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마지막 썰썰썰 - 3
"지훈이 니가... 여기에는 어떻게..."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설아 누나도 나를 보고 놀랐다. 여긴 미진 누나 집이었으니까.
저 놀란 반응을 보니 한 가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진 누나가 나와 있었던 일들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 예를 들어 누드모델 이야기라든지, 만화 상담 기획이라든지.
"아... 야... 이걸... 음..."
미진 누나가 머리를 긁적이며 나와 설아 누나를 번갈아 본다.
그동안 나와 설아 누나는 서로 연락을 하지 않았었다.
더 이상 할 말도 없었고, 나는 설아 누나에게 그저 아는 동생뿐이라는 걸 확인한 상태였으니까. 연락해서 뭘 하겠나?
형진이 형을 버리고 나랑 사귀자?
웃기는 거잖아.
남녀 사이에 이성적 호감이 없거나, 희망이 없다면 할 이야기가 뭐가 남겠어?
"저기 말이야. 애들아. 일단은 가서 좀... 앉을까?"
"..."
"..."
미진 누나의 말에 나와 설아 누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술판이 벌어진 식탁으로 걸음을 옮겼다. 분위기는 삭막하고, 무거웠다.
우리 사이는 상당히 애매한 사이거든.
나는 설아 누나가 나를 좋아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함께 사는 동안 내가 스킨쉽을 하면 피하지 않았었거든. 섹스만 안했지 연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정직하고, 바른 여자다. 그러니 고등학생과 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섹스를 피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조금만 더 다가가면 마음을 열 것이다.
뭐 그렇게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니. 아니. 갑자기는 아니지. 다른 잘 되가는 남자와 새롭게 만나더니 행복하게 잘 사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나도 마음을 접었으니까.
근데 이제 와서 그 슬픈 표정은 뭘까.
"... 누나는 무슨 일 있어요?"
"..."
"그러게. 야. 설아야. 너 술 냄새도 나는데 술 먹었냐?"
"... 응. 조금."
미진 누나가 설아 누나의 몸에 코를 킁킁인다. 주량이 소주 한 병인 설아 누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누나가 술을 먹고 왔다는 건...
"혹시 헤어진 거예요?"
"... 아니. 아직."
아직? 뭔가 말이 이상하다. 아직이라는 말은 이제 헤어질 준비를 한다는 그런 뜻인가? 미진 누나도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너 형진 오빠랑... 음..."
"전 괜찮아요. 저도 여자 친구 있는데요. 뭘."
괜히 센 척하려고 여자 친구가 있다고 했다. 현정이랑 정식으로 사귀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애인이 있는 척 하고 싶었다. 미진 누나는 '너 애인 없잖아' 하고 따지는 대신 모른 척 하고 넘어가줬다.
"여자친구?"
설아 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본다. 나는 누나를 보며 말했다.
"네. 여자친구랑 같이 살고 있어요."
"... 그렇구나. 축하해."
그렇게 말하며 웃는데.
왜 그렇게 가슴이 아픈지.
이 감정은 무엇일까.
"됐고. 그보다 어떻게 됐는데. 형진 오빠랑 잘 되가는 거 아니었어?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 다시 생각해보자던데?"
"... 와. 그 시발새끼. 웃기는 새끼네. 사람 가지고 장난 쳐?"
"..."
"아니. 처음에 거절했다가 다시 고백했을 때 받아준 건 뭔데? 받지를 말든가! 야! 내가 말했지. 그 새끼는 괜히 남 주기 아까우니까 니 고백 받아준 거야."
"그게 무슨 뜻이에요? 남 주기 아깝다니?"
내 물음에 눈을 깜박거리던 미진 누나가 설아 누나의 눈치를 본다. 설아 누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미진 누나가 내게 말을 시작했다.
"지훈이 너. 처음에 설아 집에서 잠깐 살았었잖아."
"네."
"그 때 그 일이 회사에도 소문이 좀 났었거든."
아.
그거라면 메신저로 훔쳐봤던 기억이 난다.
같은 팀원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냐며 상담했던 메시지들.
"그러니까 내 생각에는... 그 형진이라는 놈 귀에 그게 들어갔던 거야. 처음에 설아가 자기 좋아한다고 하길래. 아... 좀 별론데?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튕겼는데. 알고 보니까 그 여자가 웬 쌔끈한 고딩남자랑 동거를 하고 있는 거지. 남한테 뺏길 거 같으니까 어쩐지 탐스러워 보이고... 가만히 놔두자니 아깝고."
"..."
"설아가 다시 고백하도록 만드는 거야 쉽지. 그게 남자애들 특기 아니야? 앞에서 살랑거리면서 대화를 다시 시작하고. 자기 좋아하는 여자한테 고백 유도하는 게 어렵겠어? 친해지고 용기를 불어넣어주고, 결과적으로 고백을 받으면서 끝! 디 엔드."
