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스핀오프] 정조관념 이상한 여고생 썰 - 12
우리 집 비밀 번호를 알고 있다. 누구겠나? 아빠, 엄마지. 아빠 엄마의 반응도 나와 똑같았다. 문을 열고 의외의 인물들을 보고 놀랐다가 이야기를 듣고 한숨을 쉰다.
우리는 방 가운데에 모여 앉아 대략적인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업무 중 버스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변태와 함께 앉았던 조민영을 본 이야기. 조민영이 가출했다며 재워달라고 한 이야기. 밤에 있었던 일들은 축약해서 말했다. 대충 얼버무렸지만 양 가 부모님 모두 나이가 적지 않다. 뭔 말인지는 아실 것이다.
“휴우...”
“흐음...”
모든 이야기를 들은 양 가 부모님들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찾아온 침묵.
그 이후 내 원룸에는 전쟁터와 같은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것은 1차 여요전쟁의 거란 소손녕과 고려 서희의 외교 담판, 6.25 한국전쟁 당시 북괴군과의 휴전협정, 아덴만의 여명 작전 당시 회의 분위기, 후쿠시마 원전 사고 당시 대책회의.
뭐 그런 느낌이다.
한 마디로 죽겠다는 거다.
나와 조민영은 나란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바닥으로 처박고 있었다. 도저히 앞을 쳐다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리는 저릿저릿, 온 몸은 피로하고, 입술이 말라간다. 옆을 슬쩍 보니 조민영도 애꿎은 교복치마를 꾸깃거리며 잔뜩 긴장한 눈치였다.
꿀꺽- 꿀꺽-
민영 아버님과 민영 어머님은 팔짱을 끼고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우리 엄마와 아빠는 말없이 물만 들이켜고 있었다. 속이 타는 거겠지.
사실 이런 경우 상황이 어찌됐든 남자 쪽이 눈치가 보이는 법이다. 미래가 창창한 여자 고등학생을... 그것도 남자 경험도 없는 애를 집에 불러놓고, 동거하고, 성관계를 맺었다는 증거까지 있었으니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나와 조민영의 경우 사귀는 사이도 아니니까.
그 때, 우리 아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그래서 사돈어른과 사부인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흠.”
“사부인이라뇨? 설마 결혼을 생각하시는 건가요?”
“... 아뇨. 호칭이 거슬리신다면야 뭐... 하. 이걸 어쩌나. ‘야’ 라고 부를 수도 없고. 허허.”
아빠가 농을 던지면서도 땀을 육수처럼 흘리고 있었다. 손수건으로 땀을 닦는데 그 때마다 파란 손수건이 축축이 젖어간다. 우리 아버지는 닭갈비 장사를 하는 자영업자로 넉살이 좋으신 분이었다. 그런 분이 농조차 제대로 못하고 땀만 흘리고 있다.
꿀꺽- 꿀꺽-
딸랑-
얼음이 잔에 튕기는 소리가 들리자 아빠가 내 쪽에 컵을 내밀며 말한다.
“지, 지훈아. 물 좀 가져와 봐라. 이거야 원. 목이 타네.”
“어, 어. 알았어.”
“제, 제가 다녀올게요. 아버님!”
우리 아빠가 한마디 하자 나랑 조민영이 누구라 할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민영 어머님의 추상과도 같은 불호령이 떨어졌다.
“민영이 넌 앉아.”
“하, 하지만 아버님이...!”
“누가 니 아버님이야!!”
“...”
“제,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어머... 미, 민영 어머님.”
“그러세요.”
워, 눈빛 봐라. 지리겄소. 뭔 아줌마가 눈빛이... 이것이 바로 어머니의 위대함인가. 나는 어머님이라고 부르려하다 민영 어머님의 눈빛을 보고 얼른 말을 바꿨다. 나는 냉장고에 가서 아예 물을 통째로 가져와 앉았다.
내가 자리에 앉자, 지금껏 칼을 갈고 있었던 민영 어머님이 입을 열었다. 은행원 출신답게 반듯하지만 딱 잘라 들어오는 그런 목소리였다.
“이번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저희 딸이 심적으로 많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어, 엄마. 아닌데. 나 좋았는...”
“넌 입 다물어!”
“...”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지요. 잠시 방황하는 순진한 여고생을 집으로 불러들여 성적인 관계를 요구하다니요. 법적으로도 이건 위법한 행위입니다. 서른이 넘은 성인이 미성년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집에 가둬놓고 각종 변태적인 행위를 강요하고 특히 저런 망측한...!”
