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PROLOG
새벽 2시 한적한 도로에 한 대의 택시가 달리고 있었다.
심야 택시 특유의 검은색 차량은 이 새벽에 한 손님의 부탁으로 마포대교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 손님은 바로 나 이성원.
내년이면 30살이 되는 이제는 아재라 불릴만한 나이가 되어가는 나였다.
나는 매일매일 똑같은 일을 하며 똑같은 직장을 출근하여 똑같은 하루를 보내던 지루하기 짝이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기에 오늘만은 평소와는 다른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나는 달리는 택시 안에서 바깥 풍경을 보며 이마에 손을 짚고는 생각에 잠겨있었다.
'내가 왜 그런 짓을...'
잘 마시지도 않던 소주를 6개나 까먹고 인사불성으로 새벽 2시에 한강으로 심야 택시를 타고 달렸다.
택시 안에서 보이는 바깥의 풍경은 택시의 속도감에 어린아이가 마구 낙서 해놓은 도화지처럼 일그러져 보인다.
아마 현재 내 마음이 그렇기 때문일 거다.
택시 아저씨는 심야 택시 경력이 꽤 되는지 자연스레 나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이야~ 진짜 신기하네요. 저희 아들과 같은 학교 출신이라고요?"
"네, 아드님이 다니시는 학교가 제 모교네요."
"근데 공부를 얼마나 잘하셨길래 그런 대기업을 다니십니까? 제 아들놈은 말도 지지리 안 듣는 게 공부도 지지리 안 합니다. 허허허."
"공부... 밖에 안 했습니다. 다른 것을 할 이유를 못 느꼈으니까요."
그 후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고 어느새 택시는 한강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리니 입김이 나와 내 시야를 하얗게 물들였다.
어느덧올해도 다 가고 연말인 12월.
날씨는 겨울이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아주 쌀쌀하였다.
말 많던 택시 기사 아저씨에게 인사를 전한 후 택시에서 내렸다.
평소와 다른 하루가 되고 싶었다.
이 지겨운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평소에 관심이 있던 같은 회사 여직원에게 교제할 마음이 없나 물어봤고 여지조차 남기지 않은 채 완벽하게 까였다.
'쪽팔리게 내가 무슨 짓을 한 거냐...'
하지만 그 와중에조차 나와 술을 같이 마셔줄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혼자서 포장마차에서 신나게 마셔댔고, 그 결과가 이 모양 이 꼴이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마포대교 밑에 흘러가는 한강을 쳐다본다.
난간은 높이뛰기 선수가 장대를 들고도 뛰어넘을 수 있겠냐는 의문이 들 정도로 높은 곳까지 망이 처져있다.
난간에는 수많은 자살 방지 메시지가 쓰여 있었다.
[오늘 힘들었나요?]
[당신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힘내세요.]
하나같이 사람들을 위로하는 수많은 문장이었다.
나는 다리 밑에 잔잔히 흘러가는 강을 보며 생각했다.
'이 다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을까.'
삶이 힘들어서.
삶의 목표가 없어서.
생활고에 시달려서.
인간관계에 목말라서.
사랑하는 연인에게 차여서.
각자 다양한 이유와 사연으로 그들은 죽음을 택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사람들을 떠올리며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바보 같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났다고 했고, 성원은 그런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물론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는 바이지만, 나는 자신이 나락까지 떨어져도 그럴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있었던 일이 떠올리자, 순간적인 수치심에 잠시 자살을 생각한 것을 보면 나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멍청한 인간이었다.
'집으로 갈까. 택시비가 아깝네.'
사실 내게 있어 돈은 썩어 넘쳐날 정도로 많았다.
모 중동 부자처럼 재산이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명품도배질을 하고 고급외제차 수집을 하는 것이 취미인 30대 독신 남성이 아니라면 전혀 모자람 없는 재산이었다.
내가 그러한 재산을 가진 이유는 단 하나였다.
'돈을 쓰고 싶은 곳이 없다.'
딱히 욕망이 없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딱히 없었다.
남들도 다 만들어 본다는 인생에서 해야 할 것들 100가지 리스트도 만들었지만, 4년째 단 하나도 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여친이라도 있으면 좋았을 것 같았지만, 누가 돈이 많으면 못생긴 얼굴이라도 여자친구가 생긴다고 하였던가.
기구하게도 나는 준수한 외모와 많은 재산을 가졌음에도 끔찍하리만큼 여자 운이 없었다.
첫 번째 여자친구는 사귄 지 두 달 만에 유학.
두 번째 여자친구는 사귀고 나서 석 달 만에 이별 통보.
세 번째 여자친구는 꽤 오래가서 다섯 달 만에 이별 통보를 받았다.
그리고 세 번째 여자친구는 내게 말했다.
