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먹어도 될까? (1)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지금 전화를 걸어온 이 여자가 누군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고민하는 중에도 시간은 자꾸 흘러가고 있었고, 나는 초조한 마음에 손에 진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조금 전 한 미친년 때문에 제대로 분출하지도 못해 스트레스가 잔뜩 쌓였는데, 그 스트레스를 일거에 해소할 수 있는 맛있는 먹잇감이, 빨리 자기를 잡아먹어 달라고 내 눈앞에서 알짱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죄송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질 않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에이~ 정말 서운하네요. 제가 누군지 정말 모르시겠어요?”
“죄송합니다.”
차라리 기억이 날 듯 말 듯했다면 억울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머릿속을 헤집어 봐도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아예 감조차 잡히질 않았다.
“저 혜정이에요.”
“예?”
“진미 강혜정이라고요.”
“강 사장님!”
오늘 박 사장과 만나기로 했다는 그리고 함께 만난다고 하는 장 사장 때문에, 내가 그 자리에 가지 않겠다고 했던 그 강혜정이었다.
그렇게 이름을 듣고 나니 그때야 혜정이란 여자의 목소리가 맞는다는 확신이 든다.
사실 혜정이란 이름을 듣기 전까지는 아니 진미 부동산이라는 이름을 듣기 전까지는, 전혀 이 여자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동안내가 어떻게 한 번 해보기 위해 껄떡거렸던 대상 중에서 목소리의 주인공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내 머릿속에 가득했기에, 혜정이란 이 친구는 아예 고민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기회가 생긴다면, 한 번쯤을 올라타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일회용 파트너로는 괜찮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그만큼 혜정이란 이 친구는 보기만 해도 아래가 불끈거릴 정도로, 색스러운 기운을 폴폴 풍기는 매력적인 여자란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사실이니 말이다.
“그런데 강 사장님이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혹시 우리 지역에 물건이라도 생겼나요?”
“치! 업무가 다 끝이 난 시간에 무슨 일 이야기를 하고 그러세요.”
“그럼요?”
이 양반이 내게 개인적으로 전화를 걸 이유가 없었다.
“오늘 저하고 차나 한잔해요.”
“예?”
“저하고 데이트하자고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동래 장 사장님 때문에 오늘 온천장에는 안 나오신다면서요? 그래서 저하고 둘이서만 만나자고요.”
무슨 일인지 둘만 만나자는 말이었다.
굳이 떡집에 갈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강 사장 같은 예쁘장한 얼굴과 늘씬한 몸매를 지닌 여자와 밥을 먹든 커피를 마시든 그걸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저야 강 여사께서 보자고 하시니 좋지만, 오늘 박 사장하고 만나기로 약속하신 것은요?”
“친구 둘만 보내기로 했어요.”
“그럼 어디서 뵐까요?”
“이 사장님 지금송정이라면서요. 제가 송정으로 넘어갈게요. 지금 정관이거든요.”
정관에서 이곳까지라고 해봐야 30분이면 넉넉한 거리였기에, 강 여사가 도착할 때까지 나는 이곳에서 계속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강 여사가 무슨 일로 나를 만나자고 그것도 데이트하자는 농(弄)까지 섞어가면서 한 것인지,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오래 기다리셨죠?”
작은 선착장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강 여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돌아선 순간 이 양반의 옷차림이 심상찮다는 느낌이다.
누구 장례식이라도 다녀온 것인지 강 여사는 검은색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고, 그녀의 눈에는 슬픔이 묻어 있었다.
“혹시 장례식장에라도?”
“예. 오늘이 발인이었거든요. 그래서 정관에서 바로 오는 길이에요.”
“가까운 분이셨던 모양입니다. 미리 연락이라도 주시지.......”
“가깝다면 가까울 수도 있었고, 그냥 원수였을 수도 있고.......”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뇨, 됐어요. 그냥 오늘 조용한 곳에서 커피를 마시고 싶었는데, 마땅히 편한사람도 없고 해서요. 내키지 않으시면 그냥 가도 되고요.”
