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마지막 썰썰썰 - 14
뷔페에서 나와 나는 입구 쪽에 있는 화장실에 들어갔다. 물을 쏟아 붓듯이 얼굴에 뿌린 나는 화장실 변기가 있는 곳에 들어가 문을 닫고 앉았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나빴으니까.
미진 누나는 내가 억지 부린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니. 실제로 내가 억지를 부리고 있고 깽판을 놓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나에게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사건의 시작은 이러했다.
미진 누나가 혼자 중얼거리듯 했던 말.
"... 그냥... 평범하게 남들은 연애하고 사랑하는 구나 싶어서..."
그 말이 너무 거슬려서,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설아 누나에게 미진 누나의 연애사를 캐물었다.
-철현이? 아... 걔~? ...
반응이 썩 별로라 그 순간부터 괜히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미진 누나가 말한 철현은. 잘생겼고, 성격도 좋고, 요즘 애들답지 않게 예의도 바른 멋진 남자라고 들었었거든. 서로 좋아했으며, 불우한 ‘불임’ 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쿨하게 헤어졌다고 그렇게 들었다.
만약 그게 맞다면 이런 반응이 나오면 안 되는 거잖아.
설아 누나처럼 긍정적인 사람이 생각보다 나쁜 반응을 보이자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다.
"왜요? 어떤 사람인데요?"
-... 내가 해줄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미진이한테 들어야지.
"미진 누나 말로는 남을 배려해주는 상냥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던데요."
-뭐? 상냥? 하아... 걔는 아직도... 참.
"잘생겼다던데."
-잘생... 겼지. 재수 없긴 하지만.
재수 없어?
가장 절친한 친구의 결혼 상대자에게 할 말은 아닌데.
지금에서야 결혼이 파토 났다지만 설아 누나의 이런 반응은 놀랄 정도였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 미진 누나에게 병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어쩔 수 없이 헤어졌다든데... 맞아요?"
-... 휴우. 걔는 그만 좀 하라니까... 남의 사랑이야기에는 연애 도사인 척 똑똑한 척 다하더니. 쯧쯔... 하긴. 자기 일이 되면 다들 앞가림하기 힘들어 하는 법이니까.
"그게 무슨 뜻인데요. 이야기 좀 해줘요."
-내가 볼 때는 흔하디흔한 콩깍지가 씐 거야...
설아 누나의 말을 종합해 보면 이렇다.
누나의 동창이자, 미진누나의 약혼자였던 임철현은 고등학교 때 튀지 않는 얌전한 아이였다고 한다. 이미진과 사귄다는 이야기에 설아 누나가 놀랄 정도로 범생이에 조용한 남자라고 했다.
그런데 대학교 때 이미진과 헤어진 이후, 본성이 드러난 것인지 남초 대학에서 이상한 사상에 물들었는지 어쨌는지 괴상한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허영심 많고, 여자 여럿을 만나가며 소위 말하는 감정을 해가며 여자를 고르는 타입. 그 때문에 설아 누나는 물론 미진 누나 친구들은 된장남이라고 임철현을 싫어했다고 했다.
정작 이미진은 그런 안 좋은 소문들을 남자들의 질투쯤으로 생각했고, 또 임철현은 이미진 앞에서는 조신하게 구는 편이었기 때문에 안 좋은 이야기들을 무시해왔다고 한다.
-내가 그래서 엄청 반대했어. 또 내가 걔 싫어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뭔데요?”
-내가 XX 기업 다닌다고 했잖아?
"네. 잘 나가시잖아요.“
-잘... 나가는지는 모르겠고. 대기업 다닌다고 잘 나가는 건 아니지. 하여간 미진이랑 헤어진 다음 날. 나한테 연락 왔더라. 혹시 나 남자친구 없냐고.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하던데?
"네?! 설마... 그거 미친 새끼 아니에요?"
듣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결혼을 약속한 사람과 헤어지고 그 친구한테 전화해서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나?
-보통 애가 아니더라니까. 아! 방금 말한 건 미진이한테는 이야기하지 마.
“알겠어요. 이야기 안 해요. 그런 이야기를 왜 해요.”
-걔는 무슨 결혼을 신분 상승의 도구쯤으로 생각하나 봐... 대체 그렇게 여자를 만나는 것하고, 성매매하는 것하고 무슨 차이가 있는 거지? 나는 이해를 못하겠어. 사랑 없이 결혼을 어떻게 해. 그리고 또...
