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동급생 협박 썰 - 7
친구들이랑 수다나 떨고 있을 줄 알았더니 얘는 또 왜이래?
내가 핸드폰을 책상에 덮으며 올려보자 배소연이 또 묻는다.
"여자냐고."
"응. 여자인데?"
"누군데?"
"여자친구."
"뭐?"
배소연이 깜짝 놀라더니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는 디스랩을 하듯 말하더니 지금은 거의 입을 다문 수준이다.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린 배소연은 내 옆자리에 천천히 앉으며 말했다.
"누군데?"
책상에 덮어 둔 핸드폰은 계속 윙윙- 하고 울리고 있다.
아 이미진 이 여자는 진짜 말 많네. 뭐가 그렇게 할 말이 많아?
나는 울리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도도하게 배소연을 노려봤다.
"여자친구라니까?"
"우리 학교 애일 거잖아. 누구야?"
"우리 학교 애 아니야."
"너 학원도 안 다니잖아. 어디서 만난 건데?"
얘 봐라? 노려보는데 솔직히 좀 무섭다.
원래 세계에서는 이런 모습 한 번도 안보였는데 왜 이럴까?
내가 쓰러진데다가 학교 며칠 빠지고, 그래서 그런가?
원래 세계에서도 내가 그랬다면 배소연이 나한테 이렇게 집착했을까?
아. 어쩐지 그랬을 거 같다. 갑자기 불현듯 떠오르는 사건이 있다.
체육시간에 농구를 하다가 센터에게 밀려서 골대에 머리를 박은 적이 있다.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고, 이마가 살짝 까지고 부은 정도였었다. 골이 아파서 그늘진 벤치에 혼자 누워있으니 배소연이 와서 놀렸었다.
'둔탱아. 바보냐? 거기다 왜 머리를 박아? 하하하!'
'내가 일부러 그랬냐?'
'그랬냐아? 말투가 좀 띠껍다? 뒤질래?'
'... 이씨.'
그래. 그 때도 쫄았다. 나는 남자였지만 존나 무서웠거든.
배소연은 내가 입을 내밀고 삐지자 귀엽다면서 막 웃더니 자기 반바지 체육복을 확 하고 걷었다. 하얀 허벅지에 내가 당황하자 나를 놀렸다.
‘왜? 꼴리냐?’
‘꼴리긴 누가 꼴려.’
그러더니 배소연은 자기 허벅지를 찰싹찰싹 때리며 말했다.
'내가 오늘 특별히 허벅지 양보해준다. 새끼. 누울래?'
'됐어. 무슨 무릎베개를 해준다고.'
'얼라리요? 해준대도 싫다네? 귀여운 새끼.'
그러며 내 볼을 꼬집었다. 나한테는 굉장히 굴욕적인 기억이다. 왜냐면 정말 집에서 키우는 개새끼 취급이었으니까. 내가 배소연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설레는 학창시절 사랑이야기였겠지만, 나는 배소연이 일진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미술을 하고, 학교에서는 비교적 얌전하지만. 일진은 일진이었다.
친구들도 다 담배피고 사고치고 다니는 그런 애였는데 내가 좋아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일진치고는 괜찮은 애다. 라는 생각은 있었지만 말이야.
어쨌건 정조역전세계에서 이 년이 지금 하는 짓 보니까 나 좋아하는 게 맞는 것 같다.
티내면서 질투하고 누구 집착하는 게 딱 남고딩 수준이다.
"... 야. 배소연. 넌 뭔데 나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아?"
"며칠 씩 니가 학교를 안나오니까 선생이 자꾸 나를 갈구잖아!"
여봐라. 여기서 니가 선생 핑계를 댄다고 티가 안날 줄 아냐?
다 눈치 챘어 멍청한 년아.
게다가 배소연이 소리를 어찌나 크게 지르는지 교실이 순간적으로 조용해졌다.
원래 세계에서도 여자 짱이었던 배소연이다.
정조역전에서는 이 지역에서 유명한 주먹이었으니 애들이 얼마나 무섭겠냐?
그래도 나는 배소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왜 소리를 질러? 너 지금 되게 웃긴 거 알아? 니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뭐? 이게 진짜... 씨..."
"자리에나 앉아."