주변 가까운 사람의 장례식이 있었던 모양이다.
정관에 있는 공원묘지까지 함께 했다면가족일 가능성이 많은데, 강 여사의 말과 표정으로는 봐서는 애증의 관계가 아니었나 싶었다.
어떻게 오늘은 되는 일이 없단 생각이 든다.
아까 그년도 서방으로부터 걸려온 전화 때문에 맥이 빠지게 하더니, 잔뜩 기대하게 만들었던 강 여사마저도 이 모양이니 말이다.
방금 장례식을마치고 온 사람에게 시답잖은 행동을 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깔끔하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손을 얼굴로 가져가 마른세수를 했다.
“여사님 차는 여기 두고 가죠.”
“어디 아시는 곳이라도 있으세요?”
“강 여사님 취향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제법 괜찮은 곳이 몇 군데 있습니다.”
송정 해수욕장 쪽은 예전과 달리 많이 복닥거렸기에 일광 쪽으로 해변도로를 따라 천천히 달렸다.
“역시 이곳은 언제와도 좋네요.”
“그렇지요. 돈만 많다면 그냥 놀기 삼아 이 주변에 자그마한 커피숍이나 하나 차려두고 그냥 오는 손님만 받으면서 노후를 즐기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벌써 노후 걱정을 하고 그러세요?”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돈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그렇게 살고 싶거든요.”
“이 사장님은 엄청 치열하게 세상을 사실 것 같더니만.......”
“먹고 살려고 아등바등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리 보였을 뿐이지요.”
“저기 잠시 차를 세우면 안 될까요?”
코너를 돌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차 한 대가 주차할 만한 공간이 보이자, 강 여사는 그곳에 차를 잠시 세워 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바다를 보니 속이 확 트이는 기분이네요.”
“바다란 곳이 원래 그렇지 않습니까.”
“저 담배 한 개비만 피워도 되죠?”
“얼마든지요.”
차에서 내려 숨을 깊이 들이쉬더니 한결 편안한 표정이다.
그리고 강 여사는 핸드백에서 담배를 끄집어냈고, 나는 잽싸게 라이터를 켜서 그녀의 입으로 가져갔다.
“여자가 담배 피우는 것이 좀 그렇죠?”
“담배도 음식인데 그걸 따지면 요즘엔 꼰대 소릴 듣습니다.”
“다행이네요. 남편이란 작자는 지가 사람 미치게 만들면서도, 내가 담배 피우는 것만 보면 반쯤 미쳐 날뛰는데.......”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나처럼 부동산중개업을 하는 사람 중에서는,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사연을 한두 가지쯤은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다.
남자들도 처음부터 중개업에 뛰어드는 사람도 있지만, 이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 중 많은 사람이 한때는 잘나가는 회사에 근무하다가 갑자기 잘린 사람, 아니면 제법 사업을 크게 벌였다가 망한 후에 마땅히 할 일을 찾지 못해서 이 업계로 들어온 사람 등, 가지가지 사연을 가진 사람이 많은 것이다.
특히 여자가 부동산중개업을 하는 사람들은, 놀기 삼아서 하는 사람보다는 생계를 꾸리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많은 편이다.
강 여사 역시 그런 부류의 사람 중 하나인 모양이다.
남편이란 작자가 제대로 돈을 벌어다 주지 않고, 그래서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부동산중개인 자격시험을 치르고 이 업계로 진출한 그런 경우인 모양이었다.
“지금 그 인간 묻고 오는 길이거든요.”
“예?”
“남편이었던 인간을 묻고 오는 길이라고요.”
“정말이십니까? 협회에서 아무런 연락도 없었는데....... 이거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아뇨. 일부러 알리지 않았었어요. 괜히 알려봐야 얼굴에 똥칠이나 하게 생겼었으니.”