책상에는 딜도가 올라와 있다. 어디서 구했는지 겁나 크다. 진짜. 이따만한 걸 조민영이 가지고 놀았다고 생각하니 나도 좀 충격이다.
“저런 망측한 걸 아이가 가지고 놀도록 만들다니요?! 저희 딸. 민영이는요. S대 노리고 있는 수재에요. 야한 건 조금도 모르는 그런 딸이라구요! 그렇게 순진무구하고, 미래가 창창한 아이의 앞길을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막으실 수 있습니까?!”
아니 근데... 너무 사실을 왜곡하는 거 아니냐. 나 진짜 아무 강요도 안했는데. 옆을 돌아보니 조민영도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낑낑거리고 있었다. 지가 잘못한 거 알거든.
팩트 폭행을 하려다가 참았다. 조민영이 너무 곤란해질 것 같아서.
근데 듣다보니 열 받았는지 우리 엄마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면서 참전을 선언했다.
“아니. 그래서 결혼을 하면 되잖습니까. 사부인.”
“결혼이라니! 이제 고3인 아이랑 다 늙어빠진 놈이랑 결혼을 시키자구요?! 날로 먹자는 거야 뭐야?!”
잘 해결해보려던 우리 엄마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나는 게 보인다. 멀쩡한 아들을 늙다리 취급하다니. 화가 날 거다.
“네에? 다 늙어빠져요? 하이고~ 제가 볼 때는 그 쪽 딸이 인생 편하게 살려고 우리 아들을 유혹해 처먹은 거 같은데요? 뭐라더라? 취, 취집? 취집이등가?”
“뭐, 뭐요?!”
“저거 봐요 저거. 교복 줄은 거봐. 저런 애가 무슨 모범적인 딸이라고 그렇게 난리를 치십디까? 예? 뻔하지 뭐. 우리 아들을 그 쪽 딸이 유혹했겠지. 볼 거라고는 얼굴밖에 없고, 가슴은 그리... 어유. 애가 우유통이 크네... 어유... 엉덩이도 애를 순풍순풍... 지훈아 너 능력있다 야.”
참고로 우리엄마는 전형적인 시골 엄마였다. 민영이의 몸매를 슥하고 훑어본 우리 엄마의 순도 100%의 촌스러운 발언에 민영 아버님과 어머님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고, 민영이가 몸을 베베 꼬며 부끄러워했다. 이 꼴을 본 민영 어머님의 눈이 뒤집혀졌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성희롱이에요?! 성희롱은?!”
“아니 이게 무슨 성희롱이라고 그러신담. 결혼 할 꺼 같으니께 좀 본 거 아니요.”
“겨얼혼?! 하! 떡줄 사람은 생각도 안하는데 결혼은 누가 결혼을 해요?!”
“떡을 우리 아들이 주지 그쪽 딸이 주남? 싸는 쪽은 남자 쪽인디?”
“뭐, 뭐라고요?!”
아아. 세련된 도시 여자가 무너져가는 모습이란. 이성적인 사람은 본래 앞뒤재지 않고 막 말하는 쪽에 약하다. 우리 엄마는 초졸이라 머리 쓰는 거 잘 못한다.
민영 어머님도 인내심에 한계를 느꼈는지, 드디어 유치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그, 그럼! 그 쪽 아들은 뭐! 괜찮나요?! 에?”
“뭐가 괜찮다는 거예요? 말 좀 해보지?”
“그, 그거요! 그거!”
뭐... 우리 딸 가슴이랑 엉덩이가지고 성희롱을 했으니, 니 아들가지고 나도 성희롱을 하겠다 이건데... 아뿔싸. 딸이 적일 줄이야. 조민영이 눈치 없게 끼어든다.
“오빠 거 대따 큰데, 저거 만해.”
“...”
“...”
조민영이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딜도로 모두의 시선이 한 번 쏠렸다. 그리고 내 남근 쪽으로 시선이 한 번. 난 여기서 손으로 거길 가렸다. 그 다음엔 다시 딜도로 시선 한 번.
나는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채 팔꿈치로 조민영을 팍 하고 밀어버렸고, 우리 아빠는 물컵을 입에 문 채 표정을 가리고 있다. 풉풉 거리며 컵 안의 물이 요동을 치는 걸 봐서는 웃음을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민영이 어머님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내 남근 쪽을 살피고 있었다.
