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마지막 썰썰썰 - 2
방송은 주로 배주리가 나에게 게임을 알려주는 식으로 진행됐다.
이 날 준비한 것은 축구 게임으로 플레이어가 직접 선수들을 조종하는 게임이었다.
방송을 시작한지 10분. 배주리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는지 내게 막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아니...!! 공을 왜...! 아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로키 딥빡ㅋㅋㅋㅋ
욱로킼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샷건치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샷건은 화가 나서 책상이든, 마우스든 부셔버릴 듯 쳐버리는 것을 뜻했다.
주리는 내가 슛을 하늘로 날린다든지, 혹은 패스를 상대방에게 해버린다든지 할 때마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분에 못이기는 소리를 내며 인형을 야구방망이로 때리거나 의자를 발로 차거나... 하여간 미친 짓을 해댔다.
“으아아아!! 으으!! 으아아아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 년 말려 ㅋㅋㅋ
ㅋㅋㅋㅋㅋ 지훈이 표정봨ㅋㅋㅋㅋㅋ 개귀욤ㅋㅋㅋ
나는 그 때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지으며 미안해... 미안해... 만 연발했다.
사실 다 짜고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일부러 더 못하는 척 했고, 주리는 일부러 더 화난 척했다. 그래야 재미있으니까. 시청자 반응들도 좋았다.
혼자 난리치느라 땀범벅이 된 주리가 숨을 몰아쉬며 내게 말했다.
"후우... 후우. 지훈아... 거기서 패스를 하면 어떻게. 슛을 했어야지."
ㅋㅋㅋㅋㅋ 저 년이 차마 화는 못 내고 ㅋㅋㅋ
야 이 년아 빡 친 거 보인닼ㅋㅋㅋㅋ
지훈이 눈치보는 거 봨ㅋㅋㅋㅋㅋㅋㅋㅋ
채팅창의 글처럼 나는 연기인 걸 알면서도 괜히 눈치가 보였다. 땀범벅이 된 여자애가 얼굴이 시뻘게 져서 숨을 몰아쉬며 나를 보고 있었으니까. 주리는 입가에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표정은 웃는 게 아니었다.
나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물었다.
"슛 키가 이거 아니야?"
"... 그거는 크로스."
"아~ 그렇구나. 몰랐어."
"괜찮아. 점점 좋아지고 있어."
그렇게 말하더니 배주리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야구방망이를 들었다. 그리고 거대한 토끼인형을 바닥에 눕히고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니가! 맞아! 라! 이! 더! 러운! 토끼! 인형! 이 씨! 발 새끼야!”
개소리 쩔구욬ㅋㅋㅋㅋㅋ
(이 꽉) 그거는 크로슼ㅋㅋㅋㅋㅋㅋㅋ
차마 남자애한테 욕은 못하겠궄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 개웃ㅋㅋㅋ
좋아지기는 삽푸고 있구만...
분명 게임은 계속 지는 중인데, 시청자들은 좋다고 난리였다.
나는 웃음을 참는 중인데, 시청자들은 울지 말라며 후원쿠폰을 쏴주었다.
그 날 들어온 후원쿠폰은 나중에 배주리가 정리해서 통장에 입금해주기로 했다.
*
평일에 학교를 안 가니 시간이 너무 많았다.
현정이는 아침에 학교를 갔다가, 오후에는 성혜네 카페에서 알바. 그리고 그 후에 잠깐이라도 풋살 연습을 하는 게 하루 일과였다.
그녀와 화장실에서의 일이 있은 후로, 나는 그녀와의 관계에 있어서 좀 더 가까워지는 것을 원했다. 이를 테면... 그래. 섹스지 뭐.
내 거기에 난 상처도 며칠 지나니까 좀 괜찮기에, 섹스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현정이가 그걸 거부했다.
“나 주말에 대회가 있으니까. 그거 끝나면 하자.”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상관이 없지 왜 없어! 아 진짜! 넌 무슨 남자애가 뭘 그렇게 밝히는 거야?!”
