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VIP라운지의 화룡점정 - 주현. (4)
- 제 98 화 -
“짠~! 만나서 반가워!”
논현의 어느 호프집.
주현을 포함한 4명의 여성들이 맥주잔을 치켜들어 인사를 나누었다.
바쁜 직장생활 중,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 건지 모두들 얼굴에 미소가 만연하였다.
살짝 우울해 보이는 주현을 제외하면 그랬다.
“우리 정말 오랜만이지 않아?”
“그렇지. 대학 졸업하고 계속 모이자, 모이자 했는데 다들 바빴잖아.”
“난 죽겠다. 무슨 회사가 매일 야근인지... 다른 사람들에게 욕먹는 게 싫어서 꾸역꾸역 하고는 있는데, 언제까지 이런 일이 계속 될지는 모르겠어.”
“가볍게 생각해. 옛날처럼 직장이 우릴 평생 먹여살려주는 것도 아니고... 네 몸부터 신경 쓰라니까? 빠득빠득 우겨서 정시 퇴근하란 말이야.”
“쿡쿡... 나는 그냥 집에 갈 시간되면 보내주던데.”
“너는 공무원이잖아! 당연히 그러시겠지.”
“그래도 돈은 많이 못 벌어. 벌이는 너희가 낫잖아.”
“얘는... 우리 연봉은 주현이에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김주현, 너도 좀 뭐라고 말 좀 해봐.”
주현은 계속 말이 없었다.
자신의 친구들이 뭐라 떠들었는지도 모를 만큼,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항상 자신 모르게 무언가를 공유하는 VIP라운지의 분위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그런 모습이 몇몇 VVIP들에게서도 나타났는데 직원이 아닌 고객들조차 공유하는 것을 자신이 모르고 있는 상황에 우울한기색이 역력했다.
“야, 주현아.”
“으, 응? 뭐라고 했나?”
“으휴... 우리끼리 연봉 얘기 하고 있었어. 얼마나 많이 버는지.”
“아... 나는 그냥 먹고살 만큼 벌지.”
“우와, 나도 그런 소리 해보고 싶다.”
“포스 봤어? 분위기 장난 아니야.”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주현이가 풀코스로 쏘는 거지?”
“꺄아~! 나는 찬성!”
말은 이렇게 하지만 주현의 우울한 기색을 보고,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한 친구들의 노력이었다.
그러자, 주현도 이때만큼은 평소와 같은 활발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아~ 너희들 정말 이러기야? 나 평소에 돈 없는 거 잘 알잖아.”
“맞다. 주현이는 벌써부터 결혼 자금을 모은다고 저금하고 난리도 아니지?”
“참나... 너 정도 되는 애가 뭘 그렇게 모으고 있어. 남자 친구도 대기업 다닌다며. 주현이처럼 예쁜 애가 시집을 간다는데, 그냥 몸만 가도 ‘감사합니다.’하면서 좋아해야하는 거 아니야?”
“그래, 우리 또래들은 유럽 여행도 다니고 외출용 명품들도 다들 장만하지 못해서 안달이잖아. 그런데, 주현이는 통 그런 게 없더라.”
친구들이 보는 주현은 그런 면에서 참 독하다고 할 수 있었다.
어학연수를 제외하면 남들 다가는 해외여행은 가지도 않았고, 옷도 대부분 비싸지 않은 SPA브랜드나 인터넷주문으로 구입한 것들이다.
일정 부분 부모님께 용돈으로 드린 뒤, 자신이 쓸 만큼만 남겨두고 버는 족족 저금을 하기에 그런 소비 패턴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모두 미래를 준비하는 그녀의 마음가짐 때문이었다.
집 안 형편이 그리 좋은 것도 아니고, 남자 친구 역시 평범한 중산층 가정이어서 대기업에 들어갔다고 해도 결혼에 들어가는 비용은 빠듯했다.
그렇기에, 주현은 검소하게 생활하면서 차곡차곡 결혼 비용을 모으고 있었다.
“벌이가 있을 때, 모아둬야지. 결혼에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잖아. 남자친구에게만 홀로 부담주기가 싫어서 그래.”
“아이구... 열녀 나셨어요. 연락도 제대로 하지 않는 남친이 뭐가 그리 좋다고.”
“아, 아니야. 내가 먼저 연락하면 잘 받아줘.”
