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마지막 썰썰썰 - 13
미진 누나의 동창회는 한식 뷔페에서 열렸다. 강남에 있는 뷔페였는데 한 끼에 2만원이나 하는 엄청난 가격이었다. 와. 무슨 한 끼에 밥이 2만원이나 하지? 이게 어른의 세계란 건가?
“너 진짜. 밥만 먹고 가. 알았지?”
“알았다니까요.”
저 이야기만 미진 누나는 벌써 3번이나 했다.
미진 누나의 자동차를 타고 한식 뷔페집으로 향하는 동안 누나는 뭐가 불안한지 내게 명심 또 명심 시켰다. 차가 중간 중간 빨간 불 때문에 멈추기라도 하면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중얼거렸다.
“아! 신호 왜 이래 막히는 거야! 짜증나게 진짜!”
항상 웃고 여유로웠던 그녀가 오늘따라 불안정해보이는 건 내 착각인 걸까?
근처에 차를 주차한 미진 누나는 나에게 차키를 하나 맡겼다.
나는 자동차 스마트키를 내려 보며 물었다.
“뭐에요. 이건?”
“차키.”
“이걸 왜 나를 줘요? 저 면허증도 없는데.”
“내가 차에 가있으라고 하면 밥 먹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여기 들어와 있어. 알았어?”
“... 왜 그래요? 누나. 오늘 진짜 이상해.”
“알았어?! 몰랐어?! 억지 써서 따라온 대신 내 말 좀 들어!”
“알았어요.”
괜히 화를 내네.
그렇게 미진 누나랑 같이 동창회 하는 뷔페에 들어갔더니 이미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숫자는 20여명 정도, 나이대가 다양한 걸 보니 애인들을 데려온 것 같았다. 그들은 각기 테이블 여러 곳에 나눠서 앉아 밥을 먹고 있었는데, 모두 하나같이 미진 누나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하고 일어났다.
“미진아! 여기야! 여기!”
“아 그래. 오랜만이야~ 훠이 훠이. 야! 엉겨 붙지 마라!”
미진 누나의 얼굴이 일순간에 풀렸다. 동창들을 만난 후로는 밝기만하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그 표정이 가면처럼 느껴졌다. 마치 이미진은 언제나 밝고 건강해야해! 라는 주위의 시선에 맞춰 쓴 그런 가면.
동창들과 인사를 나눈 미진 누나는 수다를 떨고, 나와 함께 뷔페를 돌며 음식을 골랐다.
“여긴 이게 맛있더라. 많이 먹어.”
“네. 누나. 고마워요.”
그렇게 미진 누나와 함께 뷔페를 돌고 자리에 돌아오자 화제는 나에게 집중 됐다.
“근데 미진아. 옆에는 누구냐? 소개를 해줘야지.”
“아... 그게 설명하기가 좀...”
“남자친구 입니다!”
“야!”
나는 다짜고짜 남자친구 행세를 했다. 나는 미진 누나가 무난자증이라는 이유로 미진누나와 헤어진 남자가 누군지 궁금해서 억지를 써 가며 동창회에 따라온 것이었다. 그리고 미진누나는 당당하게 여전히 잘 살고 있다는 걸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남자친구라고 외치자 동창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역시 이미진. 능력자야. 몇 살이에요?”
“18살이요.”
“18...? 야. 18살이 대학생인가?”
“대학생?”
“고등학교 3학년이요.”
“뭐?!”
“뭐!?
그 순간 모여 있는 사람들이 경악의 외침을 냈다. 누군가는 먹던 음식을 떨어뜨리고, 누군가는 음료를 흘리기도 했다. 옆 테이블에서는 무슨 일인가 하고 이쪽을 보고 수군거리다가 누군가가 손가락을 세 개 피자 경악한 얼굴로 이쪽을 봤다.
“... 고 3인데 미진이 남자 친구라고?”
“네.”
“야! 이미진! 어떻게 된 거야? 그런 이야기 없었잖아.”
“...”
미진 누나는 친구들의 추궁에 난처한 듯 이마를 긁적였다. 누나. 되돌리기는 너무 늦었어. 내 말에 맞춰줘야 될 거야. 하지만 미진 누나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아니... 하. 그게 말이야. 사귀는 사이가 아닌데.”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고?” “그게 뭔 소리야.” “남고딩 애가 남자친구라는 건 또 뭐고?” “이미진 저거 또 옛날 버릇 나오나?” “세살 버릇 여든까지...”
“야! 누가 옛날 버릇이 나와?! 내가 옛날에 뭘 어쨌는데?”
“너 인기 겁나 많았잖아.” “야야. 남친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어.” “맞아. 그런 이야긴 좀...”
“이야기 해. 괜찮아. 얘는 내 남친 아니야.”
미진 누나가 테이블에 올라와 있는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으며 대충 대답을 했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몰렸다.
근데 말이야. 대체 미진 누나가 옛날에 뭘 어쨌는데 그러는 거지? 나는 누나의 과거를 모른다. 괜히 궁금해서 말했다.
