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스핀오프] 정조관념 이상한 여고생 썰 - 13
조민영이 부모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간 이후, 그 아이와의 연락은 단절되다시피 했다. 일주일이 지나자 어쩐지 섭섭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조민영과 나의 관계는 일주일 치도 안 된다. 그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 워낙 강렬해서 그렇지 그 아이와 나는 딱 그 정도 만난 사이였다.
돌아서면 안녕하고 인사나 주고받을 그런 사이.
여고생과 어디선가 일하는 직장인 남자.
친밀감을 느꼈지만 딱 그 정도.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이 있다고 믿고 있었다. 조민영이 우리 집에서 했던 행동들을 돌아보면,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완전히 나한테 빠져버린 여고생의 순수한 애정 그 자체였다. 그렇게 나만 보는 줄 알았던 아이가 연락을 하지 않는다.
엄청나게 신경 쓰인다.
와. 설마 내가 그 여자애를 내 것이라 생각한 건가.
무언가 내 손에 들어왔던 물건을 빼앗겨버린 그런 기분이 든다.
그래서 전화를 걸었던 건데, 의외의 인물이 전화를 받았다.
-어. 자네인가?
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 너무 놀란 나머지 핸드폰 번호를 다시 확인해봤다.
조민영 번호가 맞다.
그럼...
“아... 아, 아버님. 안녕하세요.”
-크흠. 아직 아버님 소리들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
“... 네. 그... 민영이 핸드폰은...?”
-대학 때까지 압수하기로 했어. 자네도 동의하지 않았던가? 민영이가 대학교에 진학하고,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난 이후에도 자네를 좋아한다면 그 때 결혼하자고.
“... 그건 맞습니다만...”
아버님의 걱정은 이해한다. 내가 아버님이었어도 아버님처럼 행동했을 것 같다.
딸은 아직 고등학생.
조용하고 얌전했던 딸은 교통사고 이후 성격이 돌변.
그러다 갑자기 가출을 감행.
가출 후 돌아온 딸의 가방에서는 딜도와 남자의 팬티가 발견됨.
남자의 팬티에는 정액이...
이건 범죄지. 범죄.
아버님 입장에서는 분명 내가 조민영에게 이상한 걸 가르쳤다고 생각할 거야.
-그럼 끊겠네.
“네. 민영 아버님. 건강하십시오.”
-자네가 챙겨줄 건강은 없네.
뚜- 뚜-
나 참. 술 먹고는 그렇게 좋아라 하던 양반이 갑자기...
어찌됐건 전화가 막히고 나니, 민영이와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신경 쓰이는 건 분명했지만, 이게 사랑일까.
나이가 30이 넘은 이후로 불꽃같은 사랑은 믿지 않게 됐다.
나도 못 믿는 그런 사랑을 하라고?
민영이에게 여유를 가지자 말했던 것은 나 역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내 감정을 정리하고 싶었다.
내가 조민영에게 가진 감정은 소유욕이지, 사랑이라 할 만한... 그런 게 아니다.
그렇게 생각했다.
“나였으면 잡았다. 쯧쯧.”
친구가 소주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옆에서 그 친구 와이프가 소주잔을 소주로 채워주며 한 마디 했다.
“그게 사랑이잖아. 김지훈 이 멍청아!”
“저 새끼 저거 대학 때도 선비질하더니 나이 처먹고도 저러네.”
“지훈아. 너 나 좋아했었잖아. 그 때도 이렇게 망설이다가 우리 여보야한테 나 빼앗긴 거 몰라?”
“응? 우리 자기야를 지훈이가 좋아했다고?”
“확실하지. 나 엄청 챙겼잖아. 우리 지후니가.”
가만히 있으니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나와 친구, 그리고 친구 와이프 누나는 같은 대학 같은 동아리 출신이었다. 10년 가까이 친구 사이를 유지하고 있기에 서로 내숭부릴 것도 없고 알 것 다 아는 그런 사이였다.
듣다못해 내가 누나의 말에 반박하고 나섰다.
“적당히 좀 합시다. 누가 누나를 좋아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누나를 좋아했다고?”
“에이~ 좋아했으면서. 대학 때 너 나한테만 메시지 매일 날리고 그랬잖아. 술 먹으면 나한테 전화하고.”
그 말에 친구가 눈을 껌벅이며.
“지훈이가 자기야한테 뭐라 했는데?”
“글세 지훈이가... 뉴냐~ 뉴냐는 왜 그렇게 바뿨욤... 냐량됴 뇨라쥬세욤~ 뿌욤뿌욤. 막 이러면서...”
“아! 진짜 누나!! 그 이야기는 좀...!! 언제 적 이야기를...!”
“야 김지훈. 너 이 새끼 진짜...? 너 유부녀 취향이었어?”
“그 때는 유부녀 아니었거든? 그리고 그거 취해서 그런 거야 취해서.”
내가 완강히 부인하자 누나가 결정타를 날렸다.