하지만 정조역전이니까 나는 너를 막 대할 수 있는 거거든. 킥킥킥.
왜 그렇잖아? 아무리 양아치 새끼라도 여자애는 잘 안 때리잖아.
남자는 여자를 때리면 안 되고, 남자는 무조건 여자를 지켜줘야 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어서 그러지 못하잖아. 그래서 여자들은 보호 받고 배려 받으면서도 그걸 모르고 살지만, 나는 아니거든. 난 원래 자지 달린 사내새끼거든.
내가 어느 정도 지랄해도 배소연이 날 못 때릴 거 알아. 근데 무섭겠냐?
게다가 저 여자애가 나를 좋아해.
정 안되면 꼬추나 보여주지 뭐. 안 그래?
보여준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그럼 주먹을 들어 올리다 말고 멍하니 내 자지를 볼 거야. 뻔하지.
"내가 양호실에서 말했지. 딱 말하라고."
"..."
"그 때 니가 말 안했잖아. 이제 기회 없어. 그러니까 나한테 관심 끊어."
"아니. 담탱이가 진짜로..."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신경써준 건 고맙다."
"..."
입을 우물거리던 배소연은 나에게 더 이상 따지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담배나 피러 가겠지. 양아치 년이 돌아버릴 정도로 빡쳤는데 뭐 어딜 가겠어?
아. 근데 이거 재미있네.
어쩐지 어장 관리하는 재미가 이해되기 시작했어.
진짜 내가 생각해도 재수 없는 거 있지?
하지만 매력적이야! 원래 남자들은 손에 잘 안 잡혀야 더 좋아하는 법이거든.
여자보다 남자가 비교적 좀 더 모험적이고, 적극적이야.
그래서 이지(easy) 난이도 보다 하드(hard) 난이도를 좋아하는 게 남자거든.
배소연에게 나는 easy 한 남자가 아닌 거거든. 완전 hard 한 남자인 거지.
갖고 싶지 않겠어?
두고 봐. 배소연이 지금 저렇게 빡쳐 하지만 나를 더 좋아하게 될 걸?
내가 손에 안 잡히니까. 엄청나게 튕기고 있거든.
나는 교실 문을 나서는 배소연을 보며 슬쩍 웃고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이미진 : 학교 언제 끝나?]
[이미진 : ?]
[이미진 : 그냥 나와 너 어차피 학교에 미련 없잖앜ㅋㅋ]
[이미진 : 누나랑 놀자]
[이미진 : 지후낭낭~]
[이미진 : 지후나나아아아아]
[김지훈 : 아 좀 ㅡㅡ]
[김지훈 : 수업 좀 듣죠?]
[이미진 : 수업 안 들으면서 ㅋㅋㅋ]
[김지훈 : 자꾸 이러면 안 만날 겁니다.]
[이미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넘한다~ 알써~]
[이미진 : 학교 언제 끝나? 데리러 갈게~]
[김지훈 : 적당한 때 끝나니까 관심 끊어요. 연락 줄 테니까.]
[이미진 : 오케오케 ㅋㅋ]
[이미진 : 사랑해 알럽뷰~]
미친년.
*
배소연은 삐졌는지 어쨌는지 수업이 모두 끝날 때까지 내게 말 걸지 않았다.
하긴. 말 못 걸겠지. 너무 티나 거든.
이미 다 들킨 건 모르고.
그래서인지 더욱 그림에 열중하는 것 같았다. 교과서를 아예 스케치북으로 쓰는 중이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는 부리나케 짐을 챙기고 교실을 빠져나왔다.
호명 고등학교는 고3의 경우 야자가 선택형이라서 나는 야자 같은 걸 하지 않았다.
왜 해 그걸. 시팔 어차피 공부 하지도 않는데.
나는 대가리가 나빠서 공부 해봤자 다.
사실 나중에 커서 뭘 해먹고 살까 고민 같은 것도 많이 해봤는데...
지금은 그런 걱정 없다. 정 안되면 누드모델이나 하지 뭐.
그러니까 이미진과 관계를 잘 만들어 놔야 하는 거다.
한탕 뛰면 백 만 원이 들어오니까.
직장인 연봉 초봉 평균이 2천 만 원 초반 대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돈인 거지.
"지후나~ 여기야!"
