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스핀오프] 정조관념 이상한 여고생 썰 - 3
[성관계 합의서]
[상기 두 사람은 아래와 같은 조건으로 상호 합의하에 성관계를 가짐을 확인합니다.]
[1. 성관계에 강요, 협박, 매춘 등의 사실이 없음....]
조민영이 종이 위에 또박또박 적어나가는 각서를 보며 나는 머리가 아파왔다.
뭔가 이상한 아이랑 엮인 것 같았다.
이래서야 마치 이 여자애가 성관계를 원하는 것 같잖아. 그보다 여고생이 입에 섹스를 담으면서도 아무 망설임이 없는 게 너무 웃기잖아. 수줍어야 정상 아니야?
순간 머릿속에 ‘각목’ 이라는 단어가 스쳐지나갔다.
가출 청소년들이 돈을 벌기 위해 일종의 꽃뱀행위를 하는 것을 ‘각목’ 이라했다. 조민영처럼 예쁜 아이에게 넘어가 성관계를 맺으려 하면, 함께 있던 가출 청소년들이 각목을 들고 나타나 협박으로 돈을 뜯는 것이 각목이다.
그런 건 아니겠지? 조민영은 굉장히 순하게 생겼다. 나쁜 짓 안 할 것 같은 아이.
“... 민영아. 미안한데 오빠 일하러 갈게.”
나는 결국 그 아이한테 일하러 간다고 말하고 도망치듯 카페를 나왔다. 카페를 뛰쳐나가는 내 등에 대고 조민영이 밝게 소리쳤다.
“기다릴게요! 오빠!”
“...”
기다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지가 알아서 가겠지 뭐.
*
“원인 파악은 언제 됩니까?”
“정확한 분석이 어렵습니다. 내부에서 재현이 안 되고 있기 때문에...”
“허... 참.”
삼선카드 전산 담당자가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근데 이 양반아. 나도 답답하다고. 너희 서버로 테스트하면 결과가 바로 나오는 건데.
“테스트 모듈을 올려서 로그를 찍게 하면 쉽게 알 수 있는데... 그건 어렵겠습니까?”
“그건 안 되죠. 운영서버에서 어떻게 테스트를 합니까?”
“...”
그게 문제인 거라고. 답답한 사람이네. 결국 그 날은 아무 소득 없이 끝났다. 을의 입장에서 나는 차마 가자는 이야기도 못했다. 시간은 밤 11시가 넘었는데...
머릿속에서 조민영이 지워진지는 오래였다. 놔두고 온지 12시간이 지났다.
있는 게 이상하잖아?
“휴우. 오늘은 이만하고... 김지훈 대리님.”
“네. 말씀하십시오.”
“내일 다시 이야기하죠. 내부에서 조건을 달리해서 테스트 해보세요.”
“... 그 조건이라는 게...”
“그거야 알아서 생각하셔야죠.”
“... 네. 알겠습니다.”
을의 회사원이 뭘 하겠나. 그저 알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삼선카드에서 나왔을 때에는 11시가 넘었을 때였다. 저녁도 먹지 못하고 매달렸지만 헛수고였다.
원인 파악조차 하지 못했으니...
그렇게 힘없이 집으로 돌아가는데, 문뜩 낮에 만난 여고생이 생각났다. 조민영이라고 했던가? 지하철역까지 갔다가 결국 되돌아 왔다.
그 아이를 두고 온 카페로 향하는데 기분이 뭔가 이상했다.
설마. 있는 건 아니겠지?
기다린다더니 진짜 기다리는 건 아니겠지?
괜히 발걸음이 빨라진다.
마침내 카페에 도착했다. 늦은 시간이지만 카페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내 모습이 들키지 않게 카페 밖을 서성이며 나는 조민영을 찾았다.
있네?
“하... 쟤는 진짜... 나 기다리는 건가?”
거의 12시간이 지났다. 안 쫓겨난 것도 신기했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게 너무 충격적이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며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그녀는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책을 펴고 공부를 하는 건지 어쩐 건지. 가끔씩 인상을 찡그리는 모습도 꽤 귀여웠다. 그렇게 20분 정도 흘렀을까.