“그리고 지훈이가 문자도 매일 하고 그랬지. 뉴냐~ 모해욤...?”
“뭐? 우리 자기야한테 김지훈이 매일 메시지를 했다고? 나 이거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동아리 때문에 그냥 한 거였어.”
“동아리 같은 소리하고 있네. 누나는 뭐 좋아해요? 누나 시간 있어요? 이게 동아리 관련이야?”
“누나! 그만해! 아 진짜.”
“김지훈! 너 이런 이야기는 왜 나한테 안 했냐?”
“... 야. 지금 이게 중요하냐? 어쨌건 둘이 잘 살잖아. 그럼 됐지.”
얼버무리려고 했는데 친구 녀석. 완전 이 이야기에 꽂혔다. 친구가 진지하게 물었다.
“그래서 좋아했냐고.”
“좋아... 했나...?”
“이 새끼가... 이거 NTR 각인데?”
NTR이라는 헛소리를 하며 턱을 쓰다듬는 친구. 그 와중 누나는 재밌다는 듯 키득거리고 있다. 나는 당하기만 하는 이 상황이 억울해서 한 방 날려줄 속셈으로 누나의 흑역사를 꺼냈다.
“NTR 같은 소리하고 있네! 누나랑 따로 만나서 논 적 한 번도 없어. 미친놈아! 뭐... 솔직히. 대학 때 누나한테 쪼오~ 금 호감이 있기는 했는데. 그거 다 누나가 처신을 이상하게 해서 그런 거야.”
내 말에 친구와 누나가 서로를 돌아봤다. 누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어머머. 얘 좀 봐? 내가 무슨 처신을 이상하게 해?”
“누나가 MT가서 저한테 뽀뽀했잖아요! 그래서 난 누나가 나한테 마음 있는 줄 알...”
“지, 지훈아! 그 이야기는...!”
“... 자기가 지훈이한테 뽀뽀를... 모텔에서 했다고?”
“모, 모텔이 아니라 MT!! MT!!”
“MT 가서 뽀뽀를 했다. 오오. 이게 NTR 인가?”
“잠깐! 오해할까 말하는데 지훈이 볼에다 한 거였고. 22살 때 일이야. 10년 전 이야기라고!”
“오호라~ 10년 전에 내 친구 김지훈 군과 불장난을 화끈하게 하셨다 이거지?”
“여, 여보. 지금 심하게 오해하는 것 같... 야! 김지훈! 너 말을 그렇게 하면 어떻게!!”
“사실인데 뭐.”
뭐 이런 분위기의 술자리다.
오늘 친구와 친구 와이프를 만난 이유는 조민영과의 경과를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친구는 몰라도 누나는 어떻게 됐는지 엄청나게 궁금해 했으니까. 누나도 여자다보니 남의 연애사에 관심이 많았다.
누나는 모든 이야기를 듣더니 남자인 나나 친구보다 더 화를 내며 말을 했다.
“여자애가 고등학생이든 말든 좋아하면 만날 수도 있는 거지. 거기서 왜 내숭을 부려가며 나중에 다 커서도 나를 좋아하면 만나자고 그러냐? 그런 걸 지켜주면 여자가 고마워할 줄 알아? 야 김지훈! 정신 차려. 여자도 섹스하고 싶어 하고, 만지고 싶어 하고 그래. 내가 나이 들어보니까 남자랑 여자랑 다를 게 없는 거 같아. 그냥 입장 바꿔서 생각해봐.”
“입장을 바꿔서?”
“응. 지훈이 너랑. 동갑인 어떤 여자가 사귀는데 그 여자애가 1년 내내 섹스를 안 해줘. 너 그 여자애 계속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아?”
“... 그건 좀... 사귀는데 해야지. 그런 거 없이 계속 사귀기는 어렵지.”
“거봐. 안 그런 사람도 있긴 하겠지만 여자도 대부분 마찬가지거든. 남자가 섹스도 안 해주고, 스킨쉽도 안 해주면 ‘나한테 매력이 그렇게 없나’ 이러면서 고민해. 좋아하면 하고 싶은 게 당연한 건데 그걸 지켜준다 어쩐다 하면 짜증나지.”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내가 잘못했다는 이런 이야기 같은데.
“내가 볼 때는 그 여고생이라는 애... 민영이? 조민영? 아우. 얘가 고등학생답지 않게 완전 여우네. 여우.”
“여우라고? 솔직하고 털털한 그런 게 여우짓이야?”
“이거 봐. 남자들은 그게 얼마나 여우 짓인지 모른다니까?”
“그게 왜 여우 짓이야?”
나는 어리둥절해서 누나에게 물었다. 내가 생각하는 여우짓은 아닌 척 하면서 남자에게 어필하는 그런 건데. 내 물음에 누나가 한심하다는 듯 되묻는다.
“너. 털털한 게 뭐야?”
“그냥... 뭐... 내숭 안 부리고... 편하게 대해주는...”
“그치? 이런 게 털털한 거잖아.”