“둔팅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남자란 동물이 얼마나 실증을 잘 내는 동물인데. 자신의 어장 안에 있다 싶으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는 게 남자야. 사랑 받고 싶으면 여우처럼 굴라니까? 곰처럼 굴지 말고.”
“우리 서방은 안 그래. 얼마나 성실하고 착한데.”
“우웨엑...!”
“아... 속이 매슥거린다. 어디서 이상한 말을 들었는지.”
그녀들이 보면 한심하다 생각할 수도 있었다.
미련할 정도로 자신의 첫사랑에 목을 매는 그런 아이.
멋있는 남자가 널리고 널렸는데 이 순진한 아이는 그런 사람들과의 만남을 포기한 채, 직장과 집을 반복해서 오갈 뿐이다.
친구들 입장에서 답답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인지, 그녀의 친구들은 주현에게 일탈이란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미래를 준비하는 그녀가 부러...워서만은 그런 게 아니다.
그저, 그런 기쁨도 있다고 그녀에게 ‘소개’란 걸 해주고 싶은 것이다.
많은 경험을 해야 견문이 넓어진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주현의 친구들은 서로 눈을 맞추며 암묵적으로 일을 꾸미기 시작한다.
“아아~ 배부르다. 여기 먹을 만하네. 그치?”
“맞아. 배가 터질 것 같아.
“그럼... 이렇게 배부르니까 소화도 시킬 겸, 어디 2차라도 가지 않을래?”
“어디로 갈까?”
“요즘 보니까, 강남에 새로 생긴 클럽이 그렇게 죽여준다는데? 거기 어때?”
“거기 좋겠다. 남자들 좀 보고 소화도 시키자. 이렇게 헤어지면 뭔가 찝찝하잖아.”
“나는 조금...”
주현은 내키지 않는 표정이다.
우울감에 쌓여 몸도 피로 했고, 남자들이 많은 그러한 곳에 간다는 것이 남자친구에게도 미안했다.
“주현아, 뭐 어때? 바람피우러 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소화좀 시키다 오자는 건데.”
“맞아, 맞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그냥 운동하러 간다고 생각하면 되지.”
“그...런가?”
“그렇다니까? 그럼 결정된 거지? 다음 코스는 클럽이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가방을 들고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복장들도나름 예쁘게 차려입고 만난 것이라 곧장 클럽에 가더라도 꿀리지 않는 그들이다.
주현은 왠지 그것이 내키지 않는다.
남자친구는 그렇다 치더라도 기분이 영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양 팔을 잡고 있는 친구들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기도 좀 뭐한 상황.
주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게 되었다.
지치고 피곤한 하루였지만... 업무에 찌든그녀들을 위해 오늘은 그녀가 봉사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녀들은 그렇게 택시를 타고 강남의 클럽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한다.
*
“아~ 개운하다.”
“그러게, 간만에 몸 좀 푼 것 같아.”
“남자들 물도 꽤 괜찮았던 것 같아. 주현이만 아니었으면 지금 쯤 옆에 다들 짝이 붙어 있었을 텐데... 안 그래?”
“나 신경 쓰지 말고 놀라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네 얼굴이 계속 우거지상인데. 사실, 여기도 너 기분 전환 좀 시켜주러 온 거야. 남자친구에 대해서 싹 잊고 한 번 놀아보라고. 그런데... 너는 역시 김주현이다. 오로지 지아비 밖에 모르는 순정파.”
“쿡쿡...”
클럽에서 나와 큰길가로 걸어가는 길.
주현을 놀리는 어느 한 친구의 말에 모두들 까르르 웃고 있었다.
덕분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는 모른 채를 하면서, 다음날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무, 뭐래...? 헛소리하지 말고 집에나 들어가자. 다들 내일 출근하지 않아?”
“그래, 들어가 봐야지. 이젠 나도 힘들어.”
“아아... 회사 가기 싫다. 취업 준비할 때는 그렇게돈 벌고 싶었는데, 막상 일을 해보니까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이참에 나도 누구처럼 멋진 남자 하나잡아서 시집이나 가버릴까?”
“나도 그러고 싶다. 하지만... 남자가 없어.”
“너 거의 한 달에 한 번 꼴로 소개팅 하잖아? 그런데도 없어?”
“다 별로야. 얼굴이 잘생기면 집이 가난하고, 돈이 많으면 얼굴이 별로거나, 나이 많은 아저씨고... 내 스타일이 없어.”