"...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뭘 아니야 이년아! 생각 좀 하고 살아! 그거 맞다니까?"
미진 누나의 일침에 설아 누나가 소주잔에 소주를 거칠게 붓더니 휙 하고 들이켰다. 그리고 탁 소리가 나도록 강하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형진 오빠 그런 사람 아니라니까!"
"너는 이게 문제야. 그러니까 허구헌 날 병신처럼 차이기만 하지. 넌 재미가 없어 얘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무조건 잘해주기만 하잖아. 언제나 중요한 때가 되면 결정장애 걸려서 어쩔 줄 몰라 하고. 형진 오빠는 내가 볼 때 선수야 선수. 막상 사귀고 보니까 니가 생각한 것만큼 재미가 없는 거지."
아멜리 노통. 사랑의 파괴.
내가 보기에 형진이라는 사람은 그저 설아 누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 형을 내가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정조역전이기에 그의 마음은 여자의 마음과도 같았다.
나는 여자의 입장이 되어 엄청나게 많은 상황을 겪으며 그 마음을 비로소 이해하고 있었다.
여자는, 여자도, 가족도, 연인도, 심지어는 자기 자신조차도 자기 마음을 잘 모른다.
원하는 것이 있어도 원한다 말 하지 못하고, 기분 나쁜 것이 있어도 기분 나쁘다고 말하지 못한다.
왜?
모르니까.
형진이 형은 분명 설아 누나에게 관심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고백할 만큼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이고, 조금씩 마음을 열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 형에게 설아 누나는 사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매력적인 여자가 아니었던 거다. 너무 쉽거든. 가지려고 손만 뻗으면 좋다고 달려들 그런 사람이었거든.
사랑을 하려면, 사랑을 파괴해야 한다.
관심이 없는 척, 다른 사람도 만날 수 있는 척.
그렇게 인기 많은 척. 나에게 그대가 가치 있지 않은 척.
나 역시도 설아 누나가 나를 남자로 대하지 않았기에 안달이 났었던 것이고, 현정이가 나를 차갑게 대하고 나서야 오로지 그녀만을 생각했었다.
하지만 설아 누나는 그걸 모르는 것이다.
그 바보처럼 정직한 그 마음을 순수하게 상대에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형진은 '나' 라는 경쟁자가 사라지자, 더 이상 설아 누나를 흥미롭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결국 이렇듯 상처뿐인 초라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나는 오늘 그토록 대단하고 멋져보이던 설아 누나를 동정하게 됐다. 그녀가 불쌍했다. 그녀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 이렇게 초라해지는 건 나도 너무 슬펐으니까.
설아 누나와 미진 누나는 술을 몇 잔이나 연이어 마셨다. 신경질적으로 잔을 내려놓은 미진누나가 외투를 집어 들더니 현관으로 향하며 말했다.
"후! 아오 빡쳐. 시바 안 되겠네. 담배나 한 대 빨러 가야지. 나 담배 사러 갔다 온다. 둘이 이야기나 하고 있어."
이미진은 혼자 분을 삭히다 벌떡 일어나더니 집을 나섰다. 미진 누나가 집을 나간 후, 단 둘이 남은 설아 누나와 나는 아무 말도 없이 앉아있었다. 침묵을 대신 한 것은 소주잔이었다. 말없이 자기 잔을 채우는 그녀의 손을 잡아 소주병을 가로챘다.
"제가 따라 드릴게요."
"... 응."
그렇게 따르고 내 잔을 채우고 우리는 건배도 없이 술을 마셨다.
그리고 또. 연이어 술만 들이킨다.
그렇게 먹으니 나도 술이 올라왔고, 누나도 술이 올라왔다.
나도 거칠게 소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누나 좋아했어요."
"... 알아."
"... 누나는 나 어떻게 생각했어요?"
"... 좋았어."
좋았다고? 내가 이상한 대답에 말문을 잃은 사이 누나가 대답을 이어갔다.
"형진 오빠랑 처음에 잘 안됐을 때, 너 덕분에 웃고 너 덕분에 간신히 회복할 수 있었어."
"근데요?"
"하지만... 너는 학생이었고, 나는 나이가 서른이 넘은 사람이었지... 그리고. 형진 오빠도 다시 나 좋다고 해줬고."
그러니 결국 형진이가 더 좋다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인상을 찡그리고 차마 나를 쳐다보지도 못한다. 고개를 식탁에 처박을 듯 내리고 자책하는 목소리로.
"내가 나쁜 애야. 그래... 니 마음 이용한 거 맞아. 난 나빠. 그래서 벌 받나 봐."
"... 그 남자랑 다시 잘 되는 방법 알려드려요?"
"... 어떻게 하면 되는데? 내가 지금 너에게 물어도 괜찮은 거야?"
