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2.각성식
"각성식이 무엇인지 설명해드렸나요? 라프키르?"
그렇게 말하고는 라시르는 라프키르를 쳐다봤다.
"아니!"
그러자 라프키르는 즉답했다.
‘너무 당당한 거 아니냐.‘
뭐, 굳이 안 알려줘도 라시르가 알려준다고 했으니 상관 없긴 하였다.
"그럼 제가 설명해드릴게요."
그렇게 말한 라시르는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각성식은 구원자 개인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일종의 칭호를 부여합니다. 칭호란 그 사람을 상징하는 단어 같은 겁니다. 저 같은 경우는 '전진'의 칭호를 부여받아 전진의 라시르라고 불려요."
그녀와 뭔가 안 어울리면서도 어울리는 느낌이다.
’전진이라...‘
"저의 전진은 미래로서 나아감을 뜻해요. 그렇기에 이렇게..."
라시르는 말을 하면서 동시에 나에게손을뻗었고 그러자
알 수 없는 광경이 내 머릿속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광경 속에서의 나는 불타오르는 폐허 속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이게 뭐야.'
불타버린 폐허 속에서 울부짖는 나의 모습은 너무나도 서글퍼 보였고그걸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조금씩 흘렀다.
너무나도 슬퍼하고 후회하는 듯이 보이는 내 모습은 이상하게도 지금의 내 마음조차 슬프게 만들었다.
주르륵...
내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 내렸다.
나는 갑자기흐르는 눈물을 황급히 소매로 닦아냈지만 이내 한 방울이 또 흘러내렸다.
"아..."
라시르는 당황한 듯이 나를 보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고는 다시 손을 내밀더니 내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마치 달리는 차에 달라붙은 빗물 마냥 사라졌다.
"죄... 죄송합니다. 어딘지 모르는 폐허에서 제가 울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왠지 저도 모르게 슬퍼져서."
진심으로 당황했다.
저렇게 울만 한 일이 뭐가 있을까.
살면서 저리 울어본 적이 없는 것만 같다.
"제가 보여준 것은 미래의 일이에요. 그 미래가 언제일지는 몰라도 반드시 다가오는 예언과도 같은 종류죠."
라시르는 당황한 모습을 추스르더니 내게 말했다.
"방금 그 광경이 제가 언젠가는 겪을 미래라는 건가요?"
"네, 맞아요."
"허..."
믿을 수 없다.
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저리 슬프게 운단 말인가.
나는 그 장면을 머릿속에 담고는 일단은 저 멀리 기억의 저편에 밀어 넣었다.
"어쨌든 간에 이렇게 각성식을 통해 칭호를 받게 되면 자신의 칭호와 같은 종류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고 개인마다 큰 차이를 가지게 돼요."
"아마 성원 님이 겪었던 경험을 토대로 칭호가 정해지겠죠. 그건 행복했던 경험만이 아닌 불행했던 경험들, 슬펐던 경험들 또한 포함되어 있어요."
한마디로 칭호라는 것은 내가 살아온 인생을 바탕으로 정해진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성원 님을 가상 세계로 보냈던 것에요. 그곳에서 더욱 많은 경험과그리고 칭호를 수여 받을 만한 육체를 완성하기 위해."
이제야 이해가 갔다.
오직 나의 강함을 훈련하기 위해서만이 아닌 경험을 쌓기 위해 그런 수많은 세계를 보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 말을 들으니 뭐가 나의 칭호가 될지 궁금해졌다.
마친 그런 생각을 할 때 라시르가 말했다.
"그럼 이제 각성식을 치르러 가봐요. 나머지 구원자분들도 따라와 주세요."
그렇게 말한 라시르는 문밖으로 나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고, 나머지 구원자들도 하나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 또한 그 행렬에 맞춰서 조심스레 따라갔다.
그렇게 라시르와 구원자 멤버들을 따라 문 밖으로 나가자 라시르가 뒤로 돌아보며 말했다.
"모두 나오셨으면 이제 각성식을 위해 각성실로 가겠습니다."
라시르는 그러면서 우리가 나오고 나서 닫힌 문을 다시 한번 열었다.
’뭐지 왜 똑같은 문을 여는 거지?’
그리고 다시 열린 문 뒤에는 엄청난 크기의 신전 같은 공간이 보였다.
‘이게 뭐냐 어떻게 한 거야? 왜 나온 곳과는 다른 곳이 다시 보이는 거지?‘
그렇게 아까와 같은 벙찐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보면서 라프키르가 킥킥거리면서 말했다.
