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8.하련
"위대하신 분들 이시여...제 꿈은 온 대륙의 평화입니다."
이거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나와 하련이 어이없는 눈으로 황태자를 쳐다봤지만 그는 기죽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차기 황제로써의 교육에 열중해 형제들 간의 사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던 저의 미숙함 때문에 작금의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황태자는 서서히 무릎을 꿇어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잠시 뒤 고개를 다시 들어서 나와 하련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부디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의 꿈을 이루고 싶습니다. 위대하신 분들이 어째서 저희들의 세계에 온 것인지는 저의 하찮은 견식으로는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저는...아버지가 지켰던 이 평화를 이어가고 싶습니다!"
'이런 성격인가...'
나는 이런 놈들을 싫어 하지는 않는다.
황태자처럼 영웅의 상을 가지고 태어난 자들은 운명의 장난인 건지 하나 같이 시련에 휘말려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바보 같은 정도로 자신의 신념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였다.
그리고 그런 바보들을 옆에서 도와주며 그들이 원하는 세계를 완성 했을 때 오는 뿌듯함과 그 바보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항상 기분이 좋았었다.
이것은 가상 세계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똑같은 모양이다.
'저렇게 올곧은 눈으로 부탁하면 거절할 수가 없잖아.'
내가 알겠다고 대답하려 할 때였다.
"거절하지."
하련이 먼저 대답해버렸다.
거절한다고?
왜?
"하련, 한번쯤은 생각 해볼 만한 일 입니다. 저희의 일은 세계의 심판 뿐만 아니라 구원도 해당 되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하련을 설득하려 했지만 하련은 나를 처다 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냉정히 말했다.
"성원, 우리는 이곳에 온지 불과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았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이 세계의 문명을 평가하는 일이야."
그러고는 숨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
"우리가 방금 이곳에 와서 엘프들의 나라와 황태자 한 명만을 보고 '구원'이라는 선택지를 선택하면 여태 까지 심판 당해온 문명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들의 문명 안에 살고 있던 사람 중에도 이 황태자 같은 인물은 셀 수 없이 많이 존재했었어."
"나도 알고 있다. 이 황태자는 선한 인물이다. 권력을 가져도 타락하지 않고 올바르게 자라왔고 자신의 아버지인 선왕의 뜻을 이어받으려는 훌륭한 사내지."
"그럼에도 우리가 지금 해야 할 것은 모든 곳을 돌아다니며 평가를 내리는 거다."
하련의 말을 들으니 순간 내가 잊고 있었던 본분을 떠올렸다.
'맞아, 나는 이 곳의 문명을 구원하거나 심판하기 위해 세계를 돌아봐야만 한다.'
내 사사로운 감정을 집어넣어서 이렇고 저렇고 할 문제가 아니였다.
나는 구원자 이면서도 심판자다.
우선 해야 할 일은 하련의 말처럼 먼저 문명을 7가지의 항목으로 평가를 하고 결론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순간 내가 무엇을 잘못한 건지 깨달았고 나는 바로 하련에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하련, 순간적으로 잊어버렸네요. 다시 한번 더 제 본분을 떠오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사과한다.
솔직히 쪽팔렸다.
오기 전까지는 당당했고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에서 이 문명을 평가 하려 했다.
근데 이런 마음에 드는 사람을 발견했다고 바로 일을 그르치려 하다니.
'이건 명백한 나의 실수다.'
나는 조금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고 하련은 그런 나를 보더니 피식 웃고는 말했다.
"괜찮아, 처음이니까 이해 해줄게. 너 말고 다른 녀석들도 처음에는 다 그랬을 테니."
그러고 나서 하련은 프레이야와 케이든 황태자를 보며 말했다.
"들었지? 우리가 이곳에 왜 왔는지."
프레이야는 심각한 얼굴로 답했다.
"문명을...심판하거나 구원한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죠?"
프레이야는 예언은 받았지만 거기서 우리가 어째서 온 것 인지에 대한 답은 듣지 못했다.
그저 귀인이 온다는 세계수의 예언을 듣고 우리를 환대 했을 뿐이였다.
"말 그대로 다 우리는 좀 있으면 이곳을 떠나 세상을 돌아 보며 다닐것이다. 우리는 구원자이자 심판자. 이 세상을 구원할 것인가 심판할 것인가 그것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 말이지."
그 말을 듣고 있던 황태자가 갑자기 급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구원이란 게 뭡니까? 심판이란 게 뭐죠? 평가란 건 또 무엇입니까?"
황태자는 당황한 얼굴로 외쳤다.
그의 얼굴에서 처음 스퀴르에게 답을 물어보던 내 모습이 겹쳐보였다.
하련은 그 모습을 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우리는 구원자 의회. 범우주적 존재로 이루어진 차원의 균형자. 우리는 문명을 7가지의 방식으로 평가하고 그 결과에 따라 문명의 파괴와 지속을 정한다."