"네."
"..."
"앞으로 그 남자 무시하시고, 만약에 대화할 일이 있으면 이렇게만 말하세요."
"뭐라고?"
"아니. 안 돼. 좋아."
"그게 뭐야?"
"형진이 형은. 손에 잘 잡히지 않는 사람을 좋아해요. 그게 더 가치 있다고 여기니까. 보세요. 누나가 오직 형진이 형 하나만 바라볼 때는 차였죠? 근데 저랑 동거한다는 이야기가 나도니까 고백 받아줬죠? 동거 끝난 지금은?"
"... 아직 차인 건..."
"그런 사랑도 있는 거예요. 그리고 대부분 그래요. 잡히지 않아야 소중하다고 생각하죠. 자. 연습해 볼까요? 설아야. 오늘 시간 있어?"
내가 누나의 옆 자리에 딱 앉으며 목소리를 내리깔아 물었다. 나름 직장인 흉내를 낸 것이었다. 말하자면 임형진 흉내라고 할 수 있겠다. 설아 누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 아니."
"혹시 잠깐 시간 돼?"
"... 안 돼."
"선물 가져왔는데 받아줄 수 있어?"
"... 좋아."
잠시 임형진이 되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내가 누나에게 동정심을 가지게 되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취기에 의해서 일까.
그래. 취해서 그런 거다.
오래 전 그토록 원했던 누나가 내 옆자리에서 수줍게 대답만 하고 있으니 괜히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흐트러진 하얀 와이셔츠와, 붉게 달아오른 피부와, 매혹적인 그녀의 냄새는 여전했다.
그 냄새에도 또 취했다.
그녀를 아래에 내리깔고, 걸릴까 두려워하며 남근을 쑤셔 넣었던 그날 밤이 떠오른다.
수줍게 아랫입술을 깨무는 저 입을 벌리고 내 남근을 물리고 정액을 채웠던 그 날 밤이 기억난다. 침대를 튕기는 얇은 허리와 무의식중에 내뱉던 신음이 내 심장을 뒤흔들었었다. 그걸 몸이 기억한다.
"그렇게 하면 되요. 누나."
"그래. 조언 고마워 지훈아... 너는 참... 어른스러워졌구나."
"고3이면 알 거 다 알죠."
나는 괜히 나이로 밀리기 싫어서 오기부리 듯 말했다. 그러자 설아 누나가 막 웃더니 귀엽다는 듯 내 볼을 쓰다듬는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의 입술의 주름과, 눈동자에 박힌 빛무리를 샐 수 있을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그래... 잘 컸다. 멋있게..."
"..."
"... 멋있어졌어."
“... 그래요?”
“... 응.”
무언가 분위기가 묘해졌다.
나는 가까이 다가온 그녀를 점점 더 원하고 있었고, 누나도 그러리라 확신했다.
내 얼굴을 방황하던 시선이 잠시 내 입술에 머물다가 확 하고 도망가 버렸다. 설아 누나는 당황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말했다.
"나, 나 취, 취했나봐. 들어가서 자야겠..."
일어나는 누나의 손목을 붙잡아 자리에 앉혔다. 이미 나는 그녀와 하고 있었다. 완전히 그녀로 가득 찬 내 마음이 그녀를 원한다.
"꺄악-! 왜, 왜 이래 지훈아."
술에 취한 누나가 의자에 앉지 못하고 넘어져 버렸고 나는 그 위를 덮칠 듯 올라탔다. 누나를 바닥에 눕히고 그 위에서 깔고 뭉갠 채 나는 누나의 눈을 마주하며 물었다.
"지금... 나랑 하고 싶죠?"
"... 아니."
하지만 고개를 피하지 않는다. 잔뜩 발기한 남근이 그녀의 아랫배를 쿡쿡 찌르고 있고 다리들이 서로 뒤엉켜 있는데 피하지도 않는다. 내 손이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고, 그녀의 얼굴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살며시 잡아 귀 뒤로 넘겨주는데도 가만히 내 얼굴을 바라만 보고 있다.
"키스해줘요."
"... 안 돼."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누나는 내 허리를 감싼 손을 풀지 않았다. 그녀와 나의 호흡이 섞이는 자리는 이제 거리감이 없다. 서로의 숨을 공유할 만큼 가까워진 거리.
"... 그럼 내가 해줄래요."
그리고 나는 조용히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쪽.
부끄러운 듯. 살며시 입술만 대었다. 누나는 내 입술을 받은 후 내 눈을 바라보다가 허리를 감싼 손을 들어 내 뒷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거칠게 잡아당기며...
"... 좋아... 츄읍..."
"그렇게... 읍... 으음... 하면... 츕..."
그녀의 입속으로 나는 혀를 삽입하기 시작했다. 저항하던 입술이 서서히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