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자경이 (3)
“어딜 가려고?”
“이제 배도 채웠으니 커피나 마시러 가야지.”
“오빠, 술 마셨잖아?”
“봐라. 1/5도 마시지 않았거든.”
“어! 정말이네? 그럼 지수하고 내가 한 병을 다 마셨단 말이네?”
“겨우 한 병을 둘이 나눠 마시고서는 놀라기는.”
“아냐. 몇 년 동안 술을 마신 적이 거의 손에 꼽을 정도였어. 이상하게 술이 받질 않더라고.”
분위기가 술을 들어가게 만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지수와 자경인 내가 잔을 비웠는지 아닌지조차 모르고, 둘이서만 신나게 마셨던 것이고.
그런데 예전 한적했던것과 달리 주변을 공원화한 덕분에, 예전에 왔을 때보다는 분위기가 영 아니란 생각이다.
아무튼 회로 배를 채웠으니 이제 분위기 괜찮은 곳으로 가서 차를 마시면서,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야 할 시간이었다.
“그런데 우리 때문에 이렇게 사무실을 비워도 괜찮아?”
“어차피 요즘은 일거리도 없는 시기야. 신학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사 철도 아니잖아.”
그렇게 둘을 태우고 광안대교를 넘어 송정 쪽으로 달렸다.
그리고 송정 해안도로를 따라가면서 분위기가 괜찮을 만한 커피숍을 찾기 시작했고, 일광 해수욕장 끝자락에 위치한 커피숍을 발견할 수 있었다.
“2층에 올라가 있어.”
“그냥 오빠가 올라가 있어. 내가 받아서 올라갈 거니까.”
“인마, 이런 건 남자가 해야 하는 거야.”
“치! 그런 게 어디에 있어.”
그렇게 둘을 2층으로 보내고 커피와 케이크 조각을 받아 2층으로 올라갔다.
“오빠, 여기 전망 끝내준다.”
“그렇지? 이쪽에 도로 사정만 좀 괜찮으면 정말 돈이 될 곳이 많은데.”
“여기까지 와서도 직업 정신을 발휘하는 거야?”
“직업 정신이 아닌 현실적인 먹고사는 문제지. 지금이야 늦었지만 10년쯤 전에만 돈이 좀 있었더라면 이 부근에 땅을 좀 사뒀으면 지금쯤 준(準)재벌 소리는 듣고 살 수 있었을걸.”
아쉬움에 하는 소리지만 10년 전은 거짓말이고 20~30년 전쯤에 이 해안도로 쪽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땅을 사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금은 수십 배의 시세차익을 거뒀을 것이다.
그때야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그 바닷가 마을 곳곳에 지금 우리가 들어와 있는 곳처럼 대형 커피숍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고, 이런 대낮에도 빈자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손님들이 가득 차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아쉬우면 지금이라도 땅을 알아보면 되잖아?”
“이미 오를 만큼 올라서 별 메리트가 없어.”
“오빠가 이런 곳에 가게를 하나 세워서 장사하고 싶은 생각은 없고?”
“장사는 아무나 하냐? 내가 장사체질이었더라면 진작 부자가 됐을 거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정말 내가 늙어서 죽기 전까지 일하지 않고 쓸 돈만 모아두었다면, 그냥 아무런 욕심 내지 않고 이렇게 조용한 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책이나 읽으면서, 소일거리삼아 가게를 여는 것도 괜찮은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오빠.”
“응?”
“나하고 대전 갈래?”
“뜬금없이 대전은 왜?”
“솔직히 먹고 살기 위해서 회사를 붙잡고 있었지만, 이제 회사를 나 혼자 끌고 가기엔 힘에 부쳐. 오빠도 알잖아. 여자가 건설회사를 경영한다는 일이 어떨 것이란 거는.”
“그렇다고 내가 대전 간다고 뭐 뾰족한 수라도 있어?”
“오빠가 나 대신에 회사를 경영하면 되잖아.”
“내가 경영에 관해서 뭘 안다고,”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우선 10여 년 만에 만난 나를 뭘 믿고 회사를 맡기려고 하는지 그것도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고, 또 종업원 한둘을 두고 장사하는 구멍가게도 아닌 국내 도급순위 100위 안에 들어간다는 건설회사를 어떻게 경험도 없는 내가 맡아서 경영한다는 말인가?
