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29.미친련
나를 껴안고 있는 하련의 몸이 멀어진다.
그녀의 위로 덕분에 부서지려고 하는 맨탈을 부여잡을 수 있었다.
하련은 나를 보며 웃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서로 한번씩 창피한 모습을 보여줬으니, 비긴 거네?"
나를 위로하기 위해 농담을 하는 그녀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고마워, 하련."
그녀에게 진심을 담아 감사를 표했다.
이 곳에서 만난 인연들이 나를 버티게 해주는 버팀목이 되어 나를 쓰러지지 않게 도와주었다.
나를 이해 해주는 프레이야와 하련을 만나지 않았다면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내가 책임지기로 한 성아가 없었다면 지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키르케를 만나서 각오를 다지지 않았다면 죄책감에 사로잡혀 절망했을 것이다.
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인연인가.
그들과의 인연을 하나하나 되새기며 일어날 수 있었다.
"이제 가자, 성아를 데려 와야지."
하련은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엘븐가드로 가자."
우리는 손을 마주 잡고 엘븐가드로 천천히 떨어졌다.
나는 하련을 보며 말했다.
"하련."
"응?"
"너를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나는 프레이야 또한 포기할 수 없어."
이기적인 말이다.
두 명의 여자를 모두 가지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내 말을 들은 하련은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싱긋 웃으며 내게 말하기를.
"훌륭한 남자가 많은 여자를 안는 것은 당연한 일이야."
"성원 같은 남자에게 여자가 생기는 것은 자연의 이치와도 같지."
수많은 가상 세계를 돌아다녔지만 아직도 내 정체성은 현대에 멈춰있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말을 충격적으로 다가 오는 것이었다.
"내가...그럴 자격이 있을까?"
"둘 모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혹시라도 프레이야와 하련, 둘다 상처 받게 해서 나를 떠나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둘이 나를 떠나는 게... 너무 두려워..."
하련은 마주 잡은 손을 움직여 깍지를 끼며 말했다.
"성원, 나는 너를 떠나지 않아."
"항상 너에 곁에 있을거야."
"무엇보다..."
하련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누구보다도 너를 사랑한다는 자신이 있는 걸."
"그 누구에게도 이 마음 만큼은 밀리지 않아."
"설령 너가 더 많은 여자를 만들어도 나는 너와 함께 할꺼야."
그녀의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었다.
나란 놈도 참 한심하기 짜기 없는 놈이었다.
더 많은 여자를 만든다는 말에 반박할 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확실히 프레이야같은 인연이 더 생기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어느새 대기권에 진입하자 발 아래에는 넓은 초록색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정확히 엘븐가드 위에서 내려온 우리는 어느새 엘븐가드의 위에 있었다.
탁 탁
나와 하련이 착지하자 엘프들이 나와 우리를 쳐다 보았다.
웅성 웅성
이상하게도 엘프들은 무언가 바쁘다는 듯이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글쎄... 잠깐만... 이건?"
하련은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닫았다.
하련이 고민할 때 취하는 자세를 취하고 서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무언가 심각한 얼굴로 말없이 걷는 그녀를 보며 나는 뿌리를 향해 걸어갔다.
생각한 것과는 다른 반응에 김이 샜다.
마치 우리의 등장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는 것처럼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엘프들에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있었다.
이상한 상황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프레이야를 찾아 세계수의 뿌리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엘프들이 갑자기 우리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이게 무슨 짓이지?"
나는 프레이야와 성아를 보지 못하게 하는 그들의 행동에 살짝 열이 받아 싸늘하게 말했다.
엘프들은 그런 나의 반응을 보며 침을 꿀꺽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어머니께서 이 곳에 내려오신 상태입니다... 후에 찾아 와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어머니?
어머니는 갑자기 무슨 어머니란 말인가.
나는 이해되지 않는 말에 인상을 찌뿌리며 말했다.
"어머니가 누구...."