{얼굴도 괜찮고 돈도 많고... 그런데도 가끔 만나는 사이면 몰라도 애인 사이는 도저히 아닌 것 같아. 그냥 친한 친구로 지내자. 그리고... 좀 다르게 살아보는 건 어떨까? 여행도 가고, 영화도 보고 그러면서 말이야. 지금이라도 좀 바뀌어 봐.}
나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살면서 취미를 가져본 적도 변화를 추구한 적도 없었다.
사실 오늘의 이 기행은 무려 7년 만에 시도한 것이다.
'나도 안다.'
어쩔 수 없었다.
번듯한 집안에서 외동으로 자라서 부모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자랐다.
공부를 잘하면 어머니가 기뻐했고 성적이 좋으면 아버지가 기뻐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이 좋아 언제나 열심히 했다.
초등학교 때도,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심지어 대학생 때조차도, 나는 언제나 공부에 열중했고 남들 다해보는 게임조차도 손에 대본 적이 없었다.
잘못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공부를 잘하고 좋은 대학을 나오면 좋은 회사에 다닐 수 있고 그 결과는 행복한 인생이라고 자라오며 주변에서 공식처럼 누누이 들었던 말이니까.
하지만 내 무엇이 문제인 걸까.
나는 지금 이 생활이 너무나도 죽고 싶을 만큼 괴롭고 외로웠다.
친구 하나 없고 연인 하나 없이 매일 쳇바퀴 도는 햄스터처럼 똑같은 일과만을 반복할 뿐인 기계적인 인생.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지?'
이러한 잡생각을 하면서 마음속 깊이 푸념하는 중에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아까 탔었던 택시 기사 아저씨와는 다르게 이번 택시 기사 아저씨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말없이 찍힌 요금을 내고 택시에서 내린다.
다시금 쌀쌀한 겨울바람이 내 몸을 휘감는다.
‘하아아...‘
늘 걸어가는 그 길목.
늘 그 끝에 도착하는 똑같은 집.
10분 정도 걸으면 집에 도착한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걸어가던 도중 어디선가 달리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이 새벽에 뛰어다니는 사람이 있네.'
타다다닥
발걸음이 이상하게 내 쪽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기분이다.
"으아아아아아아!"
푹!
가슴이 아프다.
이물감이 느껴진다.
뒤를 돌아보니 검은 마스크에 검은색 후드티를 뒤집어쓴 사람이 있었다.
자연스레 시선은 아래로 내려갔고 그곳에는 달빛에 반사되어 선명히 빛나는 은색 빛의 칼날이 내 심장 부근에 박혀있었다.
주르르르륵...
칼이 박힌 곳에서 새어 나오는 붉은색 피.
털썩...
몸에 힘이 빠져 자연스레 바닥에 쓰러진다.
내 시선은 몸에 박힌 검은색 손잡이에서 때어지질 않았다.
가정에서 쓰는 요리용 식칼도 아니다.
손잡이를 보아하니 회칼이었다.
너무 현실성 없는 이 상황에 어이가 없었다.
"이...게 무슨..."
시야가 흐려진다.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서서히 깨달을 수 있었다.
'나...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구나.'
기계적인 인생이고 지루한 인생이었지만 죽고 싶지는 않았다.
타다다다닥...
도망가는 검은색 인영을 눈으로 쫓으며 서서히 집 쪽으로 기어간다.
'이렇게 죽기 싫은데.'
'하고 싶은 것들, 마음속에 넣어 놨던 것들, 이제는 해보고 싶었는데.'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생긴 거지..."
'씨...발....'
그렇게 나는 29살의 나이로 묻지마 살인에 당해 추운 겨울날 쓸쓸히 눈을 감았다.
점점 의식이 아무것도 없는 무저갱 속으로 빠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천천히 존재가 사라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
그랬었는데 이상하게도 아직 내가 살아있음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두 눈이 뜨인다.
'죽은 게 아니었나?'
누군가 신고해서 구급실에 실려 오기라도 한 걸까.
천장은 새하얀 색이었다.
구해준 사람에게 감사 인사라도 하기위해서 몸을 일으키니 굉장히 자연스레 일어나진다.
하지만 그에 따른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프지...않네...?'
주위를 둘러보니 무언가 이상하다.
'뭐지? 왜 모든 게 흰색으로 보이는 거지?'
바닥도 하늘도 전부다 흰색이었다.
"이성원"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인간 형체를 지닌 흰색의 무엇인가가 있었다.
'내가 죽어서 천국에 온 건가? 나 무교였는데 어쩌지...'
누가 봐도 나 사후세계요 라고 주장하는 공간에 온 것만 같은 이 상황.
'그럼 눈앞에 저 사람은 신...인가? 아니면 저승사자?'
"나는 신이 아니다."
내 표정에서 무어라 생각하고 있는지 그대로 쓰여있는 것일까?