"놀랐어? 이 문은 내 힘으로 이 건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공간으로 갈 수 있어. 쉽게 말하면 모든 공간의 입구를 공유하는 거지."
신기하다.
마법으로 어떻게든 비슷하게 할 수는 있을 것 같긴 한데 힘들 것 같다.
이게 라프키르의 칭호인가?
"이게 라프키르씨의 칭호인가요?"
"맞아 이게 내 칭호 '창조'야. 창조의 힘으로 모든 곳과 이어진 문을 만든 것이지."
창조라니 이름만 들어도 엄청 사기적인 능력 같아 보인다.
"내 창조는 내가 알고 있는 개념이나 물체를 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어 예를 들면... 이렇게!“
그렇게 말한 라프키르는 손에 조그마한 새를 만들어냈다.
진짜 살아있는 새를 말이다.
쪼로롱♪ 쪼롱♬
무슨 새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그마한 새는 힘차게 울기 시작했다.
"와! 이거 진짜 살아있는 거예요?"
놀란 나는 다시금 물어봤다.
라프키르는 자신이 만든 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응, 맞아."
미쳤다.
이건 그냥 신 아닌가.
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으면 그건 이미 신의 힘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라프키르님... 혹시 구원자는 신인가요?"
나의 물음에 라프키르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만들어낸 새를 사라지게 만든 후 말했다.
"아니, 신은 아니야. 아마 지금에 너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겠지. 하지만 너도 칭호를 부여받고 나면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이런 건 신이 행하는 기적 같은 게 아니란 걸."
아마 라프키르한테 있어서 이러한 부분은 좀 예민한 말이었나 보다.
라프키르는 뭔가 아련한 눈빛으로 앞을 바라보더니 다시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왜 그런 말을 해서는...‘
조금은울적해 보이는 라프키르의 표정을 보니 아마 사연이 있어 보인다.
라프키르는 그 뒤로 애써 웃어보이며 내게 여러 가지 조언을 해줬다.
그렇게 라프키르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받고 있으니 어느새 나는 각성실의중앙에 도착하게 되었다.
각성실의중앙에 도착하자 라시르가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성원 님 앞으로 나와주세요."
눈앞에 보이는 이상한 기계 장치 위에는 마치 3D 홀로그램을 띄운 것처럼 반투명한 도형이 자기 멋대로 계속해서 형체를바꾸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꺼려지는 기분에살짝 주춤했지만 이내 라시르가 말한대로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내가 앞으로 걸어나와 기계 앞에 서자 라시르는 그 기계를 손으로 만지며 말했다.
"성원 님."
"네."
"각성을 시작할 것인데 몇 가지 말씀을 드리자면 각성 방식은 사람마다 각기 달라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저 같은 경우는...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이 잘안 나지만엄청나게 험난한 공간을 헤쳐나가는 게 각성의 시련이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각기 다른시련을 겪었고요. 그래서 저희는 성원 님이 무슨 시련을 부여받을지 알 수가 없어요. 하지만 그거 하나만 기억하세요. 성원 님이 무엇을 하든 무슨 상황에 부닥치든 그건 각성의 시련일 뿐이라고. 무너지지 마시고 계속해서 시련이 이끄는 대로 나아가세요. 그러면 각성의 시련은 자연스레 끝나게 될 거예요."
왠지 겁주는 거 같지만 표정을 보니 한없이 진지하다.
시련이 이끄는 대로만 하면 된다니 별문제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조심하자고 생각한 나는 최대한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반드시 해내 보겠어요!"
당당히 말을 하는 나를 보며 라시르는 한 번 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시작하겠다고 라시르가 말하는 순간 공간이 어둡게 변한다.
그리고 내발밑에 기하학적인 이상한 도형이 생기더니 아까 허공에 보였던 기괴한 도형들이 생겨난다.
그러더니 어느새 주위에 구원자 멤버들이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모두가 사라졌다.
'뭐지?'
이게 시련의 시작일까.
순간 갑자기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빛이 나를 덮친다.
"으윽!“
갑자기 들이닥친 환한 빛이 내 눈을 강타하자 나는 짧게 신음을 흘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대략 5분쯤 지난 것처럼 느껴질 때 눈꺼풀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던 빛이 사라지자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그리고 그곳엔
"여긴..."
내 방이다.
그래 내 방.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너무나도 익숙하고 다시는 보기싫었던 곳.
내가 현대에 살아있을 적에 살았던 내 방이었다.
"이게...시련?"
왜 시련은 나를 이곳에 던져 놨을까.
그런 의문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 멀뚱히 서있었다.