어떤 남자가 조민영에게 접근하는 게 보였다. 키도 크고 스타일 좋은 남자였다.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잘생겼을 것 같다. 얼굴도 작고 어깨도 넓고. 그런 남자가 가서 말을 거니 조민영이 생글생글 웃으며 답을 한다.
아...
음...
어...
하. 나 지금 질투하는 건가. 기분이 좀 더럽네? 더럽기도 하고... 찝찝하다. 아주 찝찝해. 물론 세상 남자들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조민영이 괜히 이상한 남자를 따라갈까 걱정이 됐다.
카페 문을 열고 조민영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말소리가 들린다.
“약속이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에이. 아까부터 계속 혼자 있으시던데요.”
“싫다니까요.”
“그러지 말고 나랑 놀아요. 가출한 거면 제가 재워드릴까요?”
“됐어요. 저 집 있어요.”
조민영이 거절하는 말을 듣고서야 안심이 됐다. 걸레 같이 이 남자 저 남자 대주는 애는 아니라는 건데...
“민영아.”
“어?! 오빠!”
내가 이름을 부르자 조민영의 고개가 내게 휙 하고 돌아온다. 그리고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달려오듯 벌떡 일어나 다가오더니 내 팔짱을 낀다. 나는 그 상태로 아무 말 없이 잘생긴 놈을 쳐다봤다. 와. 이 놈도 꽤 잘생겼네.
“제 동생한테 무슨 일 있어요?”
“아뇨. 너무 예쁘셔서...”
“예쁜 건 나도 알고. 볼 일 없으시면 가시죠.”
“... 아. 네.”
그 잘생긴 놈은 키도 나보다 컸다. 190은 될 것 같다. 어깨도 넓고 적당히 운동을 한 티가 나 남자가 봐도 멋진 그런 남자였다. 하지만 나는 지금 자신감이 가득한 상태였다. 그렇게 멋진 남자를 거절했던 조민영이 나를 택했으니까.
눈빛을 좀 쏴주었더니 남자가 어색한 표정으로 사라졌다. 그가 카페에서 나간 후, 나는 조민영에게 말했다.
“짐 챙겨. 가자.”
*
지하철로 집까지 오는 동안 조민영이 옆에서 계속 재잘재잘 떠들어댔지만, 전혀 즐길 수 없었다.
내가 미쳤지. 본인이 가출하지 않았다고 우기고는 있지만 이건 누가 봐도 가출여고생이잖아. 데리고 가서 뭘 하겠다고. 사회적인 책임감이 나를 막 짓누른다. 머리에서는 경찰에 잡혀가는 시나리오가 막 재생되기 시작했다.
“오빠.”
그 순간 지하철 구석에 봉을 잡고 선 내 품에 누가 안긴다. 조민영이다. 얘가 또 왜 이러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이 꽤 많다. 무서운 건가? 아니면... 아. 정말 얘 생각은 알 수가 없다.
“식사는 하셨어요?”
“... 아니. 늦게 와서 미안하다. 일이 길어져서...”
“괜찮아요. 저는.”
그러면서 웃는데, 버리고 가려했던 행동을 조금은 후회했다. 나를 믿어준다는 건가.
“너는 밥 먹었어?”
“밥이라 하긴 좀 그렇구. 군것질을 좀 했어요.”
“그래. 잘했네. 근데... 왜 하필 우리 집이야?”
“네?”
“아까 보니까... 어떤 남자도 너 재워주겠다던데. 왜 우리 집을 가려고해?”
“음...”
내 말에 조민영이 잠시 고민을 하더니 답했다.
“오빠가 저 변태한테 당할 때 도와줬잖아요.”
“...”
“운명의 상대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어요.”
여고생 특유의 ‘백마 탄 왕자’ 상상인가... 나는 이 아이를 만난 후 처음으로, 여고생다운 모습을 보았다.
*
그렇게 집까지 도착했다. 문을 열기 전 나는 조민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기. 방이 좀 지저분해. 하하.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 내가 관리를 아예 안 하거든.”
“괜찮아요. 재워주시는 게 어디에요.”
문을 열었다.
내가 사는 집은 8평짜리 원룸이었는데, 혼자살기에는 딱 적당한 크기의 집이었다. 나는 여기저기 널려있는 속옷들과 쓰레기들을 치우며 집으로 들어갔다.
