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여행지에서 생긴 일 (1)
한참을 차 안에서 기다려도 정 사장님으로부터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혹시나 하는 걱정을 안고 사무실로 돌아갔지만, 정 사장님은 사무실에 있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봐야 하나 하는 생각도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 양반이 내 전화를 받을 생각은 전혀 없을 것이고 또 만약 내가 걱정 때문에 전화를 건다면, 오히려 그 양반의 화를 돋우는 일이 될 것이었다.
“뭐? 짐을 빼 오라고? 무슨 야반도주라도 하려는 것이야?”
“그러게. 아무튼부탁 좀 하자.”
소송이야 어찌 되든지 간에 우선 짐부터 빼기로 하고, 박 사장에게 부탁했다.
지금은 정 사장님 부부가 정신이 없을 때고, 이럴 때 짐을 빼야지 아니면 소송결과와 무관하게 나중에 짐을 빼려고 하다가 얼굴을 맞대게 되면, 서로 기분 좋을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옷장에 든 것은 모두 빼냈는데 컴퓨터는 원래 있던 거야 아니면 당신 거야?”
“전자제품은 컴퓨터 하고 레인지는 가지고 나와야 해. 그건 내가 사서 가지고 들어간 거거든. 그리고 비밀번호 초기화시켜두고 키는 책상 위에 두고 나오면 돼.”
그렇게 박 사장에게 부탁해서 원룸에 있던 내 살림살이를 모두 사무실로 옮겼다.
‘형님, 방 비웠습니다. 그리고 비밀번호는 초기화시켜두고 키는 책상 위에 뒀습니다.’
그렇게 정 사장님에게 톡을 보내는 것으로, 정 사장님 원룸에서의 생활은 완벽히 정리되었다.
물론 이런 와중에 보증금 어쩌고 하는 짓은 미친 짓이었기에, 보증금 500은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러게. 나도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정 사장님하고 좋았잖아?”
“좋았지.”
“그런데 무슨 빚쟁이 야반도주 하듯이 짐을 빼고 그래?”
“말 못 할 사정이 있었다.”
“혹시 당신.......”
“됐어. 거기까지만.”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하더니 바로 그 짝일세.”
“그 정도만 하라니까.”
박 소장이잔뜩 신이 나 있었다.
하긴 이런 불륜 사건이나 성에 관련된 이야기는, 당사자야 죽을 맛이지만 제삼자들에겐 이런 이야기만큼 재미있는 이야기가 어디 있겠는가?
그냥 적당히 놀리고 말다가 자기 사무실로 돌아가기만 기다리면서 나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정 사장님이 안 거야?”
“그래, 자기 남편에게 실토한 것인지 아니면 고백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게무슨 말이야? 정 사장님이 알았다면 당신을 찾아왔을 거잖아.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어?”
“모르지.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 그건 그 양반 맘이지. 그냥 와서 확인만 하고 갔으니까.”
“하긴 요즘이야 괜히 주먹질이라도 하게 되면 오히려 뒤집어쓸 일까지 생기니.......”
“남이 곤란해 하니까 그렇게 재미가 있어?”
“재미있어서 이러는 것이 아니라 이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납작 엎드려서 합의금이라도 깎으란 말이지.”
“아무튼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박 소장 당신은 가서 당신 일이나 봐.”
그렇게 박 소장을 쫓아 보냈다.
박 소장은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머뭇거렸지만, 솔직히 지금 내 머리가 복잡한 탓에 박 소장의 말을 받아줄 여유도 없었고, 또 장난처럼 이야기하는 박 소장 태도도 못마땅했다.
그렇게 박 소장을 쫓아 보내고 나서 고민을 계속했지만, 딱히 지금 상황을 반전시킬 만한 묘책은 없었다.
이유가 어찌 되고 그 전개과정이 어떻게 되었든지, 내가 정 사장님의 부부생활에 지장은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기에, 부부관계 파탄에 대한 책임은 마땅히 져야 한다.
