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동급생 대리 조교 썰 - 5
"입맛에는 맞아?"
"네. 아버님. 아주 맛있습니다."
"그래. 많이 먹어."
점심이라도 먹고 가라는 말을 거절하지 못하고 미진 누나 가족과 외식을 했다. 그것도 내가 생전 처음 보는 고급 식당에서 말이다. 얼핏 보니까 가격도 굉장히 비싼 편이었다.
내가 식사 예절을 몰라 어리바리 하며 눈치껏 이것저것 따라했더니, 누나 아버님이 웃으면서 주문 방법이나 메뉴, 식기 사용 등을 내게 자세히 알려주셨다.
대화는 어쩐지 옆집 아줌마 같은 아버님과 내가 주로 나누었다.
"이제 고3 올라가는 건가?"
"네. 이제 고3이요."
"대학은 정했고?"
"공부를 그렇게 썩 잘하는 게 아니라..."
"내가 자식 키워보니까. 대학이 중요한 것 같지는 않아. 학과가 중요하단다. 나는 커서 무엇을 하고 싶다. 하는 마음이 없으면 좋은 대학에 가도 소용이 없어. 우리 미진이가 비록 좋은 대학교는 나오지 못했지만 본인이 좋아하는 학과를 택해서 꾸준히 했더니 지금은 잘 살잖아? 여러 가지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하면서 말이야."
"아. 네네. 그렇죠. 미술 학원도 다니시고... 만화도 그리시고..."
"쟤 성격에 어디 회사 다니겠니. 나이는 서른이 넘었는데 철이 없어서... 쯧쯧."
아버님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식탁을 사이에 두고 두 부자. 아니 두 모녀는 아무 말 없이 스테이크를 썰어대고 있었다. 한 사람은 무언가 불만에 가득 찬 표정으로, 다른 한 사람은 볼이 퉁퉁 붓고 입술이 터진 상태로. 둘 때문에 분위기가 계속 삭막하자 아버님이 참다못해 말했다.
"정말 둘 다 이럴 거야? 지훈이 채하겠네. 그만큼 했으면 됐지."
"... 크흠."
"..."
"그만하고 밥부터 먹어."
어머님이 드디어 한 마디 하려는 듯 스테이크를 썰던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무거운 신음을 흘리며 한 마디 던졌다.
"... 그래서."
"네."
"네?"
"결혼은 언제할 거냐."
"푸웁!"
"쿨럭! 쿨럭!"
나는 물을 먹다가 뱉을 뻔 했고, 미진 누나는 삼키던 스테이크가 목에 걸렸는지 기침을 시작했다. 근데 이번 발언은 누나네 아버님에게도 충격이었는지 아버님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결혼이라니. 당신. 그게 무슨 소리에요?"
"아니 고등학생 애와 성관... 계를 맺었으면 마땅히 여자가 책임을 져야지! 아니면 계집답지 못하게 도망가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계집애라면 당연히 책임을 져야지!"
"임신을 할 리도 없는데 책임은 뭔 책임을 져야 하는데요?"
임신을 할 리가 없다? 정조역전세계는 여자가 임신을 안 하나?
이상한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누나네 부모님은 목소리만 조용조용하지 거의 멱살 잡고 싸우는 수준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고등학생 애를 가지고 놀다가 버리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내 딸자식 년이 계집답지 못하게 어린애를 가지고 놀았다는 것도 화가 다 나는구만...!"
"누가 가지고 놀아요. 서로 좋아하는 것 같은데."
"사귀지도 않는다잖아! 분명 이미진 저 기집애가 말로 꼬들겼겠지! 순진한 사내애를...!"
"남자라고 뭐 다들 순하고 그런 줄 알아? 아유. 그러셔서 나한테 홀랑 넘어왔어?"
"아, 아니 왜 그 이야기가 나와?"
"당신이 나한테 작업 건 줄 알지? 검찰 수사 핑계로 자꾸 은행 들어와서 날 만난 걸로만 알죠?"
미진 누나네 아버님은 은행장 출신이시고, 어머님은 검사 출신이셨다.
"잘 생각해봐요. 왜 그날 하필 내가 계속 그 자리에 항상 있었을까? 상황 조성을 다 해두었으니까 당신이 와서 작업도 걸고 그런 거지. 순진하긴 누가 순진해."
"크흠..."
그건 그렇다.
항상 남자가 여자에게 들이대는 줄 알지만 여자도 나름대로의 작업을 건다. 여자의 작업은 주로 유도를 통해 이뤄지는데, 향수를 뿌린다든지, 유독 앞에서 알짱거린다든지... 물론 정말 좋아하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알기 힘들기 때문에 어장관리라는 말도 나온 것이다.
"너도 그렇지? 지훈아?"
아버님이 나에게 의견을 묻는다. 저건 아마 아들 인생이 망가지길 바라지 않는 어머니의 마음과 같은 것 일 테다. 미진 누나가 결혼에 억매여서 충동적인 결정을 하지 않았으면 하시는 거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상관없어요. 처음도 아니었고..."
