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7)

"절......."

목이 막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앙헬이라고 그녀를 의심하고 싶었겠는가? 평생 함께하고싶었던 상대를.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너무나도 빠르게 이루어졌다.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그가 확신을 가지지 못한 것은,

"저를 농락하는 건...... 이제 그만둬 주십시오."

사실 앙헬은 베릴이 절대 아니라고 부정해 주기를 바랐다.그녀가 화를 내건, 뺨을 때리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나 그녀는 가만히 서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차갑기만 했던 얼굴은 이제 돌을 깎은 것처럼 무슨 생각을 하는지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그의 것을 스치고 지나갔다. 문이 열리고, 콩 닫히고, 그녀의 몸만큼이나 가벼운 발소리가 복도저편으로 천천히 멀어지고,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마저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후, 말이 투레질을 한다 싶더니 말발굽 소리가 빠르게 멀어져 갔다.

그때까지도 그 자리에 서 있던 앙헬이 그제야 휘청대며 벽을 짚었다. 베릴은...... 끝내 부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어서 요란한 발소리가 뛰어 올라오더니, 앙헬이 쓰는 옆 객실의 문을 벌컥 열었다.

"제독님!"

하지만 거기 사람이 있을 리가. 빈방을 확인한 상대는 자연스럽게 이쪽 문을 열어젖혔다. 앙헬의 보좌관 중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제1 부관이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의 손에서 구겨진 백지 수표가 팔랑거렸다.

"크로우 양 말입니다! 갑자기 말을 달라기에 어딜 가시냐니까, 이걸 제독께 돌려주라고 하셨다고요!"

"......떠났다. 내게 질려서."

"예?"

부관의 표정이 이상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바로 오늘 낮까지도 대장에 대해서 이것저것 들으셨는데요."

뭔 말인가."

"대장의 기호요. 음식 같은 것이라든가....... 아, 지난번에는 무슨 색을 좋아하시는지도 물으셨고요."

기호? 하지만 그게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다 끝났는데.

그러면서도 앙헬은 베릴의 시선이 머물렀던 벽장을 열었다. 뭘 숨기려고 한 것인지 알고 싶었다. 아니, 다 태우고 싶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심정일 것이다.

그러나 막상 열고 나자, 그는 불을 지르기는커녕 문을 잡은 채 움찔거릴 뿐이었다.

안에는 옷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여러 디자인의 남자 셔츠들이 여러 벌, 그리고 화려한 자수가 잔뜩 새겨진 남성용 정장 한 벌.

"이 옷은 뭐지.”

옆에서 슬쩍 고개를 들이밀어 보던 부관이 문득 감탄을 흘렸다.

“제도식 신랑 예복이군요. 저도 처제가 시집갈 때 한번 봤습니다.”

남부의 결혼식 복장은 깨끗하게 새로 지은 흰 천을 복잡한 방법으로 몸에 두르는 것이었다. 앙헬이 제도의 결혼 예복을 알 리 없었으므로, 부관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슬쩍 말했다.

"제독님이 좋아하시는 남색이네요."

색을 보나, 품으로 보나. 이 옷들의 주인은 앙헬밖에 없었다.

"......"

소매의 자수를 멍하니 매만지던 앙헬이 이를 악물었다.

..를 불러라."......

“예?”

"오도브를 불러. 당장.

당장이랍신다. 막 자려고 누웠던 리온이 순식간에 끌려왔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앙헬의 시선과 부관의 추궁 앞에서 리온은 '비밀이 뭔가요? 먹는 건가요?' 하는 얼굴로 술술 불었다.

"비밀로 하고 예복을 만들고 싶다기에 도와 드렸습니다!"

짐에서 필요한 천을 몰래 때 와 준다든가, 바늘이 부족하면 슬쩍 나가서 사 온다든가 하는 식으로 도움을 줬다. 베릴은 잘도 안 들키고 다닌다면서, 신기하다며 웃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도 리온의 이런저런 고민에 상담을 해 줬다.

그걸 다 들은 앙헬이 음침하게 물었다.

“장갑은."

"도와준 보답이라고......"

대답하던 리온이 뭔가 깨달았는지 식겁해선 변명했다.

