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동급생 협박 썰 - 6
너. 나 좋아해? 라는 말을 막 던진 건 아니다.
나도 나름 계산속이 있거든.
설아 누나와의 일이 있기 전이었다면 대뜸 섹스하자고 했겠지.
“나랑 섹스할래?” “니 보지에 내 자지를 박고 싶어.”
이딴 말이나 던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제는 정조역전세계도 나름대로의 사회정의가 있다는 걸 안다.
이대로 쟤가 좋다고 하면 나도 좋은 거지.
일진 양아치녀를 섹스프렌드로 만들 수 있다는 짜릿한 상상 안 해본 남자가 누가 있겠어.
죽이잖아? 찐따 새끼가 지금 나를 가지고 놀... 아흣! 아앙... 미, 미안해 제발 더...! 이런 거 아니겠냐고. 날 무시하는 애를 깔아놓고 허리를 움직이는 거지.
내 허리 움직임에 맞춰서 교성이 터지면 얼마나 꼴리겠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데 생각보다 반응이 시원치 않다.
이미진처럼 장난스럽되, 내 머리 꼭대기 위에서 날 가지고 노는 느낌도.
장현정처럼 아이답고 순수하게 당황하는 그런 귀여운 모습도 아니었다.
정말 덤덤한 목소리.
잘못짚었나? 이럼 내가 민망한데?
괜찮아. 다 빠져나가는 수가 있으니까.
"좋아하는 사람도 아닌데 양호실을 데려와서 치료를 해줘?"
"그건 우연히 내가 봤으니까 그런 거지."
"여기저기 나서지 말라고 하는 건?"
"짝이니까 그런 거지."
점점 자신 없어지는 목소리.
나는 며칠 동안 어른 둘과 놀면서 영악해질 대로 영악해진 상태였다.
노예 계약을 당해본 고딩이 몇이나 되겠어?
그만큼 엄청나게 놀림당하며 머리를 굴릴 줄 알게 된 거지.
갑자기 원래 세계에서는 무서웠던 배소연이 귀엽게 보였다.
애다 애야.
나는 일부러 도도하게 말했다.
여자가 남자를 앞에 두고 이러면 재미있을 것 같았거든.
"소연이 너는 당하고 있는 친구를 보면 도와주고 그런 성격이야?
"도울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럼 아까 일진 애들이 괴롭히던 여자애는 왜 안 도와줘?"
"너는 같은 반이니까."
"같은 반이라고 다 돕고 그러지는 않는 것 같던데?"
"너는 짝이니까 그냥 그런 거지."
"니 성격상 내가 이러면 화를 낼 것 같은데?”
"아니라니까.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말하면 진지하게 생각해볼게. 딱 말해. 나 좋아해?”
“... 미쳤냐? 난 간다!"
그렇게 말하며 확하고 일어서서 양호실을 나간다.
고 년 참. 야. 다 들켰어.
나는 원래 세계와 정조역전세계는 연결점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연결점이라는 것이 사람이 건너다닐 수 있는 통로. 뭐 그딴 걸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저... 예를 들면 이런 거지.
원래 세계에서 내게 적개심을 가지고 있던 아이나, 나와 사이가 안 좋던 애가 있어.
그럼 그 애는 정조역전세계에서도 나와 사이가 좋지 않아.
다만 그 표현 방법이 뒤바뀌는 것뿐이야.
자. 누가 나를 싫어한다고 쳐봐.
남자애였다면, 원래세계에서는 대놓고 괴롭힘을. 정조역전에서는 은근한 디스를.
여자애였다면, 원래세계에서는 티내지 않는 회피를, 정조역전에서는 대놓고 무시를.
그러니까 두 세계에서의 어떻게 행동하는지 종합해보면 답이 나오는 거야.
배소연 봐. 나는 남자라서 여자들의 관심표현법이 뭔지 잘 모르겠지만, 남자들의 관심표현법은 잘 알거든? 저거 지금 하는 짓 보면 딱 좋아하는 여자 앞에 둔 사춘기 남정네야.
그걸 생각하고 보니까 원래세계에서도 내게 계속 관심을 표현했던 것 같은 거지.
"어? 소연이니? 어디 다쳤어?"
"..."
"아. 지훈이구나? 몸은 좀 어때?"
배소연이 양호실 문고리를 잡는 그 때 양호실 문이 열렸다.
양호선생인 윤지유 선생이었다.
그녀는 첫날에 봤던 것처럼 풍만한 가슴을 가진 나이스바디의 소유자였다.
배소연은 윤지유에게 고개만 까닥 숙여 보이고 도망치듯 사라졌고, 윤지유는 나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또 어디 다쳤어?”
한 번 잠깐 봤을 뿐인데 이름과 얼굴, 상태를 기억한다.
나는 살짝 웃으며 답했다.
“굴러 떨어졌어요.”
“소연이가 뭐 다른 짓은 안했고?”
“소연이요? 아뇨. 소연이가 양호실 데려다 줬는데요.”
“그래?”
고개를 갸웃하는 윤지유. 나는 그 모습에서 내가 모르는 어떤 사실들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 너 소연이랑 친하니?”
“아뇨. 그냥 옆자리에 앉는데요.”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해도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친하게 지내지마.”
“네? 왜요?”
“중학교 때 사고를 엄청나게 많이 쳤다더라. 학교 폭력 때문에 정학한 적도 있고... 질이 안 좋은 애야. 남자애도 여럿 사귀고 버리고 그랬다던데. 그 때문에 울면서 학교 그만둔 남자애들이 많다더라고... 혹시 호기심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
“제가요?”