짝!
그때 옆에서 하련이 손뼉을 치면서 깨달은 듯 말했다.
"아! 이 기운은!"
"아는 사람이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세계수 그녀가 잠시 내려온 것만 같네."
"뭐?!"
세계수?
내가 아는 그 세계수?
잠시 혼란스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내가 아는 그 세계수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하련에게 물었다.
"내가 아는 그 세계수 말하는 거야?"
"어... 주기 상 한번 올 때가 되기는 했었지. 근데, 왜 우리한테 온 거지?"
그때 엘프 무리 뒤에서 프레이야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죠?"
그렇게 말한 프레이야는 엘프 무리 사이에서 앞으로 걸어왔다.
나와 하련을 발견한 프레이야는 환하게 웃으며 내게 뛰어왔다
"성원씨!!!!!!"
"프레이야!!!"
나도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
나보다 키가 작은 프레이야는 땅에서 발이 떨어진 채로 내 몸에 매미처럼 매달렸다.
그 충격으로 그녀의 신발이 바닥에 떨어져 데구르르 굴러간다.
프레이야는 바뀐 것이 없다는 사실에 기뻐, 그녀에게 물었다.
"오랜만이야 프레이야! 잘 있었어?"
사실 시간을 돌렸기에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프레이야에게는 근 1달 가까이 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프레이야는 내 볼에 자신의 볼을 문대면서 혀 짧은 소리로 대답했다.
"뎡먈...녀무 느져따구요!"
그렇게 말하고 서는 문대던 얼굴을 때서 볼을 크게 부풀린 그녀를 보니 햄스터가 연상 되었다.
나는 품에 안겨서 애교를 부리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미안... 성아는 어디있어?"
"어... 그게..."
프레이야는 말 끝을 흐리며 삐찔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내 품에서 내려와 땅에 떨어진 신발을 다시 주섬주섬 신더니 내 손을 잡고는 말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요! 안에 성원님도 깜짝 놀라실 만한 분이 와 계셔요!"
프레이야의 반응을 보니 진짜 세계수가 맞는 듯 하다.
살짝 뒤로 고개를 돌려 하련을 보니 하련의 표정은 프레이야에게는 관심 없는지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미 프레이야를 인정했기에 딱히 질투하는 듯 보이는 행동도 보이지 않으니 내가 상관할 부분은 아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프레이야를 보며 말했다.
"알겠어, 일단 들어가자."
내 손을 잡고 달려가는 엘프 여왕의 권위는 땅바닥에 던져버린 프레이야의 귀여운 행동에 절로 웃음이 지어진다.
어느 새 뿌리 앞에 도착하니 수많은 엘프가 뿌리에 모여 있었다.
엘프들을 각양각색의 자세로 뿌리 쪽을 향해 기도하였다.
그러고 있던 도중 프레이야와 내가 나타나자 흠칫 놀라며 자연스레 뿌리 안으로 들어가는 문 앞을 향해 길을 열었다.
끼이이이익
문이 열리고 내부의 아담한 방이 보인다.
그리고 그 곳에는...
"아하하하하!! 하지 말라고오오오!! 아하하하하!!!"
"흐흐... 여기냐? 여기가 간지러운 게냐?"
성아의 양 겨드랑이에 손을 넣은 채 이리저리 휘저으며 간지럼 피고 있는 한 여성이 보였다.
발끝까지 올 정도로 기다란 연녹색 머리카락, 태양빛이 반사되어 보이는 것 마냥 찬란하게 빛나는 눈동자.
온 몸을 나뭇잎으로 가리고 있는 모습이 굉장히...
'음... 좋네.'
시각적으로 큰 만족감을 느낀 내 시선을 느꼈는지 여성은 뒤를 돌아보았다.
"어! 련 아냐? 이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아하하하하하!"
상당히 밝은 성격으로 보이는 호탕한 웃음이었다.
하련은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세계수에게 인사했다.