소송까지 가서 재판정에 출석해 남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을 당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손해배상금으로 결정될 배상액 3,000만 원 정도를 배상 대신에 합의금으로 지급하는 것에서 끝을 낼 수 있을까 하고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소를 제기할 정 사장님이 아까 내가 보낸 톡조차 확인하지 않고, 또 나를 상대로 죽이느니 살리느니 하면서 난리를 쳐야 하는 것이 정상임에도, 언성조차 높이지 않고 사라진 상태이다.
그렇게 불안하고 초조한 상황에서 시간이 흘러 주말이 다가왔다.
‘아이고, 죽이든 살리든 알아서 하겠지.’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 가득했고, 만약 ‘소송을 제기한다면 개망신을 당하지.’라는 생각을 하니 차라리 속이 편했다.
- 개인적인 사정으로 월요일까지는 휴무합니다. -
사무실 입구에 A4 용지에 영업을 쉰다는 안내문을 붙이고 사무실을 나섰다.
“아빠!”
“준비는 대충 되어가?”
“예. 끝났어요. 아빤 지금 어디쯤?”
“응. 원룸 입구야.”
“알았어요. 바로 내려갈게요.”
내 속이야 어떻든지 정 사장님 부부와 관련된 일이 터지기 전에 약속했던, 지혜와 안동 쪽으로 여행을 가는 일 때문에 지혜를 태우기 위해 온 것이다.
“아빠!”
“응, 천천히 나와도 되는데. 여기 지난번에 얘기한 내 친구 효주.”
“안녕하세요. 박효주라고 합니다.”
“예. 어서 타요.”
일단 두 사람의 가방을 트렁크에 싣고 둘을 차에 타게 했다.
“친구 하고 뒤에 타는 것이 편하지 않아?”
“아빠 옆에 앉고 싶은데.”
“친구가 심심하잖아.”
지혜가 뒷자리가 아닌 조수석에 타려고 하기에 지혜에게 뒷자리에 앉게 하려니, 그때 친구인 효주란 여자아이 입에서 전혀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아저씨 전 괜찮아요. 효주가 아저씨 사랑하는 거 이미 알고 있거든요.”
“예?”
“효주하고 저하고 비밀 없어요. 그러니 전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돼요.”
순간 나는 당황스러움에 얼굴이 달아오른다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성적으로 개방되어 자유분방하다고 하지만, 지혜와 나 사이의 관계가 그렇게 자연스러운 일도 아니고 또 지혜가 요즘 젊은 친구들처럼 발랑 까진 아이도 아닌, 분명 나와 관계를 한 것이 첫 경험인데도 어떻게 그런 이야기까지 친구에게 한 것인지 의아하면서도 당황스러웠다.
‘험’ ‘험’
내가 당황스러움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음에도, 지혜는 부끄러운 기색 하나 없이 조수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맸고, 나는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출발!”
지혜는 잔뜩 들떠서 신나했다.
“아빠”
“응?”
“아빤 하고 싶지 않았어?”
“응? 뭐라고?”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아빤 그동안 나하고 하고 싶지 않았냐고 묻는데.”
“인마!”
“치! 그동안 다른 여자하고 했구나. 하고 싶으면 나한테 이야기하라고 했었는데.”
“지혜야. 친구도 있는데.......”
“효주도 알 건 다 알거든. 남자친구도 있었고.”
이건 대담한 것이 아니라 아예 아무 생각도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둘 사이에 비밀이 없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또래 남자친구와의 그것도 아닌데, 이렇게 대놓고 이야기할 그런 성질의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우리 아저씨, 되게 부끄러움이 많으신가 보다.”
“예? 아, 예.”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저도 지혜하고 나이가 같잖아요.”
“예. 천천히 할게요.”
“저도 아빠라고 하면 안 돼요?”
“예?”
“저도 아빠가 계시지 않거든요. 그래서 지혜 이야길 듣고 많이 부러웠어요.”
“그럼 창원 집에는 엄마만 계세요?”
“예. 남동생 하나하고 둘이 살고 계세요. 저도 아빠라고 해도 되죠?”
“그게 편하다면.......”
뭔가 내가 놀림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없다면서 지혜처럼 나를 아빠로 부르겠다는 친구에게, 냉정하게 그건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었기에, 말을 얼버무리면서 그러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대동 IC를 통과해서 한참을 달린 끝에, 청도휴게소에 도착하게 되었다.
