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74.갈굼의 신
차원 균열을 빠져나와 마주한 것은 광활한 우주였다.
우주임에도 불구하고 숨이 쉬어지는 게 아마 이그가 따로 수를 쓴 듯하다.
우주에 떠 있는 우리를 보며 이그가 말했다.
“그래서 이제 어디로 가야 해?”
이그가 묻자 케테르는 부은 얼굴로 이그에게 말했다.
“일단 1 베기아로 가자 언니. 그래야지. 정보를 모으기도 수월할 테니까.”
“알겠어.”
그렇게 말한 이그가 다시금 허공에 식물로 이뤄진 차원 균열을 만들고 말했다.
“1 베기아로 통하는 차원 균열을 열었어. 들어가자.”
그 말이 끝나고 우리는 다시 한번 균열 안으로 들어갔다.
탁! 탁! 탁!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고 시야가 돌아온 나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으음....”
“역시나 이런 광경이 제일 먼저 보이네.”
어디를 둘러봐도시체뿐이었다.
전쟁터 한복판처럼 보이는 곳에서 발에 치이는 시체를 차서멀리 보낸 레브가 말했다.
“그래서 이제 뭘 하면 되는 건가 의장?”
라시르는 시체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며 레브의 물음에 답했다.
“일단 행성의 역사 데이터를 받도록 하죠.”
그렇게 말한 라시르는 자신이 끼고 있는 팔찌를 손으로 만졌다.
우우우우웅...
기계음이 들리고 잠시 뒤 홀로그램이 반지에서 튀어나왔다.
거기에는 역시나 책상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는 리오가 보였다.
리오는 우리를 본 건지 라시르에게 물었다.
[역사 데이터를 달라는 거겠지? 잠시만 기다려 의장.]
그렇게 말한 리오는 잠시 화면 속에서 사라지더니 곧 나타났다.
라시르는 어딘가에서 사탕을 꺼내서 우리에게 하나씩 주었다.
꿀꺽
사탕을 먹으니 1 베기아의 역사 데이터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으음... 심하네...”
쿠르가 옆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윽고 다른 구원자들도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단 한 순간도 빠짐없이 피로 얼룩진 역사.
지성체들이 분쟁을 일으킨 순간부터 이 행성은 단 하루도 전쟁이 멈추는 날이 없었다.
“역시 전투 종족인 마족이 사는 행성답네. 저 멍청이들은 어디를 가든 항상 문제야. 저런 놈들 사이에서 슈엘같은 애가 나왔다는 게 안 믿겨 진다니까?”
라프키르는 질린 듯이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마족이라...‘
보통 판타지 세계와 연관이 많을 것으로 생각되는 이 종족은 실제로는 세계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문명에 영향을 끼친 적이 많았다.
전투 종족이라 불리며 태어날 때부터 강력한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는 이 마족이라는 종족은 특유의 마기를 몸에 두른 채 항상 전쟁터 한복판에 나타나 그 전쟁 자체를 즐기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리는 특이한 종족이었다.
그러니 이 마족이 모성인 이곳은 어떻겠는가?
오직 전투.
또 전투뿐이었다.
피와 살점이 튀기며 모닥불에 뛰어드는 불나방들처럼 자신들을 태우는 모습은 덧없는 하룻밤의 꿈을 보내는 모습 같았다.
“국가처럼 보이는 곳은 없네요. 세력이 존재하긴 하지만 국가로 보기에는 묘한... 일단 가장 큰 세력을 찾아가서 정보를 모아보는 게 좋겠어요.”
라시르의 말에고개를 끄덕인 우리는 역사 데이터 속에서 가장 큰 세력이 존재했던 동북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정말 이런 곳에 내 전생과 관련된 사람이 있다고?‘
아무리 달려본 보이는 것은 시체, 또 시체였다.
치우거나 태우지도 않는지 썩어가는 시체들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구더기들이 득실득실했다.
진심으로 단 한순간도 있기 싫은 행성은 이곳이 처음이었다.