그는 내 의문점을 정확히 집어내어 대답해 줬다.
"여긴 어디고, 당신은 누구고, 저는 왜 여기 있습니까?"
우선 상황 파악이 급선무다.
나는 궁금점을 참지 않고 모두 물어봤다.
그러자 그 인간 형체의 무언가는 마치 안내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친절히 답해줬다.
"이곳은 그녀의 공간이다. 나의 이름은 스퀴르, 너는 선택받았다."
'선택?'
무슨 선택을 받았단 말인가.
나는 다시금 스퀴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인간 형제에게 물어보았다.
"무엇에 선택받은 겁니까?"
"너는 구원자가 돼야만 한다."
성원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꼼짝없이 죽은 줄만 알았는데 이상한 곳에 불려와서 갑자기 너 구원자 하라고 말하고 있는 이 상황이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순간 혼란스러운 생각을 한번 잠재우고 자신이 스퀴르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물었다.
"제게 거부할 권리는 있습니까?"
"없다."
"구원자가 무엇인지는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저는 분명 죽었는데 어째서 이곳에 온 겁니까?"
그러자 스퀴르는 서서히 내게 다가왔다.
'뭐지? 무섭게 왜 다가오는 거야. 나 또 죽는 건가?'
또다시 스퀴르는 내 생각을 읽은 듯 말했다.
이쯤 되니 독심술이 의심되는 수준이다.
"죽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너는 이제 일반적인 방법으로 죽을 수 없다."
나는 스퀴르의 뜬금없는 말에 물었다.
"죽지 않는다는 것은 또 무슨 소리입니까."
"말 그대로다. 너를 윤회의 굴레에서 빼 왔고, 너는 이제 나와 같은 구원자가 될 것이다."
'윤회의 굴레?'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앞에 있는 존재는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욱 대단한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그리 생각하니 태도가 저절로 공손해진다.
"구원자가 뭔지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스퀴르는 내 앞에 멈춰서 팔짱을 끼고 말을 이어갔다.
"너는 살면서 세계라는 것이 얼마나 많을지 생각해본 적 있는가?"
그거야 당연히 생각해봤다.
과연 이 광활한 우주에 문명은 우리 인간이 끝인가?
우주 저 너머에는 또 다른 지성체들이 문명을 이루어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라고 어렴풋이 생각하고는 있었다.
"당연히 제가 살고 있던 문명 말고 다른 외계문명이 있으리라 생각한 적은 많습니다만."
"맞는 말이다. 하지만 조금은 다른 개념이겠군. 천천히 설명하도록 하지 시간은 넉넉하니."
그렇게 말하고는 스퀴르는 자리에 앉았다.
나도 눈치를 보다가 서서히 자리에 앉았다.
'설마 같이 앉는 걸로 뭐라 하지는 않겠지?'
내가 자리에 앉자 스퀴르는 입을 열었다.
"네가 말하는 것은 네가 살던 세상의 우주 속에 또, 다른 문명을 말하는 것이겠지."
"그거 말고 다른 문명이 있다는 말입니까?"
"물론, 다중우주라고 들어봤는가?"
다중우주
우리가 사는 우주를 제외한 우리와 아무런 연관도 없는 또 다른 우주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이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확실히 고 지능 문명에서 데려오니 말이 쉽게 통해서 좋군. 아무튼 다중우주는 실제로 존재한다. 그것도..."
그는 갑자기 손에서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펜을 꺼내더니 하얀 바닥에 점 하나를 찍었다.
"이 점안에는 얼마나 많은 점을 겹칠 수 있을까?"
"무수한 점이겠죠, 셀 수도 없을 만큼."
"그렇다, 다중우주는 네가 생각하는 거 이상으로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 내가 두 눈으로 보고 겪은 우주만 1억 개가 넘어가니."
1억 개라는 어이없을 만큼 커다란 숫자에 잠시 당황스러움이 들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사실상 무한하게 존재한다고 봐야 되는 거겠지.'
나는 스퀴르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걸 왜 저에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나는 무슨 의미로 이런말을 하는 건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모든 차원을 돌아다니며 차원의 대표 문명을 구원하고 심판한다."
"수많은 차원이 있는 만큼 수많은 행성이 존재하고, 그에 맞춰 수많은 문명이 존재하지.“
"우리는 그런 문명들을 돌아보고 구원과 심판을 병행한다."
구원과 심판이라는 단어가 생소했던 나는 그에게 물었다.
"구원과 심판은 무슨 의미입니까?"
언뜻 들으면 신과도 같은 자들이다.
하지만 본인이 신이 아니라고 했으니 아닐 것이다.
스퀴르는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 문명을 일단 지정 구원자가 돌아다녀 보면서 7가지의 평가항목을 만들어서 문명을 평가한다."