“그럼 어떻게 해? 솔직히 이제 회사를 계속 끌고 간다는 것이 힘에 부쳐. 아니 아침에 출근하려고만 하면 머리부터 지끈거릴 정도야.”
“차라리 전문경영인을 영입해서 맡겨.”
“세상에 믿을 인간이 어디 있다고. 그 사람 죽고 나서 몇 명이나 구속시켰는지는 알아?”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그 사람 죽은 후에 대표이사로 취임한 후에 몇 달 지켜보니 아무래도 회사 돌아가는 것이 엉망인 느낌이더라고. 그래서 외부 회계 법인에 의뢰해서 감사를 해봤더니 도둑질 안 한 놈보다 한 놈이 훨씬 더 많더라. 그것도 남편 죽기 훨씬 전부터....... 회사에 돌아와야 할 이익을 임원이란 것들이 다 제 놈들 배를 불리는데 썼던 거지.”
내가 경영은 모르지만 대충 짐작되는 일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야 자경이 회사뿐 아니라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대부분 회사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냥 한마디로 회사에서 도둑을 키우고 있는 것이고, 걸리면 재수가 없는 일이고 반대로 들키지 않으면 그뿐인 일이니까.
“그렇게 출근하기 싫을 정도로 그 일이 싫으면 차라리 다른 사람에게 매각해. 잘은 모르겠지만 이제 먹고살 만큼은 벌어둔 것 아니야?”
“그러지 않아도 정리를 할까 고민 중이었어. 오빠가 맡아주지 않겠다면 정릴 하는 게 맞겠지.”
“쓸데없이 나하고 연관시키지 말고.”
“그럼 지수 너도 자경이하고 같이 하는 거야?”
“아냐. 자경인 물장사를 하고 있어. 아무래도 현금 돌리는 방법으로는 물장사가 최고니까.”
“그런데 이렇게 비워도 돼?”
“그쪽은 오히려 쉬워. 그리고 가게 관리하는 애도 가게마다 따로 있으니까, 자경인 장부만 확인하고 돈만 수금하면 되는데 뭘.”
“가게가 대전에 있어?”
“대전에 두 개가 있고, 나머진 전부 서울에 있어. 그런데 대전에 있는 가게 둘은 처분하고 부산에다가 가게를 낼까 싶어서 지난번에 내려왔었던 거야.”
50억이란 돈을 쉽게 자경이가 번 돈의 10%를 내 몫으로 챙겼다고 이야기했던 것이 이해가 되었다.
아무리 건설회사에서 이익을 낸다고 하더라도 10여 년 만에 500억을 벌어들인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지만, 유흥업소를 운영한다면 그것도 몇 개씩이나 운영하고 있다면 그 정도 금액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웬만큼 수준이 되는 가게의 에이스급 아가씨 수입이, 웬만큼 잘나간다는 중소기업 사장의 수입 정도는 그냥 웃어넘길 정도라는 것이 현실이니까 말이다.
대한민국 대표적인 사창가 중 한 곳인 부산 완월동에서 에이스로 활약했던 자경이가 뒤를 받치고, 지수가 얼굴마담 노릇을 하면서 유흥업소를 10년 넘게 운영했다면, 그 바닥에서 인맥 또한 만만찮을 것이다.
아가씨를 수급하는 문제가 최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런 에이스급을 스카우트하더라도 주변 주먹들과 경찰이나 세무공무원을 비롯한 지역에서 방귀깨나 뀐다는 작자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일이 바로 유흥업소이니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입지를 굳힌 대전의 업장을 정리하고 부산으로 옮기겠다는 것이 이상했다.
“대전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아니. 그냥 부산으로 돌아오고 싶어서. 물론 내가 태어난 곳이 부산은 아니지만 부산은 철들고 난 후부터 내가 살았던 고향과도 같은 곳이잖아.”
“너희가 부산으로 돌아오면 금의환향하는 거네.”
“금의환향은 무슨. 어차피 몸 파는 년일 뿐인데.”
“또 쓸데없는 소릴 한다. 자꾸 그렇게 너 자신을 할퀴면 좋아?”
과거를 모르는 사람이 보면 누구나 부러워할 정도의 재산을 가진 자경이지만, 아직 자기 과거에 대한 자격지심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몸 파는 년이라는 그 말도 이제는 틀린 말이다.
