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에필로그 - 1
"... 그랬다는 이야기지."
"네? 그게 끝이에요?"
"껄껄. 뒷이야기가 듣고 싶은 건가?"
어두운 공간. 두 남녀가 앉아 있다.
정장을 입은 노신사는 의자에 앉아 내려 보고 있었고, 그 발 끝 정면에는 한 여자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여자는 보라색으로 물들인 짧은 머리에 보이쉬한 스타일이었는데, 두툼하게 살이 쪄서 덩치부터가 남자 같았다.
여자가 말한다.
"그래서... 그 김지훈 이라는 남자 이야기와 제 계약에는 무슨 관계가 있는 거죠?"
"그 '계약' 의 성립 조건이 이 이야기를 듣는 것이라네."
"어째서요?"
"김지훈의 마지막 계약 조건 중 하나였거든."
"조... 건?"
여자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노신사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조건으로 인해, 우리 악마는 '역전 세계' 를 원하는 계약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어야만 돼. 이제 계약을 이야기해보자. 계약은 말이야..."
*
현정이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그녀의 곁에서 잠든 그 날 밤.
나는 묘한 꿈을 꾸었다.
걷고 있었다.
나는 분명 걷고 있었다.
어둡고도 음침한 복도를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었다.
정신이 또렷해지는 그 순간 저 멀리 의자에 어떤 요염한 여인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여인은 붉은 머리카락에 피로 절인 듯한 강렬하고도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의자에 몸을 눕히고 마치 유혹하듯 다리를 꼬아 하얀 허벅지를 드러내놓고 있다. 옆으로 터진 그 드레스는 골반까지 올라가 야릇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 여자 앞에서 내가 멈춰 섰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몸과 정신을 내가 조종할 수 있음을 알았다. 정신이 돌아오기가 무섭게 나는 그 여자에게 물었다.
"저... 누구시죠?"
여자가 여우처럼 웃으며 말했다.
"결국 말하고 말았구나. 말하고야 말았어."
"... 네?"
"김지훈. 너는 나를 기억 못하고 있을 테지. 잠시 너의 기억을 돌려놔 볼까."
여자가 손짓하는 순간 나는 순간 멍한 상태가 되었다. 머릿속에 무언가 파문이 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눈앞이 팽글팽글 돌고 몸을 가눌 수가 없다.
수차례 비틀거리다 똑바로 선 순간.
모든 기억이 돌아왔다.
"... 서, 설마..."
"너와 나는 계약을 했다."
"내, 내가 죽었었다고?"
"너는 등교를 하던 도중 자동차에 치어 죽고 말았지. 그 때 네가 가장 강렬하게 원했던 것은 삶에 대한 집착이 아니었어. 성욕이었지."
나는 18살까지 모태 솔로에 동정이었다.
죽는 순간 나는 차마 꽃 피지 못한 내 미래에 대한 막연한 후회와, 집착 같은 것이 아니었다. 미래가 어떤 것인지 자세히 몰라서 그랬던 걸까? 아니면 삶이라는 것을 진득하게 느껴보지 못해서 그런 것일까?
놀랍게도 나는 죽는 그 순간까지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만, 억울해했다.
남들은 여자친구도 사귀고, 섹스도 하고, 결혼도 하며 사랑을 충분히 느끼고 사는데, 왜 나만 이렇게 아무 것도 못해보고 죽어야하나.
나도 남들처럼 연애도 하고, 여자 친구와 손을 잡고 걸으며, 영화도 보고, 함께 잠도 자고 싶은데. 남들 다하는 섹스 한 번 못해보고 이렇게 죽나.
그 후회의 냄새를 맡고 나온 것이 바로 저 악마다.
"그, 그렇다면 내가 겪은 그 모든 게 거짓... 거짓 된 세계란 말이야?!"
"아니. 아니.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군. 그 모든 건 진실이다. 네가 겪은 이들 모두 실제 있는 이들이야. 윤설아, 이미진, 배소연... 나는 다만 네가 원한대로 정조를 역전시키고, 네가 원하는 대로 뒤바뀐 세상에 널 보냈을 뿐이지."
"그, 그럼 다시 돌려줘! 뭐가 문제야!"
내 말에 악마가 붉음 입술을 찢으며 웃었다.
"꺄하하! 계약 조건이 기억나지 않나보네? 김지훈. 네가 나에게 뭐라고 했지? 세상에 사랑 따위는 필요 없다면서? 사랑 같이 복잡한 거 말고, 이 여자 저 여자 따먹으며 평생 섹스나 실컷 하다 죽을 수 있게 해달라면서?"
"그, 그렇지만...!"
"하지만 넌 결국 사랑에 빠지고 말았어. 그렇지? 김지훈?"
"..."
나는 현정이를 좋아한다.
품 안에 안았던 그 따스함이 아직 남아있는데 이럴 수가.