"슬슬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우리 쪽으로 올지는 몰랐네?"
그 말을 들은 세계수로 추정되는 여성은 다시금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하하하! 아니 글쎄 새로운 놈이 들어왔다 해서 바로 보려고 뛰어왔지!"
그러더니 나에게 천천히 다가온다.
킁킁
'좋은 냄새...'
온몸에서 풍기는 달콤한 꽃 내음이 내 후각을 마비 시킨다.
달콤한 꽃 내음에 절로 입이 헤 벌려지자 하련은 내 뒷덜미를 잡아 자신의 뒷 쪽으로 옮겼다.
그러고 나서는 내 앞을 가로막더니 세계수에게 말했다.
"건들지 마, 성원은 내꺼야."
그 말을 들은 세계수는 벙찐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크게 웃었다.
"아하하하하하하하!! 그 철벽녀가 드디어 지 짝을 찾았구만!!! 그래서 어디까지 했는감? 역시 거기까지?"
슥 슥 슥
그렇게 말하고 나서는 왼손으로 고리를 만들어 그 사이로 오른손에 검지 손가락을 넣었다 뺏다 하는 모습에 나는 적잖이 충격을 먹었다.
'이게... 세계수...? 내가 가지고 있던 세계수의 이미지는 대체...'
항상 엘프들에게 듣기로 세계수는 굉장히 자애롭고 위엄 있는 존재로 표현 되었기에 머리 속에 형성된 세계수의 이미지가 있었으나.
실제로 세계수를 만나니 그 이미지가 와장창하고 모조리 깨져 버렸다.
하련은 얼굴을 붉히더니 세계수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빡하고 때리고는 말했다.
"이...이 미친년아! 성아도 있는데 뭐 하는 거야?"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바닥에 쓰러진 세계수의 이마에서 증기가 올라온다.
이윽고 세계수는 바닥에서 빠르게 일어나더니 뒤로 달려가 성아를 껴안고는 말했다.
"으... 손바닥 진짜 드럽게 맵네. 농담도 못해? 그지 성아야?"
그제서야 성아의 모습을 제대로 보게 된 나는 깜짝 놀랐다.
마르고 관리되지 않던 과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성아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살을 찌우고 예쁘게 꾸민 성아는 놀랄 만큼 귀여웠다.
무엇보다도...
"하련...내 눈이 이상한지 성아가 너무 크게 보이는데?"
소녀에서 훨씬 성장한 성아는 나이로 치면 중학생은 되어 보였다.
"성아야...? 혹시 성아 맞니...?"
나는 성아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성아는 나를 바라보더니 울먹거리며 세계수의 품을 탈출해 내게 달려와 안겼다.
"스승님!!! 저 언니가 계속 저 괴롭혀요! 힝..."
성아는 세계수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손을 흔들었고 그런 성아를 보며 세계수는 한쪽 눈을 뒤집어 까고는 혀를 내밀었다.
"베에... 괴롭힌게 아니라 예뻐 해준 거거든?"
도대체 저 세계수는 어디까지 첫 인상을 망가뜨리려는지 온갖 유치한 짓을 다했다.
그건 그렇고 확실히 성아를 안아보니 성장 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키도 커졌고 몸무게도 늘었다.
슬슬 젖살도 빠지는 것처럼 보였고, 무엇보다 조금 튀어나온 가슴이 그걸 증명했다.
나는 세계수를 향해 말했다.
"애한테 무슨 짓을 한겁니까?
세계수는 손짓으로 바닥에서 식물들을 자라게 해 소파 모양으로 만들고는, 그 위에 누워 아버지들이 TV보는 자세를 취하였다.
그러고는 옷 안에 아니, 사실 옷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나뭇잎 안에서 어디서 꺼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담배처럼 보이는 것을 꺼냈다.
손가락으로 불을 붙힌 뒤 담배를 한 모금 빨고는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나에게 말했다.