“일단 무슨 이야기였는지 좀 들어보고요.”
“오~ 얘 봐라. 당돌한데?” “사귀는 거 맞는 거 같은데. 왜 저번에 미진이가...” “야야. 남친이라잖아. 그런 이야기해서 뭐해.” “미진이는 해도 된다는데? 쟤가 빈말할 얘는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하려면 하라고 이것들아. 사귀는 사이 아니라서 난 상관없다고.”
미진 누나가 자꾸 훼방을 놓자 나도 짜증이 났다. 오늘따라 진짜 이상했으니까.
나는 미진 누나를 째려보며 말했다.
“사귀는 사이는 아닌데, 부모님한테 다 들켰잖아요. 그죠?”
“야 그거는...!”
내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테이블에 앉은 피라냐들이 눈을 반짝이며 내게 달려들었다.
“뭘 들켰는데?” “뭔데 뭐기에 그래? 응?” “뭐겠어! 그거 아냐?”
“누나 집에서 성인용품을 보고 있었는데요...”
“야! 그런 이야기는 좀... 읍!!”
“이미진 너는 좀 다물어봐. 흥미진진한데 왜 그래!” “그래서. 성인용품을 보고 있었는데!” “어떻게 됐는데.”
“그러다가 이제 그런 걸 하게 됐거든요?”
“으읍! 읍! 푸하! 야! 하지 말... 읍! 읍읍!!”
“뭐?! 뭐, 뭘 했다는 거야! 와! 이미진! 고3을?!” “고3이랑 지금 포, 폭풍응응을 했다는 거야?” “대박 대박. 개 부럽다.” “이미진 저년이 결국 사고를 치는 구나! 강제로 고3을...”
“아뇨. 제가 누나한테 반해서 덮쳤는데...”
“꺄아아아!!” “꺄아!” “꺄아아아!”
“그 때 어머님 아버님이 딱 하고...”
“어머머머!” “어머!” “어머나! 세상에! 드라마야 뭐야?!”
뭐 그런 대화가 이어졌다. 나는 분위기가 무르익자, 미진 누나의 과거를 캐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지 진짜 듣고 싶은데. 형이랑 누나들. 이야기 좀 해줘 봐요.”
“쟤가... 예전에 7살차 나는 남자애랑 만나는 건 봤는데...” “얌마. 이건 비교도 안 돼. 띠동갑이야 띠동갑.” “띠동갑 아닐 걸? 가만 있어보자. 8... 9... 히익! 야. 13살 차이야!” “대박... 근데 또 이미진이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기도...?”
“아. 미진 누나가 7살 차 남자 랑도 사귀었었구나.”
“그래. 쟤 장난 아니라니까.” “원래 인기 많았잖아. 성격도 쿨하고.” “쿨은 개뿔 나쁜 여자지 나쁜 여자. 킥킥.” “남자애들 중에 쟤 좋아했던 애들 꽤 있을 걸?”
“저도 들었어요. 사귀었던 사람 있다고.”
“아...” “...” “큼...”
내 말에 갑자기 테이블 주위가 싸해 진다. 동창끼리 사귀다 헤어졌는데 이유가 한 쪽의 불임 때문이라면 말하기 꺼려지는 일이었으니까. 나는 싸해진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동창 중에 있다던데 어떤 사람이에요?”
“나야.”
“...”
그때 음식을 먹던 옆 테이블에 어떤 남자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가 그 남자를 돌아보자 남자도 나를 마주봤다.
“난데.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뇨. 그냥 어떤 사람이 우리 미진 누나를 울렸는지 궁금해서요.”
“울려? 너 울었어? 미진아?” “가만히 있어봐 좀.” “눈치가 없어 애가...”
그 말대로 나와 남자는 눈을 마주하고 노려보고 있었다. 미진 누나는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긴 한숨을 내뱉더니 내게 말했다.
“후우... 야. 김지훈. 이딴 식으로 할 거면 꺼져.”
“...”
강한 말에 내가 깜짝 놀라 입을 다물자 미진 누나가 남자를 향해 손을 들어 사과했다.
“철현아. 미안하다. 따라온다고 고집을 부려서 거절을 내가 차마 못 했...”
“미진이 너. 연애는 꽤 깔끔하게 하는 줄 알았는데 되게 질척거린다. 뒷말은 안 나오게 하자고 한 건 너 아니야? 친구사이로 잘 지내자며. 뭐야 이게.”
“말을 왜 그딴 식으로...!
고압적으로 말하는 철현의 말에 내가 울컥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미진 누나가 내 어깨를 잡더니 붙잡아 일으켰다.
“김지훈. 닥치고 차에 가 있어.”
“누나...”
“지금 안 돌아가면 나 앞으로 너 안 봐. 알았어?”
“...”
“대답해. 나갈 거야 말거야.”
나는 화가 나서 미진 누나에게 대답도 하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뷔페를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