그렇게 말하더니 누나가 내 옆자리에 앉아서 내게 어깨동무를 해왔다. 순간 움찔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치.”
“이게 여우짓이야. 멍청아.”
“이게?”
“뭐? 진짜?”
나도 고개를 갸웃하고 친구도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어리둥절한 남자 둘을 비웃듯 누나가 계속 말했다.
“방금 가슴 닿았다? 알아?”
누나의 말에 내가 친구의 눈치를 봤다. 친구가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있었거든.
“다, 닿긴 했지만...”
“눈앞에서 NTR..."
“남자한테 이렇게 여자가 거리감 없이 훅 들어오면 어때? 좋잖아? 안 그래?”
“음...”
“지훈이 너도 민영이라는 애가 거리감 없이 막 들어와서 곤란하다고 했었잖아. 기억 안나?”
“기억나지.”
“스킨쉽에는 일종의 거리감이 있어. 친근감의 표시인데, 이성 간에는 이 거리감이 확실히 작용을 해. 근데 이 거리감을 무시하고 예쁘고 매력 있는 애가 막 들어와. 이러면 남자애가 안 설레고 버틸 수 있겠어? 넘어가는 거지.”
“그런가?”
“털털하다는 말은 자기가 예쁘고 매력적인 걸 안다는 이야기야. 뭘 해도 예쁘게 보일 거 아니까 망가진 척 하기도 하고 편하게 상대를 대하는 거지. 잘 생각해봐라. 예쁜 애가 못생기게 망가지는 거 본 적 있어?”
“... 없어.”
“망가져도 예쁘게 보이게 망가지는 거야. 딱 예쁘게 보일 만큼만. 여자란 그런 거야 멍청아.”
뭔가 되게 어렵다. 나랑 친구랑 뭔 소리인지 몰라서 끙끙 대는 동안 누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순진한 듯이... ‘오빠! 재워줘요.’ 그럼 남자가 섹스까지 생각할 게 뻔~~ 하잖아. 여자가 집에서 재워달라는데 섹스 생각 안하는 남자가 어디 있겠어? 그걸 그 여고생이 모를 거 같아? 내가 보기엔 알고 말한 거야. 그 기집애. 배우고 싶네 아주 그냥.”
뭐 그런 갈굼을 받으며 안타까워 하긴 했지만. 어쨌건 모두 끝난 일이다. 연락도 할 수 없고... 그저 기다릴 뿐.
내가 씁쓸하게 소주를 혼자 들이키는 사이 친구와 누나는 또 티격태격 하기 시작했다.
“자기야. 근데 우리 자기가 그 여고생한테 여우짓을 배워서 뭐를 하려고?”
“응?”
“누구한테 써먹으려고 그걸 배우겠다는 거야? 지훈이?”
“무, 무슨 소리야!”
“이거 어쩐지... NTR... 아내가 결혼했...?”
“아, 아니야. 우리 여보야 한테 써먹으려고 배우려는 거지~ 여우짓~! 예쁜짓!”
*
수능이 끝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바닥에 쌓이기 시작하자 뒤늦게 조민영이 떠올랐다. 그 동안은 반쯤 잊으며 살았다.
생각하면 뭔가 가슴이 저리고, 아쉽기도 하고. 그걸 잊기 위해 일만 죽어라 했었다.
“춥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거리에는 눈이 내려와 있다. 온도도 싸늘하게 내려가기 시작했고, 추운 기온만큼이나 옆구리가 시렸다.
“민영이는 수능 잘 봤으려나...”
나는 ‘학력이 그렇게 중요할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학생 때야 보이는 게 대학교 밖에 없었으니 학력이 엄청나게 중요해보였지만 막상 사회에 나와 보니 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선생님들은 대학이 인생을 결정한다고 떠들어 대지만 사회인의 입장에서 본 선생님들은 우물 안 개구리들이다. 직장이라고는 고등학교 선생님 밖에 경험하지 못했으면서 대학이 인생을 결정한다는 등 어쩐다는 등 어떻게 그렇게 말을 쉽게 할 수 있는 걸까?
IT 회사를 다니며, 필드에서 카이xx 라든지 S대라든지... 많이 봤다. 대게는 뛰어나지만 나보다 못한 사람도 있고 그랬다.
그 사람들도 석사, 박사에 밀리다보니, 결국 학사출신은 다들 거기서 거기인 거다.
물론 수능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고등학생이 할 만한 게 뭐가 있겠나? 공부 밖에 더 있을까? 그 공부의 성과를 측정하는 것이 수능인 이상 고등학생에게 수능은 아주 중요하다.
삑- 삑- 삐리릭-
수능 날이다 보니 수능에 대한 여러 생각을 하며 문을 열었다.
“...”
하지만 누군가가 내 방 침대에서 자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불이 볼록 튀어나와 있고, 머리 쪽에서부터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퍼지며 내려온다. 여자가 분명했다. 신발도 분홍빛이 나는 운동화.
조심스럽게 침대로 다가가서 자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