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24.자애의 신, 키르케
아이언쓰론에서 벗어나 하련과의 정사 덕에 쌓인 정신적인 피로를 풀기 위해 평원에 자리를 잡았다.
마법으로 대충 모닥불을 만들고, 아공간에서 침낭을 꺼내 대충 몸을 덮은 뒤, 평원에 누워 위를 바라보니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이 보였다.
별들은 선명하게 빛을 내고 있었고, 하늘 높은 곳에 떠있는 그믐달은 그보다 더 밝은 빛을 지상을 향해 내리쬐고 있었다.
"좋다..."
인간들의 탐욕이 만들어낸 지옥도와 같은 크로울리 제국과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금속으로 요새를 꽁꽁 싸맨 아이언쓰론을 보고 왔더니 이런 아름다운 밤하늘을 바라보며 누워있는 지금이 너무 좋았다.
"이제 잘까..."
정말 오랜만에 잠이 쏟아지는 밤이였다.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은 나는 어느새 깊은 수면 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휘이이이잉~
휘날리는 바람 소리에 눈을 뜨니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모닥불을 피운 흔적을 깔끔히 치우고 침낭을 클린 마법으로 이물질을 제거 시킨 뒤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이제 신성 왕국으로 가야 할 시간이다.
신성 왕국은 엘븐가드로부터 북동쪽에 아이언쓰론에서부터는 동쪽에 위치한 방향에 있었다.
신선 왕국의 영토는 아이언쓰론과 비슷한 정도의 크기였다.
엘븐가드 주위를 감싸고 있는 대삼림과 아이언쓰론의 돌산, 마지막으로 드래곤들이 모여 있다는 드래곤 협곡으로 둘러 쌓인 난공불락 같은 곳에 위치했다는 특성과 신이 보호하는 나라라는 점 때문에 그 어떤 국가도 신성 왕국에 전쟁을 걸어본 적은 없었다.
웜 홀을 쓰면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지만, 어차피 뛰어가도 그렇게 큰 속도 차이는 안 나기에 나는 최대한의 속도로 달렸다.
아이언쓰론에서 출발 한지 약 1분이 지나자 어느새 신성 왕국처럼 보이는 곳이 보였다.
제국처럼 커다랗지 않은 영토로 인해 빠른 속도로 신성 왕국의 수도를 찾을 수 있었다.
엘븐가드에 있는 프레이야와 성아도 보고 싶었기에 최대한 빠르게 평가를 마치고 하련에게 가고 싶었다.
마치 시골에 온 듯 아기자기한 크기의 순백색의 집들과 크지는 않지만 작다고는 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를 지닌 신전이 눈에 들어온다.
마나 파장을 퍼트려서 영토 곳곳을 살펴보아도 딱히 문제 될만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애초에 성국인데 윤리, 도덕 항목에서 걸릴 리가 없지.'
반전은 없었다.
성국은 깨끗했고 사람들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같은 인간이 세운 나라임에도 제국과 확연히 다른 모습에 조금 마음이 따뜻해졌다.
속도를 늦추고 성국의 수도처럼 보이는 곳의 길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자! 오늘 새벽에 바다에서 잡아온 싱싱한 물고기입니다! 한번씩 보고 가세요!"
"대삼림에서 채취해온 사과입니다! 향이 아주 좋아요!"
"아이언쓰론에서 제가 직접 받아온 드워프제 농기구입니다! 날이 아주 잘 들어요!"
"닭꼬치 맛 좀 보고 가십쇼! 맛이 기가 막힙니다!"
시끌벅적한 시장 골목에는 다양한 장사꾼들이 물건을 팔고 있었다.
대삼림과 아이언쓰론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니 두 국가와도 교류가 있는 듯 하였다.
"평화롭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 평화로움을 만끽하며 시장 골목을 걸어가던 그때,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봐! 이봐! 총각! 일로 와서 과일 한번 잡숴봐!"
과일을 팔고 있는 아주머니가 나를 향해 손짓을 하며 말했다.
나는 나를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물었다.
"저 말이십니까?"
손가락으로 나를 가르키자 아주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과일가게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딱 보아하니 외국인이구만! 와서 사과 한입 드셔 봐!"
기운 넘치는 아주머니는 나를 향해 사과 하나를 내밀며 말했다.
나도 출출하던 차라 사과를 먹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기에 포기할려고 하였다.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가진 돈이 없습니다. 배려는 감사합니다."
좋은 마음으로 권한 것이기에 나는 정중히 사양하려 했다.
아주머니는 내 말을 듣더니 씨익 웃으며 손에 든 사과를 내 품 안으로 던졌다.
"그냥 먹어 보라고 주는 거야! 보아하니 성국은 처음인 것 같아 보이는데 외부인의 시선으로 처음 본 성국은 어때?"
"다들 행복해 보이는군요."