하지만 곧 방에 있는 전신 거울에 속옷만 입고 있던 나를 확인하고는 옷장을 열고 양복을 꺼내 입는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자연스럽게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몸.
양복을 전부 입고 넥타이까지 매었다.
방 한구석에 뒹굴고 있는 가방을 챙긴다.
출근 준비를 마친 나는 방을 나와 현관을 향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조금은 기억에서 흐릿해졌을 법한데도 마치 어제도 그랬다는 듯이 내 몸이 알아서 자연스레 움직인다.
그리고 갑작스레 치밀어 오르는 구토감.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가서 변기 앞에 앉았다.
"우욱...으웨에에엑..."
너무 싫었다.
이 삶이.
이 행동이.
이 모든 것이.
나에게 이건...
'감옥'이었다.
삶이라는 이름의 감옥.
한참 동안 구토를 이어가고 있다가 어느새 구토가 멈췄다.
토사물이 쏟아져 떠다니는 변기커버를 강하게 내려 꽝 소리가 나게 닫고는 숨을 헐떡였다.
"우욱...하아 하아..."
그러고 나서는 세면대로 가서 칫솔에 치약을 쭉 짜서 양치했다.
이 또한 구토 후 항상 행동하던 패턴이었다.
그 시절에도 나는 항상 이유 없는 구토감을 느껴 변기 앞에서 구토했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무표정한 표정으로 다시 양치해서 입을 행군 후 출근했다.
그리고 지금도 똑같이 행동하고 있다.
집 주차장에 있는 내차를 타고 시동을 켠다.
끼기기기기기긱 부릉...
키를 꼽고 시동이 걸리자 운전대를잡았다.
운전대를 잡은 것도 굉장히 오랜만인 것만 같다.
가상 세계는 현대와 비슷한 곳이 없고 훨씬 발전한 미래 세계인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럼에도 내 손은 너무나도 익숙하게 운전을 시작한다.
집 주차장에서 나와 도로로 나와 늘 가던 회사로 방향을 잡았다.
차를 타고 달리면 언제나 그랬듯 늘 보았던 풍경이 펼쳐진다.
집 근처에 있는 어린이집 앞에서 차에서 내려 어린이집으로 들어가는 아이들.
가방을 메고 저들끼리 옹기종기 모여서 등교하는 학생들.
어디론가 바삐 움직이는 성인들.
‘보기싫다.’
나는 싫었다.
이 모든 짜여있는 연극을 매일 돌려보는 것만 같은 이 길이 싫었다.
그저 늘 똑같은 풍경을 보며 똑같은 직장을 가서 똑같은 업무를 하고 똑같은 길로 퇴근하는 이 쳇바퀴 같은 일과가 너무나도 싫었다.
그리고 다시 생각에 잠기고문득 떠오른 의문.
"이게 시련이라면 나는 어째서 그 시절과 똑같이 출근하고 있는 거지?"
그러한 의문 속에서 생각에잠기던 나는 이내 결심이 섰다.
차를돌린다.
회사로 가는 것이 아니라면 어디로 가야할지도 감이 잡히질 않던 그때 든 생각.
‘그래, 부모님집에 가보자.’
부모님을 찾아간 지도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상 세계의 시간을 제외해도 오래되었다.
아마 5년은 안 찾아뵀던 것 같다.
항상 핑계는 같았다.
‘바빠서 죄송해요.’
‘이번에 프로젝트가 좀 중요한 거라서.’
‘다음에 찾아뵐게요. 네, 죄송해요. 어머니.’
항상 비슷한 핑계로 언제나 내려가지 않았다.
다시 한번 자신이 역겨워 구토감이 차오른다.
어째서 그렇게 핑계 댔을까.
무엇이 그리 바빴을까.
‘부모님을 원망했었나...’
마음 한편에서는 부모님을 원망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생각조차배은망덕하고, 이기적인 생각이다.
부모님은 나를 훌륭하게 길러주셨다.
어머니와 아버지도 내가 공부를 잘하면 좋아해주셨지만, 온종일 방에서 공부만 하던 내게 항상 말씀하시던 게 있었다.
'아들아, 이 엄마는 네가 공부를 잘해서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것도 좋지만 조금 더 사람들과 만났으면 좋겠구나.'
'아들, 아빠랑 같이 어디 놀러 갈까? 항상 공부만 해서는 몸이 못 버텨.‘
그 모든 제안을 나는 거절했었다.
바빠서? 아니, 그게 아니다.
’무서웠던 거야.‘
늘 하던 행동에서 벗어나는 것이.