교문 쪽에 검은색 SUV가 주차 되어 있다. 그 SUV에 검은 피부의 미인이 몸을 기대고 내게 손을 흔들고 있다. 이미진이었다.
그녀는 키가 그렇게 크지는 않았는데, 얼굴이 워낙 조그만 해서 비율이 좋은 그런 여자였다. 짧은 머리는 보이쉬한 느낌을 많이 주었고, 허벅지나 가슴 주위에 남은 썬탠 자국은 섹시함이 물씬 풍겼다.
저런 여자를 자동차 시트에 묶어놓고 질펀하게 섹스를 했다는 상상을 하자 남근이 다시 묵직해졌다. 보기에는 참 좋은 여자인데 말이야.
"아니 무슨 학교까지 들어와 있어요?"
"기다리다 보니까. 히히. 저녁 먹었어?"
"아뇨. 배고파요. 밥 사줘요."
"뭐 먹을래?"
"그보다 차에 타고 이야기하죠? 여긴 좀..."
사실 그녀처럼 섹시한 여자가 반겨주니 좋기는 한데.
여기는 고등학교다. 주위에서 학생들이 웅성거리며 지나가고 있는데, 나를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특히 걱정되는 건 저 멀리서 선생님들이 저녁을 먹기 위해서인지 몰려나오고 있었는데 이쪽을 손가락질 하는 게...
"야. 김지훈."
그 때 뒤통수 쪽에서 누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겠어. 배소연이지.
이미진이 너무 눈에 띄게 있어서 들킬 수밖에 없긴 했다.
"왜?"
"누구야? 너 누나도 없잖아."
목소리에 잔뜩 날이 서있다.
그래그래. 내가 학교 끝나고 학원 다니는지 아닌지, 내 가족 사정이 어떤지도 다 기억해 놨다 이거지? 나는 뭐라고 답할까 고민했다.
누나가 아니라 카섹스했던 섹스 프렌드야? 이건 좀 민망하지.
노예계약서로 묶여진 임시 내 주인님이야? 이건 변태 같잖아.
잠자는 여자 강간하다 걸려서 협박받는 중이야? 이건 범죄고.
누드모델 고용주이셔? 누드 모델 걸렸다가 학교에서 퇴학당하면?
그렇게 고민하는 나를 대신해 나선 것은 이미진이었다.
"지훈이 친구니?"
"네. 누구시죠?"
배소연이 날카롭게 노려보며 이미진에게 물었다. 어지간한 사람이면 잔뜩 쫄만한 눈빛이었는데 역시 이미진에게 소용이 없었다. 이미진은 그 눈빛을 받으면서도 활짝 웃으며 답했다.
"나는 지훈이 여자친구!"
"... 네?"
이미진은 갑자기 내 팔짱을 끼더니 내게 얼굴을 기대왔다. 평소라면 미쳤냐며 뿌리쳤겠지만 나는 그냥 놔뒀다.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갔거든.
배소연은 이미진을 위 아래로 훑더니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저기요. 아줌마. 나이가 몇인데 여자친구에요?"
“뭐? 아줌마?”
“네. 아줌마죠. 나이 서른은 된 것 같구만.”
하긴 그래. 나 같아도 안 믿을 거 같아.
이미진이 미인은 미인인데, 사실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26이 넘어가면 티가 나기 시작한다. 피부노화라든지 목에 주름 같은 걸 막을 수가 없거든.
심지어 이미진은 31세다. 누가 봐도 서른 넘은 여자였는데 고딩인 나랑 사귀는 사이라고 말하면 누가 믿겠냐고.
이미진은 배소연이 건방지게 구는 대도 재미있다는 듯 빙글거리고 있다.
하긴 그렇지. 아저씨가 고딩이 까분다고 화내면 어른이겠어?
그냥 젊을 때 치기 정도로 생각하며 웃고 넘기겠지.
솔직히 이후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나 구경이나 하고 싶었는데, 선생님들이 다가오는 중이라 나는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다.
"여자친구 맞아.”
“뭐? 여자친...”
“이만 가자 누나. 나 배고프다니까?"
"웅웅~ 뭐 머글까?"
그렇게 나는 무섭게 미간을 구기고 있는 배소연을 둔 채 이미진과 함께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