이그도 내게 다급히 대답했다.

“어! 분명히 알려준 좌표대로  건데? 여기가 레비 행성이야!”

 말을 들은 나는 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저... 저게 뭐냐...”

산산조각이 나버린 레비 행성이 있었다.

행성은 완전히 파편이 되어서 우주공간을 부유하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우...우와아앗! 여긴 어디예요!”

‘이런 미친.’

내 등 뒤에 매달려 자신의 발아래를 보고 있는 대마왕.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녀에게 외쳤다.

“여기는 왜 따라오신 겁니까!”

“아니!  산하 세력들을 전부 죽이셨잖아요! 그건 보상을 해주시든가 하셔야죠!”

“이익! 일단 돌아가 봐요!”

내가 그녀를 돌려보내기 위해 차원 균열을 열려던 그때.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뒤져!!!!]

허공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나며 그 사이에서 두 인영이 보였다.

“어? 아스?”

“어! 아스 언니!”

아스 언니?

라시르가 언니라고 칭할 사람은 몇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싸우는사람  한 명은 라시르의 자매라는 뜻.

“제가 레비 행성의 재생을 부탁드린 다섯째 언니예요! 그렇다면 싸우고 있는 것은...”

그녀의 말을 끝으로 내 시선은 그 반대쪽으로 갔다.
머리에 돋아난 뿔은 한쪽이 잘려있었고, 온몸은 피투성이였다.
머리카락은 피에 젖어서 붉은색이 되어있었고, 옷도 반쯤 찢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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