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1화 〉지민이와 수민이 (71/90)



〈 71화 〉지민이와 수민이

“어, 자기 어디야?”
“아파트 입구니까 아이들 데리고 내려와.”
“그냥 올라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러니 그냥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아이들 데리고 내려와.”

아무리 양 여사의 아이들이 그렇게 하자고 했다고 하더라도, 버젓이 남편이 존재하고 또 지역의 기초의원이니 아파트 주민들 대부분이  것인데 차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자꾸 올라오라고 하는 양 여사의 의견을 애써 무시하고, 아파트 입구에서 그들 모녀가 내려오길 기다렸다.

“어서 와.”
“안녕하세요.”
“그래, 우선 빨리 타요.”

 여사가 조수석에 타게 하고 딸 아이 둘은 뒷자리에 태웠다.

“해운대 쪽으로 넘어갔다가 와도 시간 괜찮겠어?”
“애들 내일은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니  늦어도 괜찮아. 아니면 하룻밤 자고와도 괜찮고.”
“쓸데없는 소리. 우리 아가씨들 어디 가보고 싶은  있어요?”
“센텀시티 M 하우스요.”
“아뇨.  경주 가고 싶어요.”

뜻밖에 두 아이의 목소리가 밝았다.

아무리말로는 그렇게 이야기했다고 하더라도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기분이 좋지 않아야 정상일 것인데, 하나는 중학생쯤 되어 보이고 한 아이는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 둘이 보이는 반응이 사뭇 의외였다.

정말  여사가 말했던 것처럼 제 아비에 대해선 완벽히 포기한 것인지 말이다.

“경주에 가고 싶은 특별한이유라도 있어요?”
“안압지 야경을 직접 보고 싶어서요. 그런데 아저씨 우리 엄마 애인이라면서요? 그런데 왜 우리한테 계속 존댓말을 하세요?”
“우리 꼬마 숙녀님들을 오늘 처음 보는데 처음부터 어떻게 말은 놓아요. 그런데 좀 많이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지금 출발해서 경주 도착하면, 안압지 폐장시간인데 어쩌죠?”
“그럼 보문호수 구경을 가면  돼요?”
“지민아, 그만. 여기서 경주까지 가려면 시간이 얼만데. 아저씨 많이 피곤해.”

큰아이 이름이 지민이인가보다.

그런데 큰아이의 의견도 좋지만 중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가보고 싶다던 의견도 무시할 수가 없다.

“경주라고 해봐야 40분이면 되는데 뭘. 그런데 동생 생각은 어때?”
“저도 경주는 가보고 싶어요. M 하우스는 친구 하고 가도 되고요.”

동생까지 경주를 이야기하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기에, 나는 바로 고속도를 향해 출발했다.

안압지 폐장시간이 10시이니 9시 반까지는 입장이 가능할 것이고, 지금 서두르면 마지막 입장 시간까지는 도착할 수도 있을  같았다.

“자기 뭐하려고 이렇게 속도를 내?”
“지금 100에서 110사이야. 앞에 차도 없고, 다른 차들은 나보다 더 빨리 달리고 있는데?”

같은 속도여도 내가 서두르는 느낌에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난 주차하고 따라 들어갈 테니까, 빨리 표를 끊어서 먼저 들어가서 구경하고 있어.”

관람을 마치고 빠져나가는 차들이 많았기에, 나는 안압지 입구 쪽에 비상등을 켜고 잠시 차를 정차한 후에 양 여사와 아이들을 먼저 내리게 했다.

그리고 나오는 차들을 피해 겨우 주차를 마친 후에 입구로 달려가, 안에 일행이 있다고 사정했지만 이미 입장시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입장이 불가능하다는 말만 들었다.

“자긴 어디야?”
“입구인데 여기 관리인 아저씨가 워낙 빡빡해서 입장이  된다네. 그러니 애들 데리고 천천히 구경도 하고 사진도 찍으면서 놀다가 나와.”
“힝~ 그럼 어떻게 해?”
“알라도 아니고. 그냥 난 차에서 기다릴 테니까 편하게 구경하고 나오라고. 이제 겨우 30분 남았다.”

사실 굳이 내가 따라 들어갈 이유도 없었다.