뭐... 그런 생각이겠지. 저렇게 큰 걸, 우리 딸에게 넣었단 말이야. 뭐 그런 거 아니겠어?
탁-
시끄러워지는 상황을 정리한 것은 민영 아버님이었다. 탁자를 내리쳐 소란을 정리한 민영 아버님이 입을 열었다.
“소란을 피워서 일단 죄송하게 됐습니다. 제가 오늘 온 것은 김지훈... 씨의 행동을 확인하고, 사과를 받은 후, 다신 만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으러 온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우리 아빠가 했다.
“뭐. 대충 듣기는 했는데... 사과... 까지 해야 합니까?”
“그게 무슨 소리신지?”
“듣자하니 따님께서 우겨서 우리 아들 집에 온 것 같은데. 젊을 때 서로 반해서 만날 수도 있는 거지 우리 같은 어른들이 나서서 뭘 하겠습니까.”
“설령 그런 제의를 받았더라도 거절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게 어른이지요. 아이가 순간의 감정에 욱해서 행동을 하면, 어른은 마땅히 다독이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할 의무가 있어요.”
“그래요. 뭐 그건 잘 알겠는데. 그거도 자기네가 알아서 할 일 아니겠습니까? 보아하니 둘 다 서로 마음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지. 며늘아기야?”
“네! 아버님! 저 오빠 좋아요!”
이쯤에서는 내가 나서야 할 것 같다.
“아니. 아빠. 제 의사는 뭐 묻지도 않고 갑자기...”
본래 부부는 비슷한 사람끼리 결혼을 한다. 우리 엄마가 초졸에 된장맛 강한 그런 촌동네 아주머니라면 우리 아빠도 비슷하다.
“야. 새끼야. 너 그러면 안 돼. 여고생이랑 했으면 바로 물어야지 뭘 빼고 그러냐~”
“지, 지금 그럼 우리 딸에게 아무 감정도 없이 했다는 건가?! 자네 지금 그런말이야?!”
조금 전에 했던 말은 실언이 분명하다. 민영이는 민영이 대로 삐져서 나를 보고 있었고, 우리 엄마, 아빠는 물론이고, 민영이 아버님 어머님도 나를 쓰레기처럼 보고 있었다.
와. 미치고 팔짝 뛰겠네 진짜. 누가 봐도! 누가 봐도! 내가 따먹힌 건데!! 왜 내가 쓰레기 취급을 받아야 돼!
“아오!!”
화가 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뭐여. 야. 너 뭐야!”
“자, 자네 지금...!!?!”
아빠랑 민영 아버님이 당황하든 말든 나는 성큼성큼 냉장고로 걸어가 소주를 꺼내 나발로 한 번 들이켰다. 그리고 충격 받은 듯 나를 보고 있는 양가 부모님들을 보며 말했다.
“후우. 한 잔 하시죠. 그냥.”
*
“크하하하!! 아이고! 우리 검사사돈!! 반칙아닙니까?! 똑똑한데 잘생기셨어! 그러니 딸도 그렇게 예~~~뿐 딸을 나았찌요!!!”
“크하하! 사돈어른은 어떻고요?! 지방에서 자영업하면서 서울에 아들을 보내놓는 게 어디 쉬운 줄 아십니까!! 인품이 훌륭하시니 아들도 잘생기고 멋지고 올바르게 컸겠죠!!”
“하이고오오... 우리 사돈어른만 하겠씁니까! 민영이 딱! 처음 보는데... 아! 하늘에서 여신이 내려온 줄 알았지 몹니까...!”
“그치이요?! 내가 딸은 잘 키워써~”
“...”
비틀비틀. 술 냄새에 찌들어서 어깨동무까지 하며 걷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아빠랑 민영이 아버님이다. 집에서 소주 한 잔하다가 또 말싸움 좀 하다가 불타오르는 바람에 근처 술집까지 오게 됐다.
승부를 보겠다는 듯 미친 듯이 술을 퍼먹기 시작하는 두 아버님을 상대하느라 나는 죽을 지경이었다.
그 둘을 보며 나랑 조민영은 뒤로 물러나 걷고 있었다. 민영이가 내 옆구리를 콕 찌르더니 마개가 따진 숙취해소제를 건넸다. 나는 숙취해소제를 물끄러미 내려 보다가 조민영에게 말했다.