늘 똑같던 일상생활의 패턴에서 이탈하는 것이.
그런 것이 두려워 나 자신에게 핑계를 대며 도망칠 뿐이었다.
그러한 생각을 하던 중 어느새 부모님 집 앞에 도착했다.
부모님 집은 변한 것이 없었다.
서울이 답답해서 경기도로 내려와 한적한 곳에 단독 주택을 얻고 살아가는 내 부모님.
마당은 가지런히 정리된 잔디가 깔려 있었고 아버지의 고집으로 설치된 조그마한 연못에는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왈! 왈왈!”
"건아야!"
나와 같이 자란 형제와도 같은 애완견 건아.
고등학교 3학년 때 예민한 나 때문에 아들 같은 것 키워봤자 아무 소용 없다고 말하던 아버지가 데려온 강아지였다.
아버지는 진짜 아들이라는 듯이 이름도 사람처럼짓고 엄청나게 예뻐했다.
처음에는 떨떠름 해하던 어머니도 어느새 건아를 굉장히 예뻐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 또한 예민한 고3이 지나가고 건아를 굉장히 좋아하게 되었다.
건아는 나의 형제 같은 개였다.
외동으로 자라 형제도 없던 나에게 처음 생겼던 형제 같던 개.
"하하, 이 녀석!이 형님이 그렇게 보고 싶었냐?"
내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 건아가 다가와 반갑다는 듯 나를 향해 꼬리를 미친 듯이 흔들며껴 안긴다.
나에게 안겨 오는 건아의 무게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너도 이제 힘이 예전 같진 않구나. 예전에는 이렇게 밀면 진짜 부담스러웠는데."
그래 건아도 어느새 10살이 넘었다. 개로 치면황혼기에 들어선 나이라는 소리다.
"이게 무슨 소리야. 건아야~ 누구 왔니?"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니 가슴이 떨렸다.
목소리가 들린 후 이내 문 여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린다.
“이 녀석 왜 갑자기이렇게 짖어대는 거야.”
어머니는 방금 씻고 나오셨는지 살짝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며 건아에게 물었다.
머리를 닦고 수건을 머리에 감싼 후 건아가 있는 곳을 쳐다본 어머니가 잠깐 멍하니 있더니 대충 신은 슬리퍼를 이끌고 나에게 달려오며 외쳤다.
"아들!!!"
이제는 아들보다 작아진 어머니.
어머니가 내 품 안에 쏙 들어오는데 왠지 가슴이 아프다.
나를 키우느라 아버지 뒷바라지를 하다가 이렇게 늙어버리신 우리 어머니.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어머니... 어머니..."
"아이고 이놈이 징그럽게 왜 그래 다 큰 놈이!"
그렇게 말씀하시면서도 어머니는 내 품에서 벗어나지 않으셨다.
나는 인지하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이 나의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진 시련의 현장인 것을.
앞으로 다시는 부모님을 보지 못할 것을.
나는 잠시 뒤에 어머니를 놔드리고 어머니의 모습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듬성듬성 하얗게 보이는 흰머리.
조금씩주름져가는 피부.
어머니는 항상 TV 드라마에 나오는 아줌마들처럼 뽀글뽀글한 머리 하기 싫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고.
그거는 지금도 똑같다는 듯이 최대한 긴 생머리를유지하고 계셨다.
"어머니, 머리에 흰머리가 꽤 보이네요. 염색하셔야겠어요."
"아들 온다 했으면 했을 텐데. 웬일로 연락도 없이 내려온 거야?일은 다 끝났어? 중요한 프로젝트 있다더니."
어머니는 굉장히 기분이 좋으신 듯 나에게 웃으며 말했다.
이런 어머니를 나는 잠시나마 원망 했었던건가?
못난 놈.
못된 놈.
나쁜 새끼.
쓰레기 새끼.
죄책감이 스멀스멀 몸을 타고 올라온다.
다시금 올라오는 구역질을 억지로 억누른 뒤 애써 웃으며 어머니께 물었다.
"잠시 어머니랑 아버지 얼굴 보려고 바쁜데 내려왔어요. 잘 지내셨어요?"
"하이고 말도 마라 너희 아부지 어제도 술 퍼먹고 오늘도 퍼질러 자고 있다. 축구 동호회 가야 할 텐데 저 양반이 아직도 자고 있네! 기다려봐라. 금방 깨워 올 테니!"
어머니는그리 말씀하시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셨다.
멀리서 '일어나 이 영감탱이야! 당신 아들 왔어!'라고 소리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