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처형이 될 뻔했던 (1)
“그 이유 때문에 이사하겠단 거야.”
“그러니 그게 무슨 뜻이냐니까?”
“우리가 같이 집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가 뭐야? 혹시 원룸에 사는 사람들이 아빠하고 우리 관계를 눈치를 채게 될까 봐 걱정되어서잖아. 이런 게 싫어.”
무슨 말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 역시 그 걱정 때문에 셋을 먼저 들어가게 하고, 나는 바깥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따로 들어가겠다고 한 것이었으니까.
물론 이해를 한다고 해서, 이사 말고 딱히 방법도 없다.
대한민국이 이슬람 국가처럼 일부다처제가 합법화되었거나 용인되는 나라가 아니니, 우리 네 사람의 관계가 알려지게 되면 주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그 손가락질 받음의 대상은 지혜를 비롯한 세 아이에게 집중될 터였다.
“알았어. 며칠 생각 좀 해보자.”
아이들에게 피해가 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그걸 무시하고 지금처럼 지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게 세 아이를 먼저 집으로 돌려보내고, 나는 연산동 쪽으로 차를 몰았다.
처음에는 오피스텔을 찾아볼까 했지만 막상 오피스텔 몇 군데를 둘러본 결과, 오피스텔 대부분이 중앙대로에 인접해 있는 탓에 잠을 잘 때도 시끄럽기도 하고 불빛에 잠을 설칠 것 같았다.
결국 나는 가게가 있는 온천장이나 시내를 오가기에 그다지 불편하지 않은, 신리삼거리 쪽의 신축 아파트로 향했다.
어차피 아파트 가격이야 알고 있는 것이었고, 지난번 모델하우스를 오픈했을 당시에 구석구석 둘러봤던 적이 있었기에 결정하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이 아파트의 가장 큰 단점이라면,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는 버스를 한번 갈아타야 한다는 점과 밤에 버스에서 내려서 아파트 입구까지 걸어오는 도로가 너무 한산하다는 점이었다.
“예, 자경 부동산입니다.”
“이 소장님, 저 김주경이라고 해요.”
“아, 예. 기억납니다. 지난달인가 사무실을 찾아 오셨지요?”
“맞아요. 그런데 오늘도 사무실에 계시질 않으시네요?”
몇 달 전 아이들과 함께 경주를 다녀왔을 때 내 사무실을 방문했다던, 연산동에서 부동산중개인사무실을 한다고 했던 그 양반으로부터 전화였다.
참 이 양반과도 희한한 인연이다 싶었다.
나는 이 양반의 사무실이 있는 연산동에, 그리고 이 양반은 내 사무실이 있는 온천장에 있으니 말이다.
결국 내가 이 양반 사무실이 있다는 연산 5동 쪽에서 기다렸다가 만나보기로 했다.
“어머, 벌써 와 계셨어요?”
“아~ 김 소장님. 그냥 마땅히 가 있을 만한 곳도 없어서요.”
간판만 아니라면 겉으로 보기엔 부동산중개인사무소로 보기 힘들 정도의 분위기였다.
아니 위치 또한 부동산중개인사무소를 하기에는 별로 적당하지 않은 주택가 골목 안에 있는, 널찍한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 1층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창 넘어 보이는 내부도 오밀조밀하니, 마치 주부들을 대상으로 하는 퀼트니 수제비누 만들기니 하는, 그런 종류의 교습소 분위기였다.
그렇게 바깥에서 사무실 분위기를 구경하면서 빙긋이 미소를 짓고 있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우선 들어가세요.”
“예, 잠깐만요.”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나는 차의 뒷문을 열고, 조금 전 마트에서 사서 온 믹서 커피와 휴지를 들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뭘 이런 것까지.”
“어차피 오래 두고 쓰실 수 있는 거잖습니까.”
의례적인 겸양의 인사를 마치고 우린 커피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이 소장님께선 절 전혀 기억하지 못하시는 것 같으시네요.”
“예?”
“제가 누군지 모르시겠죠?”
“협회 모임에서?”
“아뇨. 개인적으로 우린 인연이 있어요.”
정말 뜬금없는 소리였다.