당연히 하고 싶으니까. 나는 현정이와 함께 살며 몸이 달아오른 상태였다.
생각해보면 그녀와는 꼭 이런 저런 일들이 겹쳐서 섹스를 못했다.
요즘은 풋살 대회 준비를 하는 것 때문에 카페 알바가 끝나면 잠들기 직전까지 풋살을 하다 들어왔다.
좋아하는 마음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데, 섹스는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뭐 그런 것 때문에 같이 살면서도 티격태격 거렸는데.
결국 오늘 일이 터졌다.
“뭐? 누드모델 알바를 가겠다고?! 야! 김지훈! 너 미쳤어?!”
“약속이 되있는 걸 어떻게 그러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현정이는 누드모델 같은 거 하지 말고, 내가 집에만 있기를 원하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성폭행 일도 있는데, 다른 여자와 함께 일한다는 게 찝찝하겠지.
생각해보면 원래세계에서 성폭행. 그것도 윤간을 당한 여고딩이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다른 남자랑 놀러 다닌다고 생각해봐. 좀 이상하거든.
그렇게 신나게 한 번 싸우고, 결국 이미진을 만났다. 약속이기도 했고, 지금은 단 돈 100만원이 귀중했으니까.
나는 빨리 돈 벌 생각 밖에 없었다. 돈을 벌어서 현정이랑 좀 넓은 원룸으로 옮기는 게 지금의 목표였다.
“지후나~!! 잘 지냈어?!”
이미진은 미술학원까지 찾아온 나를 아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그녀와 나는 근처 패밀리 레스토랑에 데려가 점심을 먹은 후, 다시 미술학원으로 돌아와 누드모델 준비를 했다.
옷을 모두 벗고 가운을 입은 상태로 부원장 실에서 미진 누나와 수다를 떨었다. 주된 주제는 인터넷 방송 출연 이야기였다.
"크하하하하!! 야! 지후나! 너.... 큭큭큭!!"
"왜 그렇게 웃어요. 사람들은 귀엽다던데."
"우, 웃기잖아! 푸하하하!! 이거 봐!! 큭큭! 너 진짜 찌걱찌걱이 뭔지 몰라서 그런 거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남잔데. 탁탁탁이면 모를까."
"탁탁탁? 그게 무슨...? 아~! 아하! 탁탁타악~! 꺄아!! 미쳤어!! 하하하하!! 웃겨웃겨. 푸하하하!"
요즘 뭐하냐는 질문에 무심코 인터넷 방송 이야기한 게 문제였다. 그녀가 좋아할만한 주제다. 나를 놀릴만한 것이니까.
"아~ 배야. 아이고! 배야!"
이미진은 인터넷에 떠도는 영상 등을 몇 변씩이나 돌려봤다. 그 후 내가 나온 방송을 보더니 또 한 번 빵 터졌다.
"아니 어떻게 이걸 몰라요?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커뮤니티 같은데 엄청 퍼졌던데... 자위남, 찌걱지훈 뭐 이런 걸로."
"얌마. 나이 먹으면 그런 거 잘 안하는 법이야 원래."
"그래요?"
"연예인 이름도 잘 모르는구만... 커뮤니티에 이게 유명한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어유~ 우리 지훈이 벌써 연예인 병 걸렸쪄요?"
"연예인 병이 아니라 진짜 유명하다구요."
"아라써아라써~ 이 누나도 후원쿠폰 쏴줄게 킥킥. 가입 어디서 하는 거냐? 킥킥."
인터넷 방송 이야기가 끝난 후, 누나와 본격적인 누드모델 이야기가 시작됐다. 이번에는 시간이 여유로운 편이어서 미진누나가 모델 사진집을 보여주며 포즈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 근데 거기에 상처난 건... 아니다. 보이지도 않을 것 같은데.”
"거기에 상처? 무슨 상처?"
"아니에요. 말실수 했어요."
“뭔데. 사람 궁금하게 진짜.”
