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스핀오프] 정조관념 이상한 여고생 썰 - 18
조민영이 집으로 돌아가고 한 달 가까이 지났을까.
괜히 우울하기만 했다.
조민영의 핸드폰은 민영이 아버님이 여전히 압수하고 있는지, 연락이 계속 되질 않았다. 해외로 벌써 간 건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는 그 아이를 정말 진심으로.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었다. 기회가 떠나가고 나서야 후회하는 건 어릴 때나 나이를 먹고 나서나 모두 똑같다.
왜 이렇게 뒤늦게 그러는 걸까.
안된다고 나 스스로를 옭아매서 그런 걸까.
“야. 김대리. 정신 안 차려?”
“오늘 회식 잊은 건 아니겠지?”
오늘은 금요일로 회사 회식 날이었다. 아. 회식. 가기 싫다.
일반적으로 직장인들이 회식을 싫어하는 이유는 도가 넘은 술문화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회식을 가기 싫어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었다.
“아. 이 새끼 이거 여고딩 놓치더니 아주 맛이 갔어.”
“그러게 임마 잡지 그랬냐? 응? 킥킥.”
이것 때문이다.
민영이와의 일이 있은 후 팀원들이 얼마나 놀려대는지... 나도 답답해죽겠는데 놀림까지 받으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시끄럽고. 일 다 끝냈으면 정리하고 일어나. 다들 나가자고.”
“네. 팀장님.”
“예썰.”
팀장을 따라 10여명의 팀원들이 우르르 일어나 회사 밖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오는 동안 중간에 낀 나를 두고 팀원들이 또 놀리기 시작했다.
“아~ 우리 김지훈 대리는 결혼을 언제하려나~”
“그러니까. 그러게 임마. 이 형이 말했잖냐. 여고딩이 그렇게까지 했으면 딱~! 딱! 엉?! 그거 하나 못해가지고 말이야.”
오늘은 그래도 평소보다 말들이 순한 편이었다. 사이에 여직원도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여직원도 나를 놀리는데 동참하고 나섰다.
“그러니까요. 김대리님 여자를 너무 모르신다. 여자가 그렇게까지 했으면 하셨어야죠.”
“봤지? 진아 씨도 여자를 너무 모른다고 말씀하시잖아. 넌 그래서 안 되는 거야!”
“에효.”
“큭큭. 야 얘 한숨쉰다.”
“지훈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미국 갔다고 그랬나? 따라가!”
“에이. 지금은 좀 늦었지. 드라마처럼 공항에서 잡아야 딱인데.”
“얼마나 됐다고 했지?”
“한 달이요. 갔는지 안 갔는지도 잘 몰라요. 수능 끝나는 날 보고 그 뒤론 못 봤으니까.”
뭐 그런 식의 수다 속에서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팀원들과 함께 출입카드를 찍고 건물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아아아!!!!”
로비를 울리는 우렁찬 여자 목소리.
퇴근하는 회사원들, 로비의 안내데스크 직원들, 경비원들, 지나가는 손님들까지.
그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얼핏 보기에도 우월한 신체비율에 어려보이는 얼굴. 긴 생머리에 짧은 테니스 스커트가 눈에 띈다. 붉은색 스커트 아래 하얀 허벅지를 감싸고 있는 두툼한 검은 니삭스. 두꺼운 파카 속에 수줍은 듯 숨어있는 얼굴.
추운 겨울 속에서 피어난 봄꽃과도 같은 투명하고도 아름다운 미소.
“... 뭐야. 쟤. 이 쪽보고 있나?”
“와. 겁나 예뻐.”
그녀의 모습을 보며 팀원들이 한 마디씩 한다.
조민영은 이쪽을 보며 양 손을 번쩍 들고 손을 흔들다가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걸음걸음이 내 심장을 미친 듯이 두근댄다.
“뭐, 뭐야. 일로 오는데?”
“누구지? 누구... 아?”
“어? 설마 지훈이 그...?”
“...”
팀원들이 뭐라고 떠들든 나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너무 반갑고.
너무 기쁘고.
너무 좋아서.
입가에 펴지는 웃음마저 굳어버린 그런 상황.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직 해외로 가지 않은 건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아버지 몰라 나온 건가? 그래도 괜찮아?
팀원들과 내가 뭉쳐있는 곳 까지 다가온 조민영은 허리를 꾸벅 숙이며 팀원들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네네.”
나는 팀원들이 인사를 받아주는 걸 무시하며 다짜고짜 물었다.
“야. 너 여기 어쩐 일이야?”
“김 대리. 뭔 말을 그렇게 해~ 임마. 여기서는 안아줘야지. 싸나이가 말이야.”
“그래요~ 김 대리님 만나려 왔나보죠~ 어머나~ 로맨틱해라~”
옆에서 팀원들이 뭐라하든 말든 나는 조민영만 보고 있었다.
내 말에 조민영이 묘한 표정을 짓더니 작은 상자 같은 것을 내밀었다.
얼핏 보기에는 만년필 상자 같은 그런 상자였다.
“...? 이게 뭐야?”
“오빠 선물이요!”
“선... 물?”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상자를 열기 시작했다. 선물이라고?
팀원들도 대체 무슨 선물인가 하고 곁에서 상자를 힐끗거리는 가운데, 상자 안에 있던 뭔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얗고... 분홍빛의...
“...”
“이, 이건...”
“와...”
“야...”
팀원들이 짧게 감탄하는 소리가 들린다.
나도 그걸 보는 순간 숨이 한 순간 막혀왔다.
내가 침을 꿀꺽 삼키며 앞을 보는데.
조민영이 구미호 같은 요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두 줄 나왔어요. 오빠.”
“... 이, 이거 테스트기... 니, 니 꺼야?”
임신테스트기를 서둘러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떠듬떠듬 물었다. 누가 볼까 두렵다.
조민영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팀원들은 난리가 났다.
“와... 야! 이 도둑놈의 새끼야!”
“뭐야. 뭔데? 니 꺼야? 니가 한 거야?”
“이거 뭐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팀원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팀장님이 팀원들을 밖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됐어! 나가! 나가! 둘이 알아서 할 문제 같으니까.”
“아 팀장님 이야기 좀 듣고 가요. 이제는 제수씨인데~”
“그러니까! 그죠? 제수씨?”
팀원들이 멀리 나가는 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민영은 웃으며 내 대답을 기다렸지만 나는 지금 너무 당황한 상태였다.
만나서 너무 기쁘고 좋은데, 이건 뭐라고 해야하나...
내가 그렇게 진땀을 흘리며 뻘뻘대고 있는데, 기다리다 지친 듯 조민영이 내게 가까이다가오더니 내 손을 마주잡아왔다.
“오빠...”
손은 따뜻했다.
그날의 따뜻함을 떠올릴 정도로 아주 따뜻했고, 또한 부드러웠다.
조민영은 내 손을 붙잡고 꼼지락 거리며 나를 올려봤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그 순간.
조민영이 내게 말했다.
“저랑... 결혼하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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