“참나... 그러니 여태껏 남자친구가 없지. 얼른 나이 먹기 전에 하나 만들어 놔. 단점을 보려하지 말고, 장점만 보라고.”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사회가 그리 녹록치 않음을 깨달아 갔다.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와 직장 상사의 구박, 은연중에 만들어진 파벌 싸움까지...
일을 위한 곳이라기 보단 복마전이라 할 수 있는 게 회사의 실상이다.
주현의 친구들은 그것을 깨닫고 벌써부터 ‘취집’에 대한 로망들을 표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현은 그들의 대화를 묵묵히 들으며 길가를 걷고 있을 뿐이다.
“하암... 나도 그래야지. 그니까 좋은 남자 좀 소개시켜 줘.”
“없어! 그런 남자가 있었으면 내가 먼저 채갔지. 저기 주현이한테 물어봐. 남자친구가 이 근처 대기업 다닌다며. 좋은 남자들이 수두룩 빽빽하겠다.”
“맞다! 주현아, 남자들 좀 소개시켜줘라. 남친한테 말해서 소개팅 같은 자리를 마련하면 좋잖아.”
“으, 응... 한 번 물어 볼게.”
“정말? 꼭이다?”
친구의 재촉에 주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그녀들의 외롭다는 소리를 듣고, 이미 남자친구에게 부탁했던 미팅 자리였다.
그가 알아보고 있다니까 조만간 좋은 소식이 들려올 것이다.
“어...? 주현아. 저기 네 남친 아니야?”
그저 집에 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러다 들려온 남친에 대한 이야기.
풀이 죽어있던 그녀는 생기 있는 모습으로 친구가 가리킨 그곳을 바라보았다.
멋들어진 양복을 입고 회사 직원들로 보이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
분명 그녀의 남친이 맞았다.
주현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같이 있던 친구들에게 먼저 양해를 구했다.
“나, 그럼 가볼게.”
“알았어. 기지배... 남친 보니까 바로 살아나네. 다음에 또 보는 거야?”
“맞아. 소개팅도 꼭 시켜주고!”
“알았어! 그럼 들어들 가!”
주현은 그녀들에게 인사를 건넨 뒤, 저 멀리 있는 남자친구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런 생각이 없다가 그의 모습을 갑자기 만나게 되니, 울컥했던 오늘의 일이 모두 떠오르고 있었다.
어서 빨리 그에게 매달려 오늘 있었던 일을 털어놓고 싶은 그녀였다.
그것에 대해 말한다면 그는 자신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안아줄 것이다.
아아... 하늘도 무심하시지.
100m 쯤 떨어진 곳에서 빨간 불의 횡단보도가 주현의 걸음을 머뭇거리게 만든다.
짧은 거리였으면 무단 횡단이라도 할 것을 넓은 8차선 도로였기 때문에 그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녀가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자신의 남자친구는 회사 동료들과 대화를 마친 뒤, 어떤 여자와 함께 다른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나름 예쁘장한 미모를 지니고 있는 그녀. 아마도 회사 동료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이 점점 멀어질수록 주현의 마음은 속이 타들어갔다.
그와 그녀가 같이 있어서 그렇다기보다는 빨리 남자친구의 품에 안기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신호등의 불빛이 초록빛으로 바뀌게 되었다.
주현은 그가 들어간 골목을 계속 바라보며 하염없이 뛰기 시작한다.
금방 숨이 가쁘게 차올라 거친 호흡이 내쉬어졌지만, 그의 품에 안기기 위해서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그가 들어온 골목에 도착한 그녀는 저 멀러 길을 걷고 있는 그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주현은 그를 놓치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숨을조금씩 고르면서, 그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점점 걸어갈수록 그와 그녀의 거리는 좁혀지는 듯하다.
얼마쯤 걸었을까.
부르면 닿을 거리만큼 그와 가까워졌다.
많은 거리를 뛰어오느라 힘이 들었던 그녀는 그를 부르기 위해 두 손을 자신의 입가로 가져갔다.
“석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니, 부르려 했다.
하지만... 그가 어느 건물로 자신의 ‘회사 동료’와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된 순간, 모든 행동이 멈춰지게 되었다.
멍한 표정을 지으며 그가 들어선 건물로 다가가는 그녀.
고개를 들어 화려한 외관과 조명이 눈에 띄는 그곳을 바라보았다.
‘MOTEL’
희망에 찬 그녀의 표정이 절망으로 물들어드는 것은 금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