아이들이 아까 차에서 셀카봉 어떠니 하면서 이야기를 한 것을 보면 사진을 찍을  누가 필요할 일도 없을 것이고, 관리인이 상주하는 관광지에다가 아직 관람 중인 많은 사람이 제법 많으니 사고가 일어날 일도 딱히 없을 테니 말이다.

주차장에 남은 차들이 얼마 남지 않았을 즈음  여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자기 어디쯤 있어?”
“나오고 있어?”
“응, 입구에서 주차장 쪽으로 가려고.”
“그럼그냥 입구에 서 있어. 내가 바로 그리로 갈 테니까.”

아까 이곳경주로 오는 도중에도 표정들이 밝았지만, 안압지 구경을 마치고  아이들은 잔뜩 흥분한 기색으로 목소리조차 변해 있었다.

“아저씨.”
“응?”
“오늘 보문단지 야경 구경하고, 여기서 자고 가면 안 돼요?”
“그러고 싶으면 그러지. 우리 예쁜 꼬마 숙녀들께서 원하시는데 그렇게 해야죠.”
“자기야,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괜찮아.”
“어차피 나도 바쁜 일 없잖아.”

아이들이 낯을 가리지도 않고 적응력이 빠른 것인지 몰라도, 생판 처음 보는 그것도 보통의 경우에는 잔뜩 경계하고 꺼려야  자기 엄마의 애인이란 작자에게,  거리낌도 없이 다가서고 있었다.

그리고 이왕 이렇게 밤에 경주까지 왔으니, 오랜만에 경주 보문호수 야경을 구경하고 가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여긴 보문단지로 가는 길이 아니잖아요?”
“여기까지 왔으니 우리 꼬마숙녀들이 좋아할 만한 곳 두어 군데만 차로 보고 지나자고.”
“어디를요?”
“밤에 조명을 받은 첨성대도 예쁘고, 전포동에 있는 카페촌처럼 여기 경주에도 황리단 길이라는 곳이 있거든.”

솔직히 서울 경리단길을 본떠서 전국 곳곳에 아류들이 많이 퍼져 있는 것으로 안다.

나야 굳이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니 뭐니 하는 이유가 아니더라도 그런 류의 몰개성한 장소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감수성이 예민한 여자아이들은 생각이 다를 수도 있을 것이기에 거길 보여주고 가려는 것이다.

단지 이 아이들이 이곳 경주에 그런 장소가 있다는 것을 몰라 보문호수 구경을 가자고 하는 것일 뿐.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은 황리단길이라고 이름 붙여진 그곳에 도착하자 아이들은, 연신 차창 밖을 내다보면서 ‘와~저기 예쁘다.’ ‘저곳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 좋겠다.’라는 등 수다가 끊이지 않았다.

“우리 아가씨들 어떻게 할 거야? 그냥 바로 보문단지로넘어갈까? 아니면 여기서 커피라도 마시고 갈까?”
“커피 마셔도 돼요?”
“어차피 오늘 주빈(主賓)은 두 꼬마 숙녀님인걸.”
“좋아요. 우리 저 가게로 가서커피 마셔요.”

별 특별하지도 않은 가게였지만 아이들 눈에는 예쁘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케이크는?”
“힝~ 밤에 케이크 먹으면 살찌는데.......”
“그럼 말고.”
“치! 그렇게 냉정하게요?”
“아가씨들이 가장 고민하는 것이 살찌는 거잖아. 그것 때문에 망설이는데 자꾸 권하면 내가 나쁜 놈 되잖아.”
“전 이거요.”
“저는 여기 호두 박힌 것으로 주세요.”

이렇게 귀여운 아이들을 두고, 양 여사 남편은 어떻게 바람을 피울 생각을 한 것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와! 맛있겠다.”

주문을 마치고 테이블에 돌아와서 잠시 앉아 있으니 벨이 울렸고, 커피와 케이크를 가지고 돌아오자 아이 둘은 잔뜩 흥분해서 환호성을 질렀다.