아직 현정이와 정식으로 사귄지 하루도 안 됐고, 손을 잡고 어디를 제대로 가본 적도 없고, 영화도 본 적 없다. 데이트 한 번 못해보고 이렇게... 정말 섹스나 하다 끝났네.
절망에 빠진 내게 악마가 계속 떠들어댔다.
"평생에 걸친 사랑을 내게 모두 바치고, 너는 정조역전세계를 살아갈 기회를 얻었어. 하지만 사랑에 빠져버렸으니...”
"그, 그럼 난 이제 어, 어떻게...?"
악마가 말을 질질 끌기에 나는 잔뜩 긴장해서 마른침을 삼켰다.
누구 하나 사랑하지 않고, 섹스만 즐기겠다는 조건으로 정조역전이라는 내가 바라는 세상을 얻었다. 내가 섹스하자고 하면 여자들은 쉽게 대주는 그런 세상. 섹스 한 번 못하고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
하지만 조건은 깨졌다.
내가 현정이에게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으니까.
그럼 삶의 기회도, 정조역전 세상도 없어진단 말인가?
"... 너에게서 다시 모든 걸 빼앗아야지. 안 그래?"
"자, 잠깐! 설마 나보고 다시 죽으라는 이야기야?"
"너는 남을 사랑해서는 안 돼. 그 사랑을 나에게 바치기로 했으니까. 하지만 너는..."
"마, 만약에! 만약에 그럼. 내가 평생에 걸쳐 현정이만 사랑하겠다고 맹세를 하면? 그건 어때?"
"한 여자와...?"
악마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다른 여자와 섹스를 할 기회가 수없이 주어진다고 해도 말이냐?"
"그래! 그 모든 걸 포기하면?"
"다른 여자를 보고 발기가 되지 않아도 상관없느냐? 사랑할 기회가 주어져도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오로지 네가 말한 그 여자에게만 사랑을 느끼게 될 텐데도?"
"사, 상관없어. 나는! 나는 걔만을 사랑할게."
"큭큭... 재밌군. 그래. 그 정도라면... 살려주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다만 세상은 원래대로 돌려놓겠다."
"... 원래... 대로?"
나는 조금 전까지 역전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것이 원래대로 돌아간다고?
"자, 잠깐! 원래대로 돌아가면 다들 나를 기억하지 못할...!"
"아니. 그건 아니야. 기억과 사실은 적당~히 인과율에 맞추어 조절할 것이니까."
나를 기억한다.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궁금한 것이 또 하나 생겼다.
"어떤... 식으로 바뀌는데?"
"어디보자... 윤설아는... 어느 날 전철에서 치한을 만나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될 거야. 마침 김지훈이 나타나 그 치한을 퇴치해주고 그것을 인연으로 친해졌지."
"... 미진 누나는?"
"이미진은... 윤설아의 친구로 너에게 누드모델을 부탁하며 친해지지. 이 세계든 정조역전세계이든 남자 모델은 구하기 어려울 테니까. 다만."
"다만?"
"안타깝구나. 무난자증으로 남자에게 버림받고 절망에 빠져..."
"!"
그 말에 내 눈이 번뜩 뜨였다.
정조역전세계의 이미진 조차도 충격으로 정신을 못 차렸을 정도다.
남자는 홀로서기에 익숙한 동물이다. 태어나서 크면서도 알아서 하라는 말을 여자에 비해 수십 배 넘게 들으며 자란다. 그렇게 담금질에 익숙한 이미진도 그 충격을 이기지 못했는데 과연 원래 세계의 이미진은 버틸 수 있을까?
"... 혀, 현정이는?"
"아. 그 장현정은 놀이터에서 홀로 울고 있던 것을 네가 발견해 위로해주며 친해지게 되지. 함께 카페 알바도 하고, 축구장도 놀러 다니며...”
이건 괜찮은데? 하지만... 지금까지 악마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그러다 현정이는 어느 골목에서 남자 3명에게 붙잡혀 네가 당했던 윤간을 당하고..."
"뭐...?"
"남자 혐오증에 빠지게 되는데..."
"자, 잠깐...!"
"그 곁에 네가 있게 됨으로 인해서..."
"그만! 그만!"
내가 설아 누나를 만났을 때, 내가 치한을 당하고 누나가 나를 구해줬었다.
이 인연은 유지한 채 상황이 반대가 된다면...
현정이는... 내가 그런 상황에서 구하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생각하기도 싫은 결과였다.
"그, 그건 안 돼."
"그럼 네가 죽어야 하는데도?"
"..."
천연덕스러운 대답. 나는 악마의 말에 생각에 잠겼다.
나는 무언가 터무니없는 계약을 한 것 같다.
어차피 죽은 것.
될 대로 되라는 생각으로 악마와의 계약을 받아들였었다.
그래서 평생 사랑 같은 건 안 해도 괜찮으니 섹스나 죽어라 했으면 좋겠다고 악마에게 소원을 빈 것이다.