그 뒤에도 뭐라뭐라 했지만 나는 눈이 반쯤 돌아간 상태였다.
미진 누나의 집안은 엄청나게 빵빵한 편이다.
일단 본인이 미술학원 부원장인데, 이 곳은 누나의 삼촌이 운영하는 미술학원이었고. 어머니는 거대 은행의 은행장 출신이며, 아버지는 검사 출신에 현직 변호사이시다. 오며가며 이야기 듣기로는 친척들 중 의사, 판사도 있는 것 같았다.
미진 누나 본인은 성인 만화가 일지 몰라도 집안 자체는 S급 집안이 분명했다. 당장에 미진 누나의 집만 해도 그렇다. 집이 서울에 있는데, 크기도 엄청 크다.
임철현이 그런 놈이라면, 이미진은 아주 좋은 먹잇감일 것이다.
"임철현은 지가 뭐라고 그렇게 콧대가 높데요? 웃긴 놈이네."
-뭐... 교사니까. 어르신 들이 신랑감으로 교사를 좋아하잖아. 그러니 콧대가 높아도 이상하지는 않지.
"교... 사?"
남교사라 이거지?
남교사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편견에 가득차기 딱 좋은 직업이었다. 무슨 직업이든, 어떤 환경이든. 남자와 여자가 적당히 섞여 있는 곳이 정신 건강에 좋다. 그게 아니라면 편파적인 지식을 가지고 편견만 가득 찬 사람이 되니까. 그래서 여대, 공대 출신을 피하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나는 그 즉시 유희 누나를 만났다.
교사라는 직업은 선, 후배 관계가 아주 끈끈한 직업 중 하나이다. 교육 실습 등으로 사범대에서 선, 후배를 만나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희 누나에게 임철현에 대한 이야기를 캐오라고 부탁아닌 협박을 했다.
"그걸 어떻게 알아와..."
"누나. 그래서 못하겠다는 거예요?"
"하, 하긴 하겠지만!!"
유희 누나는 임철현의 이름, 나이, 학번, 학교 정보만 가지고, 하루도 안 되서 임철현의 소문을 모아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학교 선배였고, 그 덕에 아는 사람도 있었던 것이었다.
소문은 생각보다 더 거지같았다.
미진 누나는 성격이 쿨하다보니 뒷조사 같은 걸 하지 않았겠지만, 나는 이미 눈이 뒤집혀서 임철현의 아이디를 가지고 인터넷에서 신상털이도 하고 별에 별 짓을 다하고 있었다.
진짜 여기저기 수소문 하고 장난 아니었다.
누가 보면 빚쟁이 추적하듯이 그렇게 쫓고 있었다.
임철현은 미진 누나와 사귀는 와중에도 대학교에서 다른 여자랑 사귀고 있었다. 최소한의 보험이 아니었을까? 이미진과 잘 안됐을 때를 대비한... 개새끼.
결론적으로 임철현은 천하에 둘도 없는 쓰레기 같은 놈이었다. 미진 누나를 주기에는 너무도 아까울 정도로.
너무 흥분하는 바람에 방법이 잘못됐긴 했지만... 어떻게 미진 누나가 임철현을 포기하도록 하는 방법은 없을까?
오늘 하는 걸 봐서는 아직 미진 누나는 그 임철현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게 걱정된다.
그렇게 내가 변기 뚜껑 위에서 괴로워하고 있을 때였다. 화장실 밖에서 미진 누나의 이야기가 갑자기 흘러 나왔다. 나는 습관적으로 핸드폰 녹음기를 켰다.
“... 래서 이제 미진이랑 어떻게 할 건데?”
“미진이? 미진이... 참네. 걔는 무슨 코흘리개 꼬맹이를 동창회에 데려왔데?”
“그러니까. 웃기는 얘야.”
“뭐 그런 거겠지. 지는 잘 살고 있다. 그런 거 나한테 보여주려고.”
“킥킥. 맞아. 걔는 원래 자존심 쎈 애니까.”
“그래도 쿨한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닌 가봐?”
“걔가 철현이 너한테 지극 정성이었잖아.”
