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마지막 썰썰썰 - 18
내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 미진 누나는 주방에서 음식을 하고 있었다. 누나는 요리를 하다가 나를 발견한 듯 웃으며 말했다.
"일어났어?"
"아... 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오냐~ 근데 지훈아.“
“네.”
“내가 매일 외식만 하느라고 집에 먹을 게 별로 없어. 계란 후라이도 괜찮지?”
“그럼요.”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며 누나의 안색을 살폈다.
울면 어떡하지. 어두우면 어떡하지. 우울해하고 있으면 어떡하지.
다행이도 생각보다 누나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이 요리에 집중하고 있다. 그것이 더 신경 쓰인다. 폭풍 전 찾아오는 고요처럼 느껴졌으니까.
눈치를 보며 식탁에 앉자 누나가 밥을 차려주며 말했다. 식탁 위에는 밥, 계란후라이, 김치, 햄, 김 등뿐이다. 기본적인 잔반들. 누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냥 외식이나 할까?"
"아니에요. 이거면 됐어요."
"그래. 다행이네."
"... 근데 누나. 이젠 괜찮아요?"
"뭐가?"
"아니... 어제..."
"아아~ 그거...? 아... 오히려 내가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
"네?"
“너는... 괜찮아?”
도리어 나를 걱정하는 미진 누나.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잠시 당황했다.
아아. 그래. 지금은 정조역전이지.
31살짜리 남자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여고딩에게 섹스를 부탁했어.
서로 원해서 섹스를 한 적이 몇 번 있긴 하지만 사귀는 사이도 아니야.
그런데 그저 외롭고 몸이 고프다는 이유로 섹스를 부탁한다?
남자가 상당히 책임감을 느낄 일이다. 13살 어린 연하의 여고딩의 섹스 파트너라.
사회적으로 남자는 여자를 지켜야한다는 암묵적인 강요.
도덕적으로 남자가 무조건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
남자는 사랑하던 연인에게 배반을 당하고, 그걸 위로받고자 여고딩에게 육체관계를 요구했지. 거기에는 사랑도 뭐도 없어. 그저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 여고딩의 육체가 필요했던 것뿐이야. 섹스만을 원했던 거지.
미진누나가 느끼는 죄의식은 아마 그것 아닐까.
"저는 괜찮아요. 좋았어요."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답하자 누나가 머리를 벅벅 긁고 있는 손이 더 빨라졌다. 먼지가 휘날리도록 머리를 긁은 이미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휴. 미안하다. 그래... 어젠 내가 좀 추한 모습을 보였다."
"안 추했어요. 여자가 울 수도 있지. 뭐. 힘들면 울어요."
"아니... 그런 의미로 추하다고 한 게 아니었는데... 하여간 나는 기분이 좀 괜찮아졌어. 여자가 하루 징징거렸으면 됐지. 매일 그러고 살 수는 없지. 안 그러냐?"
"그거야 뭐..."
이렇게 보니 남자란 참 힘든 생물이구나. 지쳐 쓰러지는 것조차 용납 안 된다니.
"그보다 너 잘 때 전화 엄청나게 왔었어."
"전화요?"
"장현정이라고 이름 뜨던데... 잘 돼간다던 게 그 여자애냐?"
밥을 먹으며 무심하게 묻는 미진 누나의 말에 나는 속이 괜히 뜨끔했다.
그리고 직감했다.
선택의 순간이 온 것이다.
"그 아이한테는... 괜히 미안하네. 아... 하여간 이건 내가 실수한 게 맞으니까... 으... 어쩌지."
미진누나가 마른세수를 해가며 괴로워한다.
그 순간 나는 또 하나를 알게 됐다.
언제나 참고 인내해야하는 남자의 입장만큼 선택을 해야 하는 여자의 입장도 참 어렵구나.
*
결국 그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우리는 집을 나왔다.
내가 미진 누나에게 들이대면 나와 사귀어 줄까?
애초에 내가 미진 누나를 좋아하는 게 사랑일까?
잘 모르겠다.
"너 며칠 동안 뭘 했기에 연락이 안 된 거야?"
현정이는 나를 만나자마자 화부터 냈다.
아무리 짜증나도 그렇지 연락을 어떻게 그렇게 무시할 수가 있냐며.
그러다 내가 표정이 시무룩해지니, 당황한 듯 서둘러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하, 하여간! 다신 그러지마!"
그 이후에 현정이의 권유에 따라, 나는 풋살 대회장으로 향했다.
풋살 대회장에는 그녀의 친구들이 이미 와서 몸을 풀고 있었다.
성혜, 주리, 윤미 등등등... 처음 보는 어떤 여자애까지.
나는 팀원들과 인사를 하고 대회를 구경했다.
내리쬐는 태양 속에서 현정이는 빛나고 있었다.
드리블 하고 슛하고 패스하고. 골 넣고, 막고. 혼자 다 한다.
말 그대로 하드 캐리. 결국 그녀는 팀을 결승전에 올려놨다.
4강전이 끝난 후,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이 현정이가 땀에 전 채 내 옆에 앉았다.
풀럭거리는 옷자락에 땀 냄새가 후욱하고 밀려들어왔다.
"지훈아. 무슨 일 있어?"
"응? 아니. 왜?"
"표정이 어두워서... 여자들이 많아서 그래?"
장현정은 내가 성폭행 당한 사실 때문에 여자들을 겁낼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그래서 표정이 어두운 게 아니었다.
현정이를 보니 괜히 미안했다. 바람피운 거 같아서.
이렇게 나를 아끼고 좋아하는 여자애를 두고 내가 뭘 하고 다닌 건가 싶다.
"피곤하면 들어가서 쉬어. 내가 풋살장에 괜히 데리고 왔나 싶네..."
"..."