"저도 약혼녀 있습니다! 릴리 그 누나는 저를 평생 꼬맹이로 물 텐...... 아윽!"

부관에게 발을 꽉 밝힌 그가 얼른 말을 바꿨다.

“예, 예비 마님이시죠!"

리온을 보며 부관과 앙헬은 똑같은 생각을 했다.

'이 새끼...... 실수로라도 적에게 사로잡히면 안 될 놈이군.'

그러나 정신 교육은 나중에. 지금은 전말을 알았으니 일단베릴을 데려와야 했다. 성급하게 길을 나서려던 앙헬이 획돌아서서 험악하게 말했다.

"장갑 받지 마.”

"예?"

“새 장갑 살 돈을 줄 테니 베릴이 만든 건 받지 말라고. 내거다."

리온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적 3명을 동시에삼지창으로 꿰뚫던 제독이 이렇게 팔불출일 줄이야.

하지만 앙헬은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움직였다. 계단을 내려가는 시간도 아까워서 창문에서 뛰어내리고, 잠시후 말발굽 소리가 멀어졌다.

오랜만에 보는 대장의 무모함에 멍하니 있던 부관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밖을 지키던 호위병들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뭐 하냐! 빨리 제독님 따라가!"

앙헬이 이를 악물며 말을 몰았으나 베릴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정말 예상하지 못한 일이지만, 그녀는 말을 잘 탔다. 몸무게도 앙헬보다 훨씬 가벼웠고 심지어 한눈에 골라 데려온 말은 그가 타는 대장마였다.

그래도 앙헬은 근성으로 어떻게든 그녀를 따라잡았다. 그는 군인이고 베릴은 평범한 여자니 애초에 체력 차이가 나는 것이다.

"베릴!"

목청이 터져라 불렀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옆으로 바싹 붙은 앙헬은 말을 공략했다.

"햄! 멈춰!"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와 이름을 부르며 명령하는 주인의 목소리에 말이 주춤했다. 앙헬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뛰어올라 베릴의 등 뒤에 안착했다.

"다치면 어쩌려고 이래요!"

베릴은 기겁하며 돌아봤다. 하지만 다치는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앙헬의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말문이 탁 막혔다.

“왜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대답을 오래 기다리지 않고 베릴의 몸을 꽉 껴안았다.

"몸이 찹니다.""신경 쓰지 말아요!"“싫습니다!"

앙헬의 팔을 밀어내고 때리기도 해 봤지만, 안는 힘이 더 세질 따름이었다. 마침내 베릴도 화를 터뜨렸다.

"왜 말하지 않았냐고요? 깜짝 선물을 누가 예고하고 줘요? 그게 무슨 깜짝 선물이야! 그리고 아까는 아까는.......!"

밀어내던 손에서 힘이 쭉 빠졌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그녀가 상처받지 않는 건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믿지 않는 것도, 그리고 그를 괴롭게 했다는 사실도 모두 충격이었다.

들을 마음도 없었잖아요, 당신.”

“잘못했습니다. 진심입니다."

“난...... 당신이 그렇게 자신 없이 구는 거 싫어요. 내가 그렇게 좋아한다고 했는데 믿을 마음은 있는 건지....... 대화하지 않으려는 사람하고 살 자신도 없고요."

앙헬은 시무룩해진 베릴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어느새 말은 속도를 줄여 걷고 있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커다란 남자가 이토록 수그리고 용서를 빌자 안쓰러웠다.그 감정을 깨닫고, 베릴은 앙헬을 떠날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 일이 잠깐의 해프닝으로 끝나더라도 고칠 건 고쳐야 했다. 그녀는 억지로 냉정한 목소리를 냈다.

...... 그거야 당신이 가장 잘 알 텐데요."

"당연히 이건 고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어떻게하면 당신의 화가 플릴지, 저와 함께 돌아가 주실지 알고 싶습니다.

그걸 고치는 거면 됐는데. 또 뭘 요구해야 하는 건가? 생각하며 베릴이 눈을 굴렸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을 볼 수 없는 앙헬은 안달이 나서 덧붙였다.

“뭐든 하겠습니다.”

"뭐?"

"예. 뭐든지요."

각오로 가득 찬 목소리에 베릴의 얼굴에서 놀람이 가시고요염한 미소가 들어찼다.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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