어째서 구원자들이 내 말에 웃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이런 식으로 자신들끼리 파멸을 향해 달려간다면 행성 하나 두 개를 부순다고 하더라도 큰 상관이 없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죽은 자들의 명복을 비는 마음으로 푸른 초원을 떠올리며상상을 사용했다.
키릴의 방에서 봤었던 드넓고도 아름다운 초원.
그러자시체들이 사라지고 내 시야는 푸른 초원이 생겼다.
그 모습을 본 구원자들이 내게 말했다.
“우와, 무슨 전조 현상도 없이 아예 바뀌어 버리네? 진짜 사기다 상상이란 거.”
“대단하네요...”
“방금과같은 곳이라는 게 믿어지질 않는군.”
구원자들은 각자 감탄을 내뱉으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저 멀리서 거대한 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역사 데이터에서 봤던 가장 강대한 마왕이 산다는 성.
’분명 이름이...‘
“저게 역사 데이터에서 봤던 1 베기아에서 4천 년 가까이 집권을 하고 있는 대마왕 미르우탄의 성이에요.”
라시르의 말에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빠른 속도로 성을 향해 날아갔다.
쾅!!!
우리는 텔레포트도 사용하지 않고 성문을 정면으로 부숴버렸다.
깜짝 놀란 마족들이 하나둘 밖으로 얼굴을 내밀며 우리들을 쳐다보았다.
“뭐 하는 놈들이냐!”
그러자 케테르가 앞으로 가더니 외쳤다.
“비켜! 엑스트라한테 소모하는 시간이 아까워!”
그녀가 가볍게 손을 흔들자 그 마족은 목이 두 동강 난 채로 바닥에 쓰러져 움찔거렸다.
케테르의 행동으로 겁을 먹었을 것만 같았지만 마족들은 오히려 그 모습을 보고 달려 나와 우리에게 덤벼들기 시작했다.
“이것들이 정말! 행성째로 날려버리기 전에 비켜! 나는 너희 대빵과 할 이야기 있다고!”
케테르는신경질적으로 손을 저었고, 그런 손짓 한번마다 마족들이 대량으로 쓸려나갔다.
’귀찮게 구네...‘
나도슬슬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상상을 공격적으로 사용할방법이 없나 고민하던 나는 간단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우리 앞을 가로막는마족은 원래 없던 것.‘
그렇게 생각하며 상상을 사용하자 정말로 모든 마족이 사라져버렸다.
그런 나를 보며 케테르가 엄지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와우! 잘 사용하는데?”
마족들이 일순간에 사라진 모습을 보며레브가 투덜거렸다.
“낭만이 없지 않은가 낭만이. 사내라면 자신의 주먹으로 적을 분쇄해야 하는데 말이야...”
“늙은이 아니랄까 봐 말하는 꼴하고는~”
라프키르의 말에 레브는 푸훕하고 웃음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다른 멤버들은 몰라도 네가 나한테 그런말을 하면 안 되지 않겠나? 라프키르!”
그러자 라프키르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레브에게 말했다.
“뭐래! 속은 아직도파릇파릇한 20대 처녀거든!”
“지랄도 정도껏!”
“이이익!”
라프키르와 레브가 말싸움하는 사이 우리는 그새 본성 안으로 들어왔다.
에빌다씨는 답답한 것인지 짜증을 부리며 말했다.
“정보를 알아내야 해서 그냥 날려버릴 수도 없고... 답답하네.”
’그럼 그냥 성이 없으면 되는 거 아닌가?’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상상을 사용하자 성이 사라져 버린 채그 안에 있던 마족들이 땅으로 떨어졌다.
몇몇 마족은 떨어지는 와중에 중심을 잡고는 날개를 펼쳐 허공에 떴지만 그렇지 못한 마족들은 중력으로 인해 바닥에 박혀버렸다.
그래도 원체 몸이 튼튼한 것인지 죽은 마족은 몇 없었다.
“고마워 성원!”
내 깔끔한 대처에 감사를 표한 에빌다씨가 나를 향해 윙크하였다.
그리고 나는점점 느끼고 있었다.
‘이거... 너무 사기 아니야?’