“할 말 없냐?”
“... 죄, 죄송해요. 오빠.”
“휴우... 진짜 이게 뭐야. 너... 뭐 어떻게 된 거야?”
“아니... 아, 아빠가... CCTV까지 다 뒤져가면서 막 오빠 신상을 따길래...”
“...”
아. 검사구나. 무섭다 진짜.
“그, 그거 좀 위법행위 아니냐? 개인 신상을...”
“아빠 눈에 그런 게 들어오겠어요?”
그치. 하나 뿐인 딸아이가 당했다는데 그딴 거 신경 쓰는 아빠가 어디 있겠어. 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래. 뭐...”
“저... 근데 오빠. 제가 사실...”
“응?”
“교통사고를 당했었는데... 그 이전에 기억이 좀 별로 없어요.”
“아... 그래? 힘들겠구나.”
“아, 아뇨. 힘든 것 까지는 아닌데... 전 괜찮은데... 제가 그... 교통 사고 이전에는 좀 성격이 많이 달랐나봐요.”
“아아~ 뭐. 그런 경우도 많다고는 들었어. 큰 수술 전 후로 각성하듯이 뭔가 다른 사람처럼 변한다고...”
“그래서 저희 부모님이 저를 너무 순진하게 보셔서... 그래서 막... 막말도 하고 그런 것 같은데 너무 죄송해요...”
막 울려고 한다. 저렇게 미안해하니 뭐라 할 마음도 사라졌다. 조민영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니, 집에서는 고스톱 판이 벌어졌다.
“아! 쌌네!”
“...”
어머님 둘이 고스톱이나 치면서 친해질 줄이야. 뭐 잘 풀린 편이라고 해야 하나. 험악했던 분위기는 그렇게 손쉽게 풀렸다. 술에 취한 민영 아버님을 그대로 두고 갈 수도 없고 해서, 다 같이 우리 집에서 자기로 했다. 6명이 자면 아주 꽉 차는 크기.
민영이는 어머님 아버님 사이에 껴서 잤고, 나는 우리 엄마 아빠 사이에 끼어서 잤다.
그래서 본격적인 이야기는 다음 날이 돼서야 진행됐다.
우리 엄마, 아빠의 의견은 이러든 저러든 상관없다. 결혼하고 싶으면 하는 거고, 말면 마는 거고. 다만 다 큰 아들이 고등학생을 건드렸다는 점에서는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원하는 게 있으면 말을 해라.
뭐 그런 식의 의견이었고. 조민영이 여기에 동조하고 나섰다.
“전 오빠랑 결혼할 거예요!!”
민영 어머님, 아버님의 의견은 아이가 아직 어리고, 사과 받으러 온 것이지 결혼을 진행할 의사는 전혀 없다. 아이는 아직 준비가 안 됐다. 만약 다 큰 후에도 생각이 변하지 않으면 그 때 진행하는 게 어떻겠냐.
뭐 그런 식의 의견이었고, 내가 여기에 동조했다.
“아직 나이도 어리고... 저희 오래 만난 사이도 아니구요. 여유를 가지는 게...”
사실 내가 결혼하자고 우겨도 되겠지만, 그럼 조민영은 부모님의 반대를 등에 업고 결혼 하는 것이 된다.
결혼 이라는 것은 집안과 집안의 결합이다. 좋아서 만나는 거면 그냥 동거를 하면 된다. 굳이 결혼을 하려는 것은 아이를 낳고, 그 아이에게 사회적 울타리를 제공하기 위한 보호장치를 두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반대를 했다.
“그리고... 솔직히 우리 만난 지 얼마 안 됐잖아. 그렇지?”
“하지만 오빠. 나 오빠가 너무 좋...”
“니가 아직 어려서 그래. 대학가면 오빠보다 훨씬 멋있는 사람도 많고... 나는 솔직히 상대도 안 돼. 그러니까 조금 더 커서 만나자. 알았지?”
뭐 그런 식으로 달래서 돌려보냈다. 민영 어머님의 손에 이끌려 나가는 조민영이 아쉽다는 듯 계속 뒤를 돌아봤지만... 잡지 않았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만 있자 아빠가 내 뒤통수를 한 대 후려갈기며 말했다.
“에이! 나였으면 그냥 오늘 도장 찍었다. 너 봐라. 이제 후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