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20.하 련의 진심
축제는 시끄럽지만 즐거웠고 나와 하련도 즐겁게 보냈다.
사실 드워프들은 우리를 핑계로 축제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자기들끼리 잘만 놀았다.
신체 활동을 모두 통제 가능한 나와 하련 이었지만 술을 마심에 있어 취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은 동일한지 일부러 취기를 방출하지 않고 맥주를 마셨다.
탕!
하련과 같이 한 테이블에 앉아 맥주와 고기를 먹던 중 하련이 탁자 위로 맥주잔을 세게 내려쳤다.
나는 지은 죄가 있기에 그런 행동에도 양심이 찔려 조심스레 하련의 눈치를 보았다.
하련은 정말 취한 것인지 얼굴이 빨개진 상태로 나를 째려보았다.
'진짜 화 났었나 보네...'
나는 하련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상냥한 말투로 말했다.
"하련...? 취하신 것 같은데 이제 슬슬 일어날까요?"
하련은 내가 말을 하던 말던 잔에 맥주를 다시 꽉 채워 담았다.
꿀꺽 꿀꺽 꿀꺽
"파하! 끄으으윽...야...성원...이성원...!"
꽉 채워 담은 맥주잔을 단숨에 배 속에 털어버리고 서는 나를 향해 삿대질 하며 말했다.
"너...너어어어...그러는거 아니야... 그렇게 막... 막... 아무한테나 마음 주고...그러면 안된다고...알아?"
진짜 제대로 취한 거 같다.
구원자가 취한 모습은 얼마나 희귀한 걸까 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하련의 혀 꼬부라진 소리를 들었다.
하련은 대답이 없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은지 다시금 맥주잔을 채웠다.
그러고 서는 안주로 나온 소세지를 한입 베어 물더니 내게 말했다.
"구원자는...그래, 신입인데...아니 그래도...그렇게 막 아무나 좋아하면 안된다고! 응? 내 말 뭔 말인지 알겠어?"
그렇게 말하고 서는 다시금 맥주잔을 비워버리는 하련.
바람피고 나서 여자친구에게 들켜 취조 받는 기분이 이런 걸까.
"죄송해요 하련, 다음부터 이런 일은 없도록 노력할게요..."
나는 최대한 미안하다는 듯이 그녀에게 사과했다.
사실 내 잘못이 맞았다.
임무 중에 그러한 인연을 만드는 건 좋지 않은 행동 이였고 그건 초짜인 내가 해서는 더욱 안되는 행동 이였다.
문명을 평가한다는 일을 하는 구원자는 최대한 사적인 감정을 버리고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판단을 내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만약 본인이 심판을 내려야 하는 문명에서 연인을 만들게 되면 사적인 감정이 평가에 개입될 수 밖에 없었고 그건 구원자로써 하면 안될 행동 이였다.
'근데 지금 내가 이렇게 혼나는 이유는 그것 때문만이 아닌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사적인 감정으로 내게 찡얼 거리는 것은 하련이였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된다면 나도 하련도 좋지 않았기에 이제는 아까 못 다한 말을 내 쪽에서 먼저 말해야 했다.
"후..."
나는 말을 꺼내기 전에 다시 한번 각오를 다지고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하련...혹시 저 좋아해요?"
"푸우우우우우우웁!"
'아, 씨발...'
맥주를 마시던 하련은 내 말을 듣고 서는 내 면상에다가 시원하게 맥주 샤워를 시켜버렸다.
어디선가 맥주로 피부 관리를 하는 사람도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은 있으나 그 사람도 이런 식으로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클린 마법을 사용해 내 옷과 얼굴에 묻은 맥주를 없앴다.
"컥...컥...컥...미안해, 뭐라고?"
하련은 자신이 맥주를 뱉어 놓고는 자신이 사례에 들린 듯 컥컥거리며 내게 되물었다.
다 들었으면서 한번 더 묻는 건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 된 문화인지 모르겠다.
"저 좋아하냐구요."
이제 물러설 곳이 없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하련은 YES or NO 로 대답만 하면 되었다.
'자...YES냐 NO냐... 말해! YES or NO!'
나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쑥 내밀며 하련과 눈을 마주쳤다.
하련은 못 들었다는 핑계도 대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내 시선을 애써 피하면서 입에 물고 있는 소세지를 씹어댔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내가 고개를 뒤로 빼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과 눈을 마주치려 하자 결국 포기한 하련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 그게 지금 임무랑 관련 있는 물음이야? 궁금한 것을 물어보라 했지 그런 질문을 하라고는 안 했는데?"
여기서 더 회피하게 하면 안된다.
나는 지금 이미 물이 오를 대로 오른 이 분위기 속에 취한 건지, 어떻게든 대답을 듣고 말겠다는 결심이 서버린 상태였다.
다시금 그녀에게 물었다.
"저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좋아하는데...그게 좀...그래, 동료애! 동료로써 말이야! 동료로써 네게 호감이 있다는 말이야."
되지도 않는 변명을 하고 완전히 포커페이스를 잃어버린 그녀는 확실히 취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여기서 조금 더 막 나가기로 했다.