협회 모임에서 만난 기억조차 없는 사람과 내가, 어떻게 개인적인 인연이 있다는 말인가?
나는 김 소장의 말에 그동안 내가 알고 지냈던 여자들뿐 아니라, 이따금 즐기기 위해 만났었던 여자들 기억까지 돌이켜 봤지만, 도저히 내 앞에 앉아 있는 김 소장과 매치를 시킬 수 있는 여자를 찾지 못했다.
“김수진.”
“예?”
김수경 소장의 입에서 김수진이란 이름이 튀어나오는 순간, 내 눈에선 내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어떻게 김수진이란 이름을 내가 잊을 수 있겠는가?
그러고 보니 김수경 소장의 얼굴에서 옛 흔적이 조금씩 보이는 듯하다.
내가 수진이와 사귀고 있을 당시에 동아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없어진 지역 신문사 시험에 합격해서 문화부 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많이 놀라신 모양이네요.”
“그러게요. 수진인 잘 지냅니까?”
“지난번 제가 소장님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그때 수진이가 귀국해 있었어요. 아버지가 그때 돌아가셨거든요.”
“기억합니다. 그때 제가 일이 있어서 경주를 다녀와야 해서, 박 소장에게 대신 부의(賻儀)를 부탁했었으니까요.”
“봉투에 적힌 이름 때문에 혹시나 했던 겁니다. 이름을 확인하고 협회 수첩을 확인하고 우리도 이 소장님이 그때의 이진호 씨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거든요.”
개인적인 인연이 분명했다.
내 앞에 앉아 있는 김수경 소장이 다른누구도 아닌 내 첫사랑이었던 수진이 언니였고, 그때 그 문제만 아니었더라면 수진인 나와 결혼해서 살고 있었을 것이고, 눈앞의 김수경 소장에게 처형이라고 부르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선배, 우리 헤어져.”
“뭐라고?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헤어지자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만나자고 하고서 뜬금없이 헤어지자니.”
내 20대 어느 가을날, 3년을 사귀고 있었던 수진이로부터 이별통보를 받았다.
그리고 그렇게 이별통보를 받고 채 반년도 지나지 않아, 수진이 결혼소식을 듣게 되었다.
“정말이야?”
“예, 선배. 그것 때문에 수진이 엄청 울었어요.”
“그때 왜 나한테 말을 하지않았다고 해?”
“그런 일은 어떻게 이야길 해요? 다른 일도 아니고.......”
그날 이후에 처음으로 수진이 소식을 듣게 된 것은, 같은 과 친구인 진주에게 들은 수진이가 이혼하게 되었고 이혼을 한 후에, 미국으로 갔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예전에 수진이가 뜬금없게 내게 이별통보를 하게 된 이유가, 졸업여행을 가서 그곳 나이트클럽에서 함께 어울렸던 상대 남학생에게 술이 떡이 된 상태에서 강간을 당했고, 그 사내놈이 바로 수진이의 남편이란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수진이가 결별을 통보할 만했다.
사귀던 3년 동안 수차례 같이 자자고 강요에 가까울 정도로 내가 꼬드겼지만, 수진이 대답은 항상 ‘우리가 결혼한 첫날밤에 선물할 거야.’라고 했던 친구였으니까.
“그런데 이혼은 왜 했다고 해?”
“남편이 박사학위를 받던 날, 대놓고 제 애인을 데리고 박사학위 수여식장에 갔었거든.”
“뭐?”
“뭐긴 뭐야. 화려하게 복수한 거지.”
“복수?”
“응. 수진이가 그날 이랬대. ‘당신이 가장 높이 날아오르는 순간, 파멸시키기 위해서 참고 기다렸다.’라고.”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나하고 결혼해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던 수진이가 강제로 처녀를 빼앗기고 어쩔 수 없이 그놈과 결혼을 했지만, 미래를 빼앗긴 것에 대한 분노를 그동안 꾹 참고 지내면서, 그놈이 박사학위를 받는 순간까지 기다렸다가 개망신을 준 모양이었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 중에서 경제 관료로 활약하려는 사람에게, 세계적으로도 이름 있는 스탠퍼드 대학의 경제학박사라는 이력은 일종의 권력이 될 수가 있다.