의자에 드러눕듯이 몸을 기대고 있던 미진누나가 상처이야기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남근에 상처가 있다는 이야기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깜박거린다.
"봐봐."
"뭐, 뭘 보자고 그래요! 거기 옆에 난 건데!"
"야! 이제 와서 뭘 부끄러워하고 그래? 이 누나를 덮쳤던 그 패기는 어디 갔어?"
"제, 제가 언제 덮쳤다고!!"
"내가 팬티를 또 보여줘야 하니? 그래야 만족 하겠어?"
"그 말이 왜 또 나와요!!"
"지훈아. 좀 봐야 괜찮은지 아닌지 알지. 엄마라고 생각하고 까봐."
나는 지금 알몸에 가운 하나만 입고 있는 상태였다. 상처 이야기에 놀란 미진 누나는 그 가운을 거의 강제로 벗길 듯이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나는 마치 여자라도 된 듯이 옷깃을 여미며 그녀를 뿌리치려 노력했다.
"뭐하시는 거예요?!"
"얼레? 야. 너 돈 받고 하는데 이럴 거야?"
"그, 그래도 강제로 벗기시면..."
“됐고 빨리 벗어.”
“시, 싫어요...!”
"... 우리 대화 뭔가 이상한데?"
"... 그러게요."
"하여간 좀 보여줘. 괜찮아."
여고딩 보지를 잠시 보여 달라고 부탁하는 아저씨라. 이거 굉장히 변태 같은데?
물론 미진 누나의 표정은 아주 진지했기 때문에 그렇게 변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살짝 가운을 들어 올려 남근을 보여주자 미진누나는 손을 뻗더니 덥썩 하고 내 남근을 쥐었다.
"아악! 누, 누나...!"
"가만히 있어봐. 좀. 아 진짜."
나는 깜짝 놀라서 내 남근을 쥔 누나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은 상처를 관찰할 듯이 요리조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의 손길에 자극 받은 남근에 조금씩 힘이 들어간다.
아... 귀두를 그렇게 잡으면...
"어? 너 지금 흥분했어? 이거 왜 커져?"
"... 만지면 당연히 커지죠."
"흐음. 상처는 사실 상관없긴 한데... 이거 아프겠다. 손톱자국 같은데?"
예리하긴.
내 상처는 애초에 큰 상처는 아니었다. 피부가 얇게 파여서 통증이 심할 뿐.
처음에 비하면 많이 나아서 조만간 제대로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미진누나의 물음에 나는 그녀에게 상처가 생긴 이후의 일들을 쭉 설명했다.
나를 협박하던 배소연이라는 친구가 스토킹을 하다가 나를 덮쳤고, 저항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됐다고. 패티쉬 카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결국 성폭행 당한 것까지 말해야했는데, 그건 하고 싶지 않았거든.
원래세계에서 어떤 여고생이 성폭행 당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분위기 이상해질 거잖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겠지. 지금처럼 성적인 농담도 주고받는 자유로운 관계가 한 순간에 깨져버릴 수도 있었다.
좀 전 대화도 그렇다. 성폭행 경험이 있는 여고딩한테 ‘야. 거기 좀 보여줘 봐.’ 이런 농담을 하는 미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경찰에 신고 안 했어? 그거 완전 미친년이네... 우리 엄마한테 말해볼까? 우리 엄마 지금 변호사이신데."
미진 누나는 나보다 더 화를 냈다. 근데 사실 배소연은 당한 거라기보다는 서로 한 방씩 주고받은 건데... 거기에 윤간 사건도 겪은 후라 그런지 별로 심각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하여간 오늘의 모델 일은 저번처럼 중간에 발기하는 일은 없었다. 이미진도 비교적 얌전하게 옷을 입고 왔었고, 나도 적응이 됐기 때문이다.
일이 모두 끝난 후, 나는 오늘 미진 누나의 집에서 자기로 했다.
"우리 집 가는 거 정말 괜찮겠어?"