이미 자경이가 업소를 나온 것이 20년 가까이 된 일이고, 그 이후는 몸을 판 적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짜 요즘 몸을 파는 년이라고 손가락질 받아야 할 여자라면, 멀쩡히 직장을 잘 다니면서 월급을 꼬박꼬박 갖다 바치는 서방이 있는 여자가, 제 년이 쓸 것은 다 쓰면서 아이들 학원비를 댄다는 핑계로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서 매춘 아닌 매춘을 하면서 욕정을 채우는 그런 년들이 아닐까 싶다.
“유흥업 쪽 가게를 하려면 온천장은 이제한물갔어. 꼭 그걸 하려면 규모가 어떻게 될지 몰라도 서면이나 해운대 쪽을 알아봐야지.”
“해운대에는 고구려라고 있잖아. 그리고 서면은 주로 젊은 애들이 가는 곳이고.”
“고려라고? ○○ 급의 주점을 열겠다고?”
“그럼?”
돈을 벌긴 엄청 번 모양이다.
해운대 마린시티에 있는 ○○란 주점은, 알 만한 사람은 알고 있을 정도로 명실상부한 부산 최고의 주점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은 강남의 ‘텐 프로’급 선수와 비교하면 손색은 있을지언정, 그래도부산에서 최고 수준급의 아가씨들을 데리고 있는 곳이니 말이다.
“자경이 네가 부산에서 살았다고 하지만 그건 예전 일이잖아. 그런데 부산에서 뭘 하려고하더라도 일단 그 분야에 대해 아는 인맥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니야? 그리고 그 일을 하려면 일할 아가씨들도 확보해야 하고?”
“그건 크게 걱정할 일 없어. 서울에 있는 동생들이 부산 쪽에도 다 연결되어 있거든. 애들은 서울에 있는 애들 몇 명만 불러 내리면 되고.”
10년 가까이 그 일을 해왔다면 내가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자경이 머릿속에는 이미 부산에서 업소를 개업하기 위한 계획이 모두 서 있는 것 같았다.
“아무튼 내 일은 내가 하면 되고, 오빠는 정말 부동산중개사무소를 계속할 생각이야?”
“응, 그 일만큼 속 편한 일이 없더라. 그리고 밥 굶을 일도 없고.”
“알았어. 그럼 이 돈 가지고 원룸이나 찾아봐.”
“통장은 네가 갖고 있으라니까.”
“오빠, 물건을 살 때, 싸게 사는 법이 뭔 줄 알아?”
“특별한 방법이라도 있어?”
“눈앞에 돈을 보여주면 돼. 그럼 사람은 그 돈이 전부 자기 돈이 되는 줄 알고 서두르게 되어 있어.”
말이야 맞는 말이다.
원룸을 내놓은 건물주에게 계약서에 도장만 찍으면 당장 현금을 지급할 것이라고 하면, 웬만큼 그 금액이 꼭 필요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몇 천 정도는 쉽게 깎아주는 것이 보통이니 말이다.
결국 나는 자경이가 내민 통장이 든 봉투를 받아 챙겼다.
어차피 내가 이 돈을 들고 야반도주만 하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생길 일이 없는 것이고, 자경이 말처럼 이 돈을 내가 쥐고 있으면 원룸 건물주를 만나서 이야기를 할 때도, 훨씬 도움이 될 것은 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커피숍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니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저녁으로 물회는 어때?”
“물회?”
“응, 여기서 송정 쪽으로 가다가 보면 물회를 잘하는 제법 깨끗한 집이 하나 있거든.”
“오빠, 미안하지만 오늘은 물회보다는 예전에 거기서 많이 시켜먹었던 돼지국밥을 먹으면 안 될까?”
“돼지국밥?”
“응, 부산에 오니 그게 갑자기 먹고 싶어지네.”
“그럼 그러자.”
“오빠가 잘 아는 곳이라도 있어?”
“응, 두구동에 있는데 M 돼지국밥이라고 제법 잘하는 집 있다.”
자경이나 지수 옷차림에 돼지국밥은 좀 어울리지 않지만 본인들이 먹고 싶어 하는데 어쩌겠는가?
물론 지수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지만, 지수가 반대한다고 자경이 결정이 바뀔 것 같지는 않았기에 나는 둘을 태우고 다시 두구동을 향해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