물론 범위가 넓거나 대상이 많을수록 소모되는 힘이 급격히 늘어났지만 크게 문제가 될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던 중 위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웬 놈들이냐. 갑자기 내 성을 없애버리다니.]
오만하게 외치는 그 여성 마족은 대마왕 본인인지 허공에서도 왕좌에 앉아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새파랗게 어린 것이감히 누구를 내려다봐?”
이그는 심기가 불편한지 손을 위로 뻗고는 아래로 찍어 눌렀다.
[어? 꺄아아아아악!]
그 대마왕은 갑작스럽게 아래로 뚝 떨어지는 자신의 왕좌에 매달려 소리 질렀다.
다행히 정보를 얻어야 한다는 목적이 있었기에 왕좌는 사뿐히 바닥에 앉았다.
[이...이게 무슨...!]
알 수 없는 힘으로 바닥에 떨어진 대마왕은 당황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보며 전투태세를 취했다.
[너흰누구냐!]
이제는 익숙한 대사가 되려고 하는 물음에 이그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하이고, 너흰 누구냐? 야, 내가 니 친구냐?”
그렇게 말한 이그가 손을 내밀어 꽉 쥐자 대마왕의 몸이 비틀리더니 무언가에 붙잡힌 듯 이그 앞에 끌려왔다.
“누... 누구십니까!어째서 저희에게 이런 짓을!”
“누군지는 알 필요 없고 궁금한 거 있어서 물어보려고 왔으니까 대답 잘해라. 눈동자 굴릴 때마다 한 놈씩 죽일 거야.”
이그의 말이 끝나자 케테르가 앞으로 나와서 우리가 봤던 영상 속의 목걸이를 허공에 만들어내더니 물었다.
“아가야, 이런 목걸이 본 적 있니?”
그러자 대마왕은 마치 구명줄이라도 본 것처럼 다급히 말했다.
“아... 아뇨! 없는데요?”
“흐음... 진짜? 잘 생각해봐... 만약 진짜 없으면 넌 죽는 거야. 그러니 응?”
“히...히익!”
겁에 질린 대마왕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봤을 것이다...
어디선가...
곰곰이 자신의 오랜 인생을 뒤져보던 대마왕은 어디선가 그런 목걸이를 본 것 같다는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내 뇌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채 일단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일단 내뱉었다.
“초상화! 저희 가문에 내려오는 초대 님의 초상화에서 봤던 것 같습니다!”
“초대?”
“너희 초대의 초상화라 하면 우리가 어떻게 알아. 진짜 죽을래?”
이그와 케테르가 말하자 대마왕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저희 성에 있는 기록 보관소에 걸려있는 초대 님이 누군가와 있는 초상화에서 그 목걸이를 본 적 있습니다!”
“아.”
성... 없앴는데...
나는 성을 없앤 것을 후회했다.
“이런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귀찮아도 직접 들어갈걸.
그때 문득 든 생각.
‘아니 그냥 성을 없앴던 일 자체가 없었던 일이라고 상상하면 되지 않을까?’
나는 그 생각이 들자마자 바로 실행해 보았다.
쭈우우우욱...
없앨 때보다 배에 달하는 힘이 빠져나갔지만 놀랍게도 성은 그 자리에 나타났다.
“오! 되돌리는 것도 되네?”
“역시 최강의 개념! 야, 뭐하냐? 빨리 안내해.”
성이 되돌아온 것을 보며 감탄을 내뱉은 구원자들과 만나지 2분도 안 된 대마왕을 자기 꼬봉 마냥 대하는 이그.
대마왕은 억울한지 울상을 지으며 우리를 성안으로 데려갔다.
“이야... 너 좋은데 산다? 아주 그냥 행성은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어도 지 배때기는 불러야 되나 봐?”
“죄...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한데. 너 뭐가 죄송한지, 5초 내로 말 못 하면 오늘 윤회의 굴레로 빨려가는 거야. 자 센다. 5... 4...”
“잠... 잠시만요!”
걸어가는 도중에서도 이그는 대마왕을 군대 선임처럼 끊임없이 갈궜다.
‘불쌍한 녀석.’
먼저 겪어봤던 사람으로서 이그가 저러는 데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냥.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다.