"후우우... 열매 몇 개 맥인게 단데?"
저 미친년은 세계수라는 년이 담배를 쳐 피네.
아니,잠깐만?
열매?
"미친, 설마."
그녀는 내 말을 듣고는 그 설마가 맞다는 듯이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양손을 자신의 볼에 대고는 말했다.
"아니, 애가 귀여운게 너무 내 취향이라 말이지~ 그만 귀여움에 홀려서 홀라당 줘버렸달까? 아하하하하!"
미친련...미친련...미친련...
'손에 있는 담배라도 없애고 그러던가.'
정말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이 없었다.
세계수는 진심으로 상상 이상의 미친년인 것이 분명했다.
'세계수가 열매라고 할만한 것은 하나밖에 없지...'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세계수에게 말했다.
"세계수의 열매를 먹인 겁니까...?"
성아가 이렇게 성장 할만한 이유는 세계수의 열매 말고는 없었다.
세계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쩝... 어차피 요즘 먹일 년도 거의 없어서 썩어 넘쳐 가지고, 니들 가져다 주던가 동생년놈들에게 가져다 주는 거 제외하고는 죄다 버리고 있단 말이야."
진짜 미친련...
남들은 없어서 못 먹는 세계수 열매를 죄다 버리고 있단다.
그렇게 말한 세계수는 허공에 손을 넣더니, 영롱한 붉은 빛의 열매를 두 개 꺼내서 자기가 한입 베어 물고는 한 개는 나를 향해 던졌다.
"자, 옛다 이거나 먹어라."
휙~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세계수의 열매를 받은 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하련에게 물었다.
"'저거' 진짜 세계수 맞아? 너가 착각한 거 아냐?"
하련은 굉장히 슬픈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진실이야... 어째서 저딴 년이..."
의외의 공감대가 생긴 측은한 눈으로 동시에 프레이야를 쳐다봤다.
프레이야는 그동안 세계수의 기행을 많이 겪었는지 딱히 당황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나와 하련이 빤히 쳐다보자 부끄러운 듯 고개를 홱 돌렸다.
그 모습을 본 세계수가 프레이야에게 말했다.
"저 저 저 못된 년 쪽팔린다고 고개 홱 돌리는 거 보게? 야, 너는 니 어미가 부끄럽냐?"
진짜 생긴 거는 멀쩡하면서 아니, 예쁘게 생겨서는 말투 꼬라지는 50~60대 아저씨들 말투다.
프레이야는 진심으로 세계수가 부끄러운지 얼굴이 아니라 귀까지 빨개진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 그건 아닌데요..."
"야! 나 때는 말이야~ 울 아부지한테 깝치면 뒤지게 쳐맞았어! 알아? 으휴, 요즘 것들은 하여간..."
'불쌍한 프레이야.'
자기가 평생을 모시던 종족의 신이 저따구면 누가 슬프지 않을까?
그녀의 화끈거리는 얼굴에서 착잡한 감정이 느껴진다.
'후...'
이런 세계수를 보기 위해 밖에 모여서 기도 중인 엘프들을 생각하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에 손을 얹어 꾹꾹 누르며 말했다.
"진짜 어지럽네..."
하련은 내 옆에 와서 그런 나를 이해 한다는 듯이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는 나를 위로했다.
"원래 저런 년이니까, 그냥 익숙해지는게 좋아... 의장도 포기한 문제니 어떻게 해볼 생각은 하지 말고..."
라시르마저 두손 두발 다 들었다는 사실은 한번 더 내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그렇게 해서 내가 내린 결론은
'걍 생각하지 말자.'
더 생각해봤자 내 골만 아플 뿐이었다.
나는 프레이야와 이야기 할 것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서는 그녀에게 물었다.
"프레이야."
"네?"
얼굴을 붉힌 채 세계수의 라떼송을 듣고 있던 프레이야는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것 마냥 환하게 웃으며 내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