형식 상 하는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아이들은 시장 골목 사이를 웃으며 돌아다녔고, 장을 보러 나온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넘쳤다.
나까지 흐뭇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지금 중앙대륙 쪽에서는 제국과 드워프,엘프 연합이 서로 전쟁을 하고 있다던데 그게 정말 인감?"
아주머니는 전쟁이라는 것에 치가 떨리는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주머니에게 말했다.
"예, 지금 크로울리 제국과 엘븐가드,아이언쓰론 연합이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제국 쪽에서 대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아이언쓰론에 침공할 계획이라더군요."
내 말을 들은 아주머니는 놀란 얼굴을 하며 내게 말했다.
"에그머니나! 그게 정말이여? 큰일났구만... 애꿎은 젊은이들만 또 죽어 나가겠어. 쯧쯧쯧..."
아주머니는 그 후 제국이 얼마나 욕심이 많은 가에 대해 열변을 토했고, 슬슬 지겨워진 나는 대화를 끝내기로 했다.
아주머니는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어서 고맙다며 가는 길에 먹으라고 사과를 두 개 더 주셨다.
왼손에 사과, 오른손에도 사과를 들고 오른손에 있는 사과를 아삭아삭 씹어 먹으며 걸어가던 도중, 저 멀리서 신전처럼 보이는 건물이 보였다.
나는 이왕 성국에 온 김에 이 세계의 신을 한번 보고 가자는 마음이 들어 신전으로 다가갔다.
신전은 출입을 제재하는 병사 같은 것은 없었고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들고 있었다.
신전으로 들어가니 너무 크지 않고 적당한 크기의 공간에 좌석들이 나열되어 있었고, 그 좌석에 앉은 사람들이 가장 앞에 놓여져 있는 신상을 향해 기도드리고 있었다.
'저게 성국을 수호하는 신인가...'
온화한 얼굴을 한 채 조그마한 카나리아 같아 보이는 새를 품고 있는 신은 어딘가 자애로운 분위기가 풍겼다.
신의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던 도중 이였다.
갑자기 주변이 모두 조용해진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신상에서 시선을 때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모든 것이 멈춘 듯이 움직이지 않는 모습에 본능적으로 시간이 멈췄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짓을 할만한 자는...'
[안녕하세요?]
조그마한 사내 아이가 나를 보며 말했다.
신상의 남성이 어렸을 때의 모습을 가져다가 놓은 것만 같은 모습에 나는 이 소년이 성국을 수호하는 신인 것을 깨달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소년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당신이 성국을 수호하는 신이십니까?"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당신은 저보다 훨씬 격이 높으신걸요.]
당연히 프로티아라는 한 세계에서 태어난 이 작은 신은 온 차원을 돌아다니는 나보다 격이 낮았다.
라시르가 말하기를 각 세계에서 만나는 신이라는 존재들은 웬만하면 적으로 두지 말라고 하였기에 나는 호의적으로 소년을 대했다.
"그러고 보니 이름을 듣지 못했네, 이름이 뭐니?"
먼저 저 쪽에서 편하게 하라 했으니 편하게 말하기로 했다.
[키르케에요! 자애의 신, 키르케.]
자애라... 확실히 그의 신상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분명히 자애였다.
하지만 지금 키르케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신상보다도 무미건조했다.
"저 신상이 만들어졌던 때보다 신앙이 줄어들었구나."
[네... 훨씬 많이요...]
키르케는 시무룩한 얼굴로 답했다.
세계에서 태어나는 신이란 존재는 사람들의 믿음에 의해서 태어난다.
그들은 라시르가 믿는 실제 '신' 과는 다르게 믿음으로써 만들어진 존재들이었다.
사람들의 설화, 소문, 전설이 쌓이고 쌓여서 신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만들고 생명을 불어 넣는다.
그렇게 해당 신에 대한 믿음이 쌓이고, 종교가 창설되면 그제서야 신은 태어난다.
사람들의 신앙을 먹으며 살아가는 신은 행사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신앙에 비례했다.
신앙이 높으면 높을수록 물질계에 행사할 수 있는 힘도 늘어났고, 그와 반대로 신앙이 부족해지면 힘의 행사는 고사하고 자신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키르케가 신상의 모습이 아닌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신앙이 얼마나 줄어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원인은... 또 제국인가...'
보통 일반적으로 전쟁을 겪으면 그 위기를 견디기 위해 신앙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달랐다.
전쟁을 겪은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점점 냉혹해지고 현실적으로 변한다.
피가 튀기고 살점이 난무하는 끔찍한 전쟁 속에서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신이라는 존재가 구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버리기 때문이다.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온갖 종교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그에 따라 신이라는 존재들도 하나둘 소멸 되어간다.
아마 제국에서 키르케를 믿는 신자들이 다수 사라졌을 것이고, 그 결과가 지금의 키르케다.