"7가지 항목 즉 문화, 윤리, 기술, 도덕, 역사, 분쟁, 환경을 말한다. 이 항목들을 모두 평가한 후 통과 항목이 반수가 넘으면 구원을 집행하고, 반수가 넘는 항목이 통과하지 못하면 심판을 내린다."
"심판과 구원은 객관적으로 해당 구원자 본인이 생각하고 판단한다."
"물론 결과는 전부 기록에 남기 때문에 무차별한 심판이나 무분별한 구원은 불가하다."
"만일 이를 어겼으면 구원자 의회에서 대상 구원자를 처벌한다."
"심판과 구원은 말 그대로의 의미이다. 심판은 문명의 소멸, 구원은 문명의 지속을 의미하지."
긴 이야기를 들으니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나는 스퀴르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았다.
'구원자라는 존재가 문명을 7가지 항목으로 평가하고, 그것에 따라 문명의 소멸과 지속을 판단한다고?'
어떻게 그게 가능한 것일까.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구원자 하나가 문명하나를 부수거나 구원할 정도의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SF 영화도 아니고, 행성 멸망 빔이라도 쏘는 것일까,
"구원과 심판을 어떻게 행하는 거죠?"
"말 그대로 구원은 그 구원자가 해당 문명이 지속될 수 있게 해당 문명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을 해결해주고, 심판은 그 문명 자체를 소멸시켜버리지."
"그니까 그걸 무슨 수단으로 행한다는 겁니까?"
"당연히 구원자 자기 자신의 힘이다."
어이가 없다.
현실감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없다.
사람 하나가 문명을 부수고 구원한다고?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그리고 그게 진실이라고 하여도...
"저는 그럴 힘이 없습니다만, 잘못 데려온 거 아니신지?"
"아니, 너는 우리 구원자 의회의 의장 라시르가 예언의 눈으로 본 13번째 구원자다."
라시르가 누군지 궁금하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걱정하지 마라. 수많은 차원을 구르고 구르다 보면 자연스레 강해질 것이다."
미친
그니까 강해질 때까지 맨몸으로 온갖 차원을 구르게 하겠다는 거 아닌가?
"물론 우리도 구원해야 할 차원에서 너를 굴리는 게 아니다. 가상의 차원을 만드는 녀석이 있는데, 그 녀석이 만든 가상 차원에서 너를 집어넣을 것이다.
'휴, 그러면 다행... 이 아닌데? 씨발?'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급하게 스퀴르를 향해 물었다.
"거부권은 없다 하셨죠?"
"물론"
'씨발.'
나는 입 밖으로 나올 뻔한 욕을 가까스로 속으로 집어넣고는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왜 제가 그렇게 된다는 건지 몰라도 거부권도 없으니..."
어차피 거부권은 없었다.
이미 끌려온 순간부터 반강제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운명이었다.
"잘 생각했다."
머리가 아프다.
죽어서도 쉬지 못할 운명을 가지고 있는 거 같다.
물론 천국이란 게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냥 한탄해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럼 이제. 그 가상 차원인가 뭔가로 제가 들어가는 겁니까?"
"그래, 준비되는 즉시 우리 쪽에서 가상 세계로 갈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그, 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안 알려주실 겁니까?"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네가 문명 하나를 소멸시키거나 구원한다는 게 무슨 무게를 가졌는지 깨달아라."
그렇다.
문명을 소멸시킨다는 건 그 문명의 모든 생명체를 내가 죽인다는 것.
문명을 구원한다는 건 그 문명의 모든 생명체의 목숨을 내가 짊어진다는 것.
생각해보니 어느 쪽이든 구역질이 올라올 만큼 무겁고 거대한 업보이다.
사람 하나 죽여 본 적 없고 오히려 마지막에는 죽임당한 내가 이런 거대한 업보를 감당할 수 있을까.
'어질어질하네...'
그럼에도 해야만 되겠지.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보내주세요."
그러자 스퀴르가 허공에 외쳤다.
"라프키르!!!!!!!!!!!!!!"
소리가 얼마나 큰지 고막이 아프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몸이 빛에 휘감겼다.
"잘 다녀와라. 다시 볼 때는 동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 있으면 좋겠군."
나를 휘감은 빛속에서 힘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정도로 강해지려면. 3천 년도 모자라지 않을까요...?"
"인간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하다. 열심히 구르다 보면 금방 강해진다."
그런 내 말에 스퀴르는 담담히 답했다.
‘에라 모르겠다.’
업계 선배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원래 부장님이 하는 말에 토 다는 거 아니다.
이윽고 서서히 시야가 방전되었다.
몸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고, 잠시 뒤 눈을 뜨니 웬 산속에 던져진 나를 볼 수 있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나는 곧장 산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하아... 이게 뭔 고생이냐...”
그리하여 내 구원자가 되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