그건 어린 아이 특유의 객기였으며, 호기였다.
사랑 같은 거 해본 적도 없는 나에겐 섹스는 미지의 영역이었으니까.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악마에게 말했다.
"그럼... 다른 걸 내어준다면?"
"다른 것...?"
"그래. 다른 걸 내어준다면 어때? 나는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정..."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계약조건을 바꾸겠다 이거냐? 너는 참 철이 없는 아이구나."
"..."
"허나. 흥미롭군. 무엇을 내어줄 것인가? 잘 생각하고 말해야 할 게다. 하나를 받으면 하나를 내어주어야 할 테니까."
악마의 말에 나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나, 나는...!"
*
"하나를 받으면 하나를 내어줘야... 한다고요?"
"내 이야기는 이게 끝이네. 더 이상 해줄 이야기가 없어. 나는 자네에게 도움 될 만한 이야기를 모두 한 것 같은데... 자. 무엇을 원하는가?"
"..."
노신사의 말에 여자가 복잡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인다.
"... 저는... 태어나서 남자에게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뚱뚱하고 못 생겨서 어릴 때부터 놀림도 많이 받았구요. 왜 세상은 이렇게 불공평한 걸 까요? 예쁘고 아름다운 여자들은 끝없이 사랑받고 끝없이 매력적으로 변하는데, 저처럼 못생긴 여자들에게는 왜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걸까요."
"그래서 무엇을 원하는 건가? 나는 네 부모가 아니야. 징징거리지 말게."
노신사가 천연덕스럽게 안경알을 닦으며 말했다. 그러자 여자가 울면서 말했다.
"저는! 저는 여성이 상위에 있는 세계를 원합니다! 남자들이 지금까지 여자들을 억압하고, 여자들의 인권을 구박하고! 코르셋 채워 자기들의 입맛대로 조절해온 것처럼!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위에 있는 그런 세계를 원해요!"
"흐음..."
노신사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턱을 매만졌다. 잠시 생각에 잠긴 노신사가 한마디 했다.
"내가 앞서 이야기한 김지훈은 자신이 평생에 걸쳐 누군가를 사랑할 기회들을 바치고, 정조역전세계를 얻었다. 그 덕분에 누군가에게 사랑을 느끼고 그 여자와 섹스를 하며 마음을 확인하는 그 순간 모든 세계가 되돌려지게 되었지."
"그, 그래서요?"
"너는 뭘 내어줄 것인가?"
"... 내어주다니요? 당신이 멋대로 나를 불러왔으니까 당연히 아무것도 받지 않고 소원을 들어주는 게 맞는 거죠. 내가 원해서 이렇게 된 것도 아닌데 내가 왜 당신에게 뭔가를 줘야 하나요?"
"... 허허. 이거 참. 욕심쟁이로군... 원하는 것만 골라먹겠다 이건가? 왜 뚱뚱한지 알 것 같구나. 좋아. 세상을 네가 원하는 대로 바꿔주겠다."
"좋았어! 히히!"
여자는 살집이 두툼한 손을 꽉 쥐며 환호했다. 노신사는 여자에게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나온 붉은 마법진이 여자를 감싸기 시작할 때 쯤, 그 마법진 안에서 여자가 외쳤다.
"저기요! 근데 그 김지훈이라는 아이는 어떻게 됐죠?"
"그 아이?"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사랑했던 장현정이라는 아이는 윤간을 당하는 상태가 된다면서요? 다시 악마와 뭔가 계약을 했을 거잖아요? 궁금한데 좀 알려주세요."
"... 그 아이는 뭔가를 바치고, 모든 것을 무효화 한 후, 원래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무효화의 조건으로는 그 곳에서 하나의 시험을 통과하..."
그렇게 답하는 노신사의 말을 자르며 여자가 끼어든다.
"역시. 그 놈은 남자라서 원래 세계로 돌아갔구나! 원래 세계는 남자가 살기 편한 남자 상위 세계니까 당연한 거겠지! 하지만 나는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야! 여자가 상위인 세계에서 행복해 지고 말겠어!"
“큭큭. 그래. 그렇다면 아예 130세까지 사는 것은 어떠냐? 130세까지 자살하지 않고 산다는 조건을 네게 받고 싶은데.”
“좋아요! 그거 마음에 드네!”
여자는 그 말을 끝으로 모습을 감췄다. 노신사는 끌끌 대며 말했다.
"아무 것도 받지 못했지만... 네 썩어빠진 정신을 보니 어디를 가서도 불행하겠구나. 중요한 건 사회가 아니라 너 자신이거늘... 여성 상위 세계에서 더 좌절하고 더 큰 박탈감을 느끼는 그 모습을 보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겠지. 큭큭..."
그 모습을 끝으로 노신사는 모습을 감추었다.
또 다른 먹잇감을 찾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