“이미진이 그 계집애가 좋은 건 알아가지고. 걔도 좀 생각보다 좀 띨띨해. 내가 앞에서 내숭 좀 부리면 좋다고 헤실헤실 거리더라고. 니네 이미진이 ‘미안해. 한번만 용서해줘.’ 이러면서 비는 거 본 적 있어?”
“이미진이? 그 이미진이 그런 말을 해?”
“내가 그만큼 좋은 거지. 원래 부모님 상견례까지 잡혀 있었거든. 근데 하필 그 때 무난자증인 걸 알게 된 거야. 결혼만 해달라고 무릎 꿇고 막 빌더라. 아니 근데 임신을 못하는데 결혼이 뭔 가치가 있어? 안 그래?”
“그건 그렇지. 임신을 해야 나중에...”
“유산도 받고 다 그런 거 아니야? 걔는 가치가 없는 애야. 여자로서 가치가 없어. 아까도 정말 미안하다 어쩌다하면서 나한테 비는 거 봤지? 지도 이제 남자는 나밖에 없는 거 알거든. 집안도 괜찮고 집에 돈도 좀 있는 것 같아서 빨아먹을 만 하긴 한데... 뭐랄까...”
시발 새끼가...
더 이상 한가롭게 녹음이나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뭐? 여자로서 가치가 없어?
이를 뿌득뿌득 갈며 참다 참다 못 참겠어서 변기 문을 열고 나갔더니 임철현과 남자 둘이 나를 놀란 눈으로 돌아보는 게 보였다.
“너, 너는...!”
“이 개새끼야!”
다짜고짜 주먹을 날렸다. 소변기에 오줌을 싸던 임철현은 바지를 반쯤 올리다 말고 얼굴에 내 주먹을 맞고 쓰러졌다. 나는 바로 달려들어 임철현의 위에 올라타고 주먹을 내리쳤다.
개새끼! 개새끼!
“뭐야! 이 새끼는!”
“잡아!”
다른 남자 둘이 바지 지퍼를 올리고 내 머리카락을 붙잡고 팔을 잡아당기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래봐야 약한 힘이다. 이 세계에서 남자들 중에서는 내가 싸움 제일 잘할 걸? 내가 떨어지지 않자 남자 둘은 나를 걷어차고 뭔가를 휘둘렀다.
결국 나는 나가 떨어졌지만, 다시 달려들어 3명을 상대로 싸움을 시작했다.
남자 둘이 대걸레를 들고 나를 막 밀치고 위협한다. 찔리니까 아프다. 아픈데...
나는 지금 한 놈만 보였다.
임철현 개새끼. 내가 오늘 넌 조지고 만다.
“으아아아 사람 살려!!”
내가 집요하게 달려들어 죽어라 팼더니 임철현이 화장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나는 내 앞길을 막는 다른 남자 둘을 주먹으로 두들겨 패서 화장실 더러운 바닥에 내리 찍어버렸다. 그리고 저항이 없어진 틈을 타 화장실을 나서는데...
“... 김지훈...!”
임철현은 이미진의 뒤에 숨어 있고, 손님 여럿이 화장실을 둘러싸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미진 누나가 나를 보고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다.
“이게 무슨 짓이야?”
고저 없는 목소리.
미진 누나가 내뱉은 목소리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보다 무서울 수가 없다.
가슴이 떨리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아니... 누, 누나. 제, 제 말 좀...”
짜악-!
이미진이 내 뺨을 날렸다. 내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자 이미진은 이를 꽉 악물고 나를 노려보며 조용히 밖을 향해 손가락 질 했다.
“...”
꺼지라는 건지.
어떤 건지.
내 가슴이 아픈 건 확실하다.
그 사이 임철현이 또 끼어든다.
“됐어. 애가 질투 나서 그런 건데 너무 그러지마.”
와. 남자 새끼가 어떻게 저렇게 재수가 없을까. 미진 누나는 임철현이 어깨를 토닥여주자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
“철현아. 진짜 미안하다.”
“됐어. 끝났는데 뭘.”
“정말 미안해. 내가 잘 타이를 테니까...”
“알았다니까?”
“... 그래. 고맙다.”
누나가 그렇게 고개 숙일 입장이 아닌데. 미진 누나가 임철현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게 얼마나 화가 나는 건지. 미진누나는 임철현에게 싹싹 빌며 사과한 이후,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서늘하게 잘 벼려진 칼날 하나가 나를 향해 있는 느낌이다.
“김지훈. 너도 철현이한테 사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