"그럼... 제가 프레이야와 결혼해도 상관 없는 거죠? 우린 동료니까요."
내가 뱉어도 오글 거리는 대사를 하는 이 상황이 굉장히 수치스러웠지만, 어떻게든 그녀의 답을 이끌어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하련은 내 말에 얼굴이 굳어지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상관...없는데...? 그...근데...겨...결혼하면...너가...힘들지 않을까? 결국엔 헤어질 수 밖에 없을건데?"
뒤로 갈수록 떨리는 목소리가 줄어들더니 마지막에는 완전하게 문장을 완성 시킨 하련의 물음에 나는 대답했다.
"헤어지면 슬프겠지만 그건 자연의 섭리입니다. 이미 프레이야를 안았을 때부터 각오한 일이기도 하구요."
이건 진심이다.
슬프기야 하겠지.
프레이야가 죽는 것을 눈으로 본다면 정말 슬플 것이다.
그녀는 내 인생의 첫 번째 여자였으니까.
그렇지만 슬프기만 하지 그것으로 무너질 정도는 아닐 것이다.
애초에 만남과 이별은 가상 세계를 떠돌면서 어느 정도 내성이 생겼다.
가상 세계의 마지막에 다다랐을 때는 슬퍼해도 일주일을 가지 않고 또 다른 인연이 있기를 빌며 살아갈 뿐 이였고 이별한 인연에 목 매여 살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는 굉장히 힘들었기는 했지만 결국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별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별 수 없다. 만남과 이별은 무한히 살아가는 우리 구원자들에게 내려진 짐이였다.
하련이 구원자 멤버를 제외한 사람들에게 무자비하고 포악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도 그것과 같겠지.
언제나 변하지 않고 자신과 같은 시간을 살아가는 구원자들이 아니면 결국에는 헤어져야 할 인연이기에, 아예 그들과의 교류를 막는 무의식의 자기 방어일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는 그러한 정도는 아니었으나 언젠가는 그렇게 변할 수도 있었다.
하련은 진심으로 말하는 내 눈빛을 바라보며 슬픈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러면...어쩔 수 없지...너가 선택한 길이니까...그럼 이만 들어갈까? 내일은 평가를 마치고 다음 국가로 이동..."
더 이상의 대화를 하기 싫었는지, 이번에도 회피를 택한 하련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린에게 숙소를 받기 위해 움직이려고 하였다.
덥썩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소린이 있는 곳으로 가려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녀는 손목에서 느껴지는 힘에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뭐 하는 거야?"
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또렷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싫습니다."
이렇게 또 어중간한 사이로 끝내기는 싫었다.
나는 손에 힘을 줘서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 당겼다.
그녀가 힘을 줘서 버틴다면 끌려오지 않았겠지만 그녀는 자연스레 내 품 안으로 끌려 들어왔다.
이미 이렇게 와버린 상황에서 그녀에게 핑계 댈 거리는 없었다.
나는 품 안에 들어온 그녀를 꼭 안으며 말했다.
"이렇게 어중간한 사이로 임무를 끝 매치고 헤어지기 싫습니다. 하련...하련은 저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나요? 그렇다면 저에게 보인 그 행동들은 뭐죠?"
"어째서 프레이야와 저의 사이를 질투하시는 겁니까? 어째서 리오와 드베리아에게 성아의 어머니로써 오해 받았을 때 그렇게 기분 좋아 하셨나요?"
그래, 이제는 그녀도 도망갈 수 없었다.
그녀는 내 말을 듣고는 고개를 내 가슴 속에 푹 파묻고는 침묵했다.
나는 내 가슴에 파묻혀 있는 그녀의 부드러운 검은색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하련... 외로우셨나요...? 혼자가 되는 것이 두려우셨나요...?"
그녀의 아픈 상처를 후벼 판다.
그 동안 하련을 보고 지내 온 결과, 그녀의 겉은 굉장히 거칠고 포악한 맹수 같았지만 속은 가녀리고 마음 약한 여성이였다.
물론 같이 행동한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녀를 잘 알 수 있었다.
가상 세계를 돌아 다니면서 이런 종류의 인간은 굉장히 많이 봐왔었다.
얕보이지 않기 위해서,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 겉으로는 강한 척하지만 속은 여린 소위 내유외강이라고 부르는 사람.
이런 타입의 사람은 자신의 진심을 부딪혀 오는 사람에게 굉장히 약했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에게 내 진심을 부딪쳤다.
그렇게 다시금 시간이 흘러갔다.
잠시 뒤, 결국 침묵으로는 이 상황에서 도망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니까..."
"더 크게 말해요."
그녀에게 더 크게 말할 것을 요구하자 그녀는 이를 빠득거리며 악 물더니 내게서 떨어져 나와 큰 소리로 말했다.
"너가! 너가...! 그때 안아줬으니까! 내 마음을 이해 해줬으니까...! 그래서 좋아했어! 근데...근데...그날 밤에 전부 봐 버린 걸 어떡해! 너가 프레이야와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을 다 봤단 말이야! 흐윽...흐아아아아앙..."