"...! 야...!"
"처음이 아니라고?!"
"뭐?!"
아차. 말실수를 했다. 식당에서 갑자기 식탁을 들어 엎어버릴 표정으로 변하는 어머님 덕에 나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만난 게 처음이 아니라고요. 안면이 있는 사이라고요."
"... 험험."
"그래. 엄마. 엄마가 뭘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그런 사이는 아니라니까."
"내가 뭘 생각했는지 네가 알아?"
"엄마야 뻔하지. 맨날 범죄자 생각만 했었으니까 성범죄자 뭐 그런 걸 생각했겠지."
"..."
나는 미진누나 편을 들어주기 위해 말을 이었다.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었고요. 오늘은 누나가 만화를 그리는데, 남자 입장에서 솔직한 감상을 듣고 싶다고 해서 잠깐 집에 온 거였어요. 그러다 제가 여성 속옷들을 좀 보여 달라고 해서 누나가 잠깐 보여줬는데..."
"줬는데?"
"... 그래서?"
"그게... 예뻐서... 제가 순간 너무 흥분을 해서... 제가 먼저..."
미진 누나는 귓불이 빨갛게 달궈진 채 스테이크를 썰고 있었다. 접시 째 잘라버릴 듯이, 고기가 이미 썰렸는데도 계속 썰고 있다. ‘에잇 이거 왜 이렇게 안 잘려!’ 막 이러면서. 미진 누나 부모님들은 이제야 오해가 풀렸는지 표정들이 한결 편안해지셨다.
그건 그렇지. 고3이 성인과 합의하에 성관계를 하는 건 괜찮아. 고3이 여자고, 성인이 남자라면 사회적, 도덕적 지탄은 받을지언정 법적으로 크게 문제되지는 않아.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것도 상관없어. 그 역시 도덕적 문제지 법적 문제는 아니거든.
근데 알고 보니까 여고딩이 성인 남자를 덮친 경우네? 이럴 경우 강간이어서 남자가 피해자가 되더라도 사회에서는 피해자라고 생각을 하지 않아. 부럽다고 생각할 걸? 말하자면 도덕적 책임감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진 거지.
"... 커허흠."
"그렇구나. 그것 봐요. 둘이 알아서 정할 문제지. 그걸 뭘 미진이한테... 우리 애가 어디 뭐 그렇게 나쁜 짓 할 애야? 고등학교 때도 그 누구야. 왕따 당하는 친구 때문에 학교 전체랑 싸우고 난리 났었잖아."
"설아 말하는 거야?"
"콜록! 콜록! 아빠! 엄마! 됐어. 그런 이야기 하지 마."
설아 누나?
미진 누나 고등학교 친구니까 이름이 나와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의외의 상황에서 듣게 된 이름인 건 분명했다. 내가 불의의 일격에 멍한 사이, 미진 누나가 당황하며 손을 휘휘 젓는다.
"아. 그래. 설아. 설아 때문에 미진이가 여기저기 애들을 막 두들겨 패서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여기저기 사과하고... 근데 뭐 그 나이 때 친구들이랑 싸우고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런 걸 가지고."
설아 누나 이야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서서히 잊고 있었던 이름을 듣게 된 나는 괜히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
점심 식사를 끝내고 미진 누나 부모님은 본래 자기 집으로 돌아가셨다. 차 시간 때문에 간다고 하시는데, 내 생각에는 나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누나 집으로 왔고, 미진 누나는 부모님을 터미널에 데려다 주러 나갔다.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진 누나네 집으로 온 이유?
[이미진 : 컴퓨터나 하고 있어. 한 시간 내로 돌아갈테니까. ㅋㅋ]
[이미진 : 이런 시간도 다 알바시간에 포함해줄게. ㅋㅋㅋㅋㅋ]
꿀알바니까. 시간당 5만원인데 거의 놀면서 돈을 벌고 있다. 미진 누나 컴퓨터에 앉아 메신저부터 켰다.
혹시나 싶었거든.
근데 역시나 미진 누나는 이런데 철저했다.
메신저는 벌써 로그아웃 상태.
설아 누나 이야기가 나왔으니 내가 이런 짓을 할 것까지 짐작했을 거다.
설아 누나는 어른스럽고 똑똑해 보이면서도 어리바리했고, 미진 누나는 왈가닥 같다가도 의외로 프로페셔널한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괜히 설아 누나 생각하는 게 싫어서 만화책들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다행히 남성향 만화도 있어서 그것들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남성향 만화가 없더라도 GL 만화가 있었다. 그런 만화는 주로 여체를 자세히 묘사하는 편이어서 이성애자인 나에게 그렇게 거부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다녀왔습니다~"
돌아온 미진 누나는 아까와는 다르게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것도 몸매가 드러나지 않게 펑퍼짐한 청바지였다. 내가 청바지를 빤히 보자 미진 누나가 민망한지 웃으며 답했다.