"7가지 항목 중 과반수에 달하는 항목이 부합하지 못 할 경우, 그 문명은 소멸이다."
"7가지 황목 중 과반수에 달하는 항목이 평가에 부합할 경우 그 문명의 문제점이 존재한다면, 우리가 나서서 책임지고 해결한다."
"대신, 구원을 행한 문명은 기록에 남아 오랜 시간 후에 다시 한번 더 오게 되지 그리고 다시 한번 더 평가를 진행한다."
하련은 내가 스퀴르에게 들었던 내용을 똑같이 말했다.
아마 스퀴르도 이런 상황이면 똑같이 말해주겠지.
황태자는 그 소리를 듣고 황망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그...그런 걸 어째서 당신들이 정하는 겁니까? 무슨 자격으로!"
"저희들의 일은 저희 대륙 내에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해된다.
나 같아도 이런 소리를 들으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무슨 자격으로 그러냐고, 가장 먼저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행동은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라시르의 존재로 모든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 받았다.
그럼에도 이들은 받아들일 수 없겠지.
"황태자, 당신이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를 방해 할 수는 없다. 만약 방해한다면..."
하련이 잠시 억제하고 있던 기운의 리미터를 해제한다.
나는 괜찮지만 구원자 정도의 강자가 내뿜는 기운은 그 아래 사람들은 절때 거역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커헉...컥..."
"꺄아아악!"
황태자와 프레이야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엎드렸다.
'이건 좀 미안한데?'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라는 눈빛으로 하련을 보니 하련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쩝...'
이건 내가 어떻게 못 도와준다.
그때 바닥에 엎드려서 힘들어 하던 프레이야가 겨우 입을 열며 말했다.
"부디...노여...움을...거둬...주세요...위대...하신 분...이시여..."
그 말을 듣고 나서야 하련은 기운을 다시 억제했다.
허억 허억
하악 하악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황태자와 프레이야.
"그 누구도 우리의 앞을 막을 수 없다."
"성원 내일 이곳을 떠나 제국으로 떠난다."
"네..."
그녀는 그렇게 냉정한 말투로 말하고 서는 뒤로 돌아 문 밖으로 걸어갔다.
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하련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그녀가 나가자 숨을 가쁘게 내몰고 있는 둘을 쳐다봤다.
그렇게 하련이 떠나간 회의실에는 두려움에 잠겨 하련이 나간 자리를 멍하니 쳐다 보는 황태자와 프레이야가 있었다.
나는 왠지 미안한 마음에 말했다.
"죄송합니다. 하련은 이 일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 말을 들은 황태자는 울컥한 얼굴로 답했다.
"강대한 힘으로 약자들을 마음대로 주무르는게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 입니까?"
'하, 이 새끼가...'
나는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황태자님, 하나만 물어보겠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격양된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황태자님이 저희처럼 강대한 힘이 있어서 저희와 같은 일을 할 때. 황태자님은 그 업보를 온전히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을 거 같습니까?"
순간 황태자는 당황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사실 저도 이 문명이 처음인 초짜 구원자입니다. 하지만 저쪽에 있는 하련은 정말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문명을 돌아다녔죠."
"그녀는 그러한 문명을 심판하여 없애 버렸을 때도 혹은 구원해서 모두의 감사를 받았을 때도 있었을 겁니다."
"본인의 손으로 없애버린 문명들의 무게가 점점 자신을 짓눌러 오는 그 거대한 압박감, 그것을 당신은 견딜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황태자는 점점 표정이 굳어갔다.
이윽고 자신이 잘못한 부분을 알았는지 미안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받아들이기는 힘들겠지.
왜냐면 우리는 그저 무게를 짊어지는 거지만 이들은 생명이 달린 일이니.
나는 표정을 풀고 말했다.
"그러니 너무 그녀를 나쁘게 생각 말아주세요.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의 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우리가 하는 이 일은 절때 자기 만족같은 것으로 이루어 지는게 아닌 차원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행 하는겁니다."
구원자들 모두 알고 있다.
자신들이 심판이라는 명목으로 문명을 말살하는 것이 여러가지 이유로 포장되어 있지만 결국엔 대량학살일 뿐이라는 것을
그 죽어가는 수많은 생명 중에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어깨에 짐을 쌓아가며 다음 문명을 향해 떠난다.
황태자는 나를 보며 쭈뼛쭈뼛 거리더니만 이윽고 울상인 얼굴로 말했다.
"죄송...합니다...저는...저는 그저..."
그런 얼굴로 사내 새끼가 울먹거리니 기분 나쁘잖아 그러지 마라...
여자가 우는 거면 몰라도 사내 새끼가 질질 짜는 건 보기 싫었다.
나는 울먹이는 황태자를 향해 말했다.
"미안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저희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행하는 일은 절대적인 선이 아니라는 것을."