“그래. 니 나이 때 남자애들은 그런데 판타지가 있잖니.”
중, 고등학생들은 걸레에 대한 일종의 판타지가 있다.
여학생들은 여기저기 바람피우는 남자에게. 남학생들은 여기저기 잘 대주는 여자에게.
보통 바람피우는 남자나, 잘 대주기로 소문난 여자들은 외모적으로 훌륭한 경우가 많고, 몸매도 매력적이며, 행동 자체도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인다. 어떤 모습이 예쁘게 보이는지 경험을 통해 깨달은 거지.
그리고 그 대상과 섹스를 쉽게 할 수 있다는 망상 자체가 두근거림을 주기 때문에, 그것이 사랑으로 번지기가 아주 쉽다. 그래서 학생들은 착각을 하는 거다.
여자는 자신이 바람기 남자의 마지막 사랑이 될 것이라는 착각을.
남자는 걸레 같은 여자를 구원하기 위해 나타난 백마 탄 기사가 되리라는 착각을.
윤지유는 그런 의미의 말을 한 것 같았다.
“걱정마세요. 저는 그런 거 없어요.”
“그럼 다행이고. 하여간 너도 조심해라. 괜히 소연이 따라다니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배소연이 그런 애였나?
원래 세계에서도 양아치라는 인식은 있었다. 함께 다니는 애들이 다 질이 안 좋았거든.
그래도 배소연은 충실하게 학교생활하면서 미술 공부를 하는 줄 알았다.
생각해보면 내 앞에서 항상 그런 걸 어필해왔거든.
옆에서 뭔가를 그리거나, 나는 끝나고 뭘 한다든지.
미래에는 뭘 하고 싶다든지.
나는 배소연에 대해 고민하며 양호실을 나섰다.
*
교실에서 배소연은 내게 말을 잘 거는 편이 아니었다.
원래 세계에서는 가지고 놀기 좋은 장난감 취급을 하며 나를 가지고 놀았지만, 정조역전에 와서는 틱틱거리면서 뭔가를 챙겨주는 여자애로 변했다.
야. 생리대 좀 사와. 나 양말 벗겨 줘. 다리 좀 주물러봐라.
이런 농담을 던지던 당돌한 애가. 갑자기 나한테 틱틱거리니 좀 웃기긴 하다.
다른 애들이랑은 활발하게 지내는 것 같은데 말이야.
"뭘 봐 아까부터?”
내가 관찰하듯 계속 보자 배소연이 연습장에다 뭔가를 끄덕이다가 연필을 던지듯 내려놓더니 나를 휙 하고 돌아본다. 나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
“어떤 걸 그리는 거야? 남자 성기 그림?”
“일부러 그리는 거 아니야! 명암 표현 연습하느라 그런 거지!”
“다른 걸로 하지 왜 하필...”
“사람마다 연습하기 좋은 대상이 다른 거야. 그리고 거기 같은 경우 그리기 다양하다고, 원통이라든지 구 모양이라든지... 질감이라든지. 아오. 뭐 이런 걸 말해야 해?”
“아니 뭐. 날 그리나 하고 봤지.”
“참나. 너 진짜 이상한 착각을 하는 것 같다?"
"무슨 착각? 니가 나 좋아한다는 거?"
"... 그런 거 좀 크게 말하지 마라. 너 이런 성격이었냐?"
내 시선을 느낀 배소연이 투덜거리는데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난 이 세계에서 어떤 성격이었던 거지?
"내가 원래 어땠는데?"
"조용하고... 그랬는데 그걸 내가 답하는 게 웃기지 않아? 뭔 소리하는 거야?"
그렇게 답하며 배소연은 벌떡 일어나 일진 친구들 쪽으로 가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조용하고 그랬다라.
추측을 해보면 말이지.
원래 세계에서도 나는 조용한 편이었으니까 여기서도 조용한 게 맞긴 해.
이미진 같은 경우 원래 세계에서도 정조관념이 옅은 여자였을 것 같고.
장현정은 당차지만 순수한 면이 있는 여자애겠지.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핸드폰으로 문자가 왔다.
이미진이었다.
[이미진 : 지후나아아아아앙~ 학교야? ㅋㅋㅋ]
정말 어떤 의미로는 대단한 여자였다.
태어나서 처음 본 진성 사이코랄까. 뭐. 밉상은 아니었지만...
솔직히 이미진과 나는 악연이라면 악연이다.
노예계약서 쓰라며 협박하고, 우는 남자애를 가지고 논 여자.
그 남자애는 복수랍시고 발가벗겨서 자동차 시트에 여자를 묶어 놨다.
사이가 좋을 수가 없는데 말이지.
[김지훈 : 왜요?]
[이미진 : 어유~ 우리 지훈이 시크하기도 하지. 도도해 아주? 응? ㅋㅋㅋ]
[김지훈 : ㅇㅇ]
[이미진 : 오늘 끝나고 뭐해~? 누나랑 놀래?]
[김지훈 : 누드 모델이야기에요?]
[이미진 : 응. 누나가 너를 벗기고 싶어.]
[김지훈 : 그런 섹드립도 제가 기분 나쁘면 성추행인 거 아시죠?]
[이미진 : ㅋㅋ 알써 알써. 우리 지후니 그런 까칠한 것도 매력이징]
[김지훈 : 제가 언제부터 누나의 지훈이였는데요?]
[이미진 : 아니면 내가 니 꺼 할까?]
[김지훈 : 고소]
[이미진 : 알았다~ 알았어~ 저녁에 시간 되니?]
[김지훈 : 네]
짧게 답을 하는데 갑자기 스마트폰 액정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누구야? 여자야?"
배소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