나는 키르케를 향해 물었다.
"전쟁 때문에 신앙이 줄어드는 게 싫으니?"
그러자 키르케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대답했다.
[줄어드는 신앙보다도 줄어들어 가는 사람들이 더 안타까워요... 저는 신인데 왜 전쟁을 멈출 수 없는 걸까요?]
[가끔 성국 안에서 신에 대해 표현하는 것을 들어보면 굉장히 전지전능하고 완벽한 존재에요...]
[하지만 현실은 달라요... 저는 저들이 성국 밖에서 서로 죽고 죽이며 증오를 키워가는데도 이곳에 갇혀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저는 정말... 신이 맞을까요...?]
키르케는 자신의 무능함을 한탄하고 있었다.
신이란 것이 가져오는 무게감, 자신을 믿어주는 신자들의 믿음을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는 절망감들이 키르케를 서서히 좀먹고 있었다.
나는 그런 키르케가 안타까워 키르케의 조그마한 머리에 손을 얹고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키르케,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주렴. 너는 언제나 그랬듯이 모든 이들을 자애롭게 감싸 안아주면 된단다. 제국의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해결할 거야, 그러니 너무 그렇게 자책하지 마렴."
키르케는 땅을 향해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나에게 말했다.
[정말... 전쟁을 멈출 수 있어요?]
"물론,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행동할 꺼야. 아마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겟지."
그 말을 들은 키르케는 울상이 되어 내게 말했다.
[모두... 죽이실 생각이신가요?]
이 착한 자애의 신은 생명이 죽어 나가는 것을 엄청나게 꺼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와서 심판을 멈추기는 불가능했다.
나는 키르케의 머리를 한번 더 쓰윽 쓰다듬고는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게 우리의 일이란다. 이 프로티아 행성 밖에 존재하는 또 다른 수많은 세계들을 위해서는 해야만 할 일이야."
우주에는 부피가 있었다.
물리적인 부피와는 다르게 그것은 정신적인 부피를 말한다.
'신'이 수많은 우주를 만들 때 사용한 방법은 바로, 자신의 수많은 정신 세계를 분할하여 각 우주마다 배정 해주는 일이었다.
쪼개지고 또 쪼개져 너무나도 작아진 '신'의 정신은 '신'이라는 존재의 무한한 양의 정신으로도 전부 감당하지 못 할만큼 많은 우주를 만들었다.
'신'은 항상 모든 세계를 지켜본다고 라시르가 말하였다.
우리가 행동하는 것, 느끼는 것 하나하나를 '신'은 전부 볼 수도 느낄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렇기에 온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은 '신'의 자식이나 다름 없다는 것 이였다.
모든 지성체들의 삶을 느낀다는 것은 결국 그 존재의 인생을 같이 살아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정신을 너무나도 잘게 쪼갠 대가였을까?
문명이 타락하고 썩어가는 과정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인과율은 모두 '신'이 감당하여만 했고, '신'의 정신은 조금씩 무너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한 고통 속에서도 신은 자신이 만든 수많은 우주와 생명들을 포기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자신이 직접 키운 자식과도 같은 라시르와 형제자매들에게 말했다.
다양한 문명에 뿌리를 잡고 모든 지성체들이 잘못된 길을 걷지 않게 해달라고.
라시르와 형제자매 모두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을 나눠주어 모든 문명들이 올바른 길을 걸어가게 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게 하였다.
라시르가 받았던 것이 바로 개념을 다루게 만드는 힘, '칭호' 였다.
라시르를 제외한 형제자매들도 다양한 힘을 받았다는데, 그것까지는 라시르에게 설명을 듣지 못하였다.
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우울해 하고 있는 키르케를 향해 말했다.
"자애를 나타내는 신인 너에게 우리의 학살은 절대 좋게 보이지 않겠지. 하지만 그들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단다."
이 조그마한 신이 우리를 이해 해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해하지 못하여도 좋았다.
하지만 키르케는 내게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한 일을 계속하면 망가질 거에요...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아무리 강대한 힘을 가져도 정신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나는 키르케를 향해 웃어 보이며 말했다.
"괜찮아, 다 알고 하는 거니까, 견딜 수 있어. 인간은 너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단다."
처음 죽어서 스퀴르를 만났을 때 들었던 이야기였다.
아직 스퀴르가 보고 들은 경험을 따라가기에는 멀었지만...
'이제 조금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스퀴르가 말한 인간은 생각보다 강하다고 말했던 의미를 서서히 깨달아 가고 있었다.
어느 덧 주변의 공간이 진동하며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한계인 것 같아요. 부디 당신의 마음에 자애가 깃들기를...]
키르케는 나를 위해 기도하며 서서히 모습을 감췄다.
"그래, 키르케 너의 마음에도 평온이 깃들기를..."
살아 생전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신에게 기도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