"내가 좀 무신경했던 것 같아서... 나를 설마 여자로 볼 줄 알았겠냐."
"그것도 예뻐요."
"..."
내 말에 갑자기 말을 잃은 듯 코를 만지작거리던 누나가 내 옆에 와서 앉았다. 그리고 입을 연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너. 나 좋아하고 그런 건 아니지?"
"좋아하는데 그게 남녀 간에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 그래. 다행이네. 그런 건 사랑이 아니야.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나. 무난자증이야."
"... 네?"
"무난자증이라고. 임신을 못해."
"..."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그것도 평상시 하는 말투로. 마치 너 어제 뭐했어? 나는 놀았어. 하는 듯한 일상적인 말투로 핵폭탄을 날려버린다.
내가 입을 딱 벌리고 누나를 보자 누나가 히죽 웃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다른 건 다 되는데, 그것만 안 된다더라. 전 남친도 결혼까지 생각했다가 결국 그거 때문에 파혼 당했어. 파혼당해도 싸지. 여자가 임신을 못하는데..."
"... 누나."
"나도 너 좋지만. 남자 대 여자로서 좋은 게 아니라 그냥 친한 동생으로 좋은 거야. 오해할까봐 미리 말해 둘게. 그리고 혹시. 정말 만에 하나라도 나 좋아한다면 그 마음 그냥 접어 두는 게 좋을 거야. 감당 안 될 테니까."
"..."
미소긴 한데, 너무 쓸쓸한 미소였다.
어른이구나. 이래서 어른이구나.
어른이라고 덜 아프거나 덜 슬프지 않을 텐데, 그럼에도 견디는 걸 보니 정말 어른이구나.
괜히 마음이 울컥하는데 미진누나가 손을 뻗어 내 코를 꼬집었다.
"이런 이야기 들었다고 괜히 책임감 느끼면 안 된다? 우리가 서로 하기는 했지만. 서로 좋아서 한 거잖아. 난 좋았어. 너는 안 좋았어?”
“... 저도. 좋았어요.”
“그렇다고 사랑해서 한 건 아니었잖아. 그렇지?”
“... 네.”
“동정심과 애정은 구분해. 알았어?"
"... 네."
"그래. 착하다."
하지만 슬픈 건 어쩔 수 없었다.
누나가 이렇게 상세하게 속내를 털어놓는 건 아무래도 설아 누나 일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설아 누나가 내게 은근히 여지를 주었다가 나 혼자 난리를 친 것을 보고 미리 털어놓는 것이겠지. 그런 일을 사전에 예방이라도 하겠다는 듯.
그렇게 침묵 속에서 일을 시작했다.
일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두터운 시나리오 집을 누나가 여러 가지 설명을 곁가지로 붙여서 들려주면, 나는 그것에 대해 감상을 말한다. 거기에 뭔 어려움이 있겠나.
다른 때보다 더 최선을 다해 감상을 들려주며 누나와 일을 끝마쳤다. 시나리오 집을 모두 읽었을 때에는. 창밖에 어둠이 내려 깔려 있었다.
*
하숙집으로 돌아오는 미진 누나의 자동차 안.
"야! 아직도 울상이야?"
"뭐가 울상이에요."
"지후니는~ 울보래요~ 울보래요~"
"누가 울보에요! 진짜..."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미진 누나가 풀어주어서 그런 건지 분위기가 많이 밝아졌다.
원래 세계에서 남자가 무정자증으로 파혼까지 당했는데 저렇게 밝을 수가 있나?
아닐 거다. 아픔을 억지로 숨기는 것이겠지.
이미진은 정말 강한 사람이었다. 첫인상과는 너무도 다른 여자.
남녀를 떠나서 그녀가 정말 멋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정심과 애정을 구분하라는 그녀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설아 누나처럼 그녀를 동경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동경이 사랑으로 변했겠지.
괜히 울상을 지었다가는 누나가 더 힘들 것 같아 억지로 웃었다. 그렇게 분위기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도 모를 그런 상황에서 하숙집에 도착했다.
"나 갈게! 지훈아~ 다음에 또 보자~"
"네. 들어가세요. 누나. 오늘 밥 감사히 잘 먹었어요."
"모델 한 번 남은 거 알지? 연락할 테니까 몸 관리 잘하고 있어야 해?!"
"네. 누나."
"빠빠~!"
차를 타고 멀어지는 누나를 보며 끝까지 손을 흔들었다. 자동차의 뒷모습이 왜 가슴이 이렇게 아픈지.
"야. 김지훈."
"..."
순간 마음이 차갑게 식는다. 뒤를 돌아보니 배소연이 골목에서 나오고 있었다. 배소연은 밤만큼이나 어둡고 달만큼이나 서늘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방금 저 여자가 그 년이지? 너랑 원조교제 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