"나는 그냥... 바람도 쐬고 그러면 기분 좋아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집에 있는 것 보다는 좋지."
"열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이리 와봐."
그러며 바짝 내게 얼굴을 들이미는 현정이.
그 얼굴 위로는 나보다 더한 걱정이 번져있다.
그녀는 땀으로 축축한 손으로 내 이마에 손을 얹고 열이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살며시 닿는 그녀의 살결에는 땀이 가득했고, 그녀 주위에서는 끈적끈적한 그녀의 냄새가 가득했다. 잔뜩 늘러 붙은 옷 안으로는 하얀 가슴과 유두가 비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굉장히 자극적이었다. 남근이 불끈거리며 선다.
나는 시선을 애써 피하며 그녀의 손을 치웠다.
"열없어."
"재미없으면 가도 돼. 경기 끝나고 바로 갈게."
아. 얘가 또 막 걱정해주니까 미치겠네. 진짜.
현정이가 나를 좋아한다는 걸 여실 없이 느끼고 있었다.
미진 누나랑 있을 때는 장현정이 신경 쓰였고, 현정이랑 있으니까 미진 누나가 신경 쓰이네.
“무슨 일 있어? 괜찮아. 말해봐. 응?”
현정이가 내게 바짝 붙으며 시선을 마주치려 애를 쓴다. 그녀의 팔뚝과 내 팔뚝이 키스를 하듯 붙으며, 타액이 오고가듯 땀이 서로 엉킨다. 그녀의 살결이 느껴지자 또 남근이 불끈댄다. 지금 당장이라도 현정이와 하고 싶었다.
"이야. 풋살장에서 아주 신혼집을 차렸네. 보기 좋아. 어?"
그 때 누군가가 우리가 쉬고 있는 쪽으로 어슬렁거리며 걸어오기 시작했다.
현정이 팀을 향해 걸어오는 무리는 총 6명이었다.
모두 하나 같이 운동복 차림에 땀이 가득하다.
결승 팀인가?
누군가 해서 현정이를 보는데 현정이의 얼굴이 가득 구겨져있었다.
현정이는 6명에게 험악하게 말했다.
"시비 걸지 말고 꺼져."
"누가 시비를 건다고 그래~"
시비를 건 6명이 현정이 앞까지 위협적으로 다가오자 현정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나머지 팀원들도 우르르 일어나더니 현정이 뒤에 섰다.
뭐야 이거. 패싸움이라도 하려나?
주변에서 웃고 떠들던 구경꾼들도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슬금슬금 물러난다.
현정이는 짜증난다는 듯이 한숨을 푹 쉬었다.
"야... 너희는 개념이 있냐? 여기 다른 사람도 있는데 이러고 싶어? 적당히 좀 해."
"내가 뭘 했어? 난 그냥 결승 상대에게 인사하러 온 거야."
"그래에? 너희가 결승 상대였구나? 난 몰랐어. 관심이 없어서."
"니 뇌가 없는 거겠지. 이 년아."
시비녀와 현정이의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나는 옆에 서있는 김성혜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왜 저런데? 무슨 일 있어?"
"엊그제 근처에서 연습하다가 쟤네 팀하고 어쩌다 붙었거든. 근데 더티 플레이를 얼마나 하던지..."
"그거 가지고 저러는 거야?"
근데 더티플레이 한 쪽에서 왜 안 한 우리 쪽에다 시비를 걸고 있는 거지? 우리가 더티 플레이한 저쪽에 원한을 가지고 있어야 정상 아니야?
내가 뭔가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성혜가 연이어 답해주었다.
"우리도 좀 거칠게 맞대응 하던 도중에, 쟤네가 우리 쪽 팀원 다리를 부러뜨렸어."
"뭐?!"
"민이 라고... 머리 옆으로 묶는 애 있지? 걔 지금 다리 부러져서 병원에 입원했어."
아. 그러고 보니 오늘 팀원이 하나 바뀌어 있었다. 다리가 부러져서 바뀐 건가?
"부, 부러졌다고? 어쩌다가?"
"저 쪽에 고릴라 같이 생긴 애가 태클을 무식하게 하는 바람에 발목이 뒤로 꺾였어. 그거 때문에 한 번 싸웠거든. 그거 때문에 지금 분위기가 안 좋은 거야."
어쩐지 오늘따라 팀 분위기가 비장하더라니.
성혜가 말한 고릴라 같이 생긴 애는 바로 시비녀였다. 저쪽 6명 그룹의 리더처럼 보이는 여자. 그 때 시비녀가 나와 성혜가 귓속말을 하는 걸 가리키며 외쳤다.
"야아. 장현정. 근데 너 애인 관리 잘해야겠다?"
"뭐?"
"니 애인 지금 다른 여자랑 막 귓속말 하고 있는데 괜찮겠어?"
"누, 누가 애인이야!"
"저 새끼. 니 이거잖아. 맞지?"
시비녀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 중지를 들어 올린 채 자기 가랑이 사이에 붙이고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잠시 멍하니 대체 저게 뭐하는 개소린가 보고 있었는데, 현정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는 걸 보니 욕인 걸 알겠다. 대충 보지에 넣을 수 있는 자지달린 사내놈 뭐 그런 뜻 같은데.
아. 이게 뭔가 굉장히 기분이 나쁘더라고.
반대로 한 번 생각해보니까 저거 완전 미친년이잖아?
세상에. 남자만 가득한 축구장에서 어떤 남자 선수가 자기 여자 친구를 데려왔다 쳐 봐. 그것도 우리 팀 선수도 아니고 상대 팀 선수야.
그런데 그 여자를 가리키면서 손가락으로 원을 만들고 쑤시는 모양을 하며... 니 이거냐? 이렇게 묻는다니.
개 또라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