"그럼에도 저희는 해야만 합니다. 그렇기 위해 존재하니까요."
이건 나의 자기 방어 기제 같은 것이다.
아마 언젠가는 나도 행성을 심판할 날이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는 이러한 논리로 나 자신이 무너지지 않게 방어하겠지.
다들 그러고 있을테고 말이야.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환대 감사했습니다. 프레이야님.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황태자님이 꼭 다시 황위에 올랐으면 좋겠군요."
"그리고 전...당신 같은 사람 싫어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말은 진심이였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회의실에서 나와서 세계수 밖으로 향했다.
세계수 밖에 나오니 저 멀리 쪼그려 앉아 있는 하련이 보였다.
그녀에게 다가가니 담배 향기가 난다.
"하련 담배 피었어요?"
하련은 나를 발견하고는 대답했다.
"가끔...가끔 핀다."
바닥에 떨어진 다 타버린 담배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담배와는 모습이 달랐다.
하기야 구원자들이 담배 핀다고 병 걸리거나 약해질 일도 없고 중독성도 컨트롤 가능하니 피어도 상관없지.
"어땠나?"
"무얼 말하는 거죠?"
"방금 황태자의 말을 듣고 어땠냐고."
아마 그녀도 심란하겠지.
이런 일이 한 두번도 아닐텐데 저러는 것 보면 상당히 마음 속에 쌓아두고 있는 것이 많은가 보다.
나는 왠지 모르겠지만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다.
그리고 내 몸은 생각을 해서 머리의 필터를 거치기도 전에 먼저 움직였다.
와락!
나는 쪼그려 앉아있는 그녀의 뒤로 가서 살며시 안아줬다.
안아보니 하련도 그저 한명의 여성일 뿐인게 느껴졌다.
나보다 작은 키, 가벼운 육체.
무엇보다도 그녀는 조금씩 떨고 있었다.
"뭐...!"
하련은 당황한 듯 도망가려 했지만 나는 놔주지 않았다.
나는 하련이 도망가지 못하게 꽉 잡고는 말했다.
"하련...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아요. 해야만 했던 거잖아요?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고는 더욱 꽉 껴안았다.
그녀는 발버둥 치는 걸 멈추고 껴안은 내 손 위로 손을 올렸다.
뚝...뚝...
포개진 손위로 작은 물방울이 떨어진다.
'힘들었겠지.'
누구도 그녀의 아픔을 알아주려 하지는 않았을 거다.
이해해줘도 구원자 동료들만이 그녀를 이해하고 공감해줄 뿐.
그녀를 이해해줄 수 있는 건 우리 뿐이다.
하련은 소리 없이 울었고 나는 그녀를 계속해서 껴안고 있었다.
잠시 뒤, 그녀는 내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러고는 나를 빤히 처다 본 후 말했다.
"비밀이야."
"네?"
"비밀이라고 내가 운 거."
그녀는 빨개진 얼굴로 나를 향해 말했다.
'너무 귀엽잖아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나는 그녀를 향해 웃어주며 말했다.
"네, 저만 기억할게요!"
그녀는 생글생글 웃는 내 낯짝이 맘에 안 드는지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은 이곳에서 하루를 보내고 아까 말한 것처럼 내일 제국으로 향한다. 이의 있나?"
"없습니다!"
"좋아."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는 다시 프레이야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나 또한 그녀의 뒤를 쫄쫄쫄 따라갔다.
회의실에 앉아서 고민 중이던 두 남녀는 우리를 보자 동시에 일어서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죄송합니다...제가 제 입장에서만 생각한 거 같군요..."
아니, 근데 프레이야는 딱히 잘못한 것 없는데.
하련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익숙하니까."
그 말을 들은 황태자는 오히려 더 찔리는 표정이 되어버렸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가 에 대해 절절히 느꼈겠지.
무엇보다도...
'하련...의외로 사람을 맥이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걸?'
하련은 의외의 고단수였다.
황태자를 향해 말을 마친 하련은 프레이야를 향해 말했다.
"프레이야."
"네, 말씀 해주세요."
프레이야는 공손하게 고개를 살며시 숙이며 대답했다.
"오늘 하루 이곳 엘븐가드에서 묵고 가겠다. 숙소를 준비해 줄 수 있나?"
"물론입니다. 그럼 이쪽으로...성원님이라고 하셨나요? 성원님께서는 황태자님과 같이 온 호위병에게 말을 하면 숙소로 안내해주실 겁니다."
왜 하련은 위대한 분이고 나는 성원님 일까.
근데 이게 좀 더 거리감이 없는 거 같아서 나은 편이다.
근데 프레이야가 날 보는 눈빛이 뭔가 묘하다.
'뭐지, 이 꺼림칙한 느낌은?'
아무튼 간에 그렇게 하련은 프레이야를 따라갔고, 나는 황태자와 같이 온 엘프 호위병에게 말을 걸어 숙소로 안내 받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