‘버텨라...’
나는 대마왕이 어떻게든 살아남기를 빌며 그녀를 따라 성안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옆에서는 1초도 쉬지 않고 이그가대마왕을 갈구고 있었으며, 구원자들은 그 모습을 보며 낄낄거렸다.
그렇게 6분쯤 걷자 어느 방문 앞에 도착했다.
“여기냐?”
“네에... 여기에요...”
기운이 다 빠진 대마왕은 어느새 기가 다 빨린 채 힘없이 대답했다.
끼이이이이이익~
문을 열자 확실히 오래된 문이었는지 유독 소리가 크게 났다.
문이 열리자 우리는 곧바로안으로 들어가서 그 초상화라는 것을 찾았다.
“저기 있네!”
“어디? 봐봐.”
쿠르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커다란 초상화가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초상화라기보다는 사진에 가까운 퀄리티였다.
초상화 안에는 한 어린 여성 마족과 어깨동무를 하며 환하게 웃고 있던 어린 남자 마족이 있었다.
그 어린 여성 마족의 목에는 우리가 봤던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저거! 저거 맞지!”
“확실히 모양새는 똑같은데...”
그렇게 중얼거린 케테르가 대마왕에게 물었다.
“야, 쟤 살아있냐?”
그러자 대마왕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네? 아,아,아 아니요?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행방불명 되셨다고 하셨는데요?”
“흐음... 뻔한 스토리가 그려지네.”
“저도 그렇네요.”
나또한 그랬다.
사랑하던 남성 마족에게 선물 받은 목걸이를 간직하던 여성 마족은 어느 날 그를 잃고 만다.
그 뒤로 반쯤 미쳐버린 여성 마족이 남성 마족의 환생을 찾기 위해 먼 여정을 떠난다...
라는 뻔한 클리셰 같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럼 어딘가에 살아있겠네요?”
“그럴 수도 있고. 찾다가 진즉에 죽어버렸을 수도 있고.”
내 물음에 뻔하다는 식으로 대충 대답한 이그가 말했다.
“근데 문제는 그게 아니잖아. 만약 그 여자가 저 여자라면 어떤 방식으로 케테르에게 타격을 입힌 거지?”
“맞아! 나도 지금 그게너무 궁금해! 어떻게 나한테 공격을 적중시킬 수가 있지?”
나는 아까부터 거론되는 ‘케테르에게 피해입혔도르’가 궁금해서 에빌다씨에게 물어봤다.
“케테르에게 타격을 입히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거예요?”
곰방대를 피며 초상화를 바라보던 에빌다씨가 내 질문에 대답했다.
“그녀는 자신보다 격이 낮은 상대에게는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거든. 한마디로 케테르에게 타격을 입혔다는 것은...”
“나보다 격이 높거나, 나와 동격이라는 거야.”
케테르와 동격...
“그걸 지금 마족의 육체로 도달했다는 겁니까?”
“그렇지.”
오싹!
“미친... 이 정도면 제가 기억을 못 해도 만나면 사랑한다고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러자 하련이 울컥하면서 말했다.
“또? 또늘리게? 왜 아주 스퀴르처럼 100명 채우지, 그래?”
“갑자기 나한테 왜 그러나! 그건 어릴 적 했던 치기 어린 행동이었을 뿐이야!”
“그렇게 따지면 성원도 어려!”
“그럼 그럴 수 있지. 진짜 해보는 건 어떤가?”
“뭘 진짜 해보긴 뭘 진짜 해봐!”
스퀴르와 하련은 계속해서 투닥거렸다.
그때 눈치를 보던 대마왕이 우리에게 말했다.
“그... 저희 가문에 얽힌 이야기가 좀 있는데 해도 될까요?”
그러자이그가 손을 들더니 대마왕에게 말했다.
“그런게 있으면 진작 말해야지! 너 진짜 죽을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제는 이그가 한마디를 하면 자동으로 죄송합니다가 따라오는 대마왕이 너무나도 측은했다.
‘부디 살아남으렴...’
지금은 타락한 문명이든 뭐든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이그의 갈굼을 당하는그녀가 불쌍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