오늘 장례식을 치른 사람이, 친척이나 다른 사람이 아닌 강 여사의 남편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부고를 하지 않았는지 그 점이 의아했다.
내가 알기로는 강 여사는 지금까지 협회 회원들의 경조사에 빠진 적이 거의 없었고 경조사에 참석한 이상 축의금이든 부의금을 냈을 것인데, 남편의 상(喪)을 당했다면 당연히 부고를 해서 부의금이라도 받아야 마땅한 법인데 협회에 알리지 않은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리고 남편의 장례식을 치른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외간남자인 나와 만나자고 한 그 이유도 도저히 감이 잡히질 않았다.
“개새끼!”
“예?”
“오늘 뒈진 그 새끼 말이에요.”
“남편 말입니까?”
갑자기 튀어나온 욕에 깜짝 놀랐다.
항상 귀여운 미소가 가득한 표정으로 사내들 애간장을 녹이던, 강 여사의 평소 모습과는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 단어였기에, 순간적으로 나는 과연 이 여자가 내가 알고 있던 강 여사가 맞는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뒈지려면 혼자 있다가 뒈지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죄송해요. 하도 속이 답답해서....... 그렇다고 남 보기 부끄러운 이야기를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고 해서.......”
“답답하시면 편하게 넋두리하듯이 털어놓으세요. 속에 담아 두면 병이 됩니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은 제 기억에서 깨끗이 지우겠습니다.”
강 여사의 표정은 남편에 대한 애증(愛憎)이 아니라 분노에 가까웠다.
도대체 남편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또 어떻게 죽었기에 저리 분노하는 것인지 그것이 궁금해졌다.
하지만 분위기가 재촉할 분위기는 아니었기에,나는 무어라 말을 거는 대신에 담배에 불을 붙였다.
“복상사라고 들어 봤어요?”
“이 나이에 그걸 모르는 사내가 있겠습니까?”
“그것도 벌거벗고 빼지도 못하고 병원에 실려 왔다고 하네요. 뒈지고도 그 구멍이 뭐가 그리 좋았는지 뽑히질 않더랍니다. 그래서 연놈이 벌거벗은 채 병원에 실려 와서야 떨어졌다 네요.”
정말 뉴스에나 나올법한 일이 생겼던 것이다.
강 여사의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강 여사가 남편의 부고를 알리지 않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부고를 하고 문상객들이 몰려들면 어디에선가 그 사실이 퍼지게 될 것이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바닥에 짠하게 퍼지게 될 테니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죽은 사람이야 창피를 당할 것도 없지만 남아 있는 사람, 특히 아내였던 강 여사는 아예 얼굴을 들고 나다니지 못하게 될 테니, 다른 사람들에게 남편의 죽음을 알릴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그냥 툴툴 털어버리세요.”
“정말 개새끼 맞죠? 내가 자존심까지 굽혀가면서 한 번만 하자고 해도, 매일 피곤하다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피해 다니기 바빴던 인간이, 밖에서 다른 년하고 붙어먹다가 뒈졌으니.......”
“.......”
무어라 대답하기가 힘들었다.
역시 잡은 물고기에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는 말이 진리라는 사실이, 강 여사와 죽은 강 여사의 남편과의 사이에서도 증명이 된 것이다.
협회의 회원 중에서 강 여사를 어떻게 한번 자빠트려 볼 것이라고 껄떡대지 않는 인간이 없는 판인데, 그런 강 여사가 집에서는 남편에게 자존심까지 버려가면서 잠자리를 애원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아~”
“담배 한 개비 드릴까요?”
“저 추하지 않아요?”
“세상 어떤 남자가 강 여사님을 보고 추하다고 할 놈이 있겠습니까. 눈이 삔 인간이 아니라면.”
“그럼 이 사장님이 저 가질래요?”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아예 내 눈알이 튀어 나갈 것 같았다.
지금 강 여사의 입에서 나온 충격적인 말 때문에, 나는 혹시 내가 환청을 들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