그러니 스탠퍼드대학에서 경제학박사 과정을 무사히 이수한 후에 학위를 수여받는다는 것은, 그 집안 전체의 경사일 수가 있다.
당시 듣기로 수진이 남편이란 작자의 집안이 나름 알아주면서도 제법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집안이라고 들었고, 자식이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으니 집안의 경사였을 것이고, 웬만한 친인척은 모두 미국으로 날아갔을 것이다.
그런 자리에서 식구뿐 아니라 졸업식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까지 있는 장소에서 개망신을 당했으니, 이혼은 당연했을 것이다.
“소장님.”
“아, 예.”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요?”
“갑자기 예전 생각이 나서요.”
“괜히 헛된 생각은 하지 마세요. 수진이 성격 알잖아요?”
무슨 뜻인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10년도 넘게 흐른 지금에 와서, 내게 수진이에 대한 미련은 남지 않았다.
“그런데 예전에 신문사에 근무하셨잖아요?”
“신문사 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IMF가왔잖아요. 그러다가 보니 마냥 집에서 놀 수도 없고 해서 이 일을 시작했던 거죠.”
어찌 생각하면 이 양반도 대단한 양반이다.
그래도 명색이 지역 일간지의 기자까지 한 사람인데, 여자의 몸으로 부동산중개업을 하려고 하다니 말이다.
“모친께서는 건강하시고요?”
“예, 아직은 정정하세요. 그러지 않아도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무슨 말인지 대충 이해가 되었다.
수진이와 결혼하겠다고 다짜고짜 집으로 쳐들어가서 처음 얼굴을 뵌 후에, 아버님과 됫병 소주를 앞에 두고 권커니 잣거니 하면서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떼를 쓰다가, 결국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뻗어버렸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이튿날 아침에 잠에서 깬 내가 낯선 풍경에 얼떨떨해하고 있을 때, 꿀물을 가져오셔서 ‘쭉 들이켜. 그럼 속이 좀 가라앉을 테니까.’라고 하시던 어머님 모습이 말이다.
“그럼 어머님은 아직 광안동에 그대로 사세요?”
“거기 재개발되었잖아요. 지금 제가 모시고 있어요.”
“그러시구나. 언제 어머님을 한번 뵐 수 있을까요? 저도 뵙고 싶었는데.”
“정말이요? 엄마가 진호 씨에게 많이 미안해하셨는데. 지난번 그 봉투의 주인이 진호 씨란 것을 아시고는........”
“예, 아직 처음 집을 찾아갔던 날 기억이 생생하고, 어머니께서 타주셨던 꿀물 생각만 해도 속이 편안한 느낌이거든요.”
“알았어요.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엄마께 여쭤보고요.”
내 앞에서 전화하기에불편한 것인지, 김 소장은 나를 사무실에 혼자 남겨두고 사무실을 나갔다.
김 소장이 자리를 비운 후 나는 딱히 할 일도 없어 테이블 위의 잡지를 집어 들었고,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인지 그 잡지를 한 권 다 볼 때까지도 김 소장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드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조금 전 전화를 걸기 위해 김 소장이 나갔던 옆문이 열렸고, 고개를 돌려본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몸이 굳어 버렸다.
“어머님!”
비록 머리엔 흰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보였지만, 정말 십여 년 전의 청초했던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신 수진이 어머니가 그 자리에 서 계셨다.
“이게 몇 년 만인가? 그동안 잘 지내셨나?”
“예, 어머니. 건강하시지요?”
“그래, 자네도 보다시피 아직은 건강하이. 내 발로 걸어 다닐 수 있을 때 죽어야 하는데.......”
“이렇게 정정하신데,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앞으로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셔야죠.”
“아무튼 자넬 보니, 그 어리석은 년이........”
“에이~ 어머니도. 그게 벌써 언제 일인데요.”
“그러게 말일세. 그런데 애는 몇이나 되나?”
“애라니요?”
“자식 말일세.”
“아직........”
하긴 나이가 든 어른들이 오랜만에 만나게 되면 항상 물어보시는 질문이었다.
내가 대답을 망설이자 수진이 어머니께서는 내심 안타까운 표정이셨고, 그런 수진이 어머니 분위기는 정말 예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으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