속에 쌓인 말을 모두 입으로 토해낸 그녀는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울었다.
주변의 드워프들은 갑자기 울어버린 그녀와 그 앞에 서있는 나를 보며 자기들끼리 쑥덕거렸고, 나는 일단 다른 이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울고 있는 하련을 안아들어서 빠르게 아무도 없는 골목 사이로 도망쳤다.
우리가 없어졌음에도 축제는 계속 되었고, 모두가 축제에 나가 아무도 없는 골목 사이에서 나는 하련을 안아주었다.
"흐아아아아아앙...흐윽...나쁜 놈...나쁜 놈....이럴거면 그러지를 말지...왜 그랬어 왜....흐으으.."
그녀는 서럽게 울면서 내 가슴을 두드렸다.
'살살 좀 치지.'
술에 취해서 힘이 조절되지 않는 건지 그녀의 주먹질 한번을 맞을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퍽! 퍽! 퍽!
'끄으으응...'
여기서 아프다고 그만 때리라고 하면 엄청 쪽팔릴 것 같기에 그녀가 눈치 채지 못하게 계속 힐링 마법을 몸에 걸으며 내상을 치료했다.
얼마나 얻어 맞았을까 그녀의 울음도 점차 줄어들었다.
"흐끅...흐끄윽...나쁜 놈..."
아직도 하련은 나보고 나쁜 놈, 나쁜 새끼라고 계속 해서 욕을 하며 내 가슴을 두드렸지만 처음에 비하면 제 정신이 된건지 힘이 많이 줄어들어 있었다.
나는 하련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좀 풀렸어요?"
그러자 하련이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나를 향해 외쳤다.
"안 풀렸어, 이 멍청아!"
그러고선 다시 고개를 파묻었다.
물론 이번에는 울지 않았다.
하련은 고개를 파묻고 서는 내게 말했다.
"미안해..."
"뭐가요?"
"그냥...전부...심술 부려서 미안하고, 때려서 미안해..."
나는 그녀의 머리에 내 볼을 가져다 대고는 말했다.
"저도 미안해요."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고, 그녀의 두 눈에 그렁그렁 맺혀 있는 남은 눈물에는 내 얼굴이 비쳤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뭐가...?"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프레이야에게 말이에요. 사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남자친구가 바람피게 생겼으니."
"그게 무슨...우읍! 읍!"
그렇게 말한 나는 그녀의 입술에 기습적으로 키스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격렬하게 반항했지만 이윽고 내 키스를 받아들였다.
눈물이 입술에 까지 묻었는지 그녀와의 키스는 살짝 짠맛이 났다.
처음에는 가볍게 키스했지만 이번에는 오히려 그녀 쪽에서 혀를 넣어왔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혀를 받아들이며 익숙하게 키스를 이어갔다.
츄읍...♡ 츕....♡
그녀의 피부에서 나는 향긋한 살 내음을 맡으며 진하게 이어지는 키스는 지금 이 순간을 몽환적으로 만들었다.
츄으읍...♡ 하아...하아...
마침내 때어진 두 사람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뿜어져 나온다.
숨이 막힐 정도로 강렬했던 키스의 여운 속에서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이제...자러 갈까요?"
여기서 더 있다가는 끝까지 갈 것만 같은 분위기였기에 나는 자리를 옮기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소린에게 숙소를 받지 못했고, 그렇다고 해서 소린에게 숙소를 안내 받으면 이 분위기가 깨질 것만 같았다.
'어떡하지...어디 남들이 안볼 것 같은 장소가...아!'
그러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라 그녀의 손을 잡고 서는 말했다.
"하련, 잠시만 저를 따라와줄 수 있어요?"
그녀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떠올렸는지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들었다.
그런 하련의 행동을 보며 치밀어 오르는 욕정을 참으며 내가 기억해둔 장소로 웜 홀을 열었다.
그렇게 웜 홀을 타고 하련과 도착한 곳은 아이언쓰론을 오기 전에 제국의 땅을 지나면서 봤었던 커다란 호수 위에 떠있는 조그마한 섬.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았는지 식물들이 울창히 자라있는 이곳은, 분위기로는 5성급 호텔도 한 수 접어줄 정도였다.
달과 별이 떠오른 고요한 하늘 아래에서 나는 그녀와 밤을 보낼 자리를 빠르게 마법으로 만들었다.
비록 라프키르의 창조처럼 완벽한 침대를 만들 수는 없지만, 항상 아공간에 온갖 물건을 챙겨 다녔기에 침대 또한 아공간에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호수 위에 침실.
하련은 침대를 봄으로써 얼굴이 폭발할 정도로 빨개져 내게 말했다.
"여...여...여기서? 누가 볼 지도 모르는데..?"
물론, 내가 생각한 좋은 생각은 이런 단순한 게 아니었다.
나는 잠시 힘을 끌어 올려 나와 하련의 시공간을 동결 시켰다.
이렇게 하면 나와 하련이 여기서 무얼 하는지 밖에서는 볼 수 없지만 안에서는 밖이 보였다.
또한 우리는 여기서 현실보다 훨씬 느린 시간 속에서 원하는 만큼 있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