“자기도 맛이나 봐.”
“됐어. 케이크 종류는 별 좋아하지도 않고, 한  거리도 안 되는 걸 가지고......”
“얘들 이거  먹으면 살찐단 말이야.”
“먹은 만큼 운동을 더 하면 되지. 아무튼 여자들은 왜 하나같이 살에 그렇게 예민한 것인지?”
“그럼 자긴 날씬한 여자가  좋아?”
“아예 관리를 하지 않아서 펑퍼짐하단 소릴 들을 정도가 아니라면 외모가 딱히 중요해?”
“치!”
“아저씨.”
“응?”
“우리 엄마 아저씨에게 예쁘게 보여야 한다고, 그제 필라테스에 등록도 했어요.”

정말 애들에게 별 이야기를 다 하고 산다 싶었다.

그리고 일반적인 경우라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특히 여자아이들 같은 경우엔 나란 존재에 대해 적의(敵意)를 품는 것이 보통인데, 두 아이의 말과 행동을 보면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심지어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지민이란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은근히  엄마와 나 사이의 관계를 응원하는 분위기이다.

“너흰 내가 밉지 않아?”
“왜 미워요?”
“왜 미울 수 있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너희가 잘 알잖아.”
“우리가 무슨 아무것도 모르는 아인 줄 아세요. 저희도   다 알아요. 그러니 아저씨도 괜히 부끄러워하고 그러지 마세요.”
“맞아요. 난 아빠하고 이렇게 놀러  본 적이  번도 없었거든요. 매일 바쁘다고 하더니 다른 여자나 만나러 나가고. 언니 맞지?”
“수민이 말이 맞아요. 아빠라기보다는 그냥 미친놈이 정답이죠. 그것도 섹스에 미친놈.”
“지민아!”

고등학생 입에서 섹스란 단어가 스스럼없이 튀어나왔고, 순간 나는 주변에 사람이 없나 그것부터 살폈다.

그리고 양 여사 역시 지민이 말에 깜짝 놀라서 지민일 불렀다.

“자기 미안해. 우리애들이 좀 그렇지.......”
“뭐 요즘 시대에 성격이 좀 강해야 피해를 보지 않고  수가 있으니. 할 말은 하고 살아야 해.”
“맞아요. 착한 척하면 오히려 이용하려고만 들고 호구 잡히거든요.”

아무튼 아이들은 저희 아버지를 아예 아빠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고, 또  여사가 아이들에 대해서 했던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람을 피우는 것은 같은 상황이지만 아빠란 자가 먼저 자식까지 있는 가운데서 여자를 만나러 나가는 것을 보고, 그런 아빠에 대한 반발로 엄마에게 맞바람을 피울 것을 권하는 그런 모양새였다.

아무튼 아이들 생각을 알고 나니 아이들 대하기도 한결 편해졌고, 덕분에 우리가 앉은 테이블의 분위기도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저씨는  결혼을 안 했어요?”
“구속받기 싫어서.”
“그럼 엄마 말고도 애인이 있어요?”
“있었겠지.”
“치!”

‘그래, 네 엄마 말고도 너희 언니뻘 되는 친구도 셋이나 있고, 너희 엄마하고 비슷한 나이도 있다.’ 그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해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조금 양심이 찔리긴 했지만 그렇게 대충 얼버무렸더니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다.

“자기야, 이제 일어나자.”
“그럴까? 너흰 어떻게 하고 싶어. 여기서 나가서 보문호수 구경이나 좀 할래? 아니면 여기서 조금 더 있을까?”
“보문단지 가서 우리 산책해요.”

나가자는 의견이었기에 우린 커피숍을 나와 보문단지를 향해 출발했다.

“자기야, 나 화장실 좀.”
“엄마, 나도.”

양 여사와 동생 수민이가 화장실에 가자 지민이가 슬며시 내게로 다가섰다.

“아저씨.”
“응?”
“우리 엄마 엄청 밝히죠?”
“뭐?”
“뭐 어때요. 나도 엄마를 닮았는지 비슷한 체질인데.”
“......”

순간 할 말이 없었다.

아무리 요즘 아이들이 발랑 까졌다고 할 정도로 개방적이라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 엄마의 애인이라는 사내에게 이런 말까지 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무튼 엄마 감당하시려면 운동도열심히 하고, 보약도 챙겨 드셔야 해요.”
“하~아~”
“우리 나이 애들  거 다 알거든요. 그러니 그렇게 한숨쉬지 않으셔도 돼요.”

그렇게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듣는데 화장실서 양 여사가 나오기에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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