“화장실 다녀와. 그리고 먹고 싶은 것 있으면 사오고.”
“아빤?”
휴게소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지혜에게 내 카드를 건네고는 둘에게 화장실을 다녀오라고 했지만, 지혜는 나는 어떻게 하겠느냐면서 내 얼굴을빤히 쳐다보았다.
“그럼 나도 아빠하고 차에 있을래. 효주 넌 화장실 갔다가 감자하고 떡볶이를 좀 사 오든지.”
“알았어.”
“지혜 넌 화장실 가지 않아도 괜찮아? 앞으로 1시간 반은 가야지 화장실 있는데?”
“아까 집에서 화장실 다녀왔어요.”
결국 지혜는 효주만 화장실로 보내고 차에 남아 있게 되었다.
“인마, 넌 친구에게 그런 이야기까지 하면 어떻게 해?”
“그게 뭐 어때서요. 효주 쟤는 지 남자친구하고 어떤 자세로 하는지 그런 이야기까지 다 해주는데.”
“남자친구하고 아빠하고는 다르잖아.”
“에이~ 괜찮아요. 효주에게 남자친구가 있었던 것처럼, 나한테는 아빠가 남자친구인데요.”
“효주가 아빠 욕은 하지 않았어?”
“아빠 욕을 왜 해? 효주는 오히려 내가 부럽다고 하던데.”
“어지간히도 부러울 것도 많다. 다 늙은 아저씨하고 그러는 것이 부럽긴왜 부러워.”
“아빠도 되고 또 남자친구도 되니까 이거야말로 일석이조잖아.”
별 해괴한 논리도 다 있다 싶었지만 이미 지혜와 그런 사이가 되었으니, 딱히 지혜의 그 말에 그건 다른 것이라고 반박할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효주 쟤 괜히 데리고 왔다.”
“갑자기 왜?”
“효주 쟤 때문에 아빠 걸 만지고 싶은데도 못 만지잖아.”
갈수록 태산이라는 말이 이럴 때는 쓰는 말이 아닐까 싶다.
물론 지혜가 아닌 다른 나이가 좀 있는 여자가 이런 말을 한다면, 이 말이 오히려 반가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은근히 기대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이제 20대 초반의 정말 내가 일찍 결혼이라도 했다면 딸 같은 나이의 지혜가 이런 말을 하니 오히려 부담되었다.
그런데 ‘중이 고기 맛을 보면, 절에 빈대가 남아나지 않는다.’란 말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효주란 친구는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후 차로 돌아왔다.
“겨우 이것만 사 왔어? 이걸 누구 입에 붙이려고?”
“네가 감자튀김하고 떡볶이만 사 오라고 했잖아.”
효주는 지혜가 이야기한 감자튀김 한 통 하고 떡볶이 1인분만 사서 왔다.
아무리 여자아이들이지만 둘이 나눠 먹기에도 부족할 정도의 양이었기에, 나는 효주가 건넨 카드를 들고 차 문을 열었다.
“아빤 여기서 저거 먹고 있어. 내가 가서 사올게.”
“됐어. 그냥 내가 갔다 올게.”
“그냥 아빤 여기 있으라니까.”
그러더니 지혜는 카드조차 받지 않고 휴게소 매점 쪽으로 달려갔다.
“아빠, 좋았어요?”
“뭐가요?”
“지혜하고 할 때 좋았느냐고요.”
“그런 걸 어떻게......”
“그게 뭐가 어때서요. 사랑하니까 섹스를 하고, 그렇게 사랑해서 섹스하면 당연히 좋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말이야 맞는 말이긴 하지만, 지혜나 효주란 이 친구의 말은 내가 감당해내기엔 정말 힘들단 생각이 든다.
남자인 나도 저 나이 때는 친구들끼리 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되면, 남자끼리라도 은근히 부끄러워서 얼굴이 벌게지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말이다.
“나도 아빠 같은 분이 한 분 있으면 좋겠다.”
“예?”
“아빠 같은 사람이, 나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요.”
대담함을 넘어선, 정말 나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말이 망설이는 법도 없이 튀어나오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효주란 친구는 무언가 갈구하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