“아하하. 대충 어디 앉아 있어. 좀 지저분하지?”
“조금요.”
그렇게 말한 조민영이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섰다. 그녀는 미니스커트 같이 짧은 교복 치마에 분홍색 고양이가 수놓인 발목 양말을 신고 있었다. 그런 모습으로 방에 아무 거리낌도 없이 들어오더니 냉큼 내 침대에 앉는다.
“...”
순간 좀... 설렜다. 내 침대에 여고생이...
“아. 피곤해.”
경계심도 없는지 아예 드러눕는다. 오늘 아침까지 내가 잠을 자고 있던 침대에 완전히 몸을 눕힌 조민영은 이불까지 덮었다. 몇 년간 써오며 내 몸에 딱 맞춰지고, 내 체취가 가득 담긴 침대와 이불이 그녀의 몸을 완전히 감쌌다. 그녀는 그 이불에 코를 킁킁.
“오빠 냄새 좋다.”
“그, 그래? 다, 다행이네.”
뭐가 다행이라는 거야. 내가 말하고도 뭔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얼굴이 괜히 빨게 지는 것 같다. 이상한 상상을 해버렸으니까.
“갈아입을 옷은 있어?”
“아뇨. 없어요. 이거 교복이 끝이에요.”
“... 그... 내 옷도 괜찮으면...”
“네! 좋아요!”
“...”
일본 문화 요소 중, ‘천연’ 이라는 단어가 있다. 내가 본 조민영도 일종의 천연이다. 남자에게 이렇게 거리감 없는 여자애는 처음 본다. 예쁜 여자가 이렇게 거리감 없는 행동을 하는 게 얼마나 파괴력이 있는지 모르는 건가? 어장관리라고 오해사기 딱 좋은 아이다.
나는 내가 작아서 못 입는 티를 민영이에게 주고, 반바지를 몇 개 꺼냈다. 고르라는 뜻이었는데, 대뜸 바지 하나를 잡더니 거기다가도 코를 박고 냄새를 맡는다.
“... 햐아...”
그것도 바지에서 남근 있는 부위다. 저거 엄청 짧고 달라붙는 건데...
... 잘 모르고 하는 짓이겠지? 내가 지저분한 놈이라 그런 생각을 하는 거겠지?
나는 또 얼굴이 달아오르기에 샤워나 하겠다고 말하고 옷가지를 챙겨 화장실에 들어갔다.
띡-!
화장실 문을 잠갔다.
어쩐지 쟤는 훔쳐볼 것 같았거든.
이거 뭔가 이상하잖아? 내가 쟤를 덮치려고 하고, 쟤가 겁을 내야 정상 아닌가?
달그락-
샤워를 하는 동안 밖에서는 뭘 하는 건지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샤워를 하고 방을 나오니 조민영이 앞치마를 입고 있었다.
“... 너...”
옷은 갈아입었다. 갈아입었는데... 내가 입으라고 준 티는 입지 않고, 그 대신 막 흘러내리는 내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하얀색 와이셔츠 밑으로 늘씬한 다리가 뻗어 나와 있다. 바지는... 입었지?
“오빠. 잠깐만 기다려요! 음식이 얼마 없어서 김치찌개 밖에 못했어요. 괜찮아요?”
“아... 어... 그, 그래. 근데... 와이셔츠... 는 불편하지 않아?”
“네? 아뇨. 이게 더 편한데. 저 원래 집에서는 아무것도 안 입고 있거든요.”
“...”
“저는 막 옷이 몸에 붙는 느낌이 싫더라고요. 괜찮죠?”
“어, 그, 그래.”
꿀꺽.
갑자기 긴장이 된다.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속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빨래바구니에 옷과 수건을 집어넣었다. 아. 잠깐만. 뭐 이상한 걸 본 것 같은데?
나는 샤워바구니에 다가가 빨래들을 뒤져보았다. 그리고 남자 집에서 있으면 안 되는 걸 보고 말았다. 여고딩 교복이나 발목 양말은 그렇다 치는데...
“... 미, 민영아.”
“아. 오빠. 제 속옷도 거기 놨는데 괜찮죠?”
“...”
“잘 때는 불편하거든요. 그거.”
그럼 지금 노브라에... 노팬...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