"싫어요?"
"나는 상관없는데... 그 잘 되가는 여자애 있다며? 그 애가 싫어할 것 같은데."
싫어하겠지.
오늘 나는 미진 누나와 현정이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나와 현정이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뿌듯하다는 듯 보던 미진 누나는 오늘 재워달라는 내 말에 황당해 했다.
"하이고... 사랑싸움하는데 괜히 내가 끼게 생겼네."
"피곤하다면서 상대를 안 해주는데 어떻게요. 그럼."
"아무리 그래도 다른 여자 집에 가서 자는 건 좀 웃기지 않냐? 들어보니 사귀는 사이인데."
"아직 사귀는 거 아니거든요. 저희 섹스도 아직 한 번도 못했어요."
"거기에 넣지만 않았을 뿐이지 뭐 거의..."
그렇게 미진 누나의 집에 도착해 나와 누나는 만화책도 보고 연애상담도 하면서 낄낄대며 재밌게 놀았다. 밤이 깊어질 때쯤에는 어느새 술판이 벌어져 있었다.
술이 들어가고, 나는 궁금했던 미진 누나의 연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 그렇게 우연히 무난자증인게 밝혀져서 고민 끝에 헤어지기로 했지."
"와... 그럼 거의 10년을 사귄 거네요?"
"하하. 알고 지낸 건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10년도 안돼. 중간에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고 그런 게 있어서..."
이미진이 결혼까지 생각했다가, 끝내 헤어진 남자는 그녀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해서 대학 때까지 잠깐 사귀다가 헤어졌고, 다시 사회에 나와 만나기 시작한 그런 사이.
그 오랜 세월 동안 신뢰를 쌓아온 사이도 무난자증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래도 헤어지기까지 하는 건 좀 너무했다."
내가 은근슬쩍 누나 편을 들었다. 하지만 미진누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답했다.
"니가 아직 어려서 그래. 아이를 낳을 게 아니면 결혼을 뭐하러 하냐? 야. 넌 결혼 왜 하는 거라고 생각해?”
“... 사랑하니까?”
“사랑하면 무조건 결혼해야 해? 결혼 못 하면 사랑 못 해? 그건 아니잖아. 결혼은 결국 아이 때문에 하는 거야. 아이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회적 장치라고나 할까... 하여간 그런 가정을 이루는 걸 목적으로 만났던 연인인데 임신이 불가능하면 헤어지는게 당연한 거 아닐까?”
“... 그럴 수도 있겠네요.”
이 쪽은 내가 뭐라 떠들 처지가 안됐다. 나보다 미진 누나가 더 많이 고민했을 테니까.
그렇게 술자리가 무르익어갈 무렵.
불청객이 도착했다.
띡- 띡- 띠리릭-
갑자기 문 열리는 소리가 나기에, 나와 미진누나는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놀란 눈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만화를 상의하기 위해 내가 누나네 집에 놀러왔었을 때. 당시의 일이 떠오른 것이다. 우리는 성인용품과 야한 속옷 등을 보다가 섹스를 나누었다. 의자에서, 침대에서 격하게 서로의 타액을 섞고 몸의 온기를 나눴다.
그러다 갑자기 들이닥친 부모님을 만나 난처한 상황에 빠지기도 했었다.
그 일이 떠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데,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너무 의외의 사람이었다. 윤설아. 내가 한 때 열렬하게 원했던 그 사람.
"..."
"..."
부은 얼굴, 눈물은 글썽글썽. 얼굴은 술기운이 올라와 빨갛다.
왜 그런 모습인 걸까.
좋아하는 연인을 만나서 그렇게 기뻐했으면서.
왜 행복하지는 않고 그렇게 슬픈 모습으로 서있을까.
난처해하는 이미진을 사이에 두고 나와 설아 누나는 서로의 눈을 마주했다.
슬펐던 눈은 놀람으로 변했고, 놀란 눈이 망설임으로 변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내